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18화 (218/425)

제218화. 흑선내항 (1)

동경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전근대 국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효율성과 계획적인 도시 건축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이 도시에 사는 인구는 자그마치 백만. 서역의 웬만한 대도시를 간단히 압도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도시가 이토록 거대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지리적 입지의 도움도 있었다. 그 배후에 자리한 넓은 관동 평야가 부양력을 발휘해 주었고, 도시 앞으로 깊이 내투한 바다가 수운의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풍년이 들 때는 관동 평야가, 흉년이 들면 해상 운송을 통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가능했다. 그래서 동영인들은 동경만을 가리켜 동경의 생명 줄이라 불렀다.

이 바다가 막힌다는 것은 바로 동경의 목줄이 죄어진다는 의미를 가졌다. 막부는 동경만의 양쪽 끝에 강력한 요새를 세워 만에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대포의 사거리가 짧아 만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지금까지는 이 약점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동경만을 봉쇄하려고 한 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그 근거 없는 믿음은 산산이 깨어졌다. 수평선 너머로부터 나타난 세 척의 흑선에 의해.

“수석 노중(막부의 집정대신에 해당, 수상 격), 큰일 났습니다.”

“무슨 소란이기에 이리 시끄럽게 구는 건가?”

다다미방 너머에서 심복이 큰 소리를 내자 안도는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잠이 많은 그는 하인들에게 자신이 일어날 때까지 기척도 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했었다.

그런 그의 지시를 어길 정도라면 큰일이 났다는 뜻이다.

안도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밀치고 일어났다. 이불이 내려가자 그 옆으로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안도가 총애하는 남첩 마에다가 한기를 느꼈는지 다시 이불을 당겼다.

동영에서는 권력자들이 남첩을 두는 풍습이 일반화되어 국가 원수인 정이대장군의 경우에는 천 명에 달하는 남첩을 두기도 했다. 이 남첩의 수로 권력의 크기를 가늠하는 시선이 있다 보니 수석 노중 정도의 권력자 옆에 남첩이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안도가 옷을 입고 다다미방을 열자 심복이 급히 절을 하며 아뢰었다.

“양이가 나타났습니다. 동경 앞바다에 말입니다.”

그 말에 안도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이 싹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동경만은 수도 동경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양이가 나타났다는 것은 막부에 대한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 말이 참인가?”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지금 고산진옥(막부 직할령을 관리하는 관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대장군은 어디에 계신가?”

“이조성(경도에 있는 대장군의 거처)에서 동경으로 돌아오실 예정이셨는데, 아직 기별이 없으십니다.”

“당장 삼봉 행(막부의 실무를 책임진 행정 관료), 약년기(막부의 근위대장 겸 부총리 격), 대목부(지방 영주들의 정무 감독), 목부(사무라이 감찰) 전부 고산진옥으로 모이라고 명하게.”

“예. 즉시 조처하겠습니다.”

심복이 절을 하고 물러나자 안도는 가내의 하인들을 불러 가마를 준비하게 했다. 고산진옥으로 달려가자면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가마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동경만(灣)에 나타난 양이들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동경만에 나타난 양이들이라면 필시 연합왕국의 양이들이 틀림없을 거다. 지난번에 로망스 양이들과 손을 잡는다는 소문을 넌지시 흘렸으니 행동을 보일 놈들은 그놈들밖에 없다.’

안도는 상대가 연합왕국이라 생각하자 목이 탔다. 세계정세에 어수룩한 막부도 연합왕국이 얼마나 막강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수천 년간 대대로 동방의 패자로 군림한 대륙의 지배 국가를 가벼운 손짓으로 때려눕힌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명분은 만들고 움직이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소문을 흘린 것인데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다짜고짜 침공이라니. 정말 무도한 양이들이다.’

안도는 최소한의 도의조차 모르는 이 무뢰한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어떤 자들인지 오판을 한 결과 혹을 떼려다 붙이게 생겼으니 한숨만 나왔다.

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던 차에 하인이 와서 고했다.

“가마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다.”

안도는 혼자서는 도저히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고산진옥에 가서 관료들을 모아놓고 논의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다고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면 길이 보일 수도 있었다.

안도는 해결책이 나오기를 희망하며 가마로 향했다.

동경만에 정박한 세 척의 배는 몇 시간째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막부 쪽에서는 동경만에 정박한 자들 쪽에서 아무런 접촉이 없다 보니 상대의 의도를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막부가 뜻하지 않은 이 위기에 직면해 찬물이라도 맞은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승도는 망원경을 들고 동경 방향을 구경하고 있었다. 일을 거하게 저지른 당사자가 팔자 좋게 경치 구경이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막부의 관리들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승도가 망원경을 들고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째 동경을 구경하고 있자 초조함을 느낀 클레망소가 대표로 사서 그에게 물었다.

“대인, 명이 있으셔서 그저 동경만 앞에 배를 정박해두고 있긴 합니다만, 대인의 뜻을 알아야 저도 간부들과 선원들을 안심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인의 의중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선단이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에서 기항은 하지 않고 바다에 닻을 내린 채로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모두가 아리송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클레망소는 승도가 왜 이런 지시라도 내렸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물음에 승도가 망원경을 내리고 시선을 돌렸다.

“여기 배를 멈춘 이유가 궁금하다 그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그렇잖아도 슬슬 설명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경은 이 동경만을 보고 이곳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수도의 앞바다이니 이곳에 적이 있으면 위험하겠다는 정도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승도가 웃음을 보였다. 역시 평범한 해군 장교 출신의 클레망소는 그와 같은 식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처음 이곳의 지리를 살핀 순간 통찰한 부분이었는데 말이다.

“이곳은 동경의 목줄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막부의 목줄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우리가 있는 이곳이 막부의 목숨 줄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승도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의도도 정체도 모를 함대(?)가 동경만에 머무는 동안은 막부의 수운은 완전히 차단되고 만다. 수운이 마비된다는 것은 식량 공급의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다. 관동 평야가 풍년이든 아니든 그 점만은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수도의 앞에 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는 정치적 부담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외세를 단시간에 몰아내지 못할수록 막부가 짊어져야 할 정치적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이 같은 점을 노렸다. 그가 동경만에 닻을 내린 순간 막부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막부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거나 하는 종류의 목적으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위협을 통해 강주가 막부를 위협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적으로 돌리기보다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클레망소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서 생각하시는 바는 이해하였습니다. 하면 여기서 언제까지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막부에서 사람을 보낼 때까지요.”

협상은 자기 안방에서 하는 것이 제일 유리하다는 것을 연합왕국과의 충돌에서 아주 잘 배웠다. 그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운 교훈을 동영인들에게 써먹을 참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협상이 되겠군요.”

“물론 그리될 겁니다. 하니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하세요.”

승도는 뒷짐을 지고 선실로 향했다.

***

동영의 막부는 흑선의 출현에 대해 가급적 정보를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사람의 입을 막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경의 시민들은 막부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들고 둔덕 위로 올라가 동경만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은 흑선을 구경하였다.

서역인들이라면 혹시 대포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군함을 구경하러 오지 않았겠지만 동영인들은 달랐다. 그들의 문화에서 전쟁은 언제나 높으신 귀족과 사무라이 계급만의 딴 세상 이야기였다. 평범한 이들은 자신들과 전쟁은 무관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흑선을 배척해야 할 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막부의 소집령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해안가에 모여 양이의 상륙에 맞설 태세를 보였다.

이처럼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막부도 결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흑선에 대한 막부의 대응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 그리고 금방이라도 양이에 대해 전쟁을 걸겠다고 펄펄 뛰는 사무라이들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막부는 사건이 벌어진 지 이틀 만에 흑선 쪽으로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다. 사절단의 대표는 치안 업무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정봉행이 맡기로 했다. 그는 실무 관료 중 최고위직으로 그 신분만 보아도 막부가 이번 사안을 얼마나 신속하게 해결하고 싶은지 잘 보여주었다.

“배가 옵니다.”

멀리 조막만한 배가 한 척 오는 것을 본 장루원이 외쳤다. 승도는 막부의 사절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갑판에 섰다. 로망스 인들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로망스 해군의 제복을 입고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로 상대가 승선하기를 기다렸다.

곧, 막부가 보낸 작은 배가 대형 프리깃함의 좌현에 닿았다. 도열하지 않고 그들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던 선원 몇이 능숙하게 줄사다리를 내렸다. 사다리를 본 동영인들은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신는 나막신을 신고 줄사다리를 오르기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정봉행(마치 부교) 마사요시는 줄사다리 앞에서 머뭇거리다 나막신을 벗었다. 신발 하나 때문에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사요시가 줄사다리를 타고 오르자 수행원들도 하나둘 나막신을 벗고 그 뒤를 따랐다. 정봉행 일행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줄사다리를 올라 겨우 뱃전에 이르자 미리 갑판에서 준비하고 있던 로망스 인들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뱃전에 오르자마자 양이들이 해괴한 인사를 건네자 마사요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흉내 냈다. 승도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그 신분을 물었다. 이번 상행을 위해 어설프게 동영어를 연습한 덕분에 발음은 이상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이 선단의 지휘관인 강주 관리사 오승도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하의 신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막부의 정봉행 마사요시입니다.”

마사요시는 반사적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다 상대의 신분에 그의 얼굴을 보았다. 서역인들로 가득한 배에서 동방 사내가 대표로 나서며 인사를 하는 것부터 이상하긴 했다.

처음에는 막연히 통역이 나와서 말을 건넨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밝힌 신분은 그럴 여지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다시 보니 옥대와 거기에 달린 패 모두 고위 관료의 것이었다.

“막부의 고관이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사요시는 처음에 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양이들이 도발을 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낌새가 조금 이상했다. 양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신의 고관이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막부에서는 우리가 이곳에 와서 크게 놀랐습니까?”

승도는 느긋하게 선수를 치고 들어갔다. 대화의 주도권은 언제나 화제를 선점하는 쪽에게 주어지는 법이다. 그의 말에 마사요시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빼앗겼으니 일단 승도가 주도하는 흐름에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도의 앞바다에 군선이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당장 철수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강주 관리사시라면 신의 고관이실 터. 동영과 신 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라도 더욱 배려를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사요시는 일단 그 흐름에 순응하며 상대를 추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다 해도 문제를 만든 쪽은 저쪽이니 추궁은 어렵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리 간단한 인간이 아니었다.

“놀라셨다면 사죄드립니다. 풍랑에 잠시 떠밀려오다 보니 귀국에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수리가 끝나는 대로 이곳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승도는 자신이 말하고도 웃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둘러대기 위한 구실이었다. 하지만 이를 논박할 방법은 없었다.

“수리라니요?”

“풍랑에 배가 조금 부서진 곳이 있어 수리를 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승도는 시간을 끌면 누가 불리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협상을 할 때는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둘러대기를 하면 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었다. 이 역시 연합왕국이 가르쳐준 치졸한 수법 중 하나였다.

“대인, 우리는 그렇게 기다려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대장군께서는 당장 양선을 물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정도 어려운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정을 좀 살펴주십시오.”

“하면 언제 떠나실 수 있으신 겁니까?”

마사요시가 채근하자 승도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수리가 되면 떠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시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동경만을 벗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정봉행은 그 말에 상대가 그저 말을 빙빙 돌리는 구실을 내세웠음을 알았다. 하지만 처음 말을 시작할 때부터 유리한 방향으로 대화를 끌어가 놓고 구실을 대어 버렸으니 그 논리를 논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인, 계속해서 동경만에 남아 계신다는 것은 우리 막부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동경만에 함정을 계속 주둔시키는 것에 대해 우리 정부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조처를 취하시겠지요. 막부에 힘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우리도 고의로 동경만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시한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시한을 말씀드리기 심히 곤란한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자로 잰 듯 언제 수리가 될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대인의 말씀은 이곳에 계속 발을 붙이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도 그런 불행한 상황은 가급적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지금 그 말씀, 기억해 두겠습니다.”

승도는 상대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막부의 관리는 그 무례함에 치를 떨면서 옷자락을 털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다. 마사요시는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뱃전 너머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클레망소가 물었다.

“대인, 장차 협력을 할 상대에게 이리 모욕을 주고 위협을 주어서 제대로 된 거래가 가능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물음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시대에 자존심은 별반 중요한 것이 못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래를 했을 때 이익이 되느냐이다.

승도는 그 자신과 적이 되었을 때 동경만을 마비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이 해프닝으로 과시했다.

하니 막부의 입장에서는 승도와 척을 지지 않는 것이 안보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 선에 속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오만한 태도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동영인들의 심리를 계산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강한 태도를 보일수록 막부에서 타협을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가능합니다. 장사라면 이런 거래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이건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거래니까요.”

승도는 뒷짐을 진 채 멀어져가는 동영 배에 시선을 두었다.

“막부에서 언제쯤 다시 사절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내일 중으로 다시 보낼 겁니다. 저들은 급하니까요.”

승도는 상대가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아마 사절단의 격도 높아질 거라고 예상되었다. 일단 승도의 신분이 가볍지 않은 만큼 막부에서도 격에 맞는 사람을 보내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신분을 제대로 맞추어 주자면 최소한 수석 노중이 나와 주어야 했다. 승도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가능하면 일이 빨리 끝났으면 합니다. 일이 길어지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개입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나도 가급적 그리되길 바랍니다.”

승도는 클레망소의 말에 가벼이 대꾸했다. 동영의 막부도 해군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역에서 상당히 많은 군함을 사들였기에 외형상 그 전력은 강주의 해군력을 월등히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그 해상 전력의 상당 부분은 숙련된 해상 승무원의 부족으로 빛 좋은 개살구 신세였고, 운용이 가능한 것들도 많은 수는 중서부의 영주들을 견제하는 용도로 쓰고 있었다. 당장은 막부가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동경만의 대형 프리깃 세 척을 걷어낼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막부는 말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자신이 유리한 고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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