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존왕양이 (2)
“무기를 지급한다. 앞줄부터 수령하도록.”
장교들이 병사들을 줄을 세워놓고 소총을 하나씩 주었다.
전장식 소총과 달리 후장식 소총은 그 값부터 매우 비싸 수령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일일이 기입해야 했기에 총기를 나누어주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음.”
장교의 손에서 소총을 건네받은 병사가 신기하다는 듯 매만져 보았다. 최초의 볼트 액션식 소총이다 보니 일단 기존의 소총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장전 절차도 매우 편리하여 총을 쏘고 볼트를 당기면 다음 탄환을 장전할 수 있었다.
병사는 볼트를 당겼다 놓기를 가볍게 반복했다. 장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기존의 소총과는 차이가 많아 교리 확립부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뒤로 장전하는 총이니만큼 전열 전투 방식이 불필요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전장식 소총은 서서 장전을 해야 했던 까닭에 앉거나 혹은 엎드려서 장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후장식은 그런 점에서 자유로웠다.
이 부분은 대단한 강점이었다. 장교들은 그 이점을 교리에 반영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 전열 전투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헨들릭은 입맛을 다셨다.
왕국 육군의 상징과도 같은 전열 전투 방식을 버린다면 어떤 방식으로 보병들을 조련해야 할지 감이 잘 서지 않았다.
“아쉽지만 새 무기의 이점을 살리자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성공적인 방식이 내일의 성공을 담보해 주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주변국 왕실과의 결혼을 통해 국가를 키워온 오스티아가 오늘날에 와서 그 한계를 맞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동군연합(같은 군주를 모신 나라들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제국은 반혁명 전쟁을 계기로 끓어오른 강렬한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 그 의미를 잃고 내부적으로 곯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를 본다면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그 말은 맞지만 마땅한 방식이 없으니 고민이네. 며칠 후에 대인께 시연을 해보여야 할 터인데.”
새 무기가 주어진 만큼 오승도가 병사들의 훈련을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 내에서 오승도가 가진 입지 자체가 상승군에 많은 부분을 기대는 만큼 그들의 훈련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엄폐 위주로 소단위 운용을 고안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장 경험이 풍부한 장교 하나가 제 생각을 밝혔다. 후장식 소총의 이점이 엄폐에 있는 만큼 이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교리를 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가 생각을 내놓자 다른 장교 하나도 입을 열었다.
“엄폐 위주의 방식도 좋지만 화력 위주의 교리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헨들릭이 묻자 장교가 말을 이었다.
“일단 이 신형 소총은 장전이 매우 빠릅니다. 단위 면적당 화력의 이점을 살리기 좋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전열 전투 방식을 조금 바꾸어 써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상대할 적은 모두 전장식 소총 이하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들의 적이 열강이 아닌 이상은 화력에 방점을 두고 교리를 세워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후장식 소총이 이렇게 우리 손에 들어왔다는 것은 언제고 우리 적에게도 후장식 소총이 들어갈지 모른다는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마 대인께서도 그 점을 중요하게 보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하면 엄폐 위주로 생각을 하자 그거군.”
“맞습니다.”
장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정도 방향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적도 후장식 소총을 손에 넣을 것을 대비한 교리를 짜는 것이 좋아 보였다.
적이 후장식을 손에 넣는다면 화력 위주의 교전 방식보다는 엄폐 위주의 방식이 유리하게 먹힐 것이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군복도 바꾸어야 한다는 소린데.”
헨들릭은 그 부분에서 입맛을 다셨다. 화려한 색상의 군복은 전열 전투의 유산이었다. 세계 최강의 붉은 코트와 그에 맞서는 로망스의 푸른 코트. 양자 모두 따지고 보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이유에서 채택된 군복들이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옷들이다 보니 엄폐라는 관점에서는 썩 좋은 군복이 아니었다.
강주군의 군복도 로망스의 그것을 흉내 낸 것이라 엄폐 위주로 교리를 고안하자면 옷부터 바꿀 필요가 있었다.
“필요하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비용이 만만찮게 들겠군.”
헨들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복 자체를 연합왕국에 발주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그 비용은 결코 싸지 않았다. 그 교체 비용만 해도 은 수만 냥을 간단히 넘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합니다.”
“군복 외에도 바꿀 것이 있단 말인가?”
장교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모자 말입니다.”
전열 전투 시대에 군모는 장식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신을 내놓고 싸우는 전투 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구태여 머리를 조준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모자가 방어력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엄폐를 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총을 쏘기 위해서는 수시로 머리가 노출되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모자의 방어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기존의 가죽 모자를 소총탄도 막을 수 있는 철모로 바꾸는 것이 최선이었다.
장교가 이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동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머리 보호구 덕분이었다.
장교의 이야기를 들은 헨들릭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자에 방어력을 넣는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네. 엄폐 전투를 한다면 필요한 장치가 되겠지. 하지만 철로 모자를 만든다면 비용 자체가 적지 않을 텐데.”
“그래도 엄폐 전투를 하려면 필요할 겁니다. 대인께 시연을 보이며 요청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헨들릭은 일단 나온 이야기들에 만족했다. 생소한 무기로 군을 무장시키면서 갖추어야 할 교리와 변화를 고민하며 조금은 막막했는데, 역시 경험이 많은 장교들이라 어느 정도의 방향성은 손쉽게 제시했다.
조금만 더 가다듬은 다음 교리를 연구해보면 새로운 전투 방식을 고안할 것 같았다.
전열 전투와 다른 새로운 교전 방식.
에우로페에서도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교리를 정립할 수 있다면 전쟁사에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거까지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지.’
헨들릭은 생각이 너무 앞서갔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또 자신에게 주어진 무기보다 더 뛰어난 무기가 나와 새롭게 만들 교리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는 판에 전쟁사에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은 오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전열함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해상의 전열 전투를 위해 태어난 전열함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도태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 누구도 그 위치를 의심할 수 없었던 그 군함들도 그럴진대 소총 정도를 위협할 무기가 나오지 않겠는가?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나 더 갖추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종이포를 담을 배낭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사들의 옷에 있는 주머니로는 소총탄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말도 얼핏 듣기에는 일리가 있었다. 후장식 소총의 연사 속도가 워낙 좋다 보니 탄환의 소모량은 기존의 전장식 소총에 비해 훨씬 크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병사 개인당 휴대해야 할 총탄의 수량이 늘어나면 주머니로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긴급하게 쓸 건조식품 등도 함께 휴대하자면 휴대용 배낭은 필수적이었다.
지금까지는 이용이 불편한 봇짐을 썼지만 상대적으로 이용이 편리한 배낭을 쓴다면 병사들도 훨씬 편리한 기동을 할 수 있었다.
문제라면 역시 돈이었다. 철모도 그렇고 배낭도 그렇고 모두 한두 푼이 들어가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헨들릭은 장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 가지는 수긍하고 몇 가지는 덧붙일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어 승도에게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는 새로운 시대에 맞춘 상승군의 모델이 담겨 있었다.
***
조마의 영주 모리는 차갑고 냉혹한 성품을 가진 자였다. 철저한 군국주의 문화를 가진 조마에서 나고 자라 그 정점에 오른 자에게 어울리는 성향이었다.
그는 관용이란 단어를 모르는 잔인한 군주였지만 타협을 아는 합리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수시로 편이 바뀌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동영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리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무사가 올린 서찰을 신중한 눈으로 훑었다. 영주가 서찰을 읽는 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방 안을 채웠다.
숨소리조차 내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무사는 침을 삼켰다. 이윽고 모리가 서찰을 놓았다. 그러곤 뱀처럼 서늘한 눈으로 무사를 보며 물었다.
“동경에 이양선이 떠서 난리가 났다면 이 소식이 왜 이제 내 귀에 들어온 거지?”
동경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주들은 이 정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심복들을 동경에 상주시켜 두고 있었다. 그 심복들이 놀고 있지 않았다면 소식이 제때 전해졌을 것이다.
영주가 상당히 화가 났음을 안 무사가 조심스레 변명을 입에 올렸다.
“장군이 통행 금지령을 내려 사람이 동경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헛소리.”
모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영주인 그가 정보를 늦게 받음으로써 발생할 위험을 생각하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동경의 가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모리의 표정이 굳어져 있음을 안 무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변명은 소용없었다.
“이케다.”
“예, 주군.”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서 조지의 목을 가져와라. 이건 네게 주는 기회이자 내 믿음을 배반한 자에 대한 징벌이기도 하다.”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무사 이케다가 이마를 바닥에 찧고는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조지는 사적으로 그의 삼촌이었지만 영주의 명 앞에 사사로운 관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이곳은 영주의 명령이 하늘의 뜻보다 우선되는 조마 번이었다.
이케다가 다다미방을 물러나는 것을 보던 모리의 눈이 다시 서찰을 향했다.
‘이양선이 나타난 것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지만 그다음이 마음에 걸려.’
모리는 이양선에서 사람이 내린 다음 고산진옥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이양선 자체야 서역 열강들이 동방 진출을 본격화한 18세기부터 자주 출몰하던 것들이었다.
동경만에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특이할 뿐 동영 서반부에서는 일 년에 서너 건씩 보고되는 것이 이양선 출몰이었다.
‘서역인이 배에서 내려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필시 중요한 제안을 던졌을 것인데.’
모리는 막부가 무언가 거래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향항으로 행상이 들어오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로 막부의 군비가 커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머릿속을 맴돌던 판이었다.
‘양이들과 막부가 손을 잡는다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모리는 연합왕국이 동영 영주들에게 무기를 파는 건에 대해 막부가 넌지시 불쾌감을 표시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막부는 로망스와 연수를 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양이는 둘이다. 로망스와 연합왕국.
전자는 말 그대로 막부와 손을 잡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가능성이 있었다. 막부를 장기짝으로 삼아 동영에서 영향력을 키우려고 할 후발 주자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라면 막부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의 군비 증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몹시 곤란한 일이었다.
후자라면 연합왕국이 영주들 대신 막부를 택하고 무기 공급을 끊을 우려가 있었다. 이렇게 되어도 문제는 심각했다.
서역식 무기를 갖추지 못하면 막부와의 군비 격차가 벌어져 종국에는 그 권위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그들 입장에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니, 매우 곤란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란 소리야. 양이들이 장군의 편을 든다면 결국 힘의 격차는 벌어지고 만다는 거지.’
모리는 마른 입술을 가볍게 혀로 축였다.
“밖에 아무도 없나?”
“찾으셨습니까? 주군.”
그 말에 다다미방이 슬쩍 열렸다. 그 너머로 머리를 반쯤 민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번의 중신 중 하나인 가토였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모리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군주의 명이 있자 가토가 의복을 조심스레 정제하고 그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네게 명할 것이 하나 있다.”
“예.”
“지금 영지 내에 있는 번의 중신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영지 내의 중신들을 모두 말입니까?”
“그래, 한 사람의 예외도 있어선 안 된다.”
모리는 딱 끊어서 답했다. 가토는 절을 하고 방을 나섰다. 영주의 명이니 재론을 해선 안 되었다.
모리는 가토가 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양이들이 막부에 힘을 싣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