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28화 (228/425)

제228화. 변수 (3)

동방 무역을 한차례 다녀오자 달력은 어느덧 여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운 남부 지방에서 계절의 변화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지만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있었다.

승도는 달력을 넘겨보다 생일이 불쑥 다가온 것을 보고 세월의 흐름을 절감했다. 어느덧 그가 동방인으로 산 지도 스무 해가 넘었다. 그리 긴 세월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이전의 삶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승도는 잠시 감상에 잠겨 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기로 한 동방 무역 문제를 손대기로 했다. 그가 클레망소를 호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쑥한 차림의 로망스 신사 셋이 그 앞으로 나타났다.

선두에 선 사람은 그가 부른 클레망소였고, 그 좌우에 동행한 자들은 선단에 새롭게 가세한 베테랑 선장들이었다. 항해 경력도 많은 자들이라 이번 선단에서 상선을 맡길 자들이었다.

승도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이번 항해에 대해 물었다.

“금번에 다시 출항을 하게 되었는데 선단 구성은 어떻게 짤 생각입니까?”

대형 프리깃함들을 전부 운용하지 않고 강주 사람들을 배에 태운다면 일단 인력 부족 문제는 만회할 수 있었다. 다음 항해부터는 윈스턴 상회의 사람들을 빼서 데려올 테니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지만.

승도의 물음에 클레망소가 먼저 대답했다.

“상선은 아홉 척 모두 동원할 생각입니다. 일단 초기 투자에서 지분을 확실히 챙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같은 무역이라면 역시 물량을 많이 가지는 쪽이 지분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물량이 적더라도 ‘희소성’이 있는 물품을 독점하는 쪽이 높은 지분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동영 무역에서 가져오는 물품은 모두가 희소한 것들이었다.

그냥 많이 실어오는 만큼 이익을 보는 구조이다 보니 상선을 많이 띄우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선을 모두 동원한다면 선원들을 모두 상선 쪽으로 민다는 이야기인데, 대형 프리깃은 적게 동원할 생각입니까?”

“예. 일단 해상에서의 안전 보장에는 군함 한 척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윈스턴이 작심하고 덤빈다고 해도 프리깃을 당할 전력은 모을 수 없을 겁니다.”

평범한 프리깃함 한 척이면 무장 상선 대여섯 척은 거뜬히 격파하고도 남았다. 하물며 대형 프리깃이라면 열 척 이상이 덤벼도 끄떡없었다. 윈스턴이 보유한 선박을 모두 무장 상선으로 개조하지 않는 이상은 안전 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인원 배분 문제는 어떻게.”

“일단 대형 프리깃함은 띄우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운용 요원은 이백 명만 태울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허장성세로 겁만 주려는 것이다. 나머지 인원을 모두 상선에 집중하면 상선의 운용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상선단의 지휘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일단 에우로페에서 상선을 지휘해서 온 기존 선장들에게 지휘권을 맡길 생각입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선원과 배에 익숙한 사람이 지휘를 맡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클레망소의 밑에서 일을 해온 선원들을 승진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경험과 권위를 생각하면 그편이 잡음이 적었다.

“그리고 프리깃함은 제가 지휘하려 합니다.”

“좋습니다.”

승도는 선단의 편성 문제에 신경 쓸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선적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일단 빈손으로 동영에 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싣고 가서 팔 물건이 있어야 교역에서 이익을 더 남길 수 있었다. 승도는 그에 대해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남방산 침향과 향신료, 그리고 최고급 자기를 싣고 가기로 하지요.”

동영에서도 자기는 생산되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신의 최고급 자기에 비견될 만한 품질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해온 신의 자기가 가지는 권위와 위상에 범접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승도는 그 이름값이면 동영의 상류층들에게 꽤나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막부에 줄 총도 실어야겠지요.”

막부와의 거래에 따라 승도는 대량의 총을 제공할 의무를 가졌다. 총알 역시 제공해야 했는데 부족한 부분은 연합왕국으로부터 수입해서 넘겨주어야 했다. 이 부분은 손해라면 손해일 수 있었지만 막부와의 우호 관계에서 나오는 이익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한 부분이었다.

“총을 채울 공간을 정리하고 남는 공간에 얼마나 상품이 들어갈 수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사람을 태울 공간과 식량도 추가로 확보해야 하는데 그것도 알고 있으시지요?”

“예, 그 부분은 대형 프리깃함 쪽에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승도는 동영과 영관 무역을 위해 행상의 유능한 상인 삼백여 명을 동영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중 백여 명은 향항에 주재하며 상품의 수매 및 관리를 감독하고, 백여 명은 호상을 비롯한 동영 상인들과 막부의 관청에 파견되어 동방 무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다.

남은 백여 명은 막부가 마련해줄 영관의 상점에 보내져 그곳의 상품을 수매하여 향항으로 보내는 일을 담당하기로 했다.

“대형 프리깃함에 다 실어버리면 전투 요원은 거의 태우지 못하겠군요.”

“어차피 군함을 보면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 문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승도는 그의 대답에 긍정의 뜻을 비쳤다.

“그리고 돌아올 때 동영 쪽의 상인들도 이곳 강주로 데려오도록 하세요.”

“동영의 상인들을 말입니까?”

승도가 덧붙인 말에 로망스 인들이 조금 놀랐다.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그도 생각이 있어서 꺼낸 말이었다.

동영 상인들을 강주로 데려오면 세 가지 정도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우선 강주의 행상들이 취급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를 동영에 보여줄 수 있었다. 이쪽이 무엇을 취급하는지 알아야 저쪽도 행상의 상품을 가져다 팔 여지가 생겼다.

두 번째, 동영 상인들과 강주 행상의 관계를 좀 더 돈독히 하는 데 있었다. 어느 일방이 와서 물건을 일방적으로 사고팔고 가는 관계는 역시 거리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직접 이쪽의 상품을 매입하거나 혹은 팔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주면 훨씬 거리도 짧아지고 이익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기 쉬워졌다.

바다 건너에서 장사를 하는 행상의 입장에서는 이런 우군을 만들어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에 하나 막부가 몰락하더라도 이들 상인을 통해 새로운 권력자에게 줄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동영 상인들을 통해 그 배후에 있는 이들에게 강주의 힘과 위상을 똑똑히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전근대의 대상인들은 장사를 하면서 대체로 권력을 끼게 마련이라 동영 거상들의 배후에는 영주나 막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동영 권력자들의 눈과 귀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강주의 힘을 제대로 인식시킨다면 지난 동경만 사건처럼 어떤 경우에도 행상과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었다.

“예, 꼭 데려와야 합니다. 향항의 호상을 비롯해서 데려올 수 있는 상인들은 다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쪽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 매입에 필요한 절차까지 도와준다고 하면 아마 솔깃하게 느끼는 자들도 많을 겁니다.”

좁은 동영에 사는 상인들이라지만 넓은 대륙을 지향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들은 언제라도 대륙에 진출하여 넓은 시장에 발을 담그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인의 말씀대로 그 부분을 신경 써서 처리하겠습니다.”

승도는 대답에 만족한 빛을 보였다. 클레망소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옆에서 소외된 두 선장이 보여 승도는 그들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장베르 선장님과 글로아르 선장님이라고 하셨지요?”

승도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자 두 선장이 다소 감격한 빛을 보이며 답했다.

“예, 대인.”

“이번 항해에서는 두 분의 힘이 크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선단을 맡은 클레망소 경을 도와 항해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합니다.”

“폭풍이 몰아쳐도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승도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방이든 서방이든 갑의 위치에 있는 자가 먼저 악수를 청하는 법이었다. 그가 악수를 청하자 선장들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양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지위로 보면 일국의 대신과 동격인 권력자와 악수를 나눈 것이다. 그들로서는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만 믿겠습니다.”

승도는 그들에게 신뢰의 뜻을 보이고 선단의 출항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

조마 번이 군대를 소집하여 보대 영주들의 군대와 대치한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장군은 조마에 대한 외교적 고립을 진행하는 동시에 직할령으로부터 이만 오천의 군대를 편성했다.

막부의 전체 동원력에 비하면 그리 많은 군세가 아니었지만 수천 리 밖으로 군대를 보낸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마에 대해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의 최대치에 가까웠다.

물론 막부가 동원한 군대는 이 병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존에 동원된 영주들의 군대와 속속 참전의사를 밝힌 자들의 군세까지 합치면 그 수는 사만에 달했다. 사만. 일개 영주를 징벌하는 군대치고는 압도적인 대군이었다.

향항에 주재하던 연합왕국의 영사는 동영 내의 정세가 이처럼 갑작스레 급변하자 크게 당황했다. 북경의 공사는 막부가 로망스와 손을 잡았는지 정확히 확인하라고 독촉해서 그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느닷없이 조마가 거병을 하더니 막부가 조마를 정벌하겠다고 군대를 일으켰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일이 연달아 터지다 보니 영사로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 조마를 방문할 필요를 느꼈다.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 중 하나를 만나야 상황을 판단할 최소한의 생각이라도 할 수 있어서다.

딸랑딸랑.

말에 달린 방울이 계속해서 소리를 냈다. 영사는 그 소리가 좀 거슬렸지만 영사와 친분이 있는 동영 상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해주었기에 그 소리를 참았다.

하긴 그 거슬리는 소리만 빼면 방울 자체는 유용했다. 방울 소리가 나면 길을 가던 일반인들이 무사의 행차인 줄 알고 길 양옆으로 비켜주었기 때문이다.

영사가 땀방울을 닦으며 동행한 무관에게 물었다.

“여기가 조마 번 경계입니까?”

영사의 물음에 무관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독도법을 익히고 있어 무관은 지도를 똑바로 볼 줄 알았다. 산과 강, 들의 모습을 살핀 무관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예, 각하. 조마 번의 경계입니다. 여기서 삼십 리만 더 가면 조마 번의 성에 도착할 겁니다.”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이리 지체되어서야.”

외교적 판단은 언제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내려져야 했다. 외교관들에게 국가가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만큼 외교관들은 국가를 위해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해 의사결정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무관은 영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때 멀리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관이 고개를 들어 보니 말을 탄 무사 일행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각하, 동영 무사들입니다.”

“조마 번의 무사들인 모양이군요. 저들에게 안내를 해달라고 합시다.”

“아, 그렇게 하면 좋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지도를 보면서 길을 찾아가기가 귀찮던 무관이었다. 동영 무사들이 안내를 해주면 일이 수월하고 편했다.

영사 일행은 말을 타고 무사 일행을 향해 똑바로 다가갔다. 그러자 무사들 쪽에서 뭐라고 큰 소리가 날아왔다.

그 말에 영사가 통역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합니까?”

“길을 비키라고 합니다, 각하.”

“뭐요? 감히 대 연합왕국 외교관에게 길을 비키라니. 안내를 맡아도 시원치 않을 것들이. 당장 통역을 하세요.”

통역이 그 말을 얼른 전하지 않고 망설였다. 조마의 무사들은 상당히 호전적인 자들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칼부림을 할 자들이었다. 물론 외교관에게 칼을 쓸 정도는 아니겠지만.

“뭘 합니까? 내 말을 전하지 않고.”

영사가 다시 재촉하자 통역은 눈을 질끈 감고 그 말을 무사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무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말에서 내렸다.

영사는 그제야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는 목덜미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지면이 가까워지더니 의식이 끊어졌다.

“각하!”

야만인들이 감히 외교관을 살해하는 광경을 목격한 무관이 품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이얍’ 하고 괴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러온 무사의 손에 팔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미친놈들.”

영사를 경호하던 붉은 코트 몇이 급히 총을 겨누었지만 일제히 달려든 무사들을 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사들은 능숙하게 칼을 휘둘러 붉은 코트들의 목을 날렸다. 싸움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데다 허를 찔리다 보니 붉은 코트들이라고 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크악.”

붉은 코트 하나가 배를 찔린 채 비명을 질렀다. 무사는 그 처참한 비명을 들으며 희죽 웃었다. 그러곤 그대로 칼을 위로 쳐올리며 붉은 코트의 복부를 갈라버렸다. 뜨끈한 김을 내는 창자가 길바닥 위로 쏟아졌다.

마지막 남은 무관은 잘린 팔을 움켜쥐고 있다 입에 칼을 박고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통역자뿐이었다. 그나마 그가 살아남은 것도 무사들이 공격을 시작한 순간에 재빨리 길옆으로 비켜서 엎드린 덕분이었다.

무사들은 죽은 왕국인들을 차가운 눈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건방진 양이 놈들. 존왕양이의 대의를 가지고 천하를 바로 세우려는 이 마당에 우리더러 길이나 안내하라고?”

“퉤.”

무사들은 죽은 영사 일행을 향해 침을 뱉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조마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건 모리의 대의(?)에 공감하여 이곳으로 달려온 신출내기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나름의 정의감(?)과 무사로서의 특권 의식으로 무장한 덕에 연합왕국 외교관의 목을 간단히 쳐 날릴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리에 현실이라는 관념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면 사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합왕국이 자신들의 적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한 조마의 영주 모리조차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건드린 상대는 세계 최강대국의 외교관이었다. 외교관은 국외에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진 존재였다. 국기 하나만 모욕해도 가만히 있지 않는 연합왕국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는 경악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몰랐다. 조마의 영주 모리가 사건을 알았다면 당장 이 무사들의 목을 날렸을 것이다.

“이 양이 놈들의 시체는 어찌 처리하면 좋겠나?”

존왕양이의 대의에 불타는 무사들에게 시신을 묻어준다는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 질문은 시체를 어떻게 훼손하면 좋겠느냐는 뜻을 갖고 있었다.

“나무에 내걸어 경고를 하는 게 어떻겠나?”

“그 말도 나쁘진 않군. 양이들의 옷을 벗겨서 알몸으로 매달아 두도록 하지.”

무사들은 이내 합의에 도달했다. 시신을 모욕하기로 작정한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그들은 들녘에서 일을 하던 농민들을 불렀다. 특권 계급인 무사의 명령에 농민들이 반항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몰락의 수순을 밟는 무사들이지만 아직 사회에서 가지는 관념상의 지위는 여전했다. 무사들의 명령에 농민들은 양이들의 시체에서 옷을 벗겨냈다. 그 옷은 모두 불에 태우고 금품은 무사들이 챙겼다.

시체는 농민들이 줄로 매달아 나무에 올렸는데 하나같이 목이 없는 것들이라 보기에도 끔찍했다.

무사들은 시체를 매단 나무 옆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양이들의 목을 나란히 올려두었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동영을 모욕한 양이들에 대한 보복으로 충분했다.

“이만 가지.”

무사들은 현장을 대충 정리하고 다시 말에 올랐다. 그들은 영사 일행을 살해하고 얻은 금품과 존왕양이를 실천했다는 만족감에 뿌듯해진 얼굴로 말을 몰아갔다.

그 뒤에 남겨진 영사의 머리가 퀭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무사들을 보았다. 그 눈이 담은 풍경에는 조금의 온기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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