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풍겸 (2)
멀리 횃불이 보였다. 그 불빛이 미치는 권역 안으로 열 채의 막사가 보였다. 얼핏 보기에 작은 개울과 논두렁을 낀 것처럼 보였지만 딱히 장애가 될 것 같진 않았다. 경계를 서는 병사도 보이지 않아 논두렁을 넘어 적의 막사로 들어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으리란 계산이 섰다.
척후는 손에 든 호롱불 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환한 불빛 앞에 손을 가져가자 불빛이 잠시 가려졌다. 이어 손을 치웠다 다시 가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멀리서도 불빛이 깜빡였다.
신호를 받았다는 뜻이다. 척후는 침을 삼킨 다음 적진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어두운 밤에는 소리가 넓게 퍼지게 마련이라 나뭇잎 밟는 소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척후는 개울에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고 어두운 물속을 걸었다. 물소리를 내지 않도록 발걸음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음은 물론이다.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기에 어른 스무 명의 키 넓이도 되지 않는 개울을 건너는 데 무려 오각이나 소요되었다.
척후는 물방울 떨어트리는 소리도 조심하며 논두렁으로 천천히 기어올랐다. 거리가 가까워진 탓인지 횃불이 무척이나 밝게 느껴졌다. 그는 몸을 움츠린 채 눈만 살짝 내놓고 적진의 동정을 살폈다. 그때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척후는 급히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야비하게 웃는 것 같은 검은 얼굴이 그 앞에 보이는가 싶더니 세상이 검게 변했다.
척후가 특별한 신호를 보내지 않자 뒤를 따르던 병사들은 아무 이상이 없다고 여기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풍겸 역시 적이 기습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리라 여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장군. 적이 방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군.”
그들은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전장의 악마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공격한다.”
풍겸이 입술만 움직여 의사를 표시하자 군관이 호롱불의 양옆으로 손을 가져갔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불빛의 깜빡임을 두 번 빠르게 반복하면 공격을 하란 신호다.
명령이 떨어지자 풍겸의 부하들이 함성을 지르며 개울로 뛰어들었다. 첨벙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병사들이 개울 위로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들은 단숨에 적의 막사로 치고 올라가겠다는 듯 개울을 건너 논두렁에 달라붙었다. 그들이 막 논두렁을 기어오르기 위해 손을 내밀던 차에 비명이 울렸다.
“으악!”
짤막한 비명과 함께 손가락이 잘려 땅바닥을 굴렀다. 그것을 신호로 섬뜩한 무언가가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빛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적이다!”
칼을 든 적병들은 논두렁 위에서 칼을 휘둘러 논두렁을 타고 올라오려던 천국 병사들을 무참하게 도륙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무기를 등에 짊어지고 움직이던 병사들로서는 그야말로 재앙을 만났다.
사람 머리통이 연달아 비탈을 타고 개울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천국 병사들이 급히 무기를 뽑아들고 맞서 보았지만 이미 사람 목을 과일 따듯 치며 달려 내려오는 적의 기세를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요마 놈들.”
한 병사의 절규에 검은 얼굴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쿠크리를 좌우에서 교차해 가볍게 목을 썰어냈다.
앞서간 병사들이 도륙당하고 옆에서는 비명이 연거푸 터지고 칼날이 희번덕대니 개울을 막 건너오던 병사들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비명 소리에 천국 병사 몇몇이 횃불을 급히 피워들었다.
“…….”
곧 용병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옥도가 만인의 눈에 들어왔다.
좁은 개울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개의 주인 잃은 머리통과 목 없는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시뻘겋게 물든 개울 위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 기겁했다.
“요마들이다. 진짜 요마들이다!”
병사들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검은 얼굴들은 개울가에 있던 천국 병사들의 목을 모두 쳐 날렸다. 그것을 본 풍겸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알았다.
적은 그들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고, 좋은 위치에서 이쪽의 공격을 받아쳤다. 철저히 조심해서 공격했다고 생각했는데 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만 것이다.
‘오승도. 이 빌어먹을 놈.’
풍겸은 이를 갈며 반대쪽 논두렁으로 돌아가려 애를 썼다. 그는 병사들에게 후퇴를 외치며 붉게 물든 개울을 헤치고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풍덩.
그때 풍겸이 향하던 논두렁 쪽에서 무언가가 개울로 떨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얼굴로 혀를 빼문 머리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기어오르려던 논두렁 위에는 젊은 사내 하나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병사 몇몇이 횃불을 들고 있던 곳이었다.
그 옆으로는 검은 얼굴을 한 자들 수백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풍겸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괴물은 백 명의 병사만 가지고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그 백 명은 풍겸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속임수였을 것이다.
사내가 호롱불을 높이 들어 보이자 논두렁 위에서 천국 병사들을 도륙할 준비를 마치고 있던 검은 얼굴들이 칼날을 늘어트리고 동작을 멈추었다. 살인 명령만 내려지면 천국 병사들에게 달려들 것이란 사실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상대가 잠깐 휴식의 틈을 주자 풍겸 역시 목소리를 높여 병사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당신이 오승도인가?”
풍겸이 묻자 젊은 사내가 좌우에 명해 횃불을 가까이 가져오라 이르며 답했다.
“맞습니다. 내가 강주 관리사 오승도입니다.”
“이거 대단한 거물을 가까이서 뵙게 되었군.”
“알고 찾아온 것 아니었습니까?”
“물론 알고 찾아왔지. 당신 목을 따려고.”
풍겸의 대꾸에 승도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목을 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승도가 여유로운 어조로 묻자 풍겸이 칼을 개울에 처박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긴 어려울 것 같군. 그보다 나와 내 부하들을 어쩔 속셈인가?”
풍겸이 묻자 승도가 무릎을 살짝 굽혀 눈높이를 낮추었다.
“그건 장군이 잘 아실 겁니다. 장군과 그 부하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설 필요도 없이 이 친구들에게 명령을 내렸을 테니까요.”
그 말은 맞았다. 논두렁의 양옆을 장악한 오승도의 용병 수백이면 개울에 갇힌 풍겸의 병사들을 모조리 도륙 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구태여 모습을 보였다.
“내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 천국의 풍겸에게 제국 장수가 원하는 것이 있다니.”
풍겸은 눈썹을 씰룩였지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상대를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었다. 한 번 수만의 부하를 잃은 그로서는 그나마 남은 부하들을 모두 잃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물었다.
“바라는 게 뭐지?”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당신이 내 밑에서 일해주길 바라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하면 당신 부하들의 목숨은 보장하겠습니다.”
그 말에 풍겸이 코웃음을 쳤다. 반란군의 장수가 정부군에 투항하여 관작을 받은 일이야 대륙의 기나긴 역사에 수도 없이 많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을 떼죽음시킨 장본인이 투항을 권고하니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잊고 있나 본데. 당신은 내 부하들을 몇 만이나 죽인 자야. 그런 자 밑에서 내가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나?”
풍겸이 반문하자 승도가 구부렸던 무릎을 쭉 펴고 바로 섰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당신이 품은 이상 때문이지요.”
“그건 무슨 헛소리지?”
“풀 죽도 먹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제대로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 그게 당신 이상 아닙니까?”
“그게 내가 당신 밑에서 일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요?”
“상관이 아주 많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아니라 나만이 당신의 이상을 이루어줄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현실을 보면 알 겁니다. 내가 품에 안은 강주와 당신들의 천국을 보면.”
승도의 말에 풍겸이 핏물로 얼룩진 개울을 보았다. 굶지 않고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땅, 강주와 이상 세계 건설을 내세우지만 전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천국.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말은 옳았다. 하지만.
“그 말이 옳다 해도 당신은 용납할 수 없는 내 적이야. 내 부하들을 수도 없이 죽인 자란 말이다.”
그 말에 승도가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장군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까? 장군 역시 죄 없는 백성들의 목을 수도 없이 치지 않았는지요. 그 손에 죽은 제국 병사들도 결국 죄 없는 백성들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궤변이다.”
“그것이 궤변이라면 장군의 원한도 궤변인 거지요. 아닙니까?”
풍겸은 그 말에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승도는 그런 풍겸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장군이 쉽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천하는 난세입니다. 나는 이 난세에서 내 울타리 안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왕도이고 내가 이상으로 가기 위해 선택한 길입니다. 그럼 장군은 무엇으로 이상을 추구하겠습니까. 장군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는…….”
풍겸이 입술을 떨었다.
***
“이자에게 새 의복을 내어주고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세요. 조정에서 관작이 내려오면 그때는 군 회의에 참석할 자격도 줄 겁니다.”
승도가 검은 죽립을 눌러쓴 사내를 데려와 그런 이야기를 꺼내자 상승군의 장교들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급이라도 들은 것이 있다면 이해라도 편할 것인데 그런 것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비가 대표로 나서며 의문을 표시하자 승도가 어려울 것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죽립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립을 벗어보세요.”
승도가 죽립을 벗을 것을 권하자 사내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내려왔을 때 장교들은 그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었으나 설마 하는 마음이 있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윽고 승도가 정적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요. 이번에 우리 군에 투항한 항장 풍겸 장군입니다.”
“풍겸이라면 대인께서 토벌을 하시겠다고 용병들을 데리고 갔던 그자 아닙니까?”
장교 중 하나가 경악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풍겸은 조정에서 보는 즉시 참할 것을 명한 도적 수괴 중 하나였다. 그런 자를 산 채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장내의 분위기를 맛보며 승도가 느릿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대인.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자를 데려오신 겁니까? 저자는.”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 조정에서 즉시 목을 치라 한 반역도당이지요.”
승도의 여유로운 대답에 장교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딱딱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하나 태양이 밝음을 깨달아 삿된 것을 버리고 돌아온 탕아에게 천자는 늘 관용을 베풀어 왔습니다. 제도를 불태운 반역도당 석문도 용서를 받고 관작을 받았으며, 강남을 반란의 땅으로 만든 장용도 왕작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 반역도당들에게도 은사가 내려진 전례가 있는데 풍 장군이라 해서 예외를 둘 필요는 없지요.”
승도는 조정에 투항한 옛 반란군 장수들이 받은 대접을 입에 올렸다. 관의 힘이 모자랄 때에 투항하여 과한 대접을 받긴 하였으나, 그들이 그러한 처우를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대인. 대인의 말씀은 알겠으나 저자를 감싸시면 득보다 실이 커집니다.”
건문이 앞으로 나서며 고했다.
“득보다 실이 많다고요?”
승도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자 건문이 말을 이었다. 상인의 생리를 가진 승도에게 이문을 가지고 설득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었다.
“대인의 말씀대로 저자를 감싸려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조정에서 처벌을 하려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대인께서 나서서 구명을 하신다면 조정에서 어찌 그 의중을 밀어붙이겠습니까? 하나 그리 일을 처결하신다면 월비들의 수도 앞에서 물러서신 건과 엮어 대인을 반적과의 내통으로 몰 수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나를 월비와 내통한 것으로 몬다. 끼워 맞추면 그렇게 만들 수도 있겠군요.”
승도가 손바닥을 가볍게 매만졌다.
“대인. 항장 풍겸을 거두어 쓰셔서는 안 됩니다. 대인께서 어떤 이문을 생각하고 그를 거두셨는지는 몰라도 득보다 실이 큰일입니다.”
건문이 이야기를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승도가 손깍지를 끼고 탁자 위에 올렸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설득력이 있어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슨 이문을 바라는지를 모르기에 그 이야기에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득보다 실이 큼에도 풍겸을 거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건문이 재차 묻자 승도가 손깍지를 풀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며 답했다.
“이유라면 하나 있습니다. 장기적인 투자이지요.”
승도의 뜻 모를 대답에 건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투자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잠시 값을 지불해두는 것을 말한다. 지금 그 자신의 입지와 공을 대가로 지불해서 미래에 무언가 이익을 얻겠다는 말인데, 그 이익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풍겸이 미래에 승도에게 어떤 이문을 준다는 것인가?
건문은 승도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승도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탁자 위를 쓸어낸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그 손바닥에는 약간의 때가 묻어 있었다.
“투자라 하시니 쉬이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항장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있습니다. 풍 장군은 천국 제일의 덕장이지요. 덕장이란 말은 바꾸어 말해 인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천국이 무너지고 그 지도자들이 모두 정리되고 나면 남은 자들의 구심점이 될 사람은 결국 풍 장군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되면 그 잔여 세력을 거두어 쓸 수 있게 됩니다.”
“대인.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풍겸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풍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승도 역시 말을 조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위험하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들을 거두어 쓰는 것은.”
“조정의 경계를 사서 위험할 거란 말입니까?”
“그러합니다.”
건문의 대답에 승도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은 참으로 묘합니다. 돈을 적게 빌리면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돈을 갚을 때까지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간섭을 하며 못살게 굽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빌리면 상황은 반대가 됩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도리어 눈치를 보게 됩니다. 권력도 이와 같습니다. 견제할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조정에서 견제를 하게 되지만 그 정도를 뛰어넘으면 조정에서 눈치를 보게 되는 겁니다. 적당한 정도를 지키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지혜이긴 하지만 돈과 권력에 정도란 없습니다. 많이 가질수록 눈치 볼 필요 없이 안전하게 산다는 겁니다.”
승도는 오랜 경험에서 흐름을 탈 때는 거세게 타고 올라가야 함을 알고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에 그는 일개 소장의 몸이었지만 단번에 종신 통령의 지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누가 보기에도 무리한 행보지만 흐름을 탔기에 정변 이후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우물쭈물거렸다면 다른 경쟁자들에게 위치를 빼앗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천국과 제국이 흥망성쇠를 다투는 시기가 끝날 때, 권력자의 칼날이 자신을 향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 칼날이 날아오기 전에 저들이 감히 칼을 뽑아들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되는 것이 주도권을 차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니 풍겸을 거두고 천국이 망하는 순간, 그 잔존 세력들까지 모조리 그 지지 기반으로 흡수해 제국 정부를 오시할 정도의 가공할 세력으로 단박에 성장해야만 했다. 그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이것이 승도가 풍겸을 거두기로 마음먹은 주된 이유였다.
승도가 항장을 거둔 이유를 밝히자 건문은 침을 삼켰다. 가끔 넓은 안목으로 일을 진행하며 원대한 뜻을 품고 있음을 내비쳐온 그였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야심을 내보인 적은 없었다.
“대인. 조정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말씀은 천자의 발아래 머물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위험한 말씀이십니다.”
“그런가요?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요.”
승도는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했다는 듯 여유롭게 말을 돌렸다. 이곳 군막은 승도의 심복들만 있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역성을 논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말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사람을 해치는 칼이 되는 법.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쨌든 내 생각은 이러하니 풍 장군을 내 막하에 머물게 하는 문제에 대해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시는 상전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이상 건문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대인의 뜻대로 하시지요.”
“풍 장군의 투항에 관한 표문도 한 통 써주세요.”
“투항에 관한 표문을 말입니까? 그거라면 당사자인 풍 장군이.”
건문은 일단 승도의 바람대로 풍겸을 장군으로 호칭했다. 반군에서의 호칭이야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나 그 막하에 거두기로 하였으니 존중함이 옳았다.
“풍 장군에게 글을 한 번 써보게 했는데 워낙 악필이라 표문을 도저히 맡길 수가 없더군요.”
“그러시다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조정에 올리는 글은 필체가 좋지 않으면 곤란했다. 필체가 나쁘면 서찰을 대충 읽는 조정 관료들이 알아보기 쉽지 않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귓가에 따라온 승도의 한마디에 건문은 읍을 하며 명을 받아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