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09화 (209/425)

제209화. 암수 (1)

‘사람의 목숨은 돈으로 바꿀 수 있다. 그 목 하나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느냐로 인간의 가치는 결정된다.’

얼핏 들으면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린다. 아니, 제대로 들어도 미친 소리가 맞다. 이 소리를 지껄인 장본인이 미친놈이기 때문이다.

바로 강주삼마 중 일인이자 삼화방의 방주인 한적세가 한 말이다.

한적세는 강주에서도 악명이 높은 인간 백정답게 사람의 목숨을 오로지 돈으로만 평가했다. 목숨 값이 비싼 인간은 좋은 인간이고, 목숨 값이 싼 인간은 나쁜 인간이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셈법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온 그도 눈앞에 쌓인 은자 값어치만큼 나가는 목숨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액수는 꿈에서도 만져본 적이 없는 거금이었다.

평소에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그가 살 떨리는 액수를 듣고 무거운 엉덩이가 들 정도이니 이번 의뢰에 걸린 돈의 무게를 알 만했다.

한적세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의뢰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니까 청부대로만 해주면 이 돈을 다 주겠다?”

“그렇습니다.”

한적세는 상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 적은 돈도 아니고 은자 만 냥이 넘는 의뢰금을 주며 청부를 하다니. 돈이 썩어 도는 졸부가 관료라도 암살하려 하지 않는 이상 이만큼 큰돈을 줄 이유가 없었다.

“청부 내용이나 들어보지.”

한적세가 말을 꺼내자 의뢰인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밀봉된 서찰을 꺼냈다. 죽간으로 돌돌 만 서찰이 모습을 드러내자 한적세는 냉큼 낚아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훑었다.

그는 서찰을 읽고는 미간을 구겼다.

청부 대상: 연합왕국 아딘 상회.

청부 내용: 회주 및 상회 간부의 암살.

사람 죽이는 일이야 평소와 같은 것이지만 그 대상이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합왕국 시민이자 동방에서 방귀 꽤나 뀌는 대형 상회의 고위 인사들을 건드리는 일이다.

계투에서 마을 장정들을 죽이거나 사보타지 등을 하는 노동자 몇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는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쉽게 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탁자에 가득 쌓인 은화 때문이었다. 천한 노동자 수백의 목을 따도 벌까 말까한 돈이 코앞에 있었다.

한적세는 마른 입술을 혀로 가볍게 핥고는 다시 서찰을 보았다.

‘대금 자체는 매우 매력적인데 이 내용이 문제란 말이지. 아딘 상회 회주와 간부들의 목을 따라니. 최소한 간부 몇 놈의 목은 잘라야 청부자가 만족할 거란 얘긴데.’

정말 그렇게 한다면 연합왕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국민이 죽어도 가만히 있는 멍청한 나라가 아니다.

도대체 이 위험한 청부를 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

한적세는 다시 의뢰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의뢰인의 신원 조사를 미리 하긴 했지만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의 의뢰인은 이 위험한 청부를 한 자가 아니었다. 대리 청부를 하는 얼굴 마담일 뿐이다.

한적세는 생긴 것답지 않게 민활하게 머리를 굴렸다. 악당 짓도 오래 해먹으려면 머리가 좋아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양지보다 정상에 서기 어려운 것이 음지의 세계였다.

‘청부를 한 놈이 이놈이 아니라면 누구지?’

그 답을 알려면 아딘 상회의 적을 생각해보는 편이 쉬웠다. 오래지 않아 한적세는 그 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딘 상회와 척을 진 자들이라면 많았다. 하지만 그들과 죽기 살기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이 강주의 주인, 행상 오승도다.

‘빌어먹을.’

한적세는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자신이 외통수에 몰렸다는 것을 알았다. 청부를 받고 받지 않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해야만 했다. 강주의 주인이 내린 청부다.

그 뜻을 거스르고 강주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청부를 받을 수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보낸 의뢰인과 이렇게 마주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나.’

한적세는 이를 악물었다. 청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오승도의 눈 밖에 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청부를 한다고 가정하면 먼저 돈 몇 푼에 목숨을 파는 싸구려들, 삼화방과 접점이 전혀 없는 것들을 내세워 일을 도모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문에서 백 리는 족히 떨어진 강주까지 연합왕국이 뒤져보긴 힘들다.

‘한 오십 명 정도 부리면 가능할 것도 같고.’

물론 싸구려 칼잡이들을 보낸다고 일이 풀린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사람대로 쓰고 의뢰인으로부터 잔금을 받지 못하는 불상사를 피하려면 몇 놈은 확실히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은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런 실력자들은 몸값이 비쌌다. 칼이 아니라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입까지 막으려면 더더욱 많은 돈이 든다. 그래도 이 청부를 받는다면 이런 실력자들을 몇 쓰긴 해야 했다.

가능하다면 독을 다루는 자들을 섭외해도 좋겠지만 독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은 극히 드물기도 하거니와 암살 대상에 접근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암살을 시도하려는 입장에서는 칼 아니면 총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청부를 받으시겠습니까?”

의뢰인은 한적세가 고민에 빠졌다고 생각했는지 물어왔다. 그 물음만 봐도 의뢰인은 자신이 누구를 대리해서 왔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 틀림없었다.

“받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니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의뢰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은화 더미를 한적세 쪽으로 밀었다.

“그럼 이 돈은 대인의 것입니다. 청부를 받으셨으니 잘 처리해 주시겠지요?”

의뢰인은 다시 멍청하게 물었다. 이곳이 어떤지도 모르고 온 것이 분명했다. 하긴 일반인이라면 모를 만했다. 이곳은 대충 보면 평범한 공사장 근처의 인력 관리소처럼 보인다.

서찰을 보았다면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잘 밀봉된 것으로 보아 이 사내가 내용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공사 의뢰를 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적세는 그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흔적 하나 만들지 않고 살인 청부를 넣었다. 조금의 실수나 착오도 없이.

그런 그들의 청부에 실패한다면.

한적세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강주삼마라 불리며 약자들의 머리 위에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던 그도 양지의 태양 같은 권력자 앞에선 미천한 벌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믿어도 좋아. 자네에게 청부를 대리하여 시킨 분께 일을 확실히 처리하겠다고 말씀드리게.”

사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을 전하지요.”

사내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에 한적세가 ‘잠깐’ 하고 그를 불렀다. 사내는 그 말에 엉거주춤 동작을 멈추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사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네.”

한적세는 사내를 멈춰 한마디를 더 물으려다 그를 보냈다. 청부자의 신분을 묻는 것은 행상에 대한 추궁처럼 들릴 수 있었다.

힘이 약한 자들이라면 그렇게 캐물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압도적인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문제가 되었다.

손님이 방을 나가자 수하 몇이 얼른 들어왔다. 그들은 한적세의 심복들로 계투 등에서 살행을 직접 지휘하는 방의 중간 간부에 해당되는 자들이었다.

“방주님, 큰 거래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만 냥.”

“은자로 말입니까?”

수하들 중 하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한적세는 그 물음에 입술을 비틀었다. 그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으니 그럴 만했다.

“그렇다네.”

“아니, 무슨 의뢰이기에 만 냥짜리 거래입니까? 혹 계투에서 앙심을 품은 마을 유력자 놈들이 관리 목이라도 따달라고 한 겁니까?”

그들의 생각도 한적세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합왕국 시민을 죽여 달라는 청부는 꿈에서도 받아본 적이 없을 테니까.

“아딘 상회 회주와 간부들의 목을 따달라는 의뢰지.”

“예?”

“방주님,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수하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힌 의뢰였다.

“제대로 들었네.”

“방주님, 그 거래는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한적세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청부자가 행상이라면 거절할 수 있겠나?”

“행상이 청부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의뢰를 하러 온 놈은 기루의 한량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대리 청부잖나.”

한적세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수하들을 보며 갑갑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칼 밥을 먹고사는 자들이니 머리가 나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너무 멍청했다. 청부로 먹고사는 자들이 대리청부조차 생각하지 못해서야.

그의 지적에야 비로소 수하들도 그 가능성을 깨닫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청부를 받으시기로 하신 겁니까?”

“받지 않으면. 당장 여기서 죽을 텐가?”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수하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받아야지.”

“어려운 청부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그러니 지금부터 애들을 싹 긁어모아. 그 중에 입 무겁고 급전이 필요한 놈들 위주로 골라내.”

“알겠습니다.”

“나가봐.”

수하들이 읍을 하고 물러가는 것을 본 한적세는 두 손을 가볍게 비볐다. 위험한 도박을 시작하게 되어서일까. 양손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아딘 상회는 주로 아편을 취급하지만 다른 여러 가지 상품도 취급한다. 차와 도자기, 비단, 기타 서역산 물품까지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 거의 없다. 손을 대는 영역이 워낙 넓다 보니 고용한 사람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상회에서 고용하는 임노동자들로 매우 싼 임금을 받고 일했다.

일종의 사환 격으로 일하는 셈인데 그래도 여타 동방의 직종들보다는 품삯이 후한 편이라 노동자들을 공급하는 방들도 아딘 상회와 계약하기를 좋아했다.

“4번 창고에서 아편 백 상자만 꺼내서 부두로 옮기고 자기와 차는 1번 창고로 넣도록.”

일꾼들이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강주는 전쟁의 여파를 받아 그 물동량이 크게 줄었지만 아문은 사정이 달랐다. 아문은 연합왕국 동방 경영의 요충으로 선택되어 그런 사정과는 전혀 무관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매일 수십 척 이상의 배가 들어와 닻을 내리고 짐과 사람을 내려놓고 또 싣고 나간다. 활기가 도는 만큼 일거리도 넉넉하여 쉴 틈이 거의 없었다.

“정말 쉴 짬을 안 주고 부리는구먼.”

땀을 닦던 홍씨가 불만 섞인 어조를 내뱉었다. 땀이 눈으로 들어와 따갑게 느껴져서인지 잠깐의 휴식이 더 아쉬웠다.

“양이들이 어디 우리 고향처럼 쉬엄쉬엄 일을 한다던가?”

함께 일하던 문씨가 어깨 위로 차 상자를 짊어지며 대꾸했다. 홍씨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 사람 같지 않단 거지. 어디 사람이 소나 말도 아니고 숨 돌릴 틈은 주면서 부려야 하는 거 아닌가?”

문씨는 동료의 불만에 긍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타일렀다. 동방 사람들이 아문에 와서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었다.

일을 하면 시간, 분 단위로 정확하게 재어 사람을 부렸는데 그 일을 한 시간 만큼 돈을 주다보니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동방 사람들이 서역인들을 몰인정하고 매몰차다고 느끼는 부분이었다.

문씨와 홍씨가 차 상자를 들고 창고로 들어가다 바짝 마른 사내 몇이 구석에 모여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일하는 동안에 몇이 쉬면 그만큼 일이 늘게 마련.

홍씨가 한마디 하려는데 문씨가 그를 만류했다.

“왜 그러나? 아무리 방에 속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도 정도는 지켜야지.”

“저들이 누군지 몰라서 그러나?”

“저들이 누구이기에 겁을 내나?”

“팔뚝에 문신이 있지 않나.”

문씨의 말에 홍씨는 급히 마른 사내들의 팔뚝을 보았다. 그들의 팔뚝에는 꿈틀거리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제야 문씨가 만류한 이유를 안 홍씨가 침을 삼켰다.

동방에서 문신은 예로부터 죄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죄를 지은 자에게 낙인을 찍기 위해 이마나 등에 묵인을 남긴 것이 동방 문신의 시초나 다름없다 보니 문신을 새긴 자들은 암묵적으로 범죄자로 여겨지곤 했다.

문신을 일부러 새기려는 자들은 그런 인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죄인들이다. 즉, 문신을 새긴 자는 범죄자라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뭘 보나?”

마른 사내들 중 하나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문씨와 홍씨는 황급히 차 상자를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문신 사내들은 겁을 먹고 부리나케 안으로 사라지는 일꾼들에게서 흥미를 잃고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명령대로 양이의 목을 따려면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네.”

“소란스럽게 만든다면 역시 방화가 좋겠군.”

사내들은 서로의 눈을 보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다 보니 방화 정도는 크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계투를 하면서 몇 번 불도 질러보았던 자들이다 보니 거기에 대한 큰 감흥은 없었다.

“방화를 한다면 창고마다 불을 내야 할 텐데.”

“그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마른 사내들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자가 입을 열었다.

“창고에서 불을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니?”

“물목을 넣으면서 미리 구부러진 초를 두고 기름을 뿌려두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린 사내의 생각은 꽤 기발했다. 초는 시간이 지나면 녹게 마련이니 기름에 불이 닿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시간만 잘 조절한다면 적당한 시간에 불이 나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괜찮은 생각이군. 방화는 그리 처리한다고 생각하고 양이는 역시 칼로 처리해야겠지?”

“자택에서 창고로 달려오는 길에 적당히 인파 속에 묻혀 있다 칼침을 놓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나쁘진 않지만 좀 더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어.”

나이 많은 사내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생각할 것을 말했다. 그들이 양이의 목을 따지 못하면 어딘가에 있을 해결사들이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 몫으로 떨어질 잔금은 그만큼 줄게 마련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잔금 걱정을 하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일을 시킨 자는 칼 밥을 먹고사는 자들 사이에서 신용이 높기로 유명한 자였다.

청부를 실행하면 죽은 자에게까지 잔금을 치러주기로 유명했다. 그런 자이기에 칼잡이들은 그 신의를 믿고 일을 했다.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서 푼 단도가 전부인데.”

“만에 하나란 것이 있으니 우리 중 몇이 확실하게 그 목을 치자고 정해두잔 거지.”

인파 속에서 암살에 실패하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몇이 달려들면 그 목을 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사내는 그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목숨을 팔기로 하고 이 자리에 선 칼잡이들이지만 확실히 죽을 수 있는 일을 자청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받기로 한 돈만으로도 충분했다. 돈이 더 나온다고 해도 그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할 수 없다면 제비뽑기로 정하지요.”

통통한 사내가 말을 받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을 비는 풍습이 있는 동방인들은 행운을 중요하게 여겼다. 운이 없으면 죽는 것이고 운이 있다면 산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나름 공평한 제안이었다.

특히 이 남방에서는 제비뽑기를 천의(하늘의 뜻)가 반영된 것이라 하여 사람들의 믿음이 아주 높았다. 운을 타고난 사람에게 신이 행운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일 어린 사내가 식사에 쓰려고 준비했던 젓가락 몇 점을 꺼냈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뚝뚝 부러트려 대충 손에 쥐었다. 긴 것을 쥐면 운이 있으니 일을 맡고, 짧은 것을 쥐면 운이 없으니 일을 맡지 않는다는 원칙에 모두 합의를 했다.

먼저 나이 많은 사내가 심호흡을 하고 젓가락을 뽑았다. 이어 한 사람씩 젓가락을 뽑았다. 모두가 한 조각씩 뽑자 나이 많은 사내가 말했다.

“그럼 결과에는 깨끗이 승복하는 걸로 알겠네.”

모두가 뽑은 젓가락을 내밀었다. 곧 운에 모든 것을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야 할 자들이 결정되었다. 당첨된 자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합의된 내용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역할을 확인했다.

일에 대한 교통정리가 끝날 즈음 감독관이 창고로 들어왔다.

“거기. 왜 아직도 일을 하지 않나?”

그는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감독관이라고 해서 방에 속한 유협(일종의 조직 폭력배)들의 존재를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이 바쁜 상황에서 여럿이 손을 놀리고 있는 것을 보니 한마디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생각이란 걸 해가면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바쁘니까 그 생각이란 건 다음에 하고 빨리 움직이게. 일당 받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아.”

어차피 일당은 이 창고의 노동 용역을 받은 방주가 주겠지만 감독관은 그렇게라도 엄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관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자 문신 사내들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관리야 이곳 방주가 한다지만 너무 감독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다가는 방 자체의 계약이 취소될 수 있었다.

일이 그렇게 풀리면 이번 의뢰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될 터, 조금은 감독관의 눈치를 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양이들은 자존심이 매우 드세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일하지요.”

나이 많은 사내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움직이자 남은 자들도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독관은 그런 그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다 일꾼들의 정리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창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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