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29화 (229/425)

제229화. 대국 (1)

무릎을 꿇은 가신의 보고에 영주 모리의 미간에 힘줄이 돋았다. 듣고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미친놈들이 연합왕국 외교관 일행을 참살했다는데, 어떻게 수습할지가 막막했다.

아무리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지만 연합왕국과 정면으로 싸울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일개 번이 세계 최강대국과 싸운다는 것부터가 미친 짓이었다. 그들과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는 동방 제일의 대국 신이 보여주었다. 수억의 인구와 백만 대군을 가진 제국도 굴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과의 대결은 곧 자살 행위였다.

하지만 왕국 외교관을 죽인 이상 그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군,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가노 아카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모리는 일단 말을 해보라고 손을 내저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계획한 것보다 이른 시간에 막부군을 격파하고 동영의 지배권을 장악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양이들에게 적당한 먹이를 주고 달랠 수 있을 겁니다. 이문만 준다면 제 부모라도 팔 수 있는 것이 양이들 아니겠습니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주군께서 동영의 권력자가 되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모리는 그 말을 듣고 수염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계속해보게.”

“먼저 강을 건너가서 막부군을 쳐야 합니다. 양이들이 개입하기 전에 말입니다. 양이들이 사실을 알기 전에 막부를 무너트리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변 번을 적으로 돌리지 않겠나?”

번의 경계를 침범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영주는 없었다. 제 영지를 침입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니, 가만히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었다.

“속전속결로 가는 겁니다.”

모리는 아카의 말을 곱씹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속전속결로 승부를 낼 수만 있다면 이번 위기는 극복할 수 있었다. 아니, 호기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양이들의 목을 친 것으로 존왕양이의 의지를 분명히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군, 막부가 이 사건을 눈치채면 절대 강을 건너오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양이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걸 묵인하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며 이익을 챙기겠지요. 일이 그리되기를 원하십니까? 도강을 결정하심이 옳은 줄로 아룁니다.”

모리는 생각에 잠겼다. 당초 막부를 상대로 방어전을 생각했던 것도 그들을 자신들의 앞마당으로 끌어들여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강을 한다면 우리 군이 불리한 입장에서 싸우게 될 텐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 우리 군이 도강할 거라 예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아카의 대답에 가신들도 동조했다.

“아카 공의 말이 옳습니다, 주군. 지금 우리가 도강할 거라고 예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 시기를 노려 강을 건너가 보대 영주들의 군대를 날려버리고 경도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보급 문제는 어찌하려고 하나?”

군의 이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보급이었다. 인간이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보니 쌀의 보급은 필수적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소모되는 총탄이야 휴대한 것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먹는 것만큼은 계속해서 보충이 필요했다.

“경도로 가는 도상에 대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쌀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판까지 지고 갈 쌀만 있으면 충분하단 얘기군.”

대판은 동영의 미곡이 모이는 곳으로 동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미곡 시장이 발달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축적된 미곡은 평시에도 4백만 석을 간단히 넘겼다. 조마군대가 아니라 조마 번 전체를 십 년은 먹여 살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쌀이 그곳에 있었다.

“막부군은?”

“우리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 대판을 선점할 수 있다면 적의 허를 찌를 수 있습니다.”

적이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친다. 할 수만 있다면 승산을 높여줄 수 있는 방법이 될 만했다.

“하는 수 없군. 자네들 말대로 도강하는 방법이 최선인 듯싶으니 강을 건너 막부군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모으도록 하지.”

“영명하십니다.”

모리는 도강을 결심했다.

밤이 깊어지자 조마 번은 이천의 정예 병력을 가지고 도강을 시도했다. 그들이 도강을 시도하는 강이 그리 넓지도, 깊지도 않아 도하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부 운이 나쁜 자들은 움푹 파인 곳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별문제 없이 도하를 마쳤다.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실시한 도강 작업이라 조마 번과 대치하고 있던 보대 영주들의 군대는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전쟁 경험이 있었다면 상대가 건너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그에 대비했겠지만, 이백 년이 넘는 평화에 찌든 영주들은 전쟁에 대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화려한 막사에서 휘하 가신들과 술잔을 나누는데 정신이 팔렸다.

“이번 토벌 전은 이백여 년 만에 장군이 친정하는 전쟁이요. 이번에 조마가 개역(영지 몰수)이나 감봉(영지 축소), 전봉(영지 변경)의 벌을 받게 되면 그 토지는 공을 세운 우리에게 조금은 돌아오지 않겠소?”

“아마 그리될 수도 있을 겁니다. 장군이 쪼잔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그 정도 상급은 베풀어야지요. 그리하지 않고 어찌 천하(동영) 제후들을 이끈다고 말하겠습니까?”

영주들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모처럼 영지가 늘어날 기회를 맞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이참에 막부에도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으니, 이번 전쟁은 여러 모로 남는 장사였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이번 전쟁이 장기화해서 번의 재정이 축나는 거요.”

전쟁이 길어지면 자연히 전쟁에 참가한 영주들의 부담도 커지게 마련이다. 병사 몇 백을 동원하고 있어도 평시의 몇 곱절에 드는 비용을 써야 했다. 하물며 수천이면 영지의 재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들은 조마 번만큼 강성한 영지를 다스리는 게 아니다 보니 군대를 소집해 유지하는 것 자체가 버거웠다.

“일이 그리되진 않을 겁니다. 장군이 친정하고 천하 제후들이 모두 조마를 징벌하겠다고 나서는 일인데, 조마가 오래 견디겠습니까? 자. 한 잔 더 받으세요.”

영주들은 불콰한 얼굴이 되어 잔을 주고받았다. 술이 몇 순배 더 돌았을 때 별안간 함성 소리와 함께 사위가 시끄러워졌다.

“게 무슨 일이냐?”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묻자 무사 하나가 급히 막사로 들어와 고했다.

“주군, 조마 번이 기습해 왔습니다. 지금 밖은 온통 적세로 가득 차 있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뭐?”

영주는 그 말에 흠칫 놀랐다. 대번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총성도 섞여 들리는 것이 적의 기습이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어이가 없어 무사에게 물었다.

“정말 조마 놈들이 우리를 기습해온 것이더냐?”

“예, 주군. 틀림없이 조마의 군마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영주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조마의 공격에 그도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주변 번까지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하고 강을 건너와 선공을 가하다니. 정말이지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두 영주는 무사의 부축을 받아 막사 밖으로 나섰다. 횃불이 일렁거리는 곳마다 한창 무기를 쥔 자들이 칼을 섞고 있었다.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어우러져 막사 주변은 아수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놈들이 정말 미쳤나 봅니다.”

“주변 번들을 전부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고서야 어찌.”

장군의 깃발을 든 군대가 아니고서는 다른 번의 경계를 넘는 것은 금기이지만, 조마는 그 금기를 깨트렸다. 자칫하면 관례도 무시하고 영주들의 목까지 치겠다고 나올지 몰랐다. 조마의 영주 모리는 원래 포악하고 잔인한 자였으니까.

영주들은 생각이 그에 미쳤는지 얼굴빛이 해쓱해졌다.

이날, 조마의 군대는 번의 경계를 넘어 막부의 명을 받고 경계에서 대기 중이던 보대 영주 군대 둘을 날려버렸다. 이 공격으로 막부와 조마의 대결은 기존의 관례를 완전히 무시한 전쟁다운 전쟁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

장군은 경도에서 주력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조마 번의 항명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마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뭔가 생각이 있어서 반기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역시 다른 번들과 손을 잡고 막부와 대항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일단 의심스런 번들이 없지는 않았다. 막부의 근친들로 이루어진 친 번 영주들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막부와의 혈연관계가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고대 대륙의 통일 왕조들이 이성(다른 성) 제후들보다 희성(동성) 제후들의 위협에 시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단 이들도 의심 대상에 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막부의 계승권 문제와 얽힌 번들이 의심스러웠다. 지금의 장군은 방계 출신에서 배출된 사람이었기에 계승권을 가진 다른 방계들로부터 적의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장군의 집안보다 계승권이 높은 자들도 몇 있었다.

두 번째 부류는 가신 출신들로 이루어진 보대 영주들. 이들 역시 최초의 장군 가문으로부터 봉토를 받고 떨어져나간 지 수백 년이 된 자들로 막부와의 관계는 상당히 희미해져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막부의 기나긴 통치 기간 중 장군가에 대한 봉사 부족 등으로 감봉(영지 축소)과 전봉(영지 변경)의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영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땅이라고 한다면 불만을 품는 자들이 더러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 번째 부류는 잠재적 적대자인 외양 대번. 막부의 친족도, 가신 출신도 아닌 자들로 막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이익만 보장되면 서슴없이 막부에 칼을 들이밀 수 있는 부류라고 할 수 있었다.

당장 반기를 든 조마만 해도 이 외양 대번 중 하나였다. 외양 대번 중 몇이 조마와 나란히 선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장군은 혐의가 가는 번들의 명단을 대강 헤아려 보았다. 그러곤 그 명단에 든 번들 하나하나와 막부의 정치적, 경제적, 혈연적 관계를 따지고, 조마의 편에 가담했을 때의 이해득실도 따져보았다. 이리 추리고 저리 추려내고 나니 대충 혐의가 가는 번은 모두 다섯이었다.

장군은 그 다섯 개의 번을 조마의 전력에 넣고 양자의 전력 차를 비교해 보았다. 거기에 조마의 구호에 선동될 무사들을 더했다.

‘백중세인가.’

막부가 원정군이라는 가정 하에 따져본 전력에서 양자의 전력은 비등비등했다. 확실히 조마가 해볼 만한 도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은 좀 더 긴 흐름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선 막부의 이점을 살려 그들을 압박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막부의 이점이라면 일단 압도적인 경제력을 들 수 있었다. 막부는 대판의 미곡 시장이 없어도 자력으로 대군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어지간히 밀린다고 해도 양곡 부족으로 항복할 이유가 없었다.

전쟁이 초장기화하면 대판의 미곡 시장 없이는 조마는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질질 끄는 단계에서 막부의 손해도 크지만 조마를 확실히 밟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점은 우세한 해운 역량이었다. 강주 해군에 무력하게 동경만을 내주긴 했지만 막부 해군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력은 언제나 대판과 향항을 비롯한 동영 서반부에 머무르며 막부의 서부 직할령을 지키고 있었다.

이 해군력이라면 조마 하나의 해상 전력 정도는 간단히 압도할 수 있었다. 이 함대로 서부의 해상을 봉쇄한다면 혹여 조마를 도울지 모를 번들의 지원을 차단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이점은 동영의 중앙 정부로서 가진 외교 역량이다. 동영을 지배하는 집단이다 보니 외국과의 교섭에서 가지는 발언권은 막부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외부와 교섭하기에 따라 조마에 대한 원조를 원천 차단하고 자신들이 원조를 받을 수도 있었다.

장군은 이점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이점을 살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단시간에 조마를 제압하려면 역시 위험을 무릅쓴 일전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오오이시, 밖에 있는가?”

“예, 주군.”

“잠시 들어와 보게.”

다다미방이 열렸다. 오오이시는 좌우에서 문을 잡은 시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고개를 아래로 한 채 장군 앞까지 걸어와 앉았다.

오오이시가 자신의 앞에 마련된 방석에 앉자 장군이 입을 열었다.

“조마가 반기를 든 문제 말인데. 그자들을 번의 경계 밖으로 끌어낼 방법이 없겠나? 그 안으로 들어가서 싸우기에는 좀 부담스럽고, 밖에서 자멸하기를 기다리자니 막부의 권위가 너무 손상될 것 같아서 말이야.”

장군의 물음에 오오이시가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장군이 원하는 것은 조마군대의 타 번 침입. 그를 통한 주변 번들의 막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유리한 전장에서의 교전이다.

하지만 조마의 영주 모리가 멍청한 자가 아닌 이상 일이 그리 수월하게 풀릴 가능성은 없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모리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버티며 조급해진 막부군대가 제가 원하는 전장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유인을 하려면 최소한 그 여우같은 모리에게 이길 만한 미끼를 던져주어야 할 겁니다. 주군께서도 아시듯 모리가 막부와 장기전을 벌이려면 대판의 미곡시장이 필요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단기전을 치르는 것은 불쾌한 일이지만, 조마도 병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곡을 미끼로 놈을 꾀어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놈이 쉽게 걸리진 않을 거란 말이지.”

“그거라면 쉽습니다. 지금 대판으로 가는 길에는 우리 측 군대가 일만 남짓한 수준입니다. 모리가 힘이 없어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대판 점령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입니다. 대판의 미곡상인들 사이에 횡령에 대한 소문을 돌리고 대판의 가신 오쿠보의 처벌 문제를 논하십시오. 그다음 오쿠보가 대판의 군사와 창고를 가지고 투항하겠다는 서찰을 조마에 보내면 놈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오오이시의 이야기에 장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걸려들겠군. 그 여우 놈이라도. 일전에 회진 번의 영주를 시켜 넌지시 놈의 자만심도 북돋아 주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주군.”

“좋아. 자네 말대로 처결하지. 물론 그 전에 오쿠보에게 서찰을 보내 그가 놀라지 않도록 손도 써두게. 알겠나?”

“주군의 명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될 수 있도록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장군은 오오이시에게 그만 물러가 보라고 말했다. 그간 조마를 어떻게 손봐줄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오오이시의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우리 막부에 대항하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 천하 제후들에게 본을 보일 수 있겠군. 이백여 년 만에 개역(영지 몰수)을 단행하여 막부의 권위가 얼마나 높은지를 모두가 똑똑히 알 수 있게 해주겠다. 그리하면 연합왕국의 양이들도 더는 협잡을 하려는 생각을 품진 않겠지. 좋아.’

장군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시녀를 불렀다. 오늘 밤은 잔뜩 취하도록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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