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25화 (225/425)

제225화. 존왕양이 (3)

결단을 내렸다면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 모리는 뒷짐을 진 채 복도로 나섰다. 가내의 시녀들이 그를 보고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구십 도로 꺾었다.

모리는 그런 시녀들에 시선을 주지 않고 복도를 돌아 밖으로 나왔다.

천수각 밖에는 그의 친위 무사 수십이 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가 밖으로 행차한다는 것을 시종이 미리 언질을 줬던 모양이다.

무사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자 모리는 그 경호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천수각 앞에 마련된 거대한 연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조마 번이 자랑하는 수백의 무사들이 칼을 든 채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잘 조련된 맹호 같은 자들이었다. 칼질 한 번에 힘이 실려 있고 살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들은 총포도 다룰 줄 알았지만 영주가 거하는 처소 주변에서는 총포를 가지고 훈련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모두 칼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조마는 이런 무사들을 만 명 이상 가지고 있었다. 일개 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할 군사력이었다.

오랜 평화에 나태해진 막부가 삼만 남짓한 군대를 직할령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아니 그 이상이다. 우리 조마의 무사들은 천하제일의 강병. 패업을 꿈꿀 기반은 갖춰져 있다.’

모리는 믿음직스런 무사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을 뵙습니다!”

무사들이 영주의 행차를 알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모리는 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있는데 막부가 두려울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는 형세를 지켜보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있었지만, 양이들이 개입한 이상 판세는 바뀌었다. 적이 오기를 기다리기 전에 먼저 친다.

‘이번에 막부를 도모하지 못하면 다음은 없겠지. 양이를 등에 업은 놈들은 더 이상 종이호랑이가 아닐 테니까. 영주들도 바보는 아니야. 놈들도 판세를 읽었을 테니 내 뒤를 바로 밟으려 하진 않겠지. 우리 다음은 자신들일 테니까.’

순망치한의 이치를 생각하면 놈들이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서전에 중립을 지킬 거라고 보아도 좋았다.

‘하지만 우리 쪽의 대의명분이 제대로 먹힌다면, 이쪽에 우호적으로 기울 수도 있는 법이야.’

모리는 양이들과 막부가 손을 잡았다는 부분을 보고 떠올린 절묘한 대의명분 하나를 곱씹었다.

‘존왕양이.’

위로는 천황을 받들어 양이를 배척하겠다는 대의명분은 그 어떤 무기보다 강한 힘을 그에게 줄 수 있었다.

전쟁을 바라는 무사들이라면 이 명분 하나에 목을 내걸고 달려와 기꺼이 조마의 편에 설 터, 그리되면 막부와 자웅을 겨룰 만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막부의 정통성과 존왕양이의 대의명분.

양쪽의 입장이 대등하게 패권을 겨루면, 싸움은 이긴다. 돼지처럼 살만 찐 막부의 버러지들이 조마의 전사들을 어찌 당해낼까?

막부에서 이 점을 의식해 정보를 가능한 한 통제했겠지만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없는 법이었다.

‘하니 양이가 개입하기 전의 지금, 존왕양이를 외칠 수 있는 이때가 천하 대권을 얻을 기회다.’

모리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기회만 잘 살린다면 가문의 오랜 염원을 현실로 이루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동영의 패권만 쥔다면 양이들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테지. 막부만 무너트리면 양이들도 우리 손을 들어줄 것이다.’

모리는 밝은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사실 몇 군데 잘못된 정보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양이는 막부와 손을 잡지 않았다. 동경만에 나타난 양이의 정체는 강주 행상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자들의 대부분이 서역인인 만큼 모리가 내세우려는 대의명분은 동영인들에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합왕국이 막부와 손을 잡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동경에 나타난 양이의 정체에 대한 오판이 부른 위험이었다.

“좋군. 아주 좋아.”

모리는 그 위험도 모른 채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에서 주먹을 쥐어보였다. 조마의 화려한 비상을 생각하며.

***

상승군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장비 요청안은 모두 수락되었다.

염상으로부터 대규모의 자금을 끌어다 동방 무역에 투자하기로 한 덕분에 군비에 투자할 여력이 생겨서다.

승도는 철모와 배낭뿐만 아니라 로망스 장교들이 건의한 각반(무릎 아래 바지를 감아 벗겨지지 않도록 하는 물건. 방한과 방호의 효과도 있음)도 상승군에 제공하기로 했다.

늪지가 많고 수시로 비가 쏟아지는 고온다습한 대륙 남부 지방의 풍토에 꼭 필요한 장비라고 생각해서였다.

이런 사소한 장비들은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여벌의 목숨이 되어주곤 했다. 돈만 많다면 이런 장비들은 가능한 한 다 챙겨주는 편이 유리했다.

아무래도 신참 병사들을 데려다 쓰는 것보다는 고참병들의 사망률을 낮추는 편이 용이해서다.

승도는 장비 보충 건을 통과시키는 김에 보병의 증원도 강행하기로 했다.

제국 정부가 그에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금 군비를 확실히 늘려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드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동안은 돈이 부족해서 하지 못한 일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행상들이 추가로 처분할 차밭과 비단, 포목 등을 합하면 대규모 군비 증강을 밀어붙여도 감당할 여력이 되었다.

승도는 한 번에 사천 명이 넘는 신병을 받기로 했다. 용병과 상승군을 합쳐 약 오천을 약간 넘는 수로 유지해오던 그의 군대를 일만 규모까지 팽창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만이면 로망스의 편제로 사단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사단은 에우로페에서 독립적인 작전이 가능한 가장 낮은 단위의 제대(19세기 기준)였다.

승도가 제 실력을 제대로 내자면 이런 사단을 여럿 부릴 수 있는 군단이나 야전군 규모의 군대를 가져야 했다.

하지만 군대를 그 정도까지 불리는 것은 감당이 되지 않는 문제였다. 지금 그가 지탱할 수 있는 한계는 만이 전부였다. 물론 이 정도로도 승도는 기존에 펼쳐볼 수 없었던 전술적 여지를 시험해볼 수 있었다.

“일만의 군대라면 천국은 내 적수가 안 된다.”

승도는 그 점을 단언할 수 있었다. 새 장비에 숙달이 되고 교리만 정립된다면 그의 일만은 천국의 십만 군대도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정면에서 십만을 녹여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수십만 대군도 다를 것이 없었다. 수십만 대군이 포위할 수 있는 지역으로 들어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의 국력을 가진 집단을 그리 다룰 수 있다면 제국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 그 군비가 완성되는 단계에서는 제국이든 천국이든 오승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제국이 그를 제어할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 단계가 되면 감히 그럴 생각을 품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군사력으로 제국을 정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강주는 새로운 신문물에 익숙한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었지만 대륙을 경영할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승도는 제국을 상대로 싸울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일단 군비 증강이 당겨진 이상 천국의 숨통은 우리 강주가 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고 조정의 구렁이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압도적인 실력을 눈으로 보면 천국 멸망 이후 강주를 제어할 생각을 가졌을 제국이나 열강도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냉엄한 세계는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잔혹한 법이니까.

“대인, 신병 모집 공고를 마련했습니다.”

“내용을 좀 볼까요?”

승도는 건문이 건네준 모집 공고를 보았다. 공고에는 체격과 키를 비롯한 조건들이 명시되어 있었다.

승도는 내용을 쭉 훑다 한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키가 오 척 이상이라는 건 장교들이 넣은 조건입니까?”

“예, 대인. 아무래도 키가 작으면 무기 운용에 문제가 많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승도도 그 부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키가 작으면 총기를 질질 끄는 것은 물론이고 행군 시 보폭을 맞추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를 가지고 제약을 걸면 사람을 뽑기가 곤란했다. 대륙 남방 인들은 대체로 키가 작은 사람들이 많았다.

북방 인들이야 키가 크고 체격이 크다지만 이곳에서 북방 인들을 흔하게 구할 수 있지는 않았다.

“이러면 자원자가 대부분 떨어져 나갈 텐데.”

“그래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별수 없지요.”

승도는 보병 장교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들이 그렇다고 판단한 이상 그 판단은 일단 믿어주어야 했다. 그들을 그 자리에 앉히고 재량권을 준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승도는 다시 내용을 훑다 조건 하나를 입에 올렸다.

“손가락이 없는 자들도 제외한다?”

대륙에서는 손가락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을 하다가 잃기도 했고, 파상풍 등에 대한 처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썩어 들어가는 것을 잘라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손가락이 없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예. 총기를 잡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방아쇠야 검지만 있으면 당길 수 있지 않습니까?”

“손가락이 모자라면 조준 등에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승도는 모집 공고의 조건들을 여러 번 보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건들은 나름 합리적인 기준에서 세워진 것이었지만 이 조건을 모두 맞추면 병역 자원을 모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역시 승도 자신이 한 것처럼 병역 자원에 불충분한 자들을 잘 먹이고 잘 입혀 그냥 쓸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는 것이 낫지 싶었다. 하지만 일단 허락한 부분을 어찌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모집 대상의 폭을 넓히는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고민 끝에 모집 공고에 단서를 하나 달기로 했다.

여자들에게도 군대의 문호를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다른 곳이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여기는 돈벌레들이 사는 강주였다.

이곳에서는 효율만 좋다면 어지간한 일들은 다 용납이 되었다. 서역 양이들과 관련된 것만 제외하면.

승도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에우로페에 살며 여성의 사회 진출을 용인했던 경험도 있거니와, 천국과의 전쟁에서 목격했던 여군의 놀라운 전투력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 기억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여자라고 해서 보호를 받을 만큼 약하지 않다. 잘 훈련만 시키면 강력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새롭게 가지게 된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회 진출을 용인해주는 만큼 여군은 남군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충성을 바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여군을 쓰는 데 있어 문제의 소지가 없지는 않았다.

승도의 단서 조항이 전해지자 곧 장교들이 그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이 부분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내비쳤다.

“대인, 조건만 다 충족되면 여자도 군대에 받아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혹 문제라도 되는 것입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여자들이 어떻게 군대에서 활약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관리부터가 곤란해집니다.”

장교들의 반발에 승도가 난처한 빛을 보이던 차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 말을 받았다.

“여자들도 기회를 주면 충분한 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난 대하 전투를 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죽립을 쓰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승도의 수하로 들어온 천국의 항장 풍겸이었다.

제국 정부로부터 그 신분을 아직 인정받지 못해 장원에서 유령처럼 지내는 신세였지만, 이번 사안에서는 조언을 해달라는 승도의 부탁을 받고 집무실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에 왕국 장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어디까지나 광신도들에 한정된 일입니다.”

“광신도가 되면 없던 무력도 생겨나는 것입니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자들인데 없던 무력도 생긴다고 해야겠지요.”

“그렇다고 하면 왜 남성 광신도들에게는 길을 내주지 않던 상승군이 여성들에게는 길을 내준 겁니까?”

풍겸이 다시 따져 묻자 장교들이 입을 다물었다. 여성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간의 경험으로 그들도 인정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지 여자들을 군대에 받아들이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승도도 그런 장교들을 이해했다. 군대는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교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면서 머릿수를 채우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갑론을박 끝에 승도와 장교들은 ‘엄격한 기준’에 통과한 여자들을 별개의 부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결정은 대륙 역사에 중대한 이정표로 남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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