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아딘상회 (1)
오승도의 뜻에 따라 양행은 루브르망 호를 시험 항해에 보내기로 했다. 항해는 동영과 려를 돌아보며 중계 무역에 타당성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사전 조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항해의 책임자는 클레망소 대령이 맡았고 배의 안전은 용병 일개 중대가 책임졌다.
그 지휘는 연합왕국 장교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문화적 차이가 큰 로망스 인들 사이에서 생활할 것을 고려하여 대령이 그 지휘도 겸하도록 했다. 대령의 보좌는 루이와 조르주가 맡았다.
선원은 대부분 로망스 인들로 구성하고 일부만 강주 사람으로 태웠다. 경험을 쌓는 것 이상으로 이번 항해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조건 하에서도 배에 태운 강주 사람들은 일종의 사관후보생의 위치에 있는 자들로, 향후 배의 키를 잡을 사람들이었다.
행상은 인선을 마무리하고 배의 출항에 필요한 수속을 밟았다. 혹 동영 등에서 문제가 생길 소지에 대비해 연합왕국에 적을 둔 강주 양행의 의뢰를 받은 선박이라는 것도 분명히 했다.
이 제반 서류 작업은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문제가 불거졌을 때 행상과 오승도가 면피하기 위해 꼭 필요했다.
행상과 양행이 배를 띄우기 위해 다소 떠들썩하게 움직이자 이 움직임은 상관에 머물던 동방 무역 회사 측의 귀에도 들어갔다.
대반 브라운 경은 상관을 찾은 상인과 이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승도가 배를 띄운다는 이야기는 일전에 들었습니다. 동영으로 띄운다고 했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해금령이 있던 나라에서의 원양 항해. 쉬이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으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브라운 경이 각설탕 하나를 잔에 넣고는 스푼을 저으며 다시 물었다.
“상품은 무얼 실어간다고 합니까? 상관 거리에는 통 이야기가 돌질 않아서.”
“우리도 아는 것은 없습니다. 특정 상품을 눈에 띌 정도로 대량적재하지는 않으니 알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초 예상한 것처럼 타당성 조사인가 보군요.”
타당성 조사는 시험 항해를 통해 항로를 확인하고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의 가격과 물동량을 점검함으로써 투자 대비 이윤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연합왕국 역시 동방 진출에 앞서 몇 번의 시험적인 항해를 통해 타당성 조사를 거친 후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결정했었다. 초기 타당성 조사에서 포크와 모직물 따위가 거의 팔리지 않는 상품이란 것을 알았기에 그들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오승도가 이번에 하는 것이 타당성 조사라면 강주가 본격적으로 무역에 뛰어들려 한다고 보아도 좋았다.
“타당성 조사라면 저들이 중계 무역에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고 생각해야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대반은 스푼을 놓고 적당히 설탕이 녹아든 커피 잔을 들었다. 향긋한 검은 황금의 냄새에 이끌린 파리가 그 옆으로 윙윙거렸다. 마치 중계 무역이라는 달콤한 이익에 유혹되어 날개를 편 강주 행상들처럼.
“그들의 이익을 건드린다고 한다면 윈스턴 상회 친구들 표정이 볼 만하겠습니다.”
“윈스턴 상회라.”
동영과 신을 잇는 중계 무역에 뛰어든 상인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인을 말하라면 윈스턴 상회를 들 수 있었다. 윈스턴 상회는 이 무역에만 종사하는 기업으로 자그마치 55척의 범선을 가진 막강한 괴물이었다.
그만큼 중계 무역에 가진 지분도 크고 그에 사활을 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이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턱이 없었다.
“그들이 보고만 있을 리 없을 테니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다 위에서야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법이니 가능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바다는 무척 넓습니다.”
바다 위는 무법천지였다.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위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강자뿐. 강주의 배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는 대반의 말처럼 넓었다. 수십, 수백 척의 배를 가진 자라도 바다를 완전히 통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광대한 대양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을 만큼 좁은 호수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벌어진 해전만 보아도 그것은 잘 알 수 있었다. 해전은 모두 항구 주변에서 일어났다. 항구를 벗어나면 상대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대반께서는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적다고 보시는군요.”
“겨우 배 한 척이니 윈스턴 상회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들의 이문을 직접 침탈하려는 것인지도 확인되지 않았고. 공연히 전혀 다른 이문을 노리고 있는데 그들을 건드렸다가 신에서 사업에 차질이 생길 위험을 생각하면 지금으로서는 그저 지켜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대반은 윈스턴 상회에서 이번 타당성 조사에 손을 쓸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다. 물론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망망대해에서라면 서슴없이 손을 쓰겠지만 그곳에서는 마주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니 눈이 있는 항구 주변에서 손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부담을 짊어지기에는 위협이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대반께서는 강주 행상들이 중계 무역의 이익에 손을 대지 않을 거라 보십니까?”
“저들이 무얼 원하는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겁니다.”
대반은 간단히 답하며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상인의 말에 대반이 커피 잔을 살짝 내렸다.
“이번 소란이 상당히 이득이 될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지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대반은 강주 양행의 동영 진출을 내버려 두었다. 동방 무역 회사가 마음만 먹었다면 아문의 총독부와 입을 맞추어 강주양행의 서류 수속을 방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연합왕국의 이익 때문이다.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 그런 동기가 강하게 작용했다.
윈스턴 상회는 신대륙 출신의 왕국 상인으로 본국 정부에 일 푼의 재원도 도움을 주지 않는 천박한 양키들이었다. 이자들이 동방 중계 무역의 이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봐야 연합왕국 정부에 이익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공고한 지배가 흔들리는 편이 본국에는 이익이었다. 그들의 지분이 내려가는 만큼 본토 출신의 자유 상인들이 이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따지고 보면 동방 무역 회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이익을 올린다면 가장 좋겠으나 의회에 의해 규정된 ‘영역’을 넘을 수는 없었다.
“이번 일에 끼어 장난을 한 번 쳐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장난을 친다?”
대반이 묻자 상인이 묘한 눈빛을 던졌다.
“회사 소속 군함을 동영과 강주 근해에 띄우는 겁니다. 그치들이 손을 쓸 생각이 있어도 할 수 없도록.”
“그것도 나쁘진 않군요. 윈스턴 상회에 은연중에 압력을 넣어 오승도의 동방 무역에 손을 쓸 수 없게 만든다. 웃기지만 아주 재미있는 장난이 되겠군요.”
대반은 윈스턴 상회의 막강한 지위를 흔드는 단초로 강주를 이용할 생각을 품었다. 일정한 수준까지는 그의 무역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보호하고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윈스턴 상회의 지위가 허물어지고 자유 상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 보호는 없다. 강주는 단지 윈스턴을 쳐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기능을 하면 충분했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의문이 있긴 합니다.”
“의문이요?”
상인의 말에 대반이 되물었다.
“기존 무역 자체에 편입하는 정도라면 경쟁과 위험부담에 비해 오승도가 얻을 수 있는 이문은 그렇게 크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인 오승도의 생리로 본다면 그보다 큰 이문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보다 큰 이문이라. 동영의 은과 구리, 신의 차와 도자기를 교환하는 무역 이상의 이문을 동방에서 찾을 수 있기나 합니까?”
“그야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움직일 때마다 세인들이 생각한 것보다는 큰 것을 보고 움직인 자입니다.”
“딴은 일리가 있는 의문이군요. 그 건은 차차 지켜보도록 하지요.”
대반은 상인의 말을 받으며 찻잔을 다시 들었다.
***
아름다운 각양각색의 도자기들이 벽면에 가득 걸려 있었다. 온갖 색상으로 채색된 도자기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석과 같았다. 그 값을 생각하면 보석이란 표현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나에 은 수백 냥을 호가하는 것들이니.
서역에서 이 정도의 동방 도자기로 도자기 방을 꾸미려면 이름 있는 군주 정도나 가능했다. 하지만 동방이라면 군주가 아니라도 화려한 도자기 방을 하나 정도 가질 수 있었다.
이 아름다운 방을 소유한 사내, 윈스턴 블레이크의 신분이 그것을 잘 알려주었다. 신대륙 북부의 일개 평민 출신. 그것이 윈스턴 블레이크를 수식할 수 있는 유일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윈스턴은 그런 자신의 신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평범한 구두수선공 집안에서 이만큼의 부를 쌓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자수성가형의 부자로서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진 만큼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윈스턴에게 있는 것은 신분 같은 허상이 아니라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었다.
돈에 대해 불타는 집착을 가진 사내이다 보니 그 이익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오늘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 중계 무역에 어느 놈팡이가 끼려 한다고 했나? 응?”
호박색 반지 다섯 개를 낀 굵직한 손가락이 책상을 탕탕 두드렸다. 그 거친 분노가 화음이 되어 도자기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화음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말을 받았다.
“가, 강주 행상들입니다.”
“강주 행상?”
윈스턴은 그 말에 얼른 그들이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했다. 몰라서가 아니다. 행상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였다. 강주에 처박혀 들어오는 상품만 내보내고 받으며 이익을 쌓는 자들과 무역을 연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예. 강주에서 차와 도자기 따위를 파는 그 행상들입니다.”
두 번째로 그 이름을 듣고서야 윈스턴은 강주 행상들이 무역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그놈들은 강주 토박이들일 것인데 무슨 재주로 무역에 뛰어든단 말인가?”
행상은 무역을 할 만한 기본 바탕이 없었다. 최근에 오승도가 배와 서역 선원들을 사들이긴 했지만 중계 무역이란 것이 동방 무역 시스템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자들이 배 한 척으로 뛰어들 정도로 만만하지는 않았다.
“총독부 쪽에서 들어온 이야기로는 동영으로 시험 항해를 하려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시험 항해?”
“예, 회장님. 그리고 오승도가 배를 몇 척 더 들여온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 말에 윈스턴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승도가 배를 더 들여온다는 이야기가 돌게 된 것은 새로 들어오는 배들의 수속 문제를 미리 진행해둔 탓이었다.
“오승도. 강주 행상. 이놈들이 정말로 작심하고 우리 그릇에 스푼을 담 그어 보겠단 말인가?”
윈스턴의 표정이 급변했다. 남자는 회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침을 삼켰다. 그가 얼마나 노했는지 책상이 덜덜 떨렸다. 회장이 책상을 쥔 손에 힘을 준 탓이다.
“시험 항해에서 그놈들이 쓴다는 배의 크기는?”
“배수량 삼천 톤 정도 되는 배로 알고 있습니다.”
“큰 배로군. 작진 않아.”
윈스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 정도의 큰 배라면 단순 사고를 가장해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 처리하려면 충돌 사고 정도가 제격인데, 그런 사고로 처리하기에는 배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 배를 상대로 전투를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일을 시키면 입단속이 곤란해.”
윈스턴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창밖의 세상, 아문. 그 너머 경계는 단 한 사람이 지배하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도전해온 사내, 강주 관리사 오승도. 그 거물과 대놓고 충돌하기에 신에 있는 상회의 자산이 너무 컸다.
오승도와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 단계에서 대놓고 충돌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을 처리하면 좋을까. 어떻게?
윈스턴은 생각을 이어가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그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이.
“그 방법이 있겠어. 아주 좋은 방법이. 해리.”
“예. 회장님.”
해리라 불린 사내가 촌각의 간격도 두지 않고 대답했다. 윈스턴은 천천히 돌아서서 그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자네, 아딘 상회 친구들과 말이 통한다고 했지?”
“예, 아 예.”
아딘 상회는 아편을 주로 거래하는 지저분한 상인들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없는 더러운 작자들. 강도 집단이 상회의 이름을 걸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은 자들이었다.
“그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 주었으면 하네.”
“무슨 말씀을.”
“현금으로 만 파운드를 오승도의 배에 건다고 말이야. 오승도의 배를 침몰시키든 나포하든 강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면 그 돈을 준다고.”
윈스턴의 말에 해리의 눈이 커졌다. 상인이 살인청부를 입에 담아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입에 올린 돈 때문이었다.
만 파운드면 물가가 비싼 연합왕국 본토에서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아편을 취급하며 배를 불린 아딘 상회도 귀가 솔깃할 액수였다.
“너무 큰 액수라고 생각하나?”
회장이 해리의 기색을 눈치채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적은 액수이지. 만에 하나 저들이 중계 무역에 뛰어든다면 혹은 내 손으로 저들을 처리하려 든다면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테니까. 상인이라면 그 정도 셈은 할 줄 알아야지.”
윈스턴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엄청난 거금을 내거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 일에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회장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물론 그 돈을 처음부터 준다고 말할 필요는 없네. 적은 액수부터 부르게. 돈벌레들에게 시작부터 만 파운드를 불러버리면 그치들은 더 많은 액수를 부를 테니까.”
“물론입니다.”
윈스턴은 품에서 궐련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럼 이번 일은 대충 해결된 셈이군.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럼 되었어. 이만 나가보게.”
윈스턴의 손짓에 해리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얼른 도자기 방을 벗어났다. 천천히 닫히는 방문 너머에 남겨진 회장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궐련 한 대를 즐기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살인 명령을 내렸다고 보이지 않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그런 그를 괴물처럼 보지 않았다. 이 동방에서 이재를 추구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저 사내처럼 끔찍한 얼굴을 내면에 품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선량한 신사의 얼굴을 뒤집어쓰겠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 동방은 인간이 탐욕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는 공간일지도 몰랐다. 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회장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
루브르망 호는 닻을 올린 지 열흘 만에 동영의 요항 향항의 개항장에 도착했다. 향항은 동영이 세계를 향해 개방한 유일한 항구로 전쟁 이전의 강주와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봐도 좋았다.
특별한 지위를 가진 곳이다 보니 도시는 향항 부교라 불리는 막부 파견 관리의 통치를 받는 막부의 직할령에 속했다.
이 향항에서 외국인에게 허락된 개항장은 항구 앞에 만들어진 섬에 한정되어 있었다. 항구가 아니라 섬을 개항장으로 지정한 것이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개항장을 섬으로 제한한 것은 동영을 통치하는 막부에서 제번들이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효율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취한 조처였다. 강력한 중앙 정부를 가진 신의 경우야 내륙에 개항장을 만들어도 상관없었지만 동영의 중앙 정부는 신과 사정이 달랐다.
복잡한 이유에서 항구가 아닌 섬에 닻을 내리게 된 로망스 인들은 돛을 거두었다. 그들은 곧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에 넋을 잃었다.
“이곳이 에우로페인가. 동영인가.”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몰랐다. 모두가 얼이 빠진 얼굴로 섬의 전경을 훑었다. 섬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개항장답게 에우로페 식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놀랍군.”
클레망소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벼 보았다.
그들은 뭔가 묘한 느낌을 받으며 배 사다리를 타고 섬에 발을 디뎠다. 로망스 인들이 상륙하자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무리의 동영인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향항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호상에 속한 자들이었다. 호상은 이 섬에 지분을 가지고 있어 섬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영주도 아닌 상인들이 섬에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하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정을 알아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수백 년 전 막부에서 25명의 호상들로부터 돈을 추렴하여 만든 인공 섬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작달막한 키에 나무 신을 신은 동영인의 연합왕국 어에 클레망소가 잠시 당황했다. 그의 발음이 너무 어색해서 문장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발음이 독특하기로 유명한 강주식 연합왕국 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로망스 인들은 한참 만에 몸짓 발짓을 동원해 상대의 말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몸짓으로 어색한 의사 전달 부분을 어느 정도 보완하자 대화는 다소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인사에 동영 사내가 뭐라고 동영 어로 빠르게 말을 하더니 웃으며 안으로 향하자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들을 따라가는 동안 루이가 클레망소에게 물었다.
“함장님. 저 사람들은 이곳 관리가 아닌 것 같은데 저들이 수속을 맡는 것이 맞겠습니까?”
“강주에서도 행상이 관리들의 역할을 대행하지 않았던가? 이미 그런 전례가 있었으니 동영에도 관료가 아닌 자들이 관료 일을 대행할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루이는 그럴 법하다 생각했다. 행상처럼 이곳의 상인들도 관리의 일을 대행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 생각은 어느 정도 비슷했다. 호상이 가진 권한은 행상의 그것과 다소 유사했다. 개항장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하는 주된 일이었다.
다만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가 유지되는 동영에서 상인이 관직을 겸한다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호상은 그저 권한을 가졌을 뿐 정부의 공식적인 관직은 갖고 있지 않았다.
클레망소 일행은 호상의 뒤를 따라 상관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상관에서 연합왕국의 강주 양행 명의로 입국 수속을 밟고 호상에서 내세운 상담인과 잠시 상담을 가졌다. 이들과의 상담을 한 후에 개항장에서 활동하는 것이 섬에서 외국인들이 지켜야 할 첫 번째 규칙이었다.
다행히 상담역으로 나온 동영 사내는 상당히 외국어에 능통했다. 클레망소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섬을 방문한 목적을 밝혔다.
“우리는 동영에서 거래되는 유황과 구리, 은의 시세를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관에서 들어오는 삼 시세까지도.”
그의 이야기에 상담역은 수염을 매만졌다.
“시세를 파악하러 방문 항해를 오신 분이군요. 대인처럼 찾아오시는 분들도 드물진 않지요. 자료를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자료를 보셔야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도 사업의 타당성을 따져 보고 찾아주실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자료를 주신다니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한 가지. 삼의 시세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머지만 알려주셔도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클레망소의 대답에 상담역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는 여러 나라(서반아, 서국, 연합왕국 등)의 말로 쓰인 종이들 사이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내용은 연합왕국 어로 적혀 있어 알아보시기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상담역은 준비한 종이를 내밀었다. 이미 여러 번 이런 상담 내용을 받아본 듯 체계적으로 준비된 느낌이었다. 클레망소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상담역이 건넨 내용을 훑었다.
클레망소가 상당히 잘 준비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이 내용은 동영 정부에서 서역 상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여 작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영은 이미 이백 년 전 도자기 전쟁(대륙과 동영이 서역에 도자기를 수출하는 문제로 경쟁을 한 것을 빗댄 표현) 당시부터 서역 상인들을 어떻게 하면 자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고민 끝에 서역 상인들이 이 나라에서 충분히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서역 상인들을 위한 정확한 시세와 상담이었다.
내용은 승도가 조사한 것과 큰 차이가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좋은 정보를 수시로 드나드는 서역 상인들에게 제공하다 보니 그것이 흘러 강주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승도가 언급한 가격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본 클레망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정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충분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모쪼록 우리 호상과 앞으로도 좋은 협력 관계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상담역은 클레망소의 일행 모두와 악수를 나누고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려 애썼다. 동방에서 이렇게까지 서역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은 보기 드물었다.
클레망소는 상담역과 인사를 마친 다음 일행들을 이끌고 상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수속을 마치고 신분증을 발급받은 이상 개항장에서 행동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었다.
“저 친구들이 우리에게 몹시 호의적으로 구는 것 같군요. 동영인들이 원래 저렇게 행동합니까?”
클레망소의 물음에 루이도 다소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여러 차례 동방 무역을 다닌 그도 이 같은 대우는 처음 받아보는 것이라 뭐라 말하기가 애매했다.
“저도 뭐라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확실히 신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뭐 나쁘진 않은 반응이라 여깁니다.”
루이의 대답에 클레망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 할 반응이라 해도 적의 어린 태도보다는 이처럼 호의적인 태도가 훨씬 나았다.
앞으로 이곳을 주요 기항지로 삼을지 모르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동영인들의 살가운 태도는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동영인들이 이렇게 살갑게 구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승도가 총을 미끼로 내걸려 했던 바로 그 이유, 즉 동영의 불안한 정세가 한몫을 하고 있었다.
“일단은 저들이 호의적으로 나오는 동안 가능한 많은 정보를 취합하는데 신경을 쓰도록 합시다.”
“물론입니다.”
루이는 클레망소의 의견에 공감했다.
일행은 상관을 돌며 이곳 개항장에서 취급하는 유황과 구리, 은 등의 취급 규모와 수출 쿼터 등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오승도가 획득한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그리고 진정 이 일에서 이문이 크게 남을 수 있는지를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었다.
로망스 인들은 강주 관리사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틀을 향항에 머물며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이곳의 해도와 영관으로 가는 해도를 구입했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삼 가격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획득과 막부와의 접촉이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