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180화 (180/425)

제180화. 투량환주 (1)

“적은 부채꼴로 퍼져 동쪽으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추격을 한다면.”

“추격은 하지 않습니다.”

작전 회의에서 승도는 간단하게 자신의 방침을 입에 담았다. 전과 확대를 지속하여 적의 씨를 말려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걸리는 상대가 하나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지 모를 적의 북벌군이다.

적장 서익이 만만한 상대라면 몰라도 그 역량이 간단치 않은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두고 전과를 지나치게 탐하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전과 확대를 한다는 것은 흩어진 적을 추격해 씨를 말리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병사들의 피로가 너무 높아졌다.

문제는 피로만이 아니다. 흩어진 적을 쫓으려면 상승군 역시 분산해야 했다. 이렇게 지치고 길게 늘어진 상태에서 적이 뒤를 친다면?

당연히 파멸이다. 공명심에 눈이 먼 장수라면 그런 덫에 빠지기 쉽지만 승도는 그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적이 전력을 모아 도전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교들의 견해에 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에우로페 군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패잔병들의 수습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패잔병 수습의 대가로 불린 프레더릭 대왕의 경우에는 겨우 한나절 만에 흩어진 병력의 9할을 모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상식에 비추어보면 왕국 장교들이 패잔병들이 전력을 수습해 도전해올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동방이지 에우로페가 아니다. 에우로페의 기준을 동방 군대에 대입하는 것은 오판을 부를 따름이다.

“저들이 군세를 다시 모으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전쟁에 종군하신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당시에 연합왕국이 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할 때 한 가지 의아스런 부분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의아스러운 부분이라 하시면.”

“한 번만 군을 깨트리면 그 지역에서 제국 군대가 다시 집결해 도전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그건 왕국 군대의 군세가 강하여 집결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까?”

“이곳 동방에서는 한 번 패한 군대를 재수습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적의 방해가 없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천국 군대도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무너지면 쉬이 병사를 수습하지 못합니다.”

“가능성은.”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을 겁니다. 하나 그 실낱같은 가능성보다는 적 북벌군이 뒤를 밟아왔을 때 만전을 기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장교들도 적 북벌군이 추격해올 가능성에 대해 일전에 들었다. 그들도 지치고 분산된 상태에서 생생한 적에게 뒤를 밟힐 경우, 치명타가 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과를 세우기에 워낙 좋은 기회라 아쉬움이 남은 눈치들이었다.

모두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차에 막사의 천이 걷히더니 한 병사가 급히 들어와 무릎을 굽혔다.

“대인. 지금 적군이 나타났습니다.”

“적이라면 달아났던 적이 다시 도전해왔단 말입니까?”

서익의 북벌군이 다가오기엔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승도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적의 잔존 병력이 도주를 포기하고 발악이라도 하는 것인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아닙니다. 우리 후방에서 나타난 적입니다.”

“우리 후방이라면.”

승도는 그 말을 입에 올리다 굳은 표정을 지었다. 후방에서 나타날 적이면 하나밖에 없었다. 적의 북벌군이다. 승도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적의 접근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던 적인 모양입니다.”

“그자들이 벌써.”

승도는 적이 자신의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 같았다. 어디선가 판단이 꼬였다. 그 말은 적장 서익이 승도를 한 번 속였다는 의미다.

“지도. 지도를 가져오세요.”

승도는 주위에 명해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장교가 지도를 챙겨 그 앞에 펼치자 승도는 그것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현재 위치와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도로를 더듬어 보았다.

그는 몇 번 손가락으로 적이 이 전략을 사용할 때 위치했던 장소를 두드리다 ‘아’ 소리를 냈다.

승도는 상대가 무엇을 믿고 자신을 잡을 수 있다 자신했는지를 깨달았다.

놈은 선두 부대만 멀찍이 앞에 전진시켜 두고 주력은 훨씬 뒤에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그 자신의 주력 위치를 기만했다.

승도는 선두의 위치만 가지고 전체의 위치를 보고한 척후의 말을 믿었다.

결과적으로 적 주력의 위치를 오판한 것이다. 바로 그 한 번의 기만이 서익의 노림수였다.

역시 적장은 간단히 볼 자가 아니었다. 이 같은 속임수로 그를 잡을 최적의 기회를 만들어 내다니. 과연 천국 제일의 장수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자였다.

하지만 승도가 서익을 오판했듯, 서익도 승도의 역량을 오판했다. 그가 최적의 시점이라고 계산한 시간에 승도는 이미 서정군을 괴멸시켜 양쪽 집게발 중 하나를 못 쓰게 만든 지 오래였다. 서로 한 방씩 주고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불리한 입장인 건 확실히 나다. 우리 병사들이 정예롭고 사기가 높지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싸운 탓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이런 상태로 싸우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승도는 상승군 쪽이 불리한 패를 쥐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적은 그의 의표를 한 번 찌른 탓에 여전히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시간이다.

“대인.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장교들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얼굴빛이 어두웠다. 승도는 그들을 보며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적도 전장을 보고 당황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점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심리적인 함정은 실제 전력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지금까지 승도가 거둔 승리도 이 심리전에 기댄 면이 컸다.

“허세라도 부리자는 말씀이십니까?”

“일단 그렇습니다. 전열을 반듯하게 세우고 적을 맞을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친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적이 쉽게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장교의 물음에 승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적의 입장에서 보자면 계획과 달리 한쪽 집게발이 완전히 부러진 상태이니 다소 불안한 입장일 겁니다. 남은 한쪽 전력만 가지고 우리를 확실히 부술 수 있는지, 앞서 교전에서 우리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등을 평가해보고 싸우려고 생각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승도는 최고 지휘관이기에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의 결정에 수천의 목숨이 좌우되니 그 무게감은 범인이 감당할 것이 못 되었다.

적장 역시 수만 목숨을 책임진 장수로서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사내라면 상황이 비뚤어진 것을 보면 자신이 세운 전략이 빗나간 것이 아닌지 먼저 고민해볼 것이다.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한 번의 전투 명령에서 확실히 승리를 따낼 수 있을지 판단 근거를 확보해두려 할 터. 결정이란 그리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 없는 전쟁 경험과 그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괴물이 아닌 이상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전열을 다시 다듬겠습니다.”

“그리고 적이 들을 수 있도록 왕국 찬가를 병사들이 부르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은 몰라도 대충 따라 부르게 시키세요.”

“왕국 찬가를 말입니까?”

연합왕국 찬가를 동방인들이 부른다. 대단히 이질적인 광경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그 노래에 익숙할 턱이 없으니 상승군 대부분은 어색한 발음으로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낼 것이 뻔했다.

하지만 승도는 그렇게라도 하기를 바랐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생경한 승리의 노래. 이미 종결된 전장. 그 모든 것은 적에게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무대 장치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장교는 얼떨떨한 얼굴로 승도의 명령을 받았다. 그가 모자를 고쳐 쓰고 하급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전하는 동안, 승도는 망원경을 꺼내들고 막사를 나섰다.

산자락에 희미하게 걸린 태양이 불길한 기운을 서쪽 하늘에 잔뜩 드리우고 있었다. 그 붉은빛 석양 아래 수천도 넘는 적이 기치창검을 세운 채 모습을 불쑥 내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사기도 높고 기세도 대단했다. 펄럭이는 깃발들만 수십 개가 넘었다. 바로 저들이 지친 상승군이 상대해야 할 이 전역의 마지막 적수였다.

승도는 망원경을 빙글 돌리다 말 탄 사내 하나를 발견했다. 마침 그 말 위의 사내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승도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승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승도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서익은 전장을 살피고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오승도가 서정군을 격파하려면 최소 사흘은 써야 했다. 하지만 괴물은 그가 계산한 것보다 빠른 시간에 서정군을 격파했다.

열 배가 넘는 대군을 그가 도착하기 전에 패배시키다니?

만에 하나까지 계산하여 최적의 시점에 도착할 수 있도록 본대를 미리 움직여 두었음에도 늦었다는 것은 상대의 역량이 예상 범위를 크게 뛰어넘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각하. 서정군이 완파되어 협공의 한 축이 무너졌습니다. 이번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게 아닙니까?”

“유감스럽게도.”

서익은 수도 없이 널린 병장기와 시체, 깃발 따위를 보며 말했다. 실패한 것에 미련을 갖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시간이 금인 전장에서 그가 할 일은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지기보다 당장 싸워서 승산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하면 퇴각을 하실 생각이신지.”

계획이 실패했다면 빠르게 물러서는 쪽이 본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도박에서도 패가 나쁠 때는 빨리 패를 던지고 물러서는 쪽이 다음을 기약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익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물러서기에는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서익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보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장 물러서기엔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전장을 자세히 보시면 아실 겁니다.”

“전장을 말입니까?”

장수들이 눈을 크게 뜨고 전장을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시체와 깃발, 그리고 싸울 준비를 마친 기세 높은 적밖에 없었다. 뭔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장수 하나가 입을 열자 서익이 딱하다는 듯 걸리는 것 하나를 짚어냈다.

“자세히 보시면 까마귀와 독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까마귀와 독수리는 청소 동물이다. 시체가 발생하면 그것을 먹어 치우기 위해 게걸스럽게 달려든다. 단, 피 냄새가 충분히 퍼진 후에야 먹이를 먹기 위해 날아온다.

짧아도 두 시간, 길면 하루가 지나서야 찾아온다. 그제야 장수들도 그 사실을 깨닫고 반문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말씀이십니까?”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서익은 그간의 경험을 믿었다. 그가 보고 들어온 것들이 틀리지 않다면 적은 전투를 치르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공격을 하시지요.”

“그건 아닙니다.”

공격을 바로 명하기에는 적의 기세가 날카로웠다.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전의를 북돋고 있는 것이 싸움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적의 예기는 높고 승리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혹 몇 시간이라도 쉬었다면 도리어 이쪽이 패할 수 있었다.

서익의 군대 역시 분초를 아껴오며 달려오느라 상당히 지쳐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적이 교전 과정에서 피해를 보았는지 확인하고 싸워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전열을 세우고 있는 이상 쉬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찌하려 하십니까?”

“적이 교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사기가 왕성한 것을 보면 당장 싸우는 것은 마음에 걸립니다. 이대로 대치하며 적의 피로를 높이고 적의 피해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됩니다.”

“각하의 의중은.”

“진을 치되 일부 병력을 전개하여 적을 압박할 준비를 하세요. 적은 쉬이 긴장을 풀지 못하고 이쪽의 공격에 전전긍긍할 겁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는 충분히 쉰 다음 적을 쳐 이 싸움을 승리로 마칠 겁니다.”

서익은 그 자신의 의중을 보였다. 오승도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해도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적은 한차례 교전으로 지쳤고 전력도 줄어 있었다. 피해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치 않아도 멀쩡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피로가 누적된다면 적군의 전력은 땅을 칠 수밖에 없다. 내일 태양이 떠오르면 놈은 죽는다. 천부와 천형과 천제의 이름으로. 서익은 적진 쪽을 바라보다 자신을 보는 젊은 사내에게 손을 들어 자신감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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