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아딘상회 (2)
강주 양행은 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한 시험 항해를 실시했다. 승도는 배를 바다에 보내고 한동안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은비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승도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일은 그의 예측 범위 안에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손을 쓸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바다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그대는 한 줌의 뭍을 지배하는 우물 안 개구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 뭍을 둘러싼 바다를 지배하는 세계의 주인이다.’
연합왕국의 수상이 황제로 에우로페에 군림하던 그에게 보냈던 친서의 내용이다. 승도는 그 오만한 어조의 글을 상기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승도는 아내가 가져다준 따끈한 차를 들고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대사건을 자신의 뜻대로 조율한 경험이 있는 천재에게 만사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에 던져 넣는 것만큼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예견할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며 움직이는 것은 상인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리 초조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상인도 아니고 거상이었다.
“대인. 하비 경입니다.”
집무실 밖에서 정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도는 방문을 허락한다는 말을 하고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곧 건장한 연합왕국 장교가 걸어 들어와 그에게 가볍게 예를 표시했다.
“경이 이 시간엔 어쩐 일입니까?”
승도는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불안감을 목소리에서 싹 지워내고 평정을 가장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에게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황제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했음에도 남아 있는 마지막 잔재. 그것은 그의 자존심과 같았다.
승도의 물음에 하비가 미리 준비한 업무 보고를 입에 올렸다.
“포병대의 교육과 관련된 내용을 상의 드리려 찾아뵈었습니다.”
포병대는 승도가 천국과의 전쟁을 벌이기 이전부터 명목상 인원을 채운 조직이었다. 그 훈련에 필요한 교관과 장비가 없어 병사들의 체력 단련 등에 주안점을 둔 포병답지 않은 훈련만 진행해 왔었다.
하비는 바로 이 포병을 제대로 훈련시키기 위한 계획안을 마련하여 승도에게 가져온 것이었다.
“포병대의 교육이라면 강주군관학교와 연관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인. 최소한 탄도학과 수학 등은 교육을 시켜야 기본적인 훈련이 가능할 겁니다. 그러자면 강주군관학교의 교수진의 협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 건은 학교의 체계가 잡히고 진행해도 될 거라 생각합니다.”
승도의 대답에 하비는 반대 의견을 냈다. 전체적인 틀을 보고 강주 전체의 발전과 군비 강화를 밀고 나가려는 승도와 달리, 하비는 군의 강화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하니 여기에서 이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면 포병의 준비가 지나치게 늦어지게 됩니다. 장비가 도착하고 교육을 시작하면 그때는 포병의 숙련도를 올리는데 시간을 전부 투자할 수 없게 되어 효율성이 저하됩니다.”
“하지만 탄도학은 단시간에 습득이 가능한 학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포병 장교 출신인 승도가 교육이 늦어지면 발생하는 문제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포병 출신이기에 포병 교육 자체가 어차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준비가 오래 걸리는 포병 교육을 약간 늦추고 강주군관학교의 교육 체계를 먼저 확고히 하는 쪽에 방점을 두려 했다.
“맞습니다. 그래도 적당한 시기에 기본 훈련이라도 이수한 포병을 긴급 동원하려면 지금 준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대륙의 정세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릅니다.”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대하 쪽의 정세가 쉽게 달라지진 않을 테니. 이틀 전에 들어온 공소의 보고가 있었으니 확실할 겁니다.”
승도는 말을 하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하나를 하비에게 내밀었다. 대령은 그것을 받아들고 매서운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승도의 말처럼 전국은 쉽게 변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모했다. 갑작스레 번진 괴질로 양군은 엄청난 비전투 손실을 냈고 전투고 뭐고 불가능한 처지가 된 상태였다. 군의 태반이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다시 교전을 벌이려면 전염병이 진정될 수개월 후를 기약해야 했는데 그 시간이면 천국이 전열을 정비해 방어를 탄탄히 할 공산이 컸다.
제국 측이 아무리 준비를 잘 한다 해도 방어를 충실히 준비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니 전국이 급격히 변화할 가능성은 적었다.
“이 내용대로라면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준비는 서둘러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포병 장교 양성 과정 쪽만 군관 학교의 협조를 구하는 것으로 하는 걸로 하지요.”
승도는 포병 양성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장교 양성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하비 역시 포병 장교 양성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말에 동의했다.
“대인께서 내락해 주신다면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은 그리 진행해 주세요.”
승도는 하비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 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구태여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하비는 그 휘하에서 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그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좋았다. 사람을 다룸에 있어 옳고 그름보다 자존심과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중요했다.
면을 세워줌으로써 상대로부터 충성심을 끌어내는 것 역시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물론 하비가 승도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나 다른 서역인들이 승도의 일을 돕고 그 명령에 따르는 것은 막대한 액수의 급료와 계약의 힘이 컸다.
“알겠습니다, 대인.”
하비는 예를 차리고 물러났다.
하비가 집무실에서 물러가자 승도는 그와 나눈 대화를 짚었다.
하비는 일어나지 않은 위험에 대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고, 그는 위험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 방점을 두었다. 그 간격은 흡사 이 무역에 대한 승도의 상반된 마음과 같았다.
위험을 감수하기로 하고 큰 그림을 그린 상인으로서의 마음과,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잘 짜 맞춘 퍼즐이 헝클어질 것을 걱정하는 정치가의 마음이 그것이다.
승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익숙지 않은 반상 위에서 실패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강주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이 제대로 그려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까.’
승도는 찻잔을 내려놓고 집무실 너머로 보이는 상관, 아니 그 너머의 금포강을 응시했다.
***
동방 무역 회사는 모두 백 척에 달하는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적을 상대하고 경쟁 국가의 위협으로부터 보유한 식민 제국 령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보유한 것으로 그 역할에 비해 보유 함정 수가 그리 많다 할 수는 없었다.
이들 함정은 대부분 소형의 코르벳과 같은 등외 함(연합왕국 해군은 모두 5단계의 등급으로 군함을 구분하는데, 이 등급에 속하지 않은 급을 등외로 분류하였다)으로 정규 군함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취약했다.
하지만 동방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다. 에우로페 국가의 대형 군함(프리깃 이상의 함정)을 상대할 때라면 역량이 크게 모자랐지만 동방의 군함 혹은 해적선 정도를 상대하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동방 무역 회사는 이렇게 보유한 함정들을 가지고 보유 식민지와 강주 사이의 항로상에서 자국 선단의 안전을 보장하였다(오승도가 마주친 해적과 같은 자들에 대한 위압 목적도 포함). 그 활동 수역에 강주만도 포함되었던 까닭에 회사는 강주 앞바다에서 언제나 두세 척 정도의 함정을 동원할 수 있었다.
회사의 명령을 받고 초계에 나선 코르벳 아인도 그런 함정 중 하나였다.
“전방에 선박 둘이 목격되었습니다.”
장루에 오른 장루원의 외침에 함장이 망원경을 들었다. 그의 눈은 짙은 운무가 낀 수평선 저편을 훑었다. 시계를 제약하는 운무 탓에 망원경으로 얼른 배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수평선을 이리저리 훑다 운무 아래에 얼핏 비친 얼룩 한 점을 찾아냈다. 장루원이 보았다고 말한 선박들이었다.
“함장님. 보이십니까?”
“보이긴 하는데, 전통적인 동방 범선이군. 회사에서 말한 배는 아닌 것 같은데.”
함장은 얼핏 보인 배의 괴상한 모양을 보고 그것이 서역식 범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돛도, 노도, 선체 구조도 서역의 형태와는 완연히 달랐다. 일반적으로 신의 연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조운선이 틀림없었다.
전쟁이 터진 판에 웬 조운선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이 나도 사람은 소금은 먹고살아야 했다. 소금을 실어 나르는 배는 전란의 와중에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며칠째 허탕을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임 위관의 불평 섞인 목소리에 함장도 입맛을 다셨다.
개점휴업을 맞아 강주의 사창가를 돌며 잔뜩 신을 내고 있을 시기였던 만큼 짜증도 몇 배로 컸다. 쉬어야 할 때 일하는 것만큼 인간을 화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보수가 더 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이번 일에 대해 특별한 보수가 더 나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평시에 급료를 주는 만큼 이런 특별 출항에 돈을 더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관례처럼 여기다 하게 되면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을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참아보지. 우리 말고도 고생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나?”
함장의 말에 선임 위관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함장은 망원경을 내리고 함교의 지휘를 선임 위관에게 맡겼다. 성큼성큼 선실로 돌아가는 함장을 본 위관이 코를 문지르고는 다시 선원들을 지휘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함장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램프를 켰다. 선내에서 사용하는 램프는 생선 기름을 쓰기도 하여 다소 비린내가 났다. 물론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램프의 불빛이 책상을 밝히자 함장은 의자에 걸터앉고는 입에 문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희뿌연 연기를 훅 뿜어내며 다리를 책상에 올린 함장은 이번 출항 명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강주만을 순찰하란 것도 그렇지만 강주 양행의 배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지켜봐주고 돌아오라니. 회사가 언제부터 그들의 뒤까지 닦아 주었다고 이런 웃긴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명목상으로는 연합왕국에 적을 둔 회사의 배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강주 행상들의 선박이다. 그것의 귀환을 주시하라고 하니 생각할수록 웃긴 일이었다.
함장은 니코틴을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생길 때면 역시 고민을 싹 지워주는 이 독한 마약이 좋은 벗이 되어주었다. 한 모금 빨아들일 때마다 짜증은 줄어들고 생각은 단순 명료해졌다.
‘하긴 책상머리에 앉은 놈들의 생각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지. 고민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고.’
함장은 몇 모금을 더 피운 다음 파이프를 내려놓고 담뱃갑을 열어 잘 익은 치즈를 몇 조각 꺼내 씹었다. 뱃사람들은 그처럼 종종 담뱃갑에 치즈를 보관하곤 하였다.
쿵쾅쿵쾅.
그때 함장실 앞으로 구두 뒤축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급히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이내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함장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던 다리를 얼른 내리고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선임 위관이 함장님을 급히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배가 또 나타났단 건가?”
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모자를 고쳐 쓰고 함장실을 나섰다. 강주만은 물동량이 많은 곳에 속했지만 전란 이후로 드나드는 배의 수가 크게 격감했다. 고기잡이배를 제한다면 하루에 다섯 척 정도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함장이 함교로 올라오자 선임 위관이 고개를 숙이고는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함장은 위관이 서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기며 망원경을 꺼내 들고 물었다.
“뭔가 발견했다면 그걸 확인하고 나를 불러도 되지 않았나?”
함장의 물음에 위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곧이어 우렁찬 포성이 은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함장이 흠칫 놀라며 위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저렇게 포성이 들리니 바로 모셔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임 위관의 대답에 함장은 윗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평화로운 바다에 느닷없는 포성이 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재빨리 대포를 쏠 만한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천국이 배를 만들어서 바다에 띄워 제국과 해전을 벌이는 경우가 첫째다. 하지만 코앞의 제국 육군과 사활이 걸린 대치를 이어가는 천국이 그만한 여력을 낼 가능성은 적었다. 대륙 정세에 비교적 밝은 동방 무역 회사의 사원이다 보니 함장도 그것은 가능성이 없다 여겼다.
두 번째는 해적이 출몰한 경우였다. 금포강까지 거슬러 올라간 전례가 있는 자들인 만큼 무리한 가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재에 밝은 해적들이 강주 만에서 해적질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전란의 여파로 ‘사냥감’은 없고 위협적인 동방 무역 회사와 연합왕국의 군함은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 머무니 기대 가능한 이익 대비 위험이 너무 컸다.
전란 이전에도 강주 만에서 그다지 활동을 보이지 않은 해적들이니 이 가능성은 접어둘 만했다.
세 번째는 서역 열강의 군함이 사략 행위를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연합왕국 이외의 국가가 동방에 상주시킨 군함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들은 동방을 오가는 자국 선박을 지키기에도 손이 모자랐다.
연합왕국이야 사략 행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가진 것이 많은 만큼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가능성은 이곳 동방 무역에 종사하는 상선이 사략 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였다.
함장은 망원경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흐릿한 수평선이 곧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그는 경험의 힘을 빌려 포성이 들려온 방향을 정확히 훑어냈다.
이내 그의 눈은 대포를 연달아 쏘는 범선 하나와 그 포격을 맞고 있는 범선을 발견했다.
포격을 하는 놈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맞는 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장대에 걸린 강주 양행의 표식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찾았군.”
함장이 입술을 비틀자 선임 위관이 그 말을 받았다.
“강주 배를 말입니까?”
“그래.”
“하면 돛을 올리라고 명을 올릴까요?”
선임 위관의 물음에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구태여 지금 움직일 필요는 없다네. 포성을 들어보니 아직 싸움이 한창인 것도 같고. 조금 더 기다렸다 움직여도 문제는 없을 것 같군.”
“회사에서 저 배를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지켜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랬지.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부터 저들의 목숨을 전부 지켜주란 명령은 받지 못했다네. 아닌가?”
그 말은 옳았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들을 도와주지 말잔 이야기는 아니야. 다만 적당히 싸움을 벌여 공격자들이 충분히 지친 다음에 도와줘도 늦진 않다는 게 내 생각일세. 그렇게 하면 우리 선원들도 그리 상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겠나?”
함장이 동의를 구하듯 묻자 선임 위관은 그 속내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발째 명중입니다.”
루이의 외침에 함교에 서 있던 클레망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려운 시험 항해에서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돌아올 때만 해도 이런 날벼락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항해를 나설 때에야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지만 동영의 향항을 방문하고 그곳을 떠나기까지 전혀 그런 징조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항해가 순조롭게 진행된 탓인지 끝에 와서 화가 닥쳤다.
클레망소는 이를 갈며 망원경을 눈가로 가져갔다. 그들에게 대포를 쏘는 자들은 해적질을 주업으로 하는 해적이 아니었다. 무역을 주로 하는 상선이 틀림없었다. 배의 속도가 느린 것만 보아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기습적으로 대포를 얻어맞아 후부 마스트 하나가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지금처럼 두드려 맞을 일도 없었다.
사슬 탄으로 상대의 기동력을 빼앗고 공격을 감행하는 사략 업자들의 수법을 잘 알고 있던 클레망소로서는 알고도 당한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함장님. 저쪽에서 뒤를 밟아오는 형국입니다. 한번 키를 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방향을 틀면 종사(raking fire)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저쪽이 몇 문의 대포를 가졌는지도 모르는 판에 종사의 위험을 감수하는 건 무리가 많아 그리할 수는 없지요.”
민간 상선에서 경험을 쌓은 루이와 달리 클레망소는 로망스 해군에서 영관 계급장을 단 몸이었다. 짧게 잡아도 십 년 이상을 해군의 칼 밥을 먹은 몸이니 단함 교전이 어떤 형식으로 굴러갈지에 대한 예측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었다.
“하면 이대로 포탄을 맞으며 가야 합니까?”
루이의 반문에 클레망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 루브르망 호가 군함이라면 몰라도 상선인 이상 배의 외벽은 그리 두터울 수가 없었다. 포탄이 계속 떨어지면 배에 탄 사람들이 계속 상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방향을 트는 대신 속도를 늦춥시다.”
“돛을 내리잔 말씀이십니까? 그리하면 저들과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지게 됩니다.”
“물론 그럴 거요. 하지만 이건 일종의 트릭이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저들이 속아 넘어가 준다면 저자들은 이 공격에 대해 비싼 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클레망소는 한 가지 기만술을 써보기로 했다. 그 자신이 사략 행위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수법이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속도를 늦추면 적은 이쪽이 계속된 포격으로 상당한 선원을 잃어 속도가 둔해졌다 판단할 만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들은 이 배 옆에 접안을 하고 공격을 해올 것이다. 사략 행위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질질 끌기에 이곳은 아문과 너무 가까웠다. 연합왕국 해군 혹은 동방 무역 회사를 의식한다면 저들도 이 일을 단시간에 끝내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당장 속도를 늦추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루이는 그 말을 곱씹고는 선원들에게 속도를 늦출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돛을 내리고 무게중심도 바꾸었다. 그 명령에 따라 선원들이 매듭과 삭구 따위로 엉망이 된 갑판 위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클레망소는 그런 선원들을 뒤로하고 자신들을 쫓아오는 정체불명의 적을 향해 다시금 망원경을 돌렸다. 다시 그의 눈에 오렌지 빛 섬광이 번뜩이는 것이 들어왔다.
‘멍청한 놈들. 주제넘은 것을 탐하니 고기밥이 되는 게지.’
아딘 상회에서도 악명이 높은 사내, 허드슨의 두툼한 입술이 탐욕스런 선을 그렸다. 이번에 윈스턴 상회로부터 받기로 한 의뢰비에다 눈앞에 보이는 불쌍한 먹이들로부터 뜯어낼 약탈품을 합치면 아편 천 상자를 팔아도 얻기 힘든 고수익을 낼 수 있었다.
허드슨은 서서히 좁혀지는 적함과의 거리를 보고는 망원경을 내렸다. 상대의 속도가 떨어지는 걸로 봐선 도선을 시도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시간 여유만 충분하다면 안전하게 대포로 확실하게 두드리겠지만 그렇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이 강주 만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왕국 해군과 동방 무역 회사의 영향력이 살아 있는 곳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손에 잡힐 수도 있었다. 일은 가능한 빨리 처리하고 철수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려면 도선을 해서 상대 배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
“도선 준비는?”
허드슨이 걸걸한 음성으로 묻자 부장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거리만 좁혀지면 당장 도선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허드슨은 부장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갑판에 늘어선 선원들을 보았다. 모두가 칼과 권총을 찬 채 다가올 도선에 대비하고 있었다. 명령만 내려지면 몇 초 안에 도선이 시작될 정도로 준비는 잘 되어 있었다.
“거리 백 피트!”
장루에 오른 장루원의 외침에 허드슨도 권총을 뽑아들고 적함이 지나갈 좌측으로 눈을 돌렸다. 상대 속도가 있다 해도 ‘고작’ 백 피트를 좁히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허드슨과 그 부하들은 잠시 긴장된 표정으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일이야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도선의 순간만큼은 언제나 안심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활대 방향(보통 가로)으로 적함 교차!”
장루원이 다시금 외친 순간 미려한 선체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적함과 그들의 배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피트 되지도 않았다.
두 배가 거의 나란히 선 순간 항해사가 키를 옆으로 꺾었다. 곧 두 배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다음 찰나에 허드슨의 입에서 쇳소리가 터졌다.
“도선!”
그 명령과 함께 아딘 상회의 선원들이 개미 새끼처럼 뱃전을 타고 넘었다. 일부는 갈고리를 던져 두 배의 결합을 단단히 하는데 신경을 썼다.
뱃전을 넘어간 선원들은 연거푸 총을 쏘았다. 불운한 희생양이 된 적선의 선원들은 마스트나 부러진 돛, 물통 따위에 의지한 채 권총을 몇 발 쏘아댈 뿐 제대로 된 저항을 보이지 못했다.
허드슨은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 여겼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돌격!”
몇 번의 간헐적인 총격 이후 적당한 타이밍을 고르던 갑판장이 칼을 뽑아들고 앞장섰다. 그가 앞장을 서자 수십 명의 선원들이 권총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칼을 뽑아든 채 적을 향해 쇄도했다.
곳곳에서 칼과 칼이 부딪쳤다. 기세를 타고 달려든 허드슨 쪽의 선원들이 사방에서 루브르망의 선원들을 뒤로 밀어냈다. 싸움은 겨우 몇 분되지 않아 판가름 날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딘 상회에서는 이 한 번의 사략 행위를 하려고 ‘상선’에 자그마치 사백 명에 달하는 전투원을 태웠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선이라면 이 공격을 견딜 수가 없었다. 뱃전을 타고 넘어오는 공격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이상 저항은 곧 끝날 것이다. 허드슨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격!”
그때 루브르망의 함교 쪽에서 수십 발의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미리 그곳에 올라가 엄폐하고 있던 적의 기습이었다. 총격 자체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공격으로 전열이 흐트러진 것이 문제였다.
바람을 타고 화약 연기까지 날아오면서 잠시나마 공격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함교 위에서 칼을 든 한 무리의 병사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모두 죽여라!”
알 수 없는 언어로 외친 검은 얼굴의 괴물들이 칼날을 휘둘렀다. 느닷없는 공격에 허를 찔린 선원들이 당황하며 칼을 마주 휘둘러갔다. 하지만 제대로 싸워도 쉽지 않은 적을 얼떨떨한 상태로 맞서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연합왕국의 전열 보병조차 간단히 도륙한 전설의 괴물들은 기이한 기형 도를 휘둘러 칼로 막아도 상대의 목젖에 어렵지 않게 칼날을 쑤셔 넣곤 했다.
허드슨은 갑작스런 총격에 잠시 현실감을 잃고 있다 정체불명의 괴물들에게 선원들의 목이 날아가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사람 목을 과일 꼭지 따듯 쳐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그의 선원들이 전투 경험 없는 일반인이라도 믿기 어려울 일인데, 그 부하들은 사략 행위에 일가견이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손도 못 써보고 죽어나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괴물들이다!”
정체불명의 적과 칼을 마주하고 있던 선원들 중 몇몇의 얼굴에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이 공격한 배는 간단히 먹어치울 수 있는 만만한 먹이가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괴물들이 숨어 있는 마녀의 가마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냥 발을 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의뢰비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딘 상회의 사략 행위에 대한 조사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목격자가 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목격자를 남기지 않고 증거를 인멸해 왔기에 무사했지만 증거가 남는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허드슨은 괴물들의 무자비한 전투력에 잠시 당황하고 있다 제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던 선원들을 향해 외쳤다.
“어딜 물러서는 거냐.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교수대에 올라가고 싶으냐?”
그의 일갈에 선원들도 두려움을 얼른 억눌렀다. 사략 행위는 연합왕국 법에 따라 교수형으로 다스려진다. 여기서 물러선다는 말은 언젠가 자신의 목을 교수대에 바치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들로서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전열을 가다듬는 선원들을 향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늘어트린 괴물들이 희죽 웃었다.
그들은 이내 칼날을 교차하더니 벼락처럼 선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