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반객위주 (2)
장교들의 명령과 동시에 무수한 발들이 지면을 밟으며 내달렸다.
섬뜩한 기형도를 가볍게 흔들며 앞으로 달려오는 까만 얼굴의 병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단숨에 수백 미터의 거리를 날듯이 좁히며 적을 향해 달려갔다. 뒤늦게 적의 공격을 눈치챈 천국 보병들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장전! 장전하라!”
칼만 든 상대라면 총을 가진 병사들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화약 병기가 등장한 이래 전장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상식이었다. 하지만 세계 최강의 전열 보병조차 칼 한 자루로 도륙을 하는 작자들에게 어설픈 사수들의 공격은 안중에도 없었다.
천국 군관이 급히 병사들의 장전을 독촉했다. 지친 상태에서 적에게 근접전을 허용했다간 피해가 예상보다 커질 수 있었다.
달라붙기 전에 적의 사기를 꺾어놓고 접근을 저지해야 했다. 안쪽에 포위된 오승도의 군대를 격파할 시간만 번다면 그들의 승리는 확실했다.
병사들 몇몇이 급히 장전을 마치자 마음이 급한 군관이 명령을 내렸다. 겨우 칼로 무장한 하등한 적이니 천둥 같은 총성에 겁을 먹고 달아날 지도 모른다. 그는 애써 그렇게 믿으며 손을 내렸다.
“사격!”
천국 병사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겨우 몇 명. 그나마도 화망을 형성하지 못하고 불규칙적으로 총성이 울렸다. 이런 어설픈 공격에 피해가 발생할 턱이 없었다.
천국 병사들은 제국 병사들이 총성에 겁을 먹기를 기대했다.
“……!”
하지만 이내 그들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적들은 겁을 먹기는 고사하고 희죽 웃으며 기이한 칼을 빙빙 돌리더니 더욱 빠른 속도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화약 무기와 겨루어 본 적이 있는 그들은 이 어설픈 총성에 상대를 오히려 우습게보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확성과 가공할 화력, 칼날 같은 군기로 무장한 왕국 보병들을 상대해온 자들에게 사격 같지도 않은 사격은 자신감만 더해주었다.
“히요.”
용병들이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 날카롭고 높은 소리는 전장에서 적의 목을 따기 전에 내는 제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적의 고함 소리에 천국 병사들은 도리어 주눅이 들고 말았다.
가뜩이나 장전도 느린 병사들이 주눅까지 들었으니 유효 사거리를 좁혀 오는 동안 사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두 그룹에서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던 비슈누는 겁에 질린 적병의 얼굴을 보고 희죽 웃었다.
다음 순간 사선 진의 우익과 천국 군대의 좌익이 뒤엉켰다. 용병들은 적과 접적한 순간 과일 꼭지 따듯 천국 병사들의 목을 쳐 날리기 시작했다. 비슈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쿠크리로 적병의 팔을 쳐 날린 다음 남은 손으로 상대의 목젖을 잡아채 당겼다. 그 간단한 동작으로 적병을 방패로 삼은 그의 행동 때문에 뒤에 서 있던 적병들은 그에게 감히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비슈누는 불운한 적병을 적에게 내던지며 그대로 그 가슴을 밟고 뛰어 오르며 쿠크리를 내리 휘어 쳤다. 유연하고 깔끔한 공격 동작 한 번에 적병 둘이 일시에 목을 잃고 좌우로 나뒹굴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이 전사들에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전근대 군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지친 상태에서 맞싸우게 되었으니 그 앞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좌익을 파고든 용병들은 그야말로 개돼지를 도살하듯 천국 병사들을 쳐 죽이며 무인지경으로 내달렸다. 무자비한 전투력 앞에 천국에 대한 대의도 믿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쉽게 겁을 먹지 않던 천국 병사들도 칼을 부딪치는 족족 목이 달아나자 전의를 상실했다. 첫 번째 열이 접적한 지 십여 초도 지나지 않아 통째로 함몰되었다. 이어 두 번째 열은 그보다 짧은 시간에, 세 번째 열은 칼을 섞기도 전에 붕괴가 시작되었다.
용병의 공격력이 집중된 좌익의 전투 상황은 참담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그나마 용병의 수가 적은 중앙 쪽도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중앙의 용병들은 무서운 속도로 파고드는 우익의 용병들과 보조를 맞추어 천국 병사들이 측면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워낙 좌익이 빠르게 함몰되다 보니 용병들은 반 시계 방향으로 대형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사선 진의 약점을 모두 메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모한 것처럼 보였던 사선 진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신의 한 수가 된 것처럼 보였다.
“적 좌익이 완전히 붕괴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오 분 안에 상승군의 포위가 풀릴 것으로 보입니다.”
망원경을 든 장교의 말에 하비가 입에 물고 있던 궐련을 검지와 중지로 집어냈다. 그러곤 회백색 연기를 훅 뿜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생각한 것보다 저 친구들이 잘 싸워주는 것 같아. 과연 명성에 어울리는 친구들이라고 할까?”
“비싼 값을 하는 친구들입니다.”
하비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궐련을 가볍게 흔들어 재를 털어냈다.
“적 좌익을 깨고 나면 적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나?”
하비의 물음에 장교가 망원경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승부에 미련이 있다면 비어 있는 우리 좌익을 노리고 부대를 돌려올 겁니다. 용병이 아무리 강해도 후미를 잡힌 상태에서는 싸움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하비의 물음에 장교는 고개를 저었다. 왕국 대령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궐련을 다시 입에 물었다.
***
“각하. 새로운 적의 공격에 군의 좌익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각 이내에 새로운 적과 강주군이 합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서익은 침묵을 깨트리며 아픈 팔로 나뭇등걸을 내리쳤다. 오승도, 그 괴물에게 움직일 여지를 주게 되면 만사가 끝장난다. 하니 그 어떤 경우에도 적세가 합류할 여지를 주어선 안 된다.
“하지만 적의 공격이 워낙 거세어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도대체 적이 얼마나 강하기에 좌익이 손도 제대로 섞어보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단 말입니까? 아까 파악한 적세는 삼천 남짓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승도의 포위에 투입한 병력은 모두 만이다. 남는 병력은 둔덕의 바깥을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들의 수도 대략 만 정도다. 나머지는 간밤의 처절한 혈전 과정에서 모두 녹아버려 북벌군이 보유한 병력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용병들에게 대항하는 전력이 많진 않은 셈이다.
그렇다곤 해도 일만의 군세라면 간단히 당할 전력은 아니었다.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천국 제일의 북벌군이다. 고작 삼천의 적에게 단박에 무너질 정도로 약하진 않았다.
“저희가 보기에도 삼천 남짓한 적이었습니다.”
“고작 삼천 남짓한 적이 일만 군세의 좌익을 뚫고 들어오는 데 일각도 걸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오승도가 지휘하는 상승군도 강했지만 이 정도의 전투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들도 괴물 같은 역량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상식 범위의 전투를 했다.
겨우 삼천으로 일만 군대의 한쪽 날개를 부러트리는데 일각밖에 걸리지 않는다면 정면에서 그냥 싸워도 수만 군세를 대적하고도 남을 전투력을 가졌다는 말과 같았다.
“소장들이 무능한 탓입니다.”
장수들이 일제히 부복하여 죄를 청하자 서익은 멀쩡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날 부축해 주세요.”
“각하. 지금 몸을 움직이시면.”
“삼군이 무너질 판에 몸 걱정을 하게 생겼습니까? 내 눈으로 상황을 똑똑히 봐야겠습니다.”
서익이 버럭 화를 내자 장수들이 마지못해 병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몇몇 병사들이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자 서익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엉거주춤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적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까지 몸을 옮겼다. 그곳에서 무서운 기세로 아군을 도륙하고 있는 적을 보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 전쟁은 장수의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던 그였다. 확실히 그간 벌여온 전투들은 그 상식을 뛰어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인 광경은 그의 상식을 철저히 부정했다.
“각하. 적의 예봉이 날카롭고 그 공격이 매섭습니다. 이번 전투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습니다.”
서익은 자신의 뒤를 따라와 고하는 장수들의 말에 눈을 감았다. 서전부터 이 정도의 전투력을 보이는 적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들 앞에 누가 있어 강주군과의 합류를 저지하겠는가?
기대할 수 없는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강주군과 저들의 합류는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서익은 손을 가늘게 떨었다. 승산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기회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서익은 절망을 곱씹으려다 아군을 무섭게 파고들던 적의 진형을 떠올렸다. 한쪽 날개를 생략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진을 보니 역전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약점만 파고들 수 있다면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적에게도 약점이 없진 않습니다. 저 측면, 저길 물어뜯어야 합니다.”
서익은 적의 진형을 보고 일말의 가능성을 짚었다. 전군을 물려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이긴 했지만 승리의 여지가 없진 않았다.
아직 건재한 우익이 적의 측면으로 돌아가 포위를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적도 그 기세를 꺾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이 싸움은 끝이었다.
***
“아군이 도착했습니다, 대인. 구원 군이 왔습니다.”
비장한 분위기 속에 적의 공격을 지켜보고 있던 상승군 장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조금 전까지 항복이냐, 전멸이냐의 양자택일에 몰려 있던 입장에서 전세가 바뀌자 목소리에서부터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군요.”
승도는 짐작한 것보다 용병들이 훨씬 빨리 도착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익의 군대가 그들의 뒤를 밟은 탓에 용병들과 전혀 접촉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들의 위치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 용병들 쪽에서도 상승군의 위치에 대한 최신 정보를 갖지 못했다.
그 때문에 승도는 이번 전투에서 용병이 적시에 합류할 가능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었다. 서익이 생각보다 빠르게 뒤를 밟아오면서 모든 작전 계획이 뒤흔들린 탓이다.
“신께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신교를 믿는 왕국 장교들은 성호를 그리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승도도 감사 기도를 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비와 용병들에게 감사의 마음 정도는 품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뒷짐을 지고 섰다. 이제 그 시야가 닿는 곳까지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사람 목을 과일 따듯하며 나아오는 기세를 보건데 합류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이 도우셨다. 그 말 대로일지 모르겠군요.”
“용병들이 합류하는 즉시 우리도 공세로 전환하겠습니다.”
장교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승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승도는 장교의 제안을 허락하며 망원경을 들었다. 합류는 기정사실이긴 했지만 얼핏 보기에 진이 다소 이상해 보이긴 했다. 한쪽 날개가 없는 불완전한 공격 진형. 승도는 그것을 보고 사선 진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사선 진은 고대 희랍에서 들고 나온 공격적인 진형으로 모든 공격력을 한쪽에 집중시켜 적이 이쪽을 포위하기 전에 상대의 날개를 잘라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처음 사선 진이 등장했을 때는 그 파격적인 수법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이후에는 대응책이 어렵지 않게 나왔다.
공격력을 집중한 축의 병력을 뒤로 물리며 시간을 끄는 사이 다른 축의 병력을 빠르게 전진시켜 상대를 포위하면 간단히 격파할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 사선 진의 가치는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장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 사선 진의 약점을 금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강군이라도 뒤를 잡힌 상태에서는 그 실력을 내지 못할 테니 적이 노릴 것도 하나밖에 없었다. 건재한 우익으로 용병들의 뒤를 노리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적은 승도의 예상대로 용병들의 후미를 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반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후미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용병들의 반응은 대단히 신속하고 빨랐다.
좌익이 무너지는 속도가 우익의 전진 속도와 맞먹는 판이니 뒤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천하의 연합왕국 전열 보병들도 근접전에서 도륙한 자들이 바로 굴카 용병들이다. 그런 자들의 사선 진을 안다고 해서 간단히 상대할 수 있을 턱이 없지.’
승도는 망원경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적장은 분명 올바른 대응을 내놓았지만 천국 병사들의 역량으로는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길 수 없었다. 그것이 서익의 한계이고 승도 자신이 이번 전투의 승리를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군이 왔다!”
용병들이 피 묻은 칼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돌파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용병의 선두가 상승군의 원형 진에 도달했다. 그것은 승리의 가능성을 손에 쥐려 했던 서익과 천국 군대에 대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전군 공격하라!”
십여 분 전만 해도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던 상승군 병사들도 사기가 올랐다. 누가 봐도 전세는 뒤집어져 있었다.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진에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보고 승도는 밤새 무리하여 뻣뻣해진 목을 돌렸다. 승패는 이 한 번의 돌격으로 결판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