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반객위주 (1)
오승도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적을 확실히 격파하자면 일출이 떠오르기 전에 적 중앙을 붕괴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나름 회심의 수로써 선택했던 중앙 집중 공격마저 적의 분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내에 둔덕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오긴 했지만 해가 떠오른 이후에는 점령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습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승리를 설계하고 적을 요리해온 그로서는 쉽게 맛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어디서 일이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그의 완벽했던 전략을 근본부터 흔들어버린 변수는 서익이 교묘하게 편 한 번의 기만이었다. 그 기만에 속아 상대의 주력 위치를 오판한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이었다.
‘상대를 과소평가한 것. 정보의 분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 그것이 지금의 위기를 가져왔다.’
승도는 그 자신의 실수를 평하며 눈을 감았다. 전장에서는 사소한 실수 한 번에 군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결국 자만심 때문이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신의 장수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천국 장수들을 보며 그들을 적수도 아니라고 여겼던 생각이 그의 완전무결한 전략에 빈틈을 만들었다.
물론 방심했다는 건 변명이다. 백전노장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인정한다.
적장 서익은 이 오승도를 사선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실력자다.
“대인. 후방에서 단련들이 밀리고 있다 합니다. 곧 둔덕 위로 단련들이 밀려 올라올 거라는 보고입니다.”
보고는 설상가상이었다. 정면에서 적의 지휘 막사도 깨지 못한 상황에 후방까지 함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천하의 그 어떤 강군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단련들이 무너지고 있다고 했습니까?”
“예. 한참 뒤로 후퇴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단련이 무너진다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승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보낼 예비대는 전무했다. 그런 부대가 있었다면 지휘 막사 쪽으로 투입했을 것이다.
승도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적이 곧 여기까지 올라오겠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피할 곳도 없었다. 앞뒤 사방이 적이었다. 날개가 달렸다면 몰라도 발이 달린 인간의 몸으로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였다.
“병사들을 뒤로 물려 원형 진을 치게 하세요.”
“예. 대인.”
승도의 명령에 장교는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전투를 벌이는 병사들 쪽으로 뛰어갔다.
승도로서는 달리 내릴 명령도 없었다. 원형 진을 이루면 포위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긴 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패배를 인정하고 협상을 시도해야 하나?
황금과 강력한 군대를 내준다고 제안하면 한 목숨 건지지 못할 건 없다.
‘아니야. 안 될 소리지. 나는 아내에게 패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 오승도가 남편으로서 건 몇 안 되는 약속을 여기서 어길 순 없는 일이야.’
승도는 아내와의 약속을 상기하며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았다. 과거 그가 위기에 내몰렸던 전투가 얼마나 많았던가?
심지어 옆에서 대포알이 터져 부관이 즉사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험난한 사투를 거쳐 왔는데 이 정도에서 무릎을 꿇을 순 없었다.
그의 방대한 경험이, 지식이, 천재의 영감 어딘가에 승리의 가능성이, 생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지만 앞으로 떠올릴 수도 있는.
승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지금까지의 변수들을 점검했다. 정말 살아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는 이 전장에 즉시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 파격적인 변수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날씨도 아니고 적의 사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상승군이 놀라운 분전을 해보이기엔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다. 당장 찾아본 변수들은 모두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보다 넓은 그림에서 변수는 없을까?
그때 승도는 큰 틀에서 전략을 짜며 남겨 두었던 한 가지 변수를 떠올렸다.
제대로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진 않았지만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을지 모를 용병들이 있었다.
그들이 예상한 시간에 합류해줄 수만 있다면 전세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이동 속도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현지에서 들었던 그들의 지구력을 생각하면 하루 평균 백 리를 달려올 수 있을 터.
그 정도의 이동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하비가 제때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특정해내어 달려온다면 전투에 가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서익이 예상보다 빨리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지가 아니라 충분히 나타나고도 남았겠지만. 승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
“각하. 적은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밤새 거센 공격을 퍼부으며 두 차례나 지휘 막사까지 육박해 왔던 적은 둔덕 중턱으로 밀려난 채 천국 병사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천하에 다시없는 강군이라 해도 이젠 끝이었다.
서익은 총탄에 맞아 지끈거리는 어깨를 꽉 쥔 채 장수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떠오른 찬란한 햇빛이 불멸의 명예를 손에 넣을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장수들은 원수에게 예를 표하며 승전을 축하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대륙 제일의 명장이 되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모두 제장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이제 오승도라는 이름은 없다. 천하가 기억할 것은 수만의 희생을 값으로 지불하고 제국 제일의 명장을 잡아낸 천국 원수 서익의 이름이다.
서익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절감했다. 눈부시게 비치는 일출이 그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승도도 쳐부쉈으니 북경의 황제도 겁을 집어먹을 겁니다. 천경으로 돌아가시면 다시 북벌을 주청하시지요.”
“북벌도 재개해야지요.”
서익도 미완의 사업으로 남겨놓고 온 북벌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승도를 잡았으니 남은 것은 왕조를 교체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대륙에 세우는 것뿐이었다.
서익은 눈앞에 보이는 오승도와 상승군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그 너머를 머리에 담았다. 다 잡은 고기에 연연하는 것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이제는 보다 큰 먹이, 대업에 심력을 모으는 것이 옳았다.
“슬슬 후미의 병사들에게도 신호를 보내 적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리합시다. 공연히 전투를 길게 끌어 좋을 것은 없으니.”
서익이 승낙의 뜻을 보이자 장수가 손을 들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기수들이 깃발을 높게 들어올리기 위해 깃대를 잡았다. 그때 깃대를 잡던 기수 하나가 실수로 그것을 놓고 말았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저, 저걸 보게.”
동료 기수가 묻자 기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그들과 상승군 모두가 지나온 길 쪽이었다. 동료 기수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응?”
동료 기수는 깃대를 쥐고 있다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뽀얀 먼지 구름이 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먼지 구름이 이유 없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니 사람이 움직이며 일으킨 것이라 봐야 했다.
“저게 뭔지 알겠나?”
“나도 모르겠네.”
두 기수가 먼지 구름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장수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 뭘 한다고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나? 응?”
장수는 그들을 질책하려다 뽀얗게 일어난 먼지 구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구름 사이로 얼핏 희미한 황룡의 깃발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장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룡을 상징으로 하는 깃발은 제국군의 것이었다. 예상치도 않은 적의 증원군이었다.
“각하! 적이 나타났습니다.”
“적이 나타나다니. 그 무슨 소립니까?”
장수가 경악 섞인 어투로 외치자 서익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우리 군의 후방으로 대규모 적이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 말에 승리를 자신하던 천국 장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두 황급히 기수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왔다. 그들은 곧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
***
망원경을 쥐고 있던 지휘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막 수백 리 길을 주파해온 병사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섰다. 평범한 병사들이라면 이런 강행군을 해낼 수 없었겠지만 그 휘하의 병사들에게는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를 제 안방 드나들 듯하던 자들에게 하루 백 리 행군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맞은 것 같습니다.”
상승군이 위기에 몰려 있긴 했지만 아직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서익의 군대가 예상보다 빨리 승도의 뒤를 따라간 것을 알았을 때는 그들도 적지 않게 당황하긴 했었다.
적이 앞에 있으니 전령을 보낼 수도 없었고, 그들의 위치를 제대로 알릴 수도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상당한 불안감을 안고 전장까지 달려온 차였다.
둥. 둥. 둥.
별안간 적 쪽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적도 이쪽의 접근을 눈치챈 듯싶었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하비가 손을 들자 보기에도 기이한 기형 도를 든 병사들이 그 앞으로 나섰다.
병사들은 가벼운 걸음으로 쏟아진 물이 퍼지듯 일순간에 전개를 마쳤다. 병사들은 모두 네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700명 단위로 묶인 반데라를 이루고 있었다.
이 반데라 규모의 용병 부대 하나가 연합왕국 보병 대대 하나를 간단히 학살한 전력이 있으니 그 악마 같은 전투력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적의 좌측부터 쓸고 지나가지.”
“하지만 적이 넓게 포진하고 있어 한쪽만 공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사선 진을 쓰는 걸세.”
하비의 대답에 장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사선 진은 중앙과 양 날개로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진형과 전혀 다른 대형이었다. 이 진은 한쪽 날개에 병력을 집중하고, 한쪽 날개는 생략하는 극단적인 진형으로 병사들의 공격력에 자신이 있을 때만 취할 수 있었다.
“사선 진을 쓰면 위험부담이 커지는 것이 걸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근접전에서 사선 진이 사용된 전례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실전에서 쓰기엔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비는 이 강인한 용병들이라면 사선 진을 써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 대인을 빨리 도와드리려면 적 좌익을 빨리 깨부수고 포위망을 열어드려야 하지 않나?”
하비의 말은 타당했다. 상승군은 필경 좋지 않은 상태에서 포위당해 있을 것이니 포위가 길어질수록 손실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상승군의 손실을 염려하는 승도의 입장을 생각하면 사선 진이 최선이었다.
“사선 진으로 공격을 진행하겠습니다.”
“좋아.”
하비는 장교들에게 가벼이 답하고는 궐련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악마처럼 강한 이 용병들이라면 사실 걱정할 것도 없었다. 하루 백 리씩을 달리고도 별로 지친 기색도 없는 작자들이다.
하비의 명령에 따라 장교들은 용병들의 공격 방향을 재조정했다. 진형을 재편하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한 방향으로 병력을 집중하게 만들면 사선 진의 효과를 내긴 마찬가지다. 짧게 사선 진에 대한 명령이 하달되고 나자 장교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오승도 휘하에서 종군한 연합왕국 출신 대부분이 곰 가죽 모자를 쓰는 것과 달리, 용병들과 함께 식민 제국 령에 머물다 온 장교들은 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장교들은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세게 내리그으며 소리쳤다.
“전군 공격!”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