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투량환주 (2)
“적 부대가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군사를 전개하는 것이 곧 공격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장교의 이야기에 승도는 망원경을 쥔 채 조용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장교가 입을 다물자 승도는 다시 적 쪽을 찬찬히 망원경으로 훑었다.
확실히 적 부대가 넓게 전개하는 것을 보면 공격 의도가 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그 전개를 보면 이쪽을 정말 공격할 생각이 있는지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전개되는 모습만 놓고 보면 적은 상당히 적은 부대만 앞에 내놓을 생각이었다.
고작 수천. 그 정도로는 막강한 상승군의 화력 앞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간 상승군에 패한 천국 군대의 전훈만 분석하더라도 그것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것을 알기에 수륙 병진 작전이라는 패를 꺼냈고, 다시 군의 절반을 미끼로 던지는 함정을 팠다. 그럴 정도로 상승군을 두렵게 여기는 적이 고작 일부의 병력만 전개해놓고 이쪽을 상대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승도는 적의 생각을 짐작하고 망원경을 내렸다. 적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 군대가 휴식을 취하는 걸 그냥 두고 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이 우리를 위협하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한고비를 넘겨 다행입니다.”
“하지만 대인. 저들이 위협만 가한다고 해도 우리 쪽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해서 생각을 조금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을 달리하신다면.”
“시간을 벌면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공격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의 입장일 겁니다. 하니 대부분의 병력은 편히 쉴 준비를 할 겁니다.”
“대인의 말씀은 역으로 우리가 야습을 가하자는 것입니까? 이 지친 병력으로.”
장교들이 놀란 눈으로 반문하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 못할 때 야습을 가해 적의 사기를 한 번 꺾어둬야 합니다. 여기서 타격을 가하면 이쪽이 승기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병사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몇 시간의 악전고투를 거친 병사들에게 야습은 한계를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경험 많은 왕국 장교들은 지친 병사들에게 너무 무리한 임무가 아닌지 의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승도는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불가능도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가능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루 동안 쉬지 않고 공방전을 벌여 지칠 대로 지친 근위대 병력을 가지고 역전승을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병사들에게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지 확신을 주고 그에 대한 포상을 명확히 한다면 한 번의 피로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정신 무장의 측면에서 허술한 동방 군대는 피로를 이겨내기 어렵지만 그의 군대는 달랐다. 그는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이 야습에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병사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별도로 은화 백 닢씩 포상으로 내린다고 전하세요. 병사들도 충분히 힘을 낼 겁니다.”
병사들이 피로하긴 하지만 제 봉록보다 큰 거금을 상으로 내건다면 한 번 정도는 피로를 견디며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이해 동기가 없는 싸움에서는 피로를 억누르기 어렵지만, 이익이 걸리면 인간은 그것을 위해 참을 수 있게 된다.
아주 간단한 차이지만 그 간격은 매우 컸다. 중세 에우로페에서 전투를 벌이기 전에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금화며 은화를 약속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병사들에게 포상을 약속하셔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길게 봐도 두 시간 이내에 한계는 찾아옵니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지요.”
승도는 장교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을 했다. 곧 그의 명령이 전해진 것인지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뜻하지 않은 부수입만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없었다. 승리만 한다면 거금이 손에 들어온다.
그 약속이라면 병사들이 한 번 힘을 내어 싸워볼 만했다. 패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만 승도는 지금까지 그들에게 결과로써 보여주었다. 그를 따르면 패배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명령에 충실히 따르면 약속된 돈은 분명히 손에 들어온다.
병사들은 천세를 외치며 싸움에 대한 투지를 드러냈다. 이번 도박은 한 번 해볼 만했다. 승도는 모처럼 자신이 승리를 설계해둔 판이 아닌 무대 위에서 모험적인 승부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흥분을 맛보며 손바닥을 가볍게 문질렀다.
***
횃불이 타올랐다. 어둠 속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불꽃을 따라 그림자들이 일렁이며 한바탕 연극을 펼쳐보였다. 병사들은 불가에 모여 앉아 감자 따위를 구워 먹으며 시간을 죽였다.
적이 공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경계심을 높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상식적으로 지친 군대가 공격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기습이 불가능한 점도 그들을 안심시켰다. 달빛은 밝았고 적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그 행동이 뻔히 눈에 보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야습을 할 이유가 없었다.
병사들을 독려하며 횃불 사이를 지나는 유경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대인. 아침 해가 떠오르면 요마들의 목을 따고 천경으로 돌아간다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이다마다. 원수께서 말씀하셨으니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오나 적장은 제국 제일의 명장이라는 오승도인데 그리 쉽게 잡히겠습니까?”
“쉽게 잡히진 않겠지만 이번만큼 우리가 유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염려할 필요는 없어.”
유경은 병사의 물음에 그리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우세한 입장을 점하고도 이쪽을 불안하게 만드는 오승도의 저력은 확실히 무서웠다.
하지만 밤새 더 지친 상태가 될 적이 이쪽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경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려다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적이 온다!”
초병이 외친 소리에 유경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과연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번들거리는 색감의 적군이 이쪽을 향해 나아오고 있었다.
“적을 맞을 준비를 하라! 어서! 그리고, 자네. 당장 본영으로 달려가 원수께 적이 오고 있음을 알려라.”
유경이 병사들에게 급히 명을 내리고는 자신도 칼을 뽑아 쥐었다. 달빛을 받으며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적의 모습은 실로 위압적이었다. 도저히 지친 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기세였다.
‘설마 지친 상태에서 싸움을 걸 줄이야.’
유경은 적의 대담한 선택에 헛바람을 삼켰다. 이쪽 병사들의 대부분이 잠을 청한 시각을 노려 공격을 감행한 선택 자체는 훌륭했다. 잠에서 막 깨면 피로가 가중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면 이 시간은 확실히 적이 승부를 걸 만한 기회였다.
적이 천천히 다가오는 동안 천국 병사들이 사격을 준비했다. 야간에 적이 멀리서 총격을 가하며 괴롭힐 것을 염두에 둔 서익이 원거리 전투 병력을 앞에 세워둔 까닭에 현재 전방에 선 병사들은 모두 사수들이었다.
“사격 준비!”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장전을 서둘렀다. 익숙지 않은 총기를 다루어 장전을 하려니 움직임이 마뜩잖았다. 몇 번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사이 푸른 군복들이 유효 사거리까지 다가섰다.
“일단 쏴.”
군관들은 적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일단 쏘라고 지시했다. 몇 번의 불규칙적인 총성이 연거푸 울렸다.
사격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푸른 군복들은 그것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거리를 착실하게 좁혀왔다.
자신들이 사선에 서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하나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지만, 나머지는 평정을 잃지 않은 얼굴이었다.
전열 전투에 대한 준비를 갖춘 병사들인 만큼 총탄이 쏟아진다고 해도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반면, 자신들을 향해 적이 무표정하게 다가오는 것을 본 천국 병사들은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것이 전열 전투에 준비가 된 자들과 되지 않은 자들의 차이였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푸른 군복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부대 정지!”
명령을 여러 번 되풀이할 것도 없이 전열 전체가 일제히 멈추었다. 수백, 수천의 병사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광경은 그 자체로 전율스러웠다. 이것이 완성된 조직이 보여줄 수 있는 박력이고 힘이었다.
“이게 오승도의 군대인가?”
유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지휘하는 사수들과 적의 차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현격했다. 같은 수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훈련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런 강병을 지휘하고 있으니 오승도가 연전연승하는 것은 당연했다. 숫자 이상의 힘이 느껴지는 적이었다.
“사격 준비!”
적 쪽에서 사격 준비 명령이 떨어지자 유경도 자신의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병사들은 사격을 한차례 하고 이제야 총탄을 욱여넣고 있었다. 분당 한 발을 쏘는 그의 병사들의 속도로는 적의 장전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의 예감대로 푸른 군복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총탄을 모두 장전했다. 그것은 본 유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격!”
적 장교의 외침과 동시에 수백 발의 총탄이 우박처럼 그의 전열을 휩쓸었다. 야간이라지만 적의 사격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여기저기서 부하들이 허수아비처럼 풀썩 쓰러졌다.
“사격 준비는?”
유경이 초조한 얼굴로 돌아보며 묻자 군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병사들은 아직도 장전을 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차이는 매우 컸다. 적은 다시 총탄을 능숙하게 장전했다.
몇 초 걸리지도 않아 총탄을 장전한 적이 총구를 겨누었다.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빌어먹을.”
유경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병사들이 사격을 가하기도 전에 일제 사격이 날아왔다. 가뜩이나 장전이 느린 병사들에게 이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상승군은 압도적인 장전 속도를 앞세워 재차 총탄을 장전했다. 전형적인 전열 전투 수칙에 따라 일제 사격을 퍼붓고 돌격을 감행할 속셈이 눈에 보였다.
그들은 무려 다섯 번의 일제 사격을 퍼붓고는 총검을 끼웠다. 푸른 군복들이 달빛을 받으며 앞으로 내달려왔을 때 천국 보병들의 전열은 반쯤 무너진 지 오래였다.
“돌격.”
총검을 휘두르며 달려든 적 앞에 유경의 병사들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총격을 받아 반쯤 뒤흔들린 데다 백병전 역량에서 차이가 너무 컸다. 다소 지친 적이라곤 하지만 이쪽도 아주 생생한 입장은 아니었다.
기계처럼 나아오는 푸른 군복들의 압도적인 공격력 앞에 유경의 병사들은 짚단처럼 넘어졌다. 유경도 나름 칼을 쥐고 전투에 뛰어들었지만 전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겨우 십여 분도 흐르기 전에 천국 군대의 전방에 배치되었던 사수의 태반이 괴멸되었다. 상승군은 여세를 몰아 막 전방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몰려나오던 천국 병사들까지 몰아쳤다.
기세를 탄 군대의 공격인 만큼 천국 병사들이 막기는 쉽지 않았다.
뒤늦게 막사에서 나온 서익은 이 상황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군 깊숙이 파고든 적은 벌써 수많은 병사를 죽이며 한껏 기세를 타고 있었다.
두 수를 내다보고 적이 약간이라도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버는 선택을 할 것이라 보았던 그로서는 허를 찌른 일격이었다.
“각하. 적의 기습입니다. 어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당황할 것 없습니다. 이는 적이 보이는 발악. 병력도 우리가 곱절은 많지요. 이 정도 피해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서익은 다소 냉정하게 전황을 보았다. 당장은 사상자가 엄청나 보이지만 오승도와 그의 정예 상승군을 잡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리 비싼 대가는 아니었다. 필시 적은 이번 야습에 모든 것을 건 것이 틀림없었다.
“적의 기세가 대단한데 낙관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별문제가 안 됩니다. 적은 이번 싸움 한 번에 우리 쪽에 결정타를 주려 했을 겁니다. 그러니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을 벌면 이기는 쪽은 우리입니다. 가급적이면 적을 지치게 만드는 쪽으로 전투를 끌고 나가세요. 좌측과 우측에서는 대열을 계속 넓게 벌려 적의 공격력을 흡수하고, 중앙에서는 이 둔덕으로 올라올 수 없게 저지하세요. 그렇게만 하면 적은 스스로 지치고 무너지게 될 겁니다.”
서익은 적장의 노림수를 간파하고 제 나름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시간을 끌며 싸우면 적은 지칠 수밖에 없다.
적은 그렇게 되기 전에 승부를 내려 할 것이고, 이쪽은 그에 응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돌아가려 하면 뒷덜미를 잡고 덤비면 피한다. 그렇게 아침까지 시간을 끌면 적은 자멸한다. 아군 깊숙이 들어온 적은 돌아간다는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오승도, 당신은 잘 싸웠다. 우리 계획을 몇 번이나 헝클어트리고 이 덫에서 미끼로 쓴 서정군까지 괴멸시키는 저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게 당신의 한계다. 한낱 기천에 불과한 병력을 가지고 너무 만용을 부렸어. 능력을 과신한 장수는 그 재능이 아무리 빛나더라도 명이 짧게 마련이니까.’
서익은 적의 운이 다했다 여겼다. 몇 번이고 천국의 허를 찌르며 놀라운 승리를 거둔 괴물이라 해도 이번만큼은 전세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오승도는 이걸로 끝장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