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05화 (205/425)

제205화. 소리장도 (3)

조마 번은 거의 오백 년의 역사를 가진 외양 대번으로 막부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잠재적 적 중 하나였다. 막부가 그들을 경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힘이 강대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마의 군사력을 놓고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했다.

조마는 사십만 석고에 불과한 세입을 가진 영지였지만 그 군사력은 자그마치 일만에 달했다. 희랍의 병정국가 라코니아를 연상시킬 정도의 ‘군국주의’로 번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수탈한 덕분이다.

인구 육십만의 영지에서 유지할 수 없는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것도 놀랍지만 더 무서운 건 그들이 가진 해상 전력이었다.

이들은 막부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내해 운항을 빌미로 수십 척의 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서역식으로 개조되어 군함 비슷한 성능을 내었다.

조마의 군사력이 이토록 막강하다 보니 근처 번들은 멀리 있는 막부보다 조마를 두렵게 여기며 그들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조마는 이런 식으로 세를 넓혀 동영 중서부에서 막부에 맞설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을 키우고 있었다.

이 조마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그들의 서남쪽에 위치한 살마 번이 유일했다. 역사적으로도 조마와 대대로 원수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막부에서도 이를 이용해 양 번을 적절히 대립시키며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시대의 조류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듯 이 적대관계도 오승도가 일으킨 파고 앞에 변화의 조짐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정비가 되지 않은 더러운 농촌 길을 따라 머리를 반쯤 민 사무라이가 걷고 있었다. 인분을 거름으로 주다 보니 논두렁 너머에서 살살 풍겨오는 더러운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고귀한 신분의 사무라이들이었다면 이를 도저히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을 걷는 사무라이, 이토에게 그 냄새는 익숙한 것이었다. 농촌에서 자란 하급 사무라이 가문 출신에게 인분은 불쾌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친숙한 것에 가까웠다.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걷던 이토의 걸음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그 앞으로 허름한 초가 집 한 채가 보였다. 그의 오랜 벗이자 모시는 주군이 다른 사무라이, 요마의 집이다.

“아직도 이런 변변찮은 곳에 사는 건가.”

이토는 벗의 집을 보고 혀를 찼다. 소박함을 미덕으로 아는 사무라이들도 최소한 갖출 것은 갖추고 살 줄은 알았다. 아랫것들의 눈을 의식해서다. 그 눈을 의식하면서도 여력이 따라주지 못해 보잘것없는 집에 사는 이들도 많았지만 요마에게 그럴 능력이 없진 않았다.

그가 아는 요마는 조마 번의 중진으로 나름 명망과 실력을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뜻만 있다면 마을 변두리의 허름한 초가에서 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이다.

이토는 초가를 향해 다가갔다. 초가 안에는 마침 불이 켜져 있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토는 그 앞에 서서 헛기침을 했다. 그가 몇 번 헛기침을 하자 곧 화사한 벚꽃을 연상시키는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몇 번 본 적이 있어 안면이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우 중 하나인 구로다의 여동생이자 요마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토를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내 그녀가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곧 백의를 입은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오랜만이군, 요마. 잘 지냈나?”

“이토. 살마에 있어야 할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요마의 물음에 이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우리 같은 이들이 번의 경계를 넘을 일이 얼마나 되겠나? 주군의 명을 받고 왔네.”

“자네 주군의?”

“그렇다네.”

“무슨 일인지 여기 앉아서 들어나 보세.”

요마가 손님방으로 이토를 안내했다. 요마와 이토가 방에 앉자 요마의 아내가 소담한 다기에 차를 담아 내어왔다. 이토는 그녀가 건네준 찻잔을 만지다 흠칫 놀랐다.

“이건 다완(다기) 아닌가?”

겉보기에는 몹시 투박하고 대충 만든 것 같은 다기였지만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바다 건너 반도에서 들어온 물건이기 때문이다. 어느 영주는 이 다완 하나를 성과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차는 이걸로 마셔야 제격이라고 주군이 내려주셨네.”

“정말 자네, 주군께 총애를 받나보군. 이런 귀한 것을.”

이토가 짐짓 놀란 눈으로 다기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는데 요마가 찻주전자를 손에 쥐며 말했다.

“다기는 나중에 구경하고 차나 한잔하게.”

요마는 이토의 다기에 찻물을 따랐다. 법도에 맞게 따라진 찻물이 뽀얀 김을 내며 향긋한 향을 내뿜었다. 이토는 차가 담긴 다기를 두 손으로 신중하게 집었다.

이토는 찻물을 세 번에 나누어 마셨다. 다도에 따른 것으로 사무라이들이라면 기본 소양으로 익혀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토가 찻잔을 비우자 요마도 잔을 비웠다.

“그래. 목도 축였을 테니 자네가 찾아온 용건을 들을 수 있겠나?”

“그 이야기가 먼저인데 다기에 정신이 팔려서 깜빡했군. 주군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을 전하겠네. 우리 주군께서 조마와 손을 잡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셨어.”

그의 말에 요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눈에 보이는 격정적인 움직임은 없었지만 거의 감정의 기복이 없는 요마가 크게 놀랐음을 이토는 알아보았다.

“우리와 손을 잡는다. 조마와 살마가 동맹을 하자?”

“주군께선 그러길 원하시네.”

“살마의 가신들이 조마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할 텐데, 뜻밖이군. 자네 주군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는 게 놀라워.”

이토는 사정을 설명하였다.

“놀랄 일은 아니네. 일전에 강주의 행상들이 향항을 다녀갔지. 장차 동방 무역을 트기 위해서란 말도 있더군. 새로운 상인들이 무역을 위해 향항을 찾는다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이토의 말에 요마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막부의 세입원이 늘어난단 얘기라. 그건 썩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그렇다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우리 주군께서 나를 보내신 것일세.”

“살마가 우리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납득했네. 막부가 강성해지면 외양 대번들에 대한 견제를 다시 강화할 테고, 그 첫 목표가 우리와 살마가 되겠지. 흐음.”

“하니 조마에서도 살마와 손을 잡는 것이 득이 되지 않겠나?”

“이해했네. 하지만 이야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조마와 살마가 원한을 지고 산 것이 한두 해의 일이던가? 수백 년의 일이지. 그 긴 원한을 눈앞의 잠재적 위협 하나로 설득하는 것이 쉬울 거라 보나?”

“물론 어렵겠지.”

“그러니 시간을 주게. 하면 내가 번 내에 여론을 만들고 준비를 하도록 하겠네.”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겠나?”

“적어도 일 년은 필요하지 않겠나?”

“일 년이라.”

“물론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네.”

요마의 말에 이토는 쓰게 웃었다.

“우리 주군께 보고하기엔 참 궁색한 답변이로군.”

“하나 어쩌겠나? 현실이 그런 것을. 자네 주군께서도 일조일석에 답을 바라진 않으셨을 것이네. 현명한 분이시니 이해해주실 걸세.”

“그야 그렇지만 주군을 실망시켜드릴 것 같아 그게 마음에 걸리는군.”

“염려하지 말게.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몇 해가 걸리더라도 해결함세. 이는 우리 조마를 위한 일이니 최선을 다하겠네.”

요마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 자가 거듭 일의 성사를 다짐했으니 언젠가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조마와 살마의 역사적인 동맹 말이다.

이토도 채근한다고 해서 쌀이 밥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는 그리 고하겠네. 자네를 믿고 주군께 일이 언젠가는 성사될 것이라 고하는 것이니 꼭 해줘야 하이. 내 목이 달린 일일세.”

“내가 허튼 이야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자, 차나 한잔 받게.”

요마는 껄껄 웃으며 이토의 잔에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둘은 밤이 깊어가도록 조마와 살마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강주항은 전시에도 수백 척의 선박이 드나드는 남방의 보석이다. 서역 선박이 드나들지 않을 때도 신의 전통 돛단배들이 드나든 덕분에 항구는 언제나 활력을 보였다.

멀리 서역 범선 하나가 모습을 보이자 짐을 부리는 인부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로 물목을 날라주고 그 삯으로 하루를 사는 임노동자들에게 서역 범선은 가장 반기는 대상이었다. 동방 선박들과 달리 삯도 후하고 일거리도 많았기 때문이다.

“자, 줄부터 서라고. 관에서 검문만 마치면 바로 내려야 할 테니까.”

인부들을 지휘하는 백장이 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백장이 손짓하자 사람들이 나루를 따라 길게 줄을 섰다.

나루에 배가 들어왔다는 말에 나온 행상의 관리인들도 서역 범선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쪽에서 서역 범선이 들어올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 동방 무역을 다녀오는 배인가?”

무역 철이 아닌 시기에는 서역 범선들이 서쪽에서 오지는 않았다. 비수기에 강주를 찾는 서역 범선들은 대개가 동방 중계 무역에 종사하는 배들이었다.

“아딘 상회의 배로군.”

멀리 들어오는 배를 살피던 관리인 하나가 말했다. 수십 년간 강주에서 배를 지켜본 경험을 가진 사내는 아딘 상회 선박들이 달고 다니는 인어 선수상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선수상은 배의 앞머리에 붙이는 일종의 장식용 상으로 사람의 얼굴이나 상반신,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딘 상회의 경우에는 반쯤 헐벗은 인어를 회사의 마크로 사용하고 있어 여타 다른 상회의 상선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아딘 상회라면 양행의 배에 해적질을 시도한 그 무도한 놈들 아닌가? 그 해적 놈들이 감히 강주에 오다니.”

“놀랄 일은 아니지. 일전에 상관에서 저들과 타협을 했다는 소문도 있지 않나?”

행상의 관리인들은 혀를 찼다.

곧 관에서 띄운 배 한 척이 범선 쪽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범선도 관료의 접근을 알았는지 닻을 내렸다. 아딘 상회의 배라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관리인들은 배에서 흥미를 잃고 나루에 마련된 대기소로 걸음을 옮겼다. 배가 들어온다는 말에 나와 보긴 했지만 그들과 상관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서 마작이나 하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관리인들은 천천히 나루를 따라 걸었다. 그 옆으로 관료의 검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임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관리인들은 그들을 일별하고 대기소로 돌아왔다.

대기소는 나루에 들어오는 서역 선박들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답게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밀가루 전쟁 이전만 해도 행상들이 직접 머무르며 서역 상인의 보증 문제를 처리하던 곳이니 그 규모가 작을 턱이 없었다.

내부에는 화장실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사람들이 잠을 청할 수 있는 숙소도 있었다. 심지어 상담을 위한 접견실까지 마련되어 있어 그 규모는 어지간한 부잣집보다 컸다.

관리인들은 아딘 상회에 대한 험담을 나누며 대기소로 돌아왔다. 접견실에는 다른 행상의 관리인들이 앉아 한창 마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오자 마작 패를 돌리고 있던 한 관리인이 물었다.

“밖에 서역 범선이 들어왔단 이야기는 뭔가?”

“아딘 상회더군.”

“아딘 상회? 그 아편쟁이들의 배 말인가? 좋다 말았군.”

아딘 상회는 지난 사략 행위 이전부터 행상과 거래가 별로 없는 회사였다. 아편에 대한 행상들의 거부감도 있었거니와 아딘 상회의 악명이 워낙 높았던 탓이다.

그러던 차에 사략 행위까지 터지자 행상은 아딘 상회와의 거래를 모두 중단했다. 그들에 대한 제재 자체는 왕국과의 협의로 중단했지만 거래를 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행상의 의중에 달린 문제였다. 거래를 아예 하지 않다 보니 아딘 상회의 배는 행상들에게 일 푼의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다.

“앉아서 패나 받게.”

패를 돌리던 관리인이 자리를 내주었다. 마작은 144개의 패를 가지고 하는 일종의 보드 게임으로 그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렀다. 바둑과 마찬가지로 기술과 전략, 계산을 겨루는 게임이었지만 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 운의 영향을 받는다는 부분이 상인들 사이에서 마작이 바둑보다 인기가 좋은 이유였다. 상계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들은 신뢰와 실력을 장사의 중요한 요소로 쳤지만 한편으로는 운의 요소도 크게 믿었다.

천재지변(전쟁, 기아, 홍수, 태풍, 지진, 해일 등) 같은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장사에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자라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망하는 곳이 상계이다 보니 운의 요소를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운이나 한 번 시험해 보아야겠군.”

행상 오승도 밑에서 일하는 관리인 유씨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유씨가 앉자 같이 대기소로 들어왔던 현씨는 피식 웃으며 멀찌감치 앉아 마작을 구경하기로 했다.

모두가 게임의 법칙에 익숙한 이들이라 진행은 신속했다. 한 게임이 끝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재미 삼아 하는 게임이긴 해도 모두 부유한 상인들이라 탁자 위에 쌓인 은화가 제법 많았다.

관리인들이 패를 다시 돌리는 사이 시비들이 차를 내왔다. 대기소에서 일하는 관리인들은 모두 행상에서 직급이 상당한 상인들이라 그 대우는 괜찮았다.

매월 은 오백 냥 이상에 전속 시비도 붙여주다 보니 말 그대로 꿈의 일자리라 할 만했다. 물론 이들도 거저 이 자리에 올라선 것은 아니었다.

행상에서 적게는 십오 년, 길게는 삼십 년 이상을 봉사한 상인들에게만 이런 자리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강주 상인들에게 이 관리인 자리는 꿈에도 바라 마지않는 자리였다.

“대인. 차 좀 드세요.”

향긋한 차가 다기 위로 쏟아졌다. 시비들은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찻잔으로부터 일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찻물을 따랐다. 묘기처럼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것도 다 의미가 있었다. 찻물에 산소를 충분히 섞어 그 맛을 깊고 진하게 하기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비들이 차에 찻물을 따르자 관리인들은 찻물로 목을 축였다. 무역 철이 아닌 때에는 이렇게 여유롭게 차도 마시고 손도 쉬어가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구종구패(九種九牌: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는 패)가 떴군. 오늘은 패가 영 나오질 않아.”

유씨가 패를 놓고 일어서자 구경을 하던 현씨가 웃으며 일어섰다. 게임을 구경만 하려니 그도 손이 근질거렸다.

“유국(승부가 나지 않고 경기 종료)을 시키고 일어설 거면 내게 넘기게.”

“그것도 좋지.”

유씨가 휘적휘적 일어서자 현씨가 그 자리에 앉았다. 유씨는 다시 패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궐련 한 개비를 물고 접견실을 나섰다.

패를 몇 번 돌리다 보니 그사이 밤이 저물었나 보다. 유씨가 접견실을 나섰을 땐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야경꾼이 상관 거리를 밝히지 않았다면 강주 시내 방향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을 것이다.

유씨는 궐련을 입에 물고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멀리 보이는 검은 강물 쪽을 바라보며 짙은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빨갛게 타들어가는 궐련을 보자니 세월이 빠르단 생각도 들었다.

이곳 강주에서 지낸 세월이 벌써 이십 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을 들라고 하면 그가 모시는 행상 오승도가 이룩한 변화였다.

일개 상인으로 머물 줄 알았던 오호관이 강력한 경제력과 명망을 바탕으로 군사력과 정치력을 길러 제국을 흔드는 세력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십 년 전의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몸을 담은 오호관은 그런 점에서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 상전벽해라는 고사를 눈으로 보게 만들어준 곳이니 말이다.

‘상인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해준 분이 오승도 대인이지.’

이곳 행상에 몸을 담았기에 상인의, 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배웠고 그들 위에서 군림하는 관료들이 얼마나 무능한지도 알게 됐다. 그만큼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행상에 대한 긍지도 있었다.

유씨는 반쯤 태운 궐련을 비벼 껐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피니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행상들에게 정해진 근무시간은 대충 지나 있었다.

동방에서 시계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 정도의 느슨한 개념으로 분리하고 있었지만 시계가 들어오면서 시간을 ‘분과 시간의 단위’로 쪼개어 쓰는 개념이 생겼다. 여기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곳이 바로 행상이었다.

강주에선 시간을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한 승도의 뜻에 따라 정해진 시간 단위로 사람에게 일을 시켰다. 단순히 일을 많이 시킨다고 효율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걸 아는 그의 노동 관리 정책 덕분에 행상들은 하루에 최대 12시간 이상은 일하지 않았다.

유씨는 자신이 귀가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느긋하게 대기소를 나섰다. 남은 동료들은 마작 한 게임을 끝내고 나서 대충 시간을 보고 나올 것이다. 그들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 것이 눈에 보였다.

유씨가 코를 문지르며 대기소 앞을 나서며 나루 앞으로 걸어 나오던 차였다.

문득 희미한 물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니 멀리 정박해 있던 서역 범선 쪽에서 검은 인영 같은 것들이 강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밤에 강에서 수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정박해 있는 범선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도 이상했다.

유씨는 그 행동에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 재빨리 상관 거리 쪽으로 달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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