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01화 (201/425)

제201화. 오리무중 (1)

오승도가 아딘 상회에 선전포고를 날릴 무렵, 동방 무역의 여파가 동영 열도까지 다가왔다.

다다미방 사이로 머리를 반쯤 민 사무라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앞에 다기가 놓여 있었고, 사무라이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기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도라 하여 차를 마시는 방법만 가지고도 수백 가지의 정해진 절차를 요구하는 나라가 동영이다 보니 그것만 가르치는 교사가 따로 있었다.

사무라이는 다도 교육을 잘 받은 사내였다. 교양이 모자랐다면 영주(번 주) 앞에서 차를 마시며 실수를 했을 것인데, 지금까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사무라이가 찻잔을 내려놓자 영주가 입을 열었다.

“이토.”

조용하고 차분한 부름이었다. 그 부름에 이토는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주는 가신의 부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시마(향항에 있는 외국인 개항장)에 행상의 배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려왔다.”

“행상의 배가 향항에 말입니까?”

이토는 적잖이 놀란 얼굴을 보였다. 그는 일전에 영주의 명을 받들어 강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 본 강주의 행상들은 배도 없었고, 국외로 나갈 의지도 없어 보였다.

영주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들이 이곳까지 올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뜻밖의 이야기야.”

영주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군을 모신 이토는 그의 표정을 살피고는 썩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소식은 아니지. 행상이 막부의 직할령에 나타나 거래를 만든다면 막부의 이익이 늘어날 테니까. 곤란해.”

영주는 자신의 옆에 늘어져 있는 큰 서역 개의 목을 쓰다듬으며 음색의 높낮이를 바꾸지 않았다.

“주군. 행상은 아직 원양 항해에 나설 능력이 충분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 역시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영주는 부드러운 털이 주는 감촉을 느끼며 움직이던 손을 늦추었다.

“문제는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머지않아 이곳도 그 영향을 받게 될 거란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영명하십니다.”

“하니 행상이 막부에 이익을 늘려주기에 앞서 우리도 손을 쓸 필요가 있다. 조마를 찾아가라. 이토.”

“주군.”

이토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소 무례한 반응이었지만 영주는 그것을 책하진 않았다.

조마는 번의 수백 년 된 숙적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을 싸워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칼을 뽑는 불구대천지 원수다. 그런 자들을 찾아가라고 영주는 명하고 있었다.

“내 말이 의외로 들리나?”

“조마는 양립할 수 없는 적입니다. 주군. 재고를.”

“적. 그 말도 맞아. 하지만 오월동주라는 말도 있다. 필요하다면 불구대천지 원수와도 같은 배를 탈 필요가 있는 게 정치 아니던가.”

영주는 차분하게 현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번은 석고 오십만 석의 영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막부는 오백만 석이 넘는 거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세입을 올려주는 대판의 미곡 시장과 향항의 개항장을 쥐고 있으니, 그 수입은 여타 제번의 영주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막부가 보다 강한 경제력을 쥐게 되면 지금과 같은 느슨한 통치는 사라질 것이다. 막부가 돈을 쥐는 족족 군사력에 투자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다.

막부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그들과 거리가 먼 외양 영주들과 손을 잡는 것밖에 없었다.

동영의 영주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는데, 외양 영주와 보대 영주, 친 번 영주가 그것이다.

먼저 친 번 영주는 막부 가문의 남계 자손이 시조가 된 자들로 철저한 친 막부파에 속하는 영주들이었다.

두 번째로 보대 영주는 막부에 봉사를 해온 가신 가문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친 번 영주만큼은 아니지만 막부와 느슨한 유대 관계를 유지한 막부파였다.

세 번째에 속하는 외양 영주들은 막부와 거의 접점이 없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막부와 항쟁을 했다 전봉(봉지를 옮김) 혹은 감봉(봉지를 축소)을 당한 적이 있어 잠재적 적대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막부는 이 외양 영주들에 대해 감시의 눈길을 번뜩였고 수시로 이들의 힘을 빼놓으려 했다. 작금에 와서야 그 통제가 느슨해지긴 했지만 막부가 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다시 강화한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졌다.

영주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같은 외양 영주에 속하는 조마와 손을 잡을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하오나 조마 쪽에서도 주군과 같이 생각할지는 의문입니다. 그쪽은 멧돼지처럼 저돌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주군의 면만 깎이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조마가 생각이 없는 자들이긴 하지. 하지만 그들도 천하(동영 천하를 말함)를 노린다면 막부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듣고 느끼는 것이 없진 않을 거야.”

영주의 손길에 큰 서역 개가 나른한 눈을 떴다. 목장 견으로 길러진 콜리의 크고 투명한 눈이 이토를 가만히 응시했다.

“주군의 복안은 알겠습니다. 하면 제가 조마를 찾아가 주군의 뜻을 전해 보겠습니다.”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는 이마를 다다미 바닥에 붙여 절을 하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가 다다미 문 너머로 사라지자 영주는 개를 쓰다듬지 않는 반대쪽 손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방 한쪽에 말없이 인형처럼 앉아 있던 여자들이 일어나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시녀들 중 둘은 영주의 뒤에 앉아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남은 하나는 먹기 좋은 포도를 그의 입으로 가져왔다.

영주는 입에 들어온 포도 알을 가볍게 굴리다 잘근 씹었다.

‘천하는 변하고 있다. 중원이 오랑캐들에게 패한 순간부터 급속하게. 그 흐름은 강주의 행상들에 의해 더욱 빨라지고 있다. 그들이 폭풍이고 강주가 격변의 핵이다. 그들이 일으킨 바람이 이 동영에 다가와 격변을 만들 때 나는 살아남아 승리자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인가?’

영주의 입에서 핏물 같은 즙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니면 패배하여 사라지고 말 것인가.’

그에게는 잘 훈련된 일만의 정규군과 강력한 네 개의 요새가 있었다. 삼천 리 떨어진 막부의 역량으로 그를 토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막부를 쓰러트릴 힘을 가졌다는 건 아니다.

‘결국 살아남아 승자의 길을 걷고 있는 오승도. 그자의 방식을 흉내 낼 필요가 있다.’

영주는 오승도의 역량을 높게 평가했다. 아편 전쟁 직후 강주에 이토를 보내 사정을 탐문할 때만 해도 그 정도로 승도를 높게 보지는 않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들려온 이야기가 그의 생각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다.

강주 관리사는 남으로는 연합왕국을 물리치고, 북으로는 루시를 격파했다.

이어 천국과의 항쟁에 뛰어들어 강남에 그 세를 부식하고 대륙 전역에 그 힘과 위상을 과시했다.

오승도가 보여준 성과를 통해 근대화된 군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배운 영주는 에우로페 식 군대를 만들 생각을 품었다.

서구식 무기는 동영의 제번들도 부족하지 않게 가지고 있었다.

‘서구식 군대를 만들고 외양 영주들과 연수하여 막부에 대항할 실력을 쌓는다. 그렇게 하면 내게도 기회가 오겠지.’

영주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시녀가 보드라운 천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냈다. 그는 그 손길에 피식 웃으며 시녀의 손을 잡았다.

영주가 그것을 원한다고 느낀 시녀가 눈을 내리깔고 옷고름을 풀었다. 부드러운 매듭 하나가 풀리자 눈부신 나신이 한 번에 드러났다.

여권이 땅에 떨어진 문화 풍토의 유산이다. 남성들이 요구하면 어디서든 그 요구에 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통 의복. 시녀는 옷을 벗고 사내의 처분을 기다렸다.

영주는 푹신한 천을 침상처럼 두른 시녀를 다다미 위로 눕혔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등불을 받아 은어처럼 반짝였다. 영주는 탐스러운 배 위에 올라 억센 팔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회가 온다면, 나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영주의 거친 움직임에 시녀가 살짝 입을 벌렸지만, 그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내리누르며 하얀 가슴을 꽉 쥐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동영을 정복하고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다. 얻을 수 있다면 대륙까지도.’

영주는 시녀의 골반 위에 올라탄 채 야만적인 미소를 지었다.

***

아문 총독부 별관 앞에 이색적인 차림의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빵모자를 눌러쓴 희한한 차림새를 한 자들이다. 깔끔하고 보기 좋은 붉은 코트들과는 다른 차림이었다.

아문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은 이 기이한 군인들을 보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쉬어.”

용병들의 지휘를 맡은 펜 소령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의 한마디에 용병들이 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리며 뒷짐을 지고 섰다.

병사들이 쉬어 자세를 갖추자 펜 소령이 돌아서서 별관 쪽을 바라보았다. 곧 검은 관복을 입은 사내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건물을 나왔다. 그 뒤를 따르는 몇몇의 수행원들이 모습을 보이자 펜 소령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대인,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마차에 오르시면 바로 모시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승도는 소령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별관 앞에는 그를 모시기 위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 그 옆으로 건문이 재빠르게 탔다. 그러곤 그가 마차에 오르자마자 말을 꺼냈다.

“보복 조치는 잘 진행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아딘 상회 쪽에선 별 반응이 없었습니까?”

승도는 아딘 상회에 그의 보복 조치가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아문에 머무는 동안 동방 무역 회사를 비롯한 연합왕국의 경제인들을 만나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이다.

“보복은 지시하신 대로 진행 중입니다. 지금까지 은자 십만 냥 이상의 손해를 입혔고, 앞으로도 그 피해 규모는 더 키울 전망입니다. 아딘 상회는 이쪽의 공격을 오래 견디긴 어려울 겁니다.”

건문의 대답에 승도가 손가락으로 창가를 톡톡 두드렸다. 정치도 그렇고, 장사도 그렇고 예기치 않은 변수는 어디서든 나오게 마련이다. 그들이 바라보지 않은 가능성은 어디에서나 나올 수 있었다.

이 동방에는 무수한 정치집단과 이익세력이 있다. 그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모두 염두에 둔다는 것은 신이나 가능한 일이다. 오승도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괴물이라 해도 한계는 있었다.

그렇기에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승도는 바로 그것을 장사와 전쟁을 통해 배웠다. 예기치 않은 복병은 어디에서라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승도는 부드러운 창틀을 손가락으로 훔치다 손에 묻은 먼지를 보았다. 먼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은 시간의 흔적.

천국은 그의 손에 묻은 먼지처럼 별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강주의 안보에 위험을 끼치기는커녕 그의 의도대로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적당한 말판으로 전락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먼지와 달랐다.

그자들은 생각을 가진 인간들로 이루어진 정치집단이다. 그런 그들이 무력한 앞날을 그냥 보고만 있을까?

그건 바보 같은 기대다. 생각을 한다면 그런 미래를 바꾸려 들 것이 자명했다. 그 가능성은 무엇에서 주어지는가? 그 예시는 승도 자신이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서역 무기로 이루어진 서구식 군대지.’

천국이 서구식 군대를 갖추고자 한다면 먼저 승도에게 잃은 막대한 장비부터 보충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연합왕국과 선이 닿아야 했다. 조금씩 들어오는 무기 밀수 정도로는 그들의 수요를 채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무기를 누가 대어줄 수 있을까?

제국의 눈 밖에 날 위험을 감수하고, 밀수의 어려운 단계를 밟을 수 있는 자.

승도는 그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있었다. 아니, 너무 쉬운 질문이다. 밀수에 경험이 많은 자들은 아편 밀수업자들을 따를 수 없다. 그 분야에서는 그들이 일인자다. 하니 능력 면에서는 아딘 상회가 그 일의 적임자다.

일을 진행할 동기도 충분했다. 오승도의 제재를 받은 이상 그들로서는 제국의 눈치를 보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다.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고 작심한다면 그들이 못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저들이 천국으로 유통망을 옮긴다면?”

승도가 조금 전 생각한 것을 입에 올리자 건문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아딘 상회가 연합왕국의 정치적 중립 방침을 깨고 천국에 직접 무기를 공급할 생각을 가진다면 지금의 아딘 상회에 대한 제재는 상당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제재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장기전이 된다, 이건데.”

승도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다. 일이 그렇게 된다면 아딘 상회는 가능한 한 오래 버티면서 강주 양행의 무역에 계속해서 재를 뿌리려 들 것이다. 승도가 타협을 해줄 때까지.

양행의 입장에선 상당히 불쾌한 전개였다.

“생각하기에 따라 일이 그리 진행될 여지가 없잖아 있습니다.”

그 대답에 승도는 코 주름을 좁혔다.

“양코배기 놈들이 우리 무역에 이를 드러낸 것도, 아딘 상회의 목줄을 확실히 죄어 놓지 못한 것도 우리가 바다에서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니.”

해결책은 둘밖에 없었다. 강주 양행의 해운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지든지 아니면 강력한 군함을 보유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전자는 너무나 많은 돈이 들어 승도에게 쉬운 길이 아니었다. 또 후자 역시 적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양행의 자금 여력을 생각하면 어느 쪽도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가뜩이나 자금이 모자란 판이다.

건문은 승도의 안색을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한참 만에 고민에 잠겨 있던 승도의 입이 열렸다.

“안 되겠습니다. 강주로 돌아가면 동방 무역 회사의 대반과 약속을 잡아야겠습니다.”

“무역 회사의 대반과 약속을 말입니까?”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만난다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건문의 물음에 승도는 주먹을 쥐어보였다.

“있습니다.”

“무슨 고견이라도.”

“군함을 사야지요.”

건문은 그 말에 크게 놀랐다. 연합왕국으로부터 군함을 산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였다.

“군함은 무척 비싸지 않습니까?”

같은 크기라면 군함의 가격은 월등히 비싸다. 상선과 달리 특수 목적용 선박으로 별도의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그 수요도 상선에 비해 훨씬 적어 생산량도 적다 보니 그 단가도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더구나 그 국가의 모든 과학 기술력의 집약체라고까지 표현되는 것이 군함이다 보니 실제 가격은 조선소의 인도 가격의 두 배 이상을 웃도는 것이 상식이었다.

“물론 아주 비싸다는 건 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작은 배를 사면 될 일 아닙니까?”

자금 사정이 빠듯한 승도로서는 대형 군함을 살 능력이 없었다. 산다고 해도 대형 함정을 운영하는 것 자체도 무리였다. 통상적인 3급 전열함만 해도 최소 팔백 명, 프리깃함만 해도 삼사백 명의 운용 요원이 필요했다.

강주의 빈약한 해상 요원을 가지고 운용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승도가 원하는 것은 아딘 상회의 상선이 감히 덤벼들 수 없는 위력을 가진 코르벳 정도의 소형 군함이었다.

이것조차도 어지간하면 구입할 생각이 없던 승도였지만 아딘 상회의 반항이 장기화될 것을 염두에 두고 구입을 결심했다.

작은 배를 산다는 승도의 말에 건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딘 상회와의 항쟁이 장기화될 경우라면 좋든 싫든 해상에서의 자위력 강화는 필수다.

용병을 수백씩 태워서는 상품을 실을 자리가 없으니 군함을 동반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다.

“대인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면 강주에 도착하는 즉시 상관에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

강주는 금포강을 끼고 발전한 도시다. 도시의 발전이 강에 의지해 있다 보니 수운이 발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배가 드나드는 포구 외에도 물길은 수도 없이 뻗어 강주 시내에서 물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역의 수도사들은 이 도시를 가리켜 동방의 베니스라 불렀다. 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린 베니스의 이름을 빗댈 정도로 물이 많은 도시라는 의미에서다. 그만큼 이 도시는 배를 타고 다니기가 쉬웠다.

부유한 이들은 쭉 뚫린 다리를 따라 마차를 타고 다녔지만 보통 사람들은 곤돌라를 연상시키는 작은 배를 타고 다녔다. 이곳의 풍경을 즐기려는 서역인들도 가끔 그들의 배를 빌려 타곤 했다.

그림 같은 운하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쪽배 위에 양산을 쓴 서역 여성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모로 꼬고 앉아 주변을 느긋하게 구경하였다. 치마가 살짝 걷혀 올라가 있어 주변의 동방 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일부 몰염치한 자들은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눈길을 계속해서 던졌지만.

아편 전쟁 이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그때는 서역인 부녀자들의 강주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전쟁으로 얻은 자유를 만끽하듯 새하얀 손을 들어 물을 가볍게 튕겼다. 좁은 새장에 제한되어 있던 행동반경이 넓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였다.

“몹쓸 서역 요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옆으로 쪽배를 몰아가던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불만을 표시하려는 듯 노를 거칠게 움직였다. 지난 밀가루 전쟁을 비롯해 서역과의 충돌이 몇 번 있다 보니 일부 강주 사람들의 서역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래도 장사를 하려면 서역인들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런 까닭에 코쟁이 서역 남자들의 왕래는 참고 견뎠지만 이익도 주지 않는 서역 여인들의 모습은 참기가 어려웠다.

사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지라 노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거친 노질을 하며 옆으로 지나다 보니 자연히 여자가 탄 배의 뱃사공이 쥔 노와 부딪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어?”

노와 노가 부딪친 순간 작은 쪽배가 크게 출렁였다. 다음 순간 배가 훌렁 뒤집히더니 서역 여자와 뱃사공이 운하에 풍덩 빠져버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뱃사공은 허우적거리며 뒤집힌 자신의 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염병할! 이 자라 새끼야. 어딜 보고 노질을 하는 거야?”

뱃사공은 뱃전을 잡고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욕설을 내뱉으며 삿대질을 했다.

사내는 뱃사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홧김에 짜증을 좀 표현하려던 것이 일이 커진 것 같았는데 큰일은 나지 않은 듯싶었다.

운하 주변에 서 있던 행인이 말했다.

“서역 요괴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여자는 어디에 있지?”

양산은 보였지만 서역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운하 변으로 행인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물에 뛰어들어 서역 여자를 찾으려는 이는 없었다.

공동체라는 것의 범위가 대단히 협의적인 데다 가족 이외의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만든 이 시대가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가족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분위기. 사람들은 사고를 냉정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사고를 일으킨 뱃사공과 사내가 뒤늦게 수면 위를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면 위를 연신 훑다 창백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실종, 아니 익사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같은 대륙 사람이라면 관에 돈을 쓴다든지 피해자 가족과 적당히 합의를 보는 수준에서 일을 무마할 수 있었다. 인명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낮은 사회라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서역인들은 구실만 생기면 동방을 뜯어먹으려는 이리. 이 사안을 간단히 넘길 리 만무했다.

배 위에 남아 있던 사내는 뒤늦게 일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맥질을 하고 물 위로 올라왔다.

운하의 수질이 썩 좋은 것이 아니어서 물속을 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하에 자라는 수초와 근처 민가에서 배출한 분변 따위가 시계를 제약하여 수중 탐색으로 사람을 찾는 데는 한 세월이 필요했다.

“빌어먹을.”

공연한 짓을 해서 일을 만들었다는 후회가 사내의 가슴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은 법이었다. 사내는 호흡을 깊게 하고는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탁한 물속을 더듬던 그의 시야 너머에 허연 물체 하나가 보였다. 눈에 더러운 물이 닿아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사람의 인영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는 얼른 그 인영의 팔을 잡고 물 위로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의 발에 수초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일단 수면 위로 올라왔다.

“틀렸어.”

운하 변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행인들이 혀를 찼다. 그들의 말처럼 여자를 구하는 것은 이미 틀렸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 것이다.

사내는 차가운 한기가 몸을 휩쓰는 것을 느끼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여자의 발쪽으로 다가가 칭칭 감긴 수초를 조심스레 풀어냈다. 허우적거리다 수초가 감긴 듯 그것은 몇 겹이나 여자의 발을 감고 있었다.

겨우 그것을 풀어낸 사내는 서역 여자를 안고 물 위로 올라왔다. 그토록 질색을 하던 서역 요괴를 가까이 데리고 있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여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중요한 일이었다.

사내는 여자를 운하 변으로 끌어올리고 그녀의 배를 힘껏 눌렀다.

그때 상관 거리를 걷던 서역인 몇이 그것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이 더러운 야만인들이.”

그들은 사내가 자국의 여자를 강간하려 한다 생각하고 대뜸 주먹부터 휘둘렀다. 얼핏 보기에는 그런 오해를 할 만했다. 성적인 의미를 가진 가슴을 풀어 헤치고 그 위에 올라탄 채로 배를 힘껏 누르고 있었으니 여자를 완력으로 제압하고 그 욕심을 채우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야만인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더러운 ‘shingk(신국인을 칭하는 말)’를 연발하며 발길질을 가했다.

하지만 그 말은 구경을 하고 있던 행인들에게 모욕으로 들렸다. 야만인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들과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신국 사람에 대한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것은 도발처럼 들렸다.

연합왕국 어로 지껄인 말이었지만 강주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서역 부녀자의 수상 사고는 순식간에 일대 폭력으로 번졌다. 서역 사내들과 강주 주민들은 집단으로 주먹다짐을 벌였다. 처음 몇이 달려들 때는 체격이 크고 힘이 좋은 서역 사내들이 유리했다. 그들은 달려든 행인 몇을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사자처럼 포효했다.

하지만 달려드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사정은 바뀌었다. 제아무리 강한 인간도 한 손으로 열은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몇 대씩 때리던 것이 중간부터는 방어 동작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쓰러진 채 집단으로 두드려 맞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거의 수십 명이 몰려들어 린치를 가하다 보니 서역 사내들은 신음을 토하지도 못하고 바닥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하지만 군중은 분위기를 타면 이성을 쉽게 찾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들은 서역 사내들이 피를 토하며 고통을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린치를 멈추지 않았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고통에 찬 신음이 터졌다. 폭력은 계속되었고 서역 사내들의 움직임도 점점 둔해졌다. 나중에는 방어적인 동작도 거의 사라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손을 늦추었다. 하지만 그때는 서역 사내들의 숨이 멎은 후였다.

“물러나라! 물러나!”

뒤늦게 달려온 상관의 순찰 포교가 사람들을 뒤로 밀어냈다. 포교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서역 사내들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서역 여자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뜩이나 강주 안팎으로 불온한 공기가 떠도는 판에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서역인이 하나도 아니고 셋. 아니, 넷이 죽은 일인가. 미치겠군. 서역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필시 이 일을 서역인들이 알게 된다면 강주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자국민에 대해서 끔찍하게 생각하는 연합왕국이니 만큼 이 일을 그냥 넘어갈 가능성은 없었다.

어쩌면 지난 전쟁 당시처럼 군대를 이끌고 강주를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포교는 사람들을 시켜 현장을 보존하게 하고 관원 하나를 오씨 장원으로 보내게 했다. 이 사건은 강주 관리사 오승도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 사건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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