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반객위주 (3)
천국 군대는 적의 맹공을 견디지 못했다. 좌익부터 허문 용병은 반시계 방향으로 쓸고 지나가며 저항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진형을 재편할 여유도 주지 않고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들의 공격 앞에 천국 군대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교전이 시작된 지 30여 분도 지나지 않아 약 2만을 헤아리던 천국 군대는 그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전면 패주 양상으로 치달았다. 용병들은 그렇게 달아나는 적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적의 뒤를 따르며 목을 쳐대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지옥의 악귀를 연상시켰다. 왕국의 전열 보병들조차 겁을 집어먹는다는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었다. 피 칠을 하며 적을 도륙하는 용병들을 바라보던 승도의 앞으로 여러 필의 전마가 다가왔다.
전마에는 근사한 모자를 쓴 장교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승도 앞에서 말을 세우고는 지면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모자를 벗어 정중히 예를 표하는 그들에게 승도는 미소로 화답했다.
“저희가 늦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인.”
“별말씀을. 아주 적절한 시간에 도착해 주었습니다.”
승도의 말에 하비가 코 주름을 살짝 만들며 물었다.
“저희 예상보다 적과의 접촉이 빠른 것 같았는데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적장이 한 가지 기만책을 펼쳐 우리 계산이 다소 어긋났습니다. 예상보다 북쪽 방면의 적이 우리 가까이 위치해 있더군요.”
승도는 적장 서익의 기만책에 속아 그 위치를 오판한 것이 이번 전투를 어렵게 한 주 요인이라 생각했다.
“운이 나빴다면 양쪽의 적에게 협공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것 같진 않은 듯합니다.”
“약간의 운이 따라 주었습니다.”
그들이 추격했던 적의 지휘관이 회전을 피하고 후위만 남기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면 승도는 더 어려운 처지에서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용병들이 합류하기 전에 무너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운보단 실력이겠지요.”
하비가 손수건을 꺼내 콧잔등에 남은 기름기를 닦아냈다. 승도 역시 자신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을 마냥 운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적을 회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의 지모였고, 단시간에 적을 박살내어 협공의 가능성을 상쇄한 것은 상승군의 실력이었다.
“어떻게 교전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습니까? 평균적인 행군 속도로는 이 시간에 전장에 합류하기 어려웠을 텐데.”
“행군 도중 낙오병을 잡아 적의 위치를 파악한 덕입니다. 적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앞서 움직인 것을 몰랐다면 우리도 이렇게 서둘러 행군하진 못했을 겁니다.”
전장에는 종종 우연의 요소가 개입하곤 한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중요한 기밀을 적의 전령으로부터 습득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런 우연에 속했다. 하비와 용병들 역시 우연한 조우 덕분에 적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군 속도를 높여 적시에 전장에 개입할 수 있었다.
낙오병은 어느 전장에나 있게 마련이라 그렇게 특이한 우연은 아니었다. 승도 역시 낙오병들로부터 정보를 종종 습득해본 경험이 있어 하비가 적시에 개입할 수 있었던 정황을 이해했다.
“밤을 새워 달려왔다면 용병들도 상당히 지치지 않았습니까?”
“대인께서 추격을 중단하라는 명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저대로 상경까지 달려가고도 남을 겁니다.”
“지휘관의 입장에선 듬직한 대답이군요. 하지만 적을 전멸시키는 것은 안 됩니다.”
승도는 이번 전역에서 천국에 이미 괴멸적인 피해를 안겨주었다. 당분간 세를 재규합하더라도 대하 이북에서 새로운 세력 팽창을 노릴 수 없을 정도로 그 군세를 철저히 꺾어놓았다. 여기에 더해 천국의 주요 맹장들의 목까지 모두 잘라버리면 천국은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곤란했다. 병사라면 모두 전멸시켜도 좋지만 천국 지휘관들만큼은 살아 있어야 했다. 그들이 건재해야 천국이 전열을 정비하고 제국을 견제할 수 있었다.
“하면 적당한 시점에 추격 중지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승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비가 손을 들어 기수들을 불렀다. 그는 기수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며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요컨대, 저 숲의 경계에 들어서면 상승군과 용병의 전진을 정지시키란 명령일 것이다. 승도는 손바닥을 가볍게 문지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만의 생명이 덧없이 꺼진 탓일까. 동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더 이상 적의 추격은 없습니다. 각하.”
수풀 속에 몸을 기댄 병사들이 숨을 헐떡였다. 군대가 와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와중에 한 무리의 패잔병과 겨우 목숨만 부지해 도망쳐온 장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 추격이 없단 말입니까?”
“예.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장수의 대답에 서익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패잔병에 대한 추격이라는 것을 적이 모를 턱이 없는데 추격이 없다니.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 가지. 적이 일부러 보내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아귀가 맞는 이야기였다. 이쪽의 허를 수시로 찌를 만큼 교활한 적이 멍청하게 행동할 리는 없으니 이는 계획된 행동이라고 봐야 했다.
‘오승도가 나를 보내줘서 생기는 이익이 있나?’
제국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나와 막대한 손실을 무릅쓴 강주 관리사가 승리 이외의 그림을 그리고 있단 말일까?
일부러 보내준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범주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천국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오승도가 작심을 하고 그들의 뒤를 밟아왔다면 천국 군대는 전멸이다.
천국의 핵심 장수들도 이 자리에서 모두 뼈를 묻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되었다면 천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적의 추격이 없다 해도 안심할 입장은 아니니 잠깐 숨만 고르고 바로 출발하도록 합시다.”
“예, 각하.”
“아. 그리고 하나.”
“말씀하십시오.”
“지금 근처에 남은 병사가 모두 얼마나 됩니까?”
원수의 물음에 장수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십만 대군을 손에 쥐고 오승도와 그 군마를 토벌하겠다고 나섰던 서익이다. 그런 그에게 백도 안 되는 병사만 남았다고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익은 장수의 망설이는 표정을 보고 눈을 감았다. 듣지 않아도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웬만한 수의 병사라도 남았다면 저리 망설이진 않았을 것이다. 근처에서 얼핏 십여 명 남짓한 병졸들을 본 기억도 있었다.
“대답은 되었습니다. 피곤할 텐데 물러가 쉬세요.”
“예, 각하.”
서익은 장수를 돌려보내고 나뭇등걸에 몸을 기댔다. 이름 모를 산촌의 화전민 자식으로 태어나 천국에 출사한 이래, 이처럼 참혹하게 패해본 적은 없었다.
수치스럽고 분했다. 적의 알량한 계산 따위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한 것에 안도해야 하는 처지에 이가 갈렸다. 수도 없이 죽은 부하들을 떠올리면 지금 당장이라도 적진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서익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번에는 졌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내 지모는 그대에 못 미쳤고, 우리 병사들의 용맹은 그대가 가진 군마에 미치지 못했다. 모든 면에서 우리의 실력이 그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오승도의 군대가 보여준 놀라운 역량은 서익 자신이 세운 원대한 전략을 깨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웬만한 장수였다면 빠져나갈 수 없을 죽음의 덫이었음에도 그들은 도리어 뼈아픈 패배를 안겼다. 부정할 수 없는 실력의 차이였다.
‘하지만 싸움은 이번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 천국은 제국을 대체하기 위해 태어난 나라다. 천국이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인 이상, 우리는 반드시 재기하여 그대 앞에 다시 설 기회를 얻게 되리라. 그날이 찾아오면 우리는 이번 싸움의 피값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서익은 승도와의 대결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천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재기의 기회는 다시 주어질 것이고, 그 불씨만 살린다면 설욕의 기회는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뼈저리게 당한 만큼 오승도와 그가 지휘하는 군대의 실력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실패는 한 번으로 족했다.
서익은 두 손을 얼굴에서 떼었다. 두 눈에 담겨 있던 수치심과 분노의 빛은 어느새 싹 지워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뜨겁게 달아오르던 감정이 차갑게 식었다.
서익은 몇 남지 않은 패잔병들 사이에서 다음의 일전을 기약하며 날카로운 칼을 가슴속에 벼렸다.
***
몇 번에 걸쳐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진 전장에는 시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시신이 워낙 많다 보니 전장에 버려진 유류품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이 유류품의 수거는 상승군에서 편성한 전장 정리 부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장 정리 부대는 병사들 중 그나마 기력이 괜찮은 자들로 편성되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근처의 상인 등과 계약을 맺고 수거를 대행시켰겠지만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그런 배짱을 부릴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챙겨야 할 품목은 총이었다. 총은 비싼 비용을 주고 사오는 수입품인 까닭에 휴대 무기 중 가장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이번 전투에서 양군 모두 총을 든 병사의 비율이 높아 수거할 총만 해도 수천 자루를 넘었다.
수거해야 할 것에 총만 포함되지는 않았다. 도검류와 병사들의 신발, 모자 등 각종 가죽 제품과 화약 꾸러미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도 모두 수거 대상에 포함되었다.
새로 생산해서 병사들에게 지급하려면 상당한 돈이 드는 물품들이었다.
전장 정리 부대에 포함되어 유류품을 수거하게 된 백씨가 시체 사이로 수레를 밀고 들어갔다. 덜컥거리는 진동이 따를 때마다 시체의 신체 분위가 밟히며 내는 묘한 촉감이 백씨의 손까지 전해졌다.
“제길. 또 밟았군.”
백씨가 욕지기를 내뱉자 근처에서 시체를 하나하나 뒤집으며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피식 웃었다.
병사 하나가 총 하나를 주워 수레 위로 올렸다.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합왕국제 소총이다. 총 자체로 보면 상승군의 것처럼 보이지만 소유자는 천국 병사였다.
제국군이 천국에 워낙 많은 무기를 헌납하다 보니 연합왕국제 무기를 가진 천국 병사는 적지 않았다.
제국 군대만이 천국의 주요 무기 보급 루트인 것은 아니다. 밀수 등을 통해서도 천국으로 무기가 종종 들어갔기 때문이다.
“양총인가? 이 월비 놈들이 별 걸 다 가지고 있군.”
“양총을 가지면 무얼 합니까? 가져봐야 우리 손에 다 죽은 놈들인데.”
병사의 대꾸에 백씨가 총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답했다.
“하긴 월비 놈들이 총 쓰는 건 정말 어린애들 같았지.”
수년에 걸쳐 서역식 총기 사용법을 숙지한 상승군 병사들이 보기에 천국 병사들의 총기 사용은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었다면 장전에 몇 초 걸리지 않을 것을 월비들은 수십 초가 걸리기 일쑤였다.
사격 자세는 또 어떠하던가? 제대로 된 지향점을 잡지 못해 총구를 띄우기 일쑤여서 그들의 총탄은 허공을 날곤 했다. 그런 사격으로는 피해를 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장발적 놈들이 팔기보단 낫더군요.”
병사 하나가 농을 섞어 던진 말에 모두가 실소를 지었다. 일개 반란군이 정규군보다 낫다는 것만큼 우스운 말도 없었지만 현실이니 더 웃길 수밖에 없었다.
장발적은 총이라도 쏘지 제국군의 십중팔구는 총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부터 연상되었다.
“하긴. 장발적 놈들이 팔기보단 훨씬 낫지. 이번 전쟁만 해도 그놈들이 어지간히 무능해서 우리까지 나오게 된 것 아닌가.”
백씨는 가래침을 퉤 뱉었다. 강주 이외의 것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오승도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곳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반군의 세가 커져서다.
상승군 병사들은 그런 맥락에서 강주의 개입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팔기가 알아서 잘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로 월비들을 크게 박살내 주었는데.”
“그렇겠지. 아무리 멍청하고 무능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걸세.”
병사들은 제국군을 비웃으면서도 그들이 더는 천국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장 그들 앞에 펼쳐진 전장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자그마치 수천 정의 총을 포함해 십만 대군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와 물자가 버려져 있었다.
인적 손실은 둘째치더라도 물적 손실만으로도 천국의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의 피해를 입은 상대에게 고전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럼 우리도 이제 강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거군요.”
병사 하나가 귀향을 입에 담자 모두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전장에 단련된 상승군이라 해도 전장이 마냥 좋을 리는 없었다. 그들 역시 가정을 그리워하기는 일반인들과 같았다.
“곧 그리되겠지.”
백씨는 그렇게 답하며 수레를 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전장이 정리되는 사이 상승군의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전투로 이 전쟁에 참가하며 세웠던 목표가 달성된 이상 진퇴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막에 모인 지휘관들은 차분한 얼굴로 승도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번 전역에서 우리 군은 목표로 세웠던 월비들의 세력 축소를 완벽하게 달성했습니다. 수차례의 주요한 전투 과정에서 약 이십만에 육박하는 월비들을 격파하였고, 그 수도를 공격권에 포함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하 이북에서 세를 확장하려 한 그들의 시도 역시 꺾어 놓았습니다. 이상의 성과만 놓고 판단한다면 당초의 목표는 초과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승도의 이야기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한때 제국 전역을 격동시키며 팽창하던 천국은 상승군의 강력한 공세에 연전연패해 힘을 잃었다.
대하 이북에서 제국군을 완파하고 중원을 손에 넣을 발판까지 만들었던 기세는 지금에 와서 온데간데없었다.
“따라서 우리 군대가 계속해서 동진을 하거나 혹은 현 위치에 머무르게 될 경우, 당초의 목표를 오히려 저해하게 될 수 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도는 압도적인 승세를 타며 천경의 코앞까지 육박해온 상승군이 현 위치에서 전진을 멈춘다고 해도 천국이 받을 압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대륙의 세력 균형을 생각한다면 천경에 대한 압력은 이쯤에서 거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 군을 철수시킨다면 제국 정부에서 의혹 섞인 시선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적의 수도 앞까지 전진했다 철수하는 것은 사실 상리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승도는 그에 답할 대답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 회전에서 입은 우리 군의 손실을 다소 과장해서 보여준다면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제국 정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우리 군세가 수천에 지나지 않는 이상 일정 수준 이상의 피해를 보고한다면 그들도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보통 전쟁에서 군의 전멸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사상자의 수가 삼 할에 달한 경우다.
이번에 상승군은 전멸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한 번 정도 물러나 재편성을 한다 해도 상식선에서 이해될 만했다.
“대인의 정적들이 철수를 쉽게 용인하겠습니까?”
정치에서는 상식을 가지고 비난하지 않는다. 공격할 흠집을 발견하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어뜯고 상처를 크게 만들어 상대를 쓰러트리려 할 뿐이다. 승도가 철수에 대한 구실을 만들어도 그냥 호락호락 보내줄 리가 없다.
승도도 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당연히 그냥 보내주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물어뜯는다 해도 날 어쩌진 못할 겁니다. 물어뜯을 거리라고 해봐야 내 전공 정도겠지요.”
승도도 신의 관직 생활을 조금 해본 까닭에 상대가 어느 선까지 공격을 할 수 있고, 어느 선에서 멈출 지를 대강은 계산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관료들의 생리대로라면 그 압도적인 전공의 상당 부분을 덜어내는 수준에서 포화를 멈출 가능성이 농후했다.
“전공을 양보하시는 겁니까?”
왕국 장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위기가 생기면 거국적인 차원에서 군인들에게 지원을 밀어주고 전공은 정파의 차이를 떠나 철저히 보장해주는 것이 연합왕국이다.
그런 나라의 군인들로서는 전공을 물어뜯어 축소한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신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이전에 상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전공은 별로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대인께서 공을 염려하지 않으신다면 물러서도 걸릴 것은 없겠군요.”
“다만 지금 철수했을 때 월비들이 어느 정도로 세를 회복할 것인가? 혹은 제국군의 역량이 아직도 월비에 비해 불충분한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가 걱정거리입니다.”
“그 부분이라면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비가 손을 들고 이야기를 꺼내자 승도가 고개를 돌렸다.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니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곳으로 합류하기 전에 강북 대영 쪽에서 보낸 전령을 만났었습니다. 전령이 알리길 강북 대영의 수장이 바뀔 것이라고 하더군요.”
승도는 하비가 건넨 말에 적잖이 놀랐다. 무능한 사령관 요수의 경질은 그 자체로 제국군의 전력에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승도는 손에 깍지를 끼고 손을 가볍게 비볐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강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 싶었다. 어차피 전장에 오래 나와 있어봐야 강주를 챙기기도 어려우니 돌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요수가 경질된다면 걱정할 거리는 없겠군요. 전장 정리를 마치는 즉시 전군을 강주로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승도는 나름의 계산을 마치고 결정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