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대국 (2)
강주 양행은 아홉 척의 상선과 한 척의 대형 프리깃함으로 이루어진 선단을 동방으로 띄웠다. 선적한 상품은 남방의 향신료와 고급 도자기, 침향 등이었다. 백 년 전만 해도 생사와 견직물(비단) 등을 요구하던 동영에 수출하는 상품치고는 이상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을 폭발시킨 연합왕국이 값싼 면사와 면직물을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생사와 견직물은 경쟁력을 잃었다. 승도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상품을 골라 선적했다.
양행이 동방 무역을 위한 선단을 띄웠다는 소식은 곧 아문으로 전해졌다. 처음부터 그들이 윈스턴 상회의 독점을 깨트리기를 원하던 동방 무역 회사는 그 사실에 흡족해했다.
상회의 회장 윈스턴 블레이크는 회사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동방 무역의 지분이 침식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중지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한참 회사 간부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며 갖가지 대응 방법을 쏟아내고 있는데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급히 들어온 침입자의 모습에 회사 중역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회의 중에 무슨 일인가?”
회사 간부들의 날 선 시선을 한눈에 받게 된 사내는 잠시 움찔하다 조심스레 회장에게 다가가 쪽지를 건넸다. 그 쪽지를 받아본 윈스턴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얼굴빛이 변한 것을 본 간부 하나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
“동영에서 전쟁이 터졌네.”
“전쟁이라니요?”
회의장이 금세 어수선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책을 논의하던 입들이 동영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윈스턴은 이 놀라운 소식이 어떤 파장을 미칠지 몰라 한참 쪽지만 들여다보았다.
“동영에서 전쟁이 터졌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에 하나 동영 전체를 휩쓰는 규모의 전쟁이라면 동방 무역 전체가 마비될 겁니다.”
“그건 안 될 일이야.”
윈스턴은 그제야 상황을 똑바로 인식했다. 전쟁이 났다면 당연히 무역에도 문제가 생긴다. 상황이 심각하다면 무역 자체가 휴업 상태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동방 무역에 최대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윈스턴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까?”
간부의 물음에 윈스턴은 대답 대신 쪽지를 건넸다. 간부는 손에 들어온 쪽지를 읽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마가 막부에 반기를 든 상황이라면 심각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조마가 막부의 적대자라면 동영 중서부의 운송 망이 마비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동영에서 나는 금과 은, 유황, 구리의 많은 부분이 동부와 중부 지방에서 서부의 향항으로 운송되는 까닭에 운송 망의 마비는 치명적이었다.
향항에 가도 살 수 있는 상품이 없다면 끝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모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일단 급한 대로 아문에 남은 배들을 전부 향항으로 보내야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전쟁으로 향항이 마비될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회장이 반문하자 간부가 생각을 밝혔다.
“무역이 마비된다고 해도 향항에는 재고 물품이 있습니다. 그 물품이라도 확보해야 무역 마비 상태에서도 동방 무역의 지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급이 마비되면 값을 높여 부를 수 있었다. 이익의 측면에서 보자면 일정한 물량만 확보하면 손해의 폭은 낮출 수 있었다.
다만 선단이 도착할 때까지 향항에 상품이 남아 있거나 전화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일리가 없진 않군. 해리, 지금 아문에 우리 회사의 배가 얼마나 남아 있나?”
“얼마 전 강주 양행의 대형 프리깃 때문에 배들이 모두 묶여 있다가 무역에 나선 상황이라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배 여섯 척이 전부입니다.”
윈스턴은 그 대답에 인상을 썼다. 평소 무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아문에는 최소한 스무 척의 상선이 정박해 있어야 했다. 겨우 여섯 척이라니. 강주 양행과 오승도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빌어먹을 강주 양행.”
윈스턴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상회의 동방 무역 지분이 달린 상황에서 일을 이렇게 꼬아 놓았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회장님, 화를 내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배에 물건을 싣고 동영으로 출발하게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오승도가 선단을 보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중역들의 말에 윈스턴은 놀라운 소식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오승도가 동영으로 열 척의 배를 띄웠다는 부분 말이다.
만에 하나 오승도의 강주 양행의 배들이 상품을 독식한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졌다.
윈스턴은 그 생각을 하니 갈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옆에 있던 사용인이 물을 가져다주자 그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회장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배에 선적할 상품은 어떻게 채우겠나?”
무역은 아무 상품이나 싣고 가서 파는 일이 아니었다. 엄선된 상품을 가지고 가서 팔고 그곳의 상품을 사오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동영에 파는 상품은 연합왕국산 면직물과 향신료, 모직물 등이었다.
이 상품들은 지난번의 태업(?)으로 운송이 지연된 탓에 아직 창고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재고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분량은 동영으로 출발한 다섯 척이 모두 싣고 가버렸다. 윈스턴 상회로서는 팔려고 해도 팔 상품이 창고에 없었다.
“일단 생사와 견직물이라도 가져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존에 동영인들이 사가던 품목이니 가져가면 분명 팔아치울 수는 있었다. 면직물과 모직물에 비해 이문이 박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싣고만 간다면 나쁘지는 않았다.
“아, 그게 있었군. 그건 창고에 남아 있나?”
“취급하는 상품이 아니라 재고가 없습니다. 일단 주문부터 해야 합니다.”
“주문부터 해야 한다면 물량 확보는 얼마나 걸리겠나?”
“짧아도 사흘은 각오해야 합니다.”
배 한 척에 채울 물량이라면 근처를 수소문해서 하루 안에 채우겠지만, 여섯 척을 채우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주문부터 서둘러주게.”
“예, 회장님.”
중역 하나가 지시를 받고 얼른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윈스턴은 한 사람이 나가며 생긴 빈자리에 시선을 두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해군의 초계 계획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구해오게.”
“오승도의 습격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그놈이 그냥 있을 놈이 아니지 않나?”
지난 아딘 상회 처리건만 해도 그랬다. 명색이 번듯한 조정의 관료요, 권력자라는 인간이 정말 단순 무식한 방식으로 상회를 날려버렸다.
“알겠습니다. 조사해서 가져오겠습니다.”
“혼자 가지 말고 가는 길에 선단장과 같이 가도록 하게.”
중역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해군의 초계 계획에 맞추어 선단의 항해 루트를 짜자면 선단장도 같이 다녀올 필요가 있었다.
“하나 더 손을 쓰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 간부가 입을 열자 회장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게 뭔가?”
“전쟁 소식이 아문에 들어온 이상 자유 상인들도 향항으로 모두 가려고 할 겁니다. 한 배에 상품만 실어와도 떼돈을 벌 기회이니 너도, 나도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맞네. 하면?”
“리브 남작께 도움을 청해 항구를 일시 마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회장은 간부의 말을 알아들었다. 경쟁자는 가능한 줄여야 한다. 상품을 확실히 독점하려면 애초에 그 싹을 잘라야 했다. 출발한 강주 양행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나머지는 일단 막아야 했다.
“좋은 지적이네. 내 곧 리브 남작을 뵙고 손을 쓰도록 하지.”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 놓인 중절모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남아 있는 중역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모두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역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자 윈스턴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행원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제 회사의 사활을 걸고 빠르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
동방 무역에 사활을 건 이해 당사자들이 바다 위의 경주를 시작하던 즈음, 조마 번의 군대는 무서운 속도로 동쪽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대판. 동영의 미곡 시장을 장악하여 경제력을 확보하려는 것이 대판을 노리는 주된 이유였다.
막부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대응을 강구했지만 이미 허를 찔린 다음이었다. 막부가 대판으로 가는 도상을 매우 무르게 방어한 탓에 조마군대는 칠 주야도 지나지 않아 대판 근처까지 육박했다.
막부는 이 매서운 진격을 막기 위해 경도에 우선 도착한 영주들의 군대와 막부군의 일부를 모아 조마군을 막게 했다. 군대의 지휘는 막부의 중신 아베가 맡았다.
아베는 모두 칠천의 군대를 받아 대판으로 들어가는 도상의 길목을 막아섰다. 이곳은 북으로는 높은 산지를 끼고 있고, 남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있어 열도의 동서 교통로에 몇 안 되는 병목 지역 중 하나였다.
이곳은 지형이 좁은 것도 모자라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세를 이루고 있어 공격자가 어느 정도의 이점을 누릴 여지가 전혀 없었다.
투레질하는 말의 고삐를 잡은 조마 영주 모리가 천리경을 들고 동쪽에 있는 막부의 진영을 보았다. 막부군대는 예상한 것처럼 고속 기동에 허를 찔려 대판 방어에 충분한 전력을 동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판만 장악하면 경도도 함께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막부와 대등, 아니 그 이상의 입장에서 천하를 다툴 수 있게 되겠지.’
동영의 천년 수도인 경도를 손에 넣으면 명분상으로 장군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거기에 갖게 될 기세라는 것을 생각하면 동경까지 진격해 막부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당장 저 협목부터 넘을 생각을 하는 게 먼저다.’
영주 모리는 수염을 매만지다 곁에 있는 가신들에게 물었다.
“협목은 지형이 협소한 병목 지점이라 우리 군의 우세를 살리기에 좋지 않은 전장인데 좋은 방법이 없겠나?”
“대포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없는 물건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좁은 지역이다 보니 일단 근접전은 무리입니다. 천천히 총포로 적을 녹여나가는 수밖에는.”
“적의 눈만 가린다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가신들의 이야기를 듣던 모리가 입맛을 다셨다. 조마가 자랑하는 정예 강군의 실력을 발휘하자면 적과 접적할 공간이 넓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이상은 시간만 오래 가는 소모전이 될 뿐이었다.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무익한 싸움이었다.
“눈을 가린다. 안개라도 끼지 않는 다음에야 그럴 방법은 없겠지.”
모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가노 아카가 그 말을 받았다.
“안개라면 한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노가 방법이 있다고 하자 영주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안개를 만들 방법이라도 있는가?”
“실은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아카는 무사 계급 출신이었지만 모범적인 무사로 자란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 장난을 좋아했는데 가장 좋아한 일이 짚단을 가지고 불을 피우는 일이었다.
불을 피울 때는 마른 짚으로 해야 잘 탔고, 젖은 짚으로 하면 연기가 심하게 났다. 연기가 많이 날 때는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아카는 바로 자신의 어릴 적 기억에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젖은 짚으로 연기를 피워 상대의 눈을 가린다?”
“예, 주군. 지형도 이쪽이 낮아 바람이 불지 않는 한은 저쪽을 향해 연기가 올라가게 됩니다. 따라서 적은 우리를 향해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는 입장에서 공격을 당하게 될 겁니다.”
아카는 간단한 발상 하나로 지형의 불리함을 오히려 이점으로 바꾸었다. 연기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생각이네. 그 방법이라면 할 만하겠어.”
모리는 진심으로 그 생각에 탄복했다. 이 방법은 어렵지 않게 당장 쓸 수 있었다. 풀이야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었다. 풀을 말릴 필요도 없으니 시간은 더욱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준비시키게.”
“예, 주군.”
아카가 소매를 모아 읍을 하고 가신들에게 지시하기 위해 물러났다.
조마군대가 협목 앞에서 잠시 지체하고 있자 아베는 그들이 막부군의 방어 태세를 뚫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협목을 돌파하려면 대포를 가져와야 하는데 시간상으로 보면 절대 대포를 운반해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마가 돌파를 시도하려면 대포를 운반해올 수십 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면 장군이 대군을 가져오고 남을 터. 조마로서는 무익한 싸움을 할 바에 역으로 이 협목의 입구를 막고 방어를 굳히는 편이 이익일 수도 있었다.
친 막부파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한 회진 번의 영주는 뒷짐을 진 채 상대의 진영을 내려다보았다. 적의 움직임은 없었지만 모리의 교활함을 생각하면 적이 이대로 허송세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 이곳에서 멈출 생각이었다면 번의 국계를 넘지 않았을 터. 모리가 반드시 이곳을 공격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리타.”
“예, 주군.”
영주의 부름에 기본이 무릎을 꿇고 명을 받을 준비를 했다.
“우리 무사들이 배치된 진영은 어디냐?”
“진영의 선두입니다.”
“진영 배치를 담당하는 자는?”
“막부의 방계 출신 오토입니다.”
영주는 그 말을 듣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금 백 냥을 줄 테니 그걸 오토에게 주며 우리 군의 진영을 뒤로 배치해 달라고 청탁해라.”
“오토 공이 주군을 배려하여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어찌 복을 놓으십니까?”
동영에서는 명성이 있거나 혹은 신뢰하는 자를 선두에 세우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명예도 주었다. 처음 창을 날린 자에게 ‘일번 창’과 같은 명예로운 호칭을 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니 대열의 선두에 선다는 것은 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은 영주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아뢰었다. 하지만 영주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생각이 있으니 시킨 것이다. 내 명이 명 같지도 않은 것이냐?”
“아닙니다. 소신이 불충하였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좋아. 지금 가서 내 명을 즉시 전해라.”
기본은 영주의 명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기본이 뒤로 물러가자 영주는 수염을 매만졌다.
‘조마는 간단한 자들이 아니다. 이번 싸움은 어려울 거란 예감이 들어. 지금은 구태여 앞에 나서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싸움은 이길 수 있을 때 나서는 것으로 충분해.’
그 역시 천하 대권에 야심을 가진 영주 중 하나. 큰 그림을 보고 움직이는 그는 작은 공 하나에 연연하지 않았다.
회진의 영주는 멀리 보이는 조마의 진영을 응시하다 뒷짐을 진 채 자기 진영을 향해 돌아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