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22화 (222/425)

제222화. 약자들 (2)

연합왕국의 남부 최대 군항인 포드 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군 공창(해군의 조선소)이 있었다. 이 조선소는 지난 삼백 년간 세계를 지배한 왕립 해군의 위상함(1, 2급 전열함)들을 연이어 건조해냈다.

대양의 왕자로 군림한 ‘바다의 군주’ 호를 비롯해 역대 최고,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해온 괴물들을 바다에 내놓으며 왕립 해군의 위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런 위상함들은 적당한 비용으로 ‘적당한 성능’을 낼 수 있도록 건조되는 양산형 전투함들에 비해 비용 면에서 낭비에 가까웠지만, 국가의 위신을 세우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조선소의 도크 안에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괴물의 뼈대가 놓여 있었다.

그 용골로 짐작하자면 추정 만재 배수량 7,000톤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건조된 그 어떤 군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의 괴물.

언제나 세계를 놀라게 한 왕립 해군의 미래를 장식할 차세대 위상함다운 모습이었다. 도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던 세 신사가 막 놓인 용골을 보다 침묵을 깨트렸다.

“이번에 새로 건조하는 군함은 전열함과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비용 면에서도 전열함 건조 비용의 다섯 배에 달한다고 하던데, 성능도 기대만큼 나와 줬으면 합니다. 물론 충분한 검토를 해보고 설계한 것이겠지만 결과가 나쁘면 내각에서도 지원해줄 수 없는 부분이니 실수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재무 차관 티머시는 돈을 퍼먹는 하마를 보며 해군 쪽에 미리 못을 박았다.

장갑함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군함은 그 설계 사상만 놓고 봤을 때 기존의 전투함들과 차원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두드려도 피해를 받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는 ‘바다의 요새’ 개념은 실로 충격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해군은 이 개념을 제시하면서 타국이 먼저 장갑함을 건조하거나 혹은 왕국보다 더 많은 수를 보유할 경우 제해권의 유지가 곤란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한마디로 해양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다면 장갑함에 투자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해군의 주장에 대해 내각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무기 채용에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탓도 있었지만, 해군에 지나치게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였다.

왕국은 전통적으로 국가 총생산의 1% 내외의 비용만으로 거대한 영역의 안보를 유지해 왔다. 제국 유지비용(안전 보장 및 통치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이 왕국의 경제력에 부담을 주면 그 순간 제국 체제가 붕괴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각은 이 같은 이유에서 장갑함의 건조를 허가하면서 단서 조항을 달았다. 시험적으로 2척만 건조하여 성능을 시험해보고 결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해군 쪽에서는 불만족스러웠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돈을 주는 놈이 갑이기 때문이다.

재무 차관이 다시 한 번 장갑함의 성능 문제를 언급하자 해군 조선국장 그랜트가 큰 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성능 문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 해군의 설계는 완벽합니다. 향후 한 세대 동안 우리 연합왕국의 바다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리라 자신합니다.”

그랜트는 자신들이 만들 장갑함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고정식 11인치 주포에 11인치 주포 탄을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압도적인 방어력,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최신 증기 기관까지. 공격과 방어, 기동력까지 기존 군함들과 전혀 다른 수준에 도달한 최강의 괴물이다.

“국장이 자신을 가지고 말해주니 다행이군요.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저 배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습니다.”

하원의원 웨버는 그랜트의 대답에 농담 삼아 대꾸했다. 장갑함이 퍼먹는 예산이 너무 엄청나다 보니 집권 여당에 대한 자유당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돈으로 고아원의 아이들부터 먹여 살리라는 등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지다 보니 장갑함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의원님께서 머리가 아프시다면 로망스도 사정은 비슷할 겁니다.”

그랜트가 그에 답하자 웨버가 반문했다.

“로망스도 장갑함을 건조하고 있단 거요?”

“맞습니다.”

“로망스가 장갑함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의회에 올라오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확실한 이야기입니까?”

“공식적인 루트로 들어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비공식적인 루트로 나오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수상 각하를 제외하면 의회에서 의원님이 처음이십니다.”

그랜트의 대답에 웨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로망스가 장갑함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면 의회에 알려야 하는 것 아니요? 그랬다면 해군성이 예산을 받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재무 차관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장갑함에 대한 신뢰성을 의심하는 시각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해군성에서 의회에 로망스 장갑함 건을 알리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과도 기대할 수 없는데 공연히 정보만 알렸다가 로망스에게 비선을 들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밝혔잖소?”

“어찌 되었든 의원님은 우리 장갑함 건조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아니십니까? 해군성에서 다른 분은 몰라도 의원님은 알고 계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고맙긴 하지만 앞으로도 도와달라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썩 내키진 않는군요.”

웨버의 대답에 그랜트가 씩 웃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앞으로 시험이 끝나면 장갑함의 양산을 시작해야 할 겁니다. 그때가 본격적인 예산 전쟁이 될 것인데, 의원님의 힘이 크게 필요합니다.”

“장갑함이 그리 돈이 많이 든다면 로망스도 몇 척 만들지 못할 것인데 양산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거요?”

“필요합니다.”

그랜트의 대답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무 차관이 끼었다.

“양산을 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정확한 근거가 없다면 성능이 충분하다 해도 양산은 의회에서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겁니다.”

“이유라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웨버가 물었다.

“지금 로망스는 동시에 다섯 척의 장갑함 용골을 놓고 있습니다.”

“……!”

웨버와 재무 차관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연합왕국보다 더 많은 장갑함을 로망스가 일시에 보유하게 된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다. 잠시나마 힘의 균형이 저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만이 아닙니다. 떨거지 취급을 받는 스와질란드를 비롯한 이류 국가들도 장갑함 건조를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두주자인 우리와 로망스가 장갑함을 건조해 성능만 검증해 보이면 그들도 바로 뛰어들겠단 소리입니다. 이런 판이니 시험이 끝나는 대로 양산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니겠습니까?”

그랜트의 말에 웨버가 수염을 매만졌다.

“그 말은 일리가 있지만 공식 루트에서 확인된 정보가 아니라면 의회가 설득되지 않을 거요.”

“맞습니다. 그래서 의원님께 이런 이야기를 하며 부탁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웨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해군은 그에게 빚을 지게 된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갑함 건조 문제에 대해서는 여당 내에서도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유권자들의 표도 잃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도와주지요.”

웨버는 침묵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만약 해군이 주장한 것처럼 로망스가 장갑함을 대량으로 건조하고 있고, 주변국들도 장갑함 건조를 준비하고 있다면 장갑함 양산을 지지한 그의 입지는 놀라울 만큼 높아질 수 있었다.

해군에서는 그의 야심과 성향을 읽고 이번에 공창으로 그를 불러 기공식을 구경시키며 제안을 넣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라를 위한 일에 그 정도야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웨버는 아직 뼈대만 놓인 장갑함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뼈대만 남은 장갑함처럼 지금의 그는 일개 의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양을 호령할 저 배처럼 비상할 기회를 얻을지 몰랐다.

***

아문 포대에는 상승군의 포병대가 주둔해 있었다. 이곳을 주둔지로 삼은 이유는 중요한 상업 도시인 강주에 포성이 크게 들리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기 위한 목적이 하나였고, 두 번째는 금포강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철제 난간이 외국 군함의 진입을 막아주긴 하지만 무장을 감춘 상선까지 막아줄 정도는 아니었다.

위험을 예방하자면 포병이 아문 포대에 주둔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승도와 하비는 이 점에서 견해를 같이하였다. 덕분에 아문에 주둔한 포병대는 금포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박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다.

“적기가 올랐다.”

강상을 감시하던 초병이 적기를 올리자 그 보고는 신속하게 지휘부에 전달되었다. 지휘 체계에서 정보 전달의 신속성을 강조한 왕국 장교들의 지침이 성과를 낸 덕분이었다. 불과 일 분도 되지 않아 하비 대령을 위시한 장교들이 허물어진 성곽 쪽에 올라섰다.

적기는 무장한 선박의 출현을 의미하는 신호였기에 직접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비가 손을 내밀자 옆에 선 장교가 망원경을 건넸다. 하비는 침착하게 망원경을 들고 강상을 보았다.

어차피 강 하류 방향을 보면 되어서 몇 번 살필 것도 없었다. 이내 그의 눈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하비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배들을 살피다 그 마스트에 붙은 깃발을 보았다.

“허가되지 않은 무장 선박입니까?”

그랬다면 철제 난간에서 위협사격을 하는 소리라도 들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비는 망원경을 내리고 장교들에게 말했다.

“오 대인이시네. 예포를 준비하게.”

하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교들이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런 것에서부터 자신들의 역량을 고용주에게 보여주면 차후 급여에 혜택이 있을 거란 기대에 장교들은 병사들을 독려했다.

뻥.

아문 포대 쪽에서 포성이 울리자 배의 선수에서 강주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승도가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암살 시도(?)인가 생각한 간부 몇이 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일단 안전한 수선 하갑판으로 그를 피신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곧이어 울린 포성에 그들은 상황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일정한 운율을 맞추어 울린 포성은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33발의 환영 예포였다.

“긴장할 것 없습니다.”

승도는 포성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로 간부들을 다독였다. 그들은 뜻하지 않은 대포 소리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강주 관리사를 보며 그가 전장에 익숙한 인간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예포 사격을 하는 아문 포대를 뒤로하고 선단은 강주로 미끄러지듯 돌아왔다. 아문 포대의 예포 사격 덕분인지 나루 주변에는 벌써 배가 온 것을 알고 수백이 넘는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배가 멈추고 줄사다리가 내려지자 승도가 먼저 보트에 올랐다. 배를 정박시키는 일까지 지켜보기에는 그는 마음이 조금 급했다. 그와 수행원 몇이 보트를 타고 나루에 도착하자 행상의 관리인들이 나와 맞았다.

“대인,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천만에요. 강주에 별일은 없었습니까?”

“아, 상선이 여러 척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승도는 관리인들과 몇 마디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관리인들은 그가 부재한 동안 서역의 상선이 여러 척 왔다고 말했다.

다만 그들이 온 시기가 의외였다. 늦봄에는 와봐야 향신료와 모직물을 팔기 어려워 행상 쪽에서 매입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북방에 몽땅 팔 수 있는 시기라 해도 대하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내륙으로 상품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시기를 아는 자들이라면 지금 같은 때에 상품을 가져오진 않을 텐데, 자유 상인들이던가요?”

승도는 상품을 가져온 자들이 그리 멍청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정보가 부족해서 실수를 했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물건을 가져왔을 공산이 컸다.

“아닙니다. 로망스 상인들이었습니다.”

“로망스 상인들이?”

승도는 그 말을 듣고 왜 지금 상인들이 왔는지 이유를 알았다. 말하자면 손해를 감수한 무역망의 구축을 노린 ‘투자’였다. 상품을 일단 가져와 헐값에라도 넘기며 안면을 트면 다음에 제 시기를 맞추어 왔을 때 거래가 쉽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의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확실히 인지해두면 다음에는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개인이 이런 손해를 무릅쓰고 선단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니 국가가 주도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로망스에서 동방 무역에 뛰어들 정도로 여력이 많은 민간 자본도 많지 않았으니 답은 바로 나왔다.

‘조카 놈이 본격적으로 동방에 발을 뻗을 생각이라 이거군. 이곳까지 오는 시간을 계산하면 일전에 전권 특사인 에일 백작을 보내놓고 백작이 협상에 대한 보고를 올린 즉시 선단을 보냈다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

전날 승도와 마주했던 로망스 전권 특사 에일 백작은 특이하게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 대양으로 향했다. 아마 신대륙의 전신을 이용해 본국으로 협상 타결에 관한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귀국 방향을 동쪽으로 잡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겠는데.’

승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일이 좀 복잡해지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지만 그에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로망스가 강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시도한다면 그만큼 연합왕국의 주의가 분산될 수 있어서다. 그들의 시선이 분산되는 만큼 그에 대한 견제도 격감하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문제라면 로망스와 연합왕국 사이에서 적당히 줄을 타며 양쪽의 심기를 너무 건드리지 않는 곡예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교에 재능이 없던 승도로서는 꽤나 어려운 숙제였다.

“예, 대인. 틀림없는 로망스 인들이었습니다. 관청에 수속도 밟고 기존의 상관도 배로 확장하고 돌아갔습니다.”

“건물을 몇 채 더 매입한 모양이군요.”

승도는 볼품없는 규모의 로망스 상관을 기억하고 있었다. 창고에 배 두 척의 상품을 채우면 터져버릴 정도로 작은 곳이다 보니 제대로 무역을 하자면 확장은 필수적이었다.

“주변의 장원 네 채를 매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법 큰 규모로 넓혔군요. 상주하는 사람은요?”

“대반 하나에 상주 인원 서른을 남겼습니다.”

그 말에 승도는 적잖이 놀랐다. 동방 무역에서 서역 각국은 상관에 보통 고용인을 제외하면 스무 명 남짓한 상주 인원을 두곤 하였다. 그 이상의 인원은 비용 부담 등으로 두는 것 자체가 낭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망스는 그렇게 했다. 단순한 무역의 목적이라면 그렇지 않을 터. 승도는 그 상주 인원들의 상당수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군인이거나 혹은 로망스 왕이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보낸 학자 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진 연합왕국 쪽이 과격하게 움직일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망스 쪽에서 그만큼 들어왔다면 연합왕국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을 텐데,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까?”

“며칠 전 연합왕국 영사가 우리 행상에 면담 요청을 한 일이 있긴 합니다.”

“그런가요. 잘 알았습니다.”

승도는 관리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이 불러온 마차에 올랐다. 행상의 대기소에는 귀빈을 위해 준비한 마차가 항시 준비되어 있어 탈것을 준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승도가 마차에 오르자 기별을 받고 달려온 강주 관청의 관병들이 마차를 둘러쌌다. 승도가 창을 내리자 마차는 자연스레 장원을 향해 출발했다.

‘영사가 면담을 요청했다면 역시 로망스 인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인데.’

승도는 일단 골치 아픈 문제는 뒤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영사가 그를 한 번 물을 먹인 덕분에 거꾸로 물을 한 번 먹인다고 해서 그쪽에서 항의할 명분은 없었다.

‘일단 면담을 요청한다면 일전의 무례(?)를 핑계 삼아 거절의 구실로 삼는 게 좋겠어. 당장은 연합왕국을 진정시킬 당근도 없고 로망스를 물릴 이유도 없으니까.’

승도는 시간을 끌며 형세를 관망하기로 했다. 로망스와 손을 잡고 연합왕국을 물리친다면 가장 바람직한 결과이겠지만 그들은 왕국을 물리칠 역량이 없었다.

욕심만 연합왕국에 비견할 만큼 클 뿐 능력은 도저히 그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믿을 건 시간이다. 시간만이 유일한 아군이야.’

시간이 지나면 강주의 입지는 굳건해지고 열강의 눈치를 덜 보아도 될 만큼 강건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길 변수들은 지금의 상황을 바꾸어줄 것이다.

하니 시일이 흘러가는 것 이상의 좋은 방법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