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39화 (239/425)

제239화. 강자의 권리 (3)

가산은 사발을 엎어 놓은 완만한 평지 지형을 하고 있었다. 평원의 중심은 비교적 높고 가장자리는 지대가 낮았다. 방어자라면 당연히 평원의 중심을 차지하고 상대가 우회할 수 있는 길을 끊을 수 있도록 포진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막부는 그에 맞는 진형을 골랐다. 중앙은 장군이 이끄는 일만의 군대가 포진했고, 좌우익은 각각 가신들이 지휘하는 일만의 군대가 자리했다. 고지를 점한 덕분에 막부는 적의 움직임에 대해 보다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과 누렸다.

하지만 조마의 주력 부대에 비해 수적으로 뒤진다는 점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단점이었다. 막부가 직할령에서 동원 가능한 전 병력을 가산에 투입하지 못한 것은 혹시나 영주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까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 단점은 영주들과의 연합 병력이 경도를 거쳐 가산으로 내려올 시점이 되면 상쇄될 부분이었기에 ‘시간제한이 붙은 단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마군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오오이시의 말에 장군이 천리경을 들었다. 멀리 기를 세우고 천천히 접근해오고 있는 조마의 대군이 보였다. 중앙에는 대규모 기마 세력과 모리의 친위 병력이 있었고, 우익에는 강력한 철포 부대가 있었다. 좌익은 전통적인 무사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포진만 놓고 보면 화력의 중심을 군의 우익에 두어 막부군의 좌익부터 노리겠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모리 놈이 좌익부터 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군.”

“좌익에 집중 타격을 가하면 자연히 중원에서 병력을 빼내야 하는데 그 점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전술적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막부군은 좌우 날개보다 장군이 있는 중원에 힘을 싣고 있어 날개가 약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날개를 부러트리면 중앙에서 병력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기마 전력을 투입하면 일시에 장군의 지휘부를 타격할 수 있었다.

전근대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다 보니 양군 모두 수뇌부가 타격당하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모리의 노림수가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아군 좌익이 흔들릴 때 구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지. 만약 우익에서 병력을 빼면 시간도 걸리고 우익도 흔들릴 수 있을 테니까.”

“옳으십니다.”

장군과 가신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조마의 대군이 포진을 마쳤다. 쌍방이 서로를 마주한 채 대치하자 팽팽한 긴장감이 전장을 맴돌았다.

곧 조마 진영에서 말을 탄 사내 하나가 나왔다.

“주군께서 말씀하셨다. 장군이 머리를 숙이고 나온다면 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군가의 존속도 지켜 주겠다고 하셨다. 지금이라도 우리 주군께 머리를 숙이는 것이 어떠한가?”

그 말에 장군의 가신들이 분격했다. 장군이 눈짓을 하자 막부 진영에서도 장수 하나가 말을 타고 나섰다.

“허튼소리. 일개 번의 영주 따위가 감히 장군께 무릎을 꿇어라 말하는 것이냐. 지나가는 개도 아는 법도도 모르는 놈이구나. 네놈 주군더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라고 해라.”

“우리 주군의 자비를 거절할 생각이냐?”

“자비는 장군께서 베푸실 수 있는 것이다. 허튼소리 할 시간이 있으면 어서 와서 자비를 간청하도록 해라.”

양측의 장수들은 서로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곧 두 사내가 각각 진영으로 돌아오자 장군이 천리경을 내렸다.

“간을 본 것 같으니 공격을 시작하겠군.”

장군의 말대로 이내 북소리가 울렸다. 이어 척척 소리를 내며 조마의 군대가 앞으로 나아왔다. 처음 포진을 그대로 유지하며 나아오는 것이 기세 하나만은 대단했다. 동영 제일의 강병다운 면모였다.

하지만 막부군이라고 그에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중앙군. 저들은 어디까지나 반군에 지나지 않았다. 관군이 반군에 밀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투 준비!”

막부의 장수들이 칼을 뽑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다음 순간 조마의 진영 한쪽이 앞으로 돌출하여 빠르게 치고 나왔다. 예상한 우익이 아니라 좌익의 무사들이었다.

함성을 지르며 좌익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막부 측 우익도 총의 장전을 서둘렀다.

“사격 준비!”

병사들이 사격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조마 무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막부 진영을 향해 육박했다.

“조준!”

거리가 웬만큼 가까워지자 막부 장수들의 명령이 터졌다. 선두에 선 병사들이 총을 겨누었다. 그들은 심호흡을 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훈련이 썩 잘된 병사들은 아니었기에 아직 조준은 고사하고 사격 준비도 마치지 못한 병사도 있었다.

조마 무사들은 적이 자신들을 겨눈 것을 보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적의 기세를 꺾기 위함이었다. 적의 사기를 꺾어야 자신들이 총을 맞을 확률이 낮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무사들의 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막부 장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사격!”

불꽃과 함께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앞으로 내달리던 무사들이 발을 헛디딘 것처럼 연달아 쓰러졌다. 잘 조준된 사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총탄이 날아가다 보니 희생자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머리가 반쪽이 날아간 무사, 팔다리에 총탄을 맞고 바닥을 구르는 자, 견갑골이 부러져 칼을 놓은 자 등 각양각색의 피해자들이 나왔다. 조마 무사들은 비명을 지르는 동료들을 뛰어넘어 곧장 앞으로 달려왔다.

이를 본 막부 측도 철포 병들을 뒤로 물리고 무사들을 내보냈다. 칼과 칼이 충돌했다. 양편이 뒤엉킨 자리에 피 보라가 일었다. 근대적인 병기보다 훨씬 오래된, 그러나 인간을 죽이기엔 충분히 효율적인 구식 병기가 생명을 수확하며 제 가치를 증명했다.

막부의 우익이 교전에 휘말림과 동시에 좌익도 교전을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느리게 전진해온 조마의 우익은 거리를 두고 차분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쪽 우익은 모두 철포 병들이었다.

공격 시간은 무사들보다 약간 느렸지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막부의 좌익 병사들이 총을 겨눔과 동시에 조마의 우익이 전진해왔다.

“사격!”

선공은 막부가 먼저 가했다. 불꽃이 튐과 동시에 조마 병사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렇지만 거리를 둔 공격은 별 효과가 없었다. 조마 측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훈련 수준은 막부에 비해 그리 우월하지 않아도 정신무장 면에서는 막부보다 조마가 우세했다.

조마 보병들은 막부가 다시 사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도 차분하게 더욱 좁혀나갔다.

“조마 놈들은 멍청이들인가?”

장군이 전투 상황을 보고 물었다. 우익에서는 무사들만 섞어 보내 서전에 손해를 보았고, 좌익에서는 철포 병의 우세를 살리지 못하고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상당히 아둔한 교전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근대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한 전황 판단이었다. 오오이시는 전국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주군. 조마 쪽이 제대로 판단한 겁니다.”

“어째서?”

“우리 우익은 무사와 철포 병을 섞어 배치한 탓에 근접전 상황에서 움직임이 많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문제를 겪지 않습니다. 서전에서 손해를 보아도 장기적으로는 이쪽보다 이익을 가져갈 공산이 큽니다.”

“한데 왜 섞어서 배치를 한 건가?”

“조마 쪽에서 철포 병을 나누어 이쪽 병력을 원거리에서 타격하며 끌어내기를 시도할 가능성을 염려해서입니다.”

장군은 그 대답에 입맛을 다셨다. 방자의 입장을 지키다보니 안게 된 약점이었다. 상대가 그 점을 역이용하여 병과를 집중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승세가 없어 보이진 않았다.

“좌익은?”

“곧 결과가 보일 겁니다.”

오오이시의 대답에 장군은 시선을 돌렸다. 곧 거리를 좁힌 조마의 철포 병들이 멈추어 섰다. 그들은 일순간에 막부군의 좌익을 겨누었다.

“사격!”

양측의 함성이 교차함과 동시에 화약 연기가 전장을 메웠다. 매캐한 연기로 전장이 가려지자 장군이 이맛살을 구겼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거지?”

그가 천리경으로 보이지 않는 전장을 더듬을 때 재차 총격이 울렸다. 이번에 수십 명의 막부 병사들이 짚단처럼 넘어졌다. 상대가 준 피해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막부 쪽 병사들의 화력이 줄어든 것과 달리.

‘설마.’

장군은 그제야 적이 철포 병을 집중한 이유를 알았다. 선두 열에서 피해가 생긴 즉시 후미에서 병력을 보충해 화력을 메운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그럴 여력이 되지 않으니 화력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셨습니까?”

“아주 불쾌한 입장이란 거군.”

“맞습니다.”

오오이시의 대답에 장군은 두툼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뭔가?”

“위치를 고수하는 겁니다.”

“이대로 두드려 맞으란 건가?”

“예.”

가신의 어이없는 대답에 장군이 화를 냈다.

“그리하면 우리 군의 피해가 누적되고 좌익과 우익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야. 적에게 승리를 헌납하려 하나?”

“아닙니다, 주군. 저는 주군의 승리를 바랍니다.”

“한데 어째서 손가락을 빨고 있잔 거지?”

“장기에서는 왕이 잡히지 않는 한 게임이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마가 이기는 방법은 하나. 주군을 잡아 장군을 부르는 것뿐입니다. 시간을 끌면 우리의 말은 늘어납니다. 구태여 중앙의 병력을 움직여 적에게 기회를 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

“주군, 상황을 넓게 보셔야 합니다. 이 전장에서 일시적인 전국의 흐름만 본다면 중앙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군을 움직이는 것은 조마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좌익도, 우익도 그리 쉽게 조마에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지켜보시지요.”

“으음.”

장군은 짧은 헛기침 소리를 내고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군 일행이 전장을 관조하는 동안, 모리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모리는 양 날개에서 거칠게 몰아붙이는 조마군대의 날카로운 기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공격은 분명 나쁘지 않은데 장군이 반응이 없군. 중원에서 움직임이 있어야 조기에 결판을 지을 텐데.”

장군이 있는 중원은 고지대이기도 한 까닭에 단순히 치고 올라가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 확실한 승리를 얻으려면 장군이 중앙 병력을 좌우 날개로 차출하는 순간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장군은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 공격 한 번을 위해 강력한 기마 세력과 친위 부대(기본)를 아껴두고 있었건만.

모리는 초조한 마음에 뒷짐을 지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주군,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당연한 일이다. 천하의 패권을 이 한판 승부로 결정지을 참이니 걱정이 없을 수 있겠나?”

모리는 천리경을 들었다. 전황은 분명 그에게 유리했지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좋지 않았다. 막부 측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는 순간 승부가 판가름 나고 말 테니까.

“그러시다면 제 계책을 한 번 들어보시지요.”

“막부의 중원을 움직일 계교라도 있단 말인가?”

“예.”

“말해보게.”

모리가 아카의 고개도 보지 않고 말했다. 군주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의 이야기가 흥미를 느꼈음을 안 아카가 입을 열었다.

“먼저 우리 기마 전력을 좌우익의 측면으로 보냅니다. 그러면 적은 그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좌우익에 틈이 나는 순간 기마가 달려와 측면부터 후려칠 것을 알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마의 체력 손실을 감안하면 썩 이익이라고 보기 어려운 움직임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기본들을 모두 적의 우익으로 투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적은 이쪽이 우익에 전력을 투자한 것으로 판단하고 중앙의 병력을 움직이려 들 겁니다.”

“하면 기병 이천을 되돌려 적의 중심을 친다? 친위 병력도 없이?”

“그렇습니다. 다만 이 이천은 승부를 보는 용도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버리는 수. 사석입니다.”

“어째서?”

“이천이 적의 수뇌부로 들어가면 필시 적은 장군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근처의 병력을 마구잡이로 끌어갈 겁니다. 하면 좌익과 우익 모두 진영이 헝클어집니다. 특히 아군 주력이 집중된 우익은 완전히 붕괴할 겁니다. 그 다음은.”

“양 날개를 꺾고 포위망을 압축해 적의 목을 딴다. 이거군.”

“영명하십니다.”

“해볼 만한 수로군. 단시간에 승부를 내기에는.”

“그렇습니다, 주군.”

“우리에게 얼마나 시간이 있겠나?”

“장군도 생각이 있다면 한나절 정도 안에 지원군을 가져오도록 계획을 짰을 겁니다. 앞으로 네다섯 시간 안에 아군은 승기를 잡아야 합니다.”

정석적으로 싸운다면 그 시간 안에 장군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리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영지도 버린 그에게 이천의 부하들 정도는 간단히 버릴 수 있는 자산에 지나지 않았다.

“허가하네. 한 번 자네 뜻대로 해보게.”

“예, 주군.”

아카가 읍을 하고 물러갔다. 모리는 차가운 눈으로 장군의 깃발이 휘날리는 적의 중앙부를 응시했다.

몇 분 후, 조마군대의 기병이 좌우로 움직였다. 막부군은 조마 측의 움직임에 경각심을 가지다 중앙에서 약간의 병력을 나누었다. 기병이 나간 만큼 병력을 빼도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그들이 다시 중앙으로 돌아올 것을 염려한 움직임이었다.

막부의 소극적인 반응에 조마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앙에 있던 모리의 친위대가 모두 좌익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막부의 우익을 노리겠다는 명백한 의도였다.

생각하기에 따라 중앙에서 병력을 쪼개 텅 빈 조마의 중앙을 쳐 모리를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이 역시 함정일 수 있었다. 막부 측이 대응을 주저하는 사이 조마의 강력한 공격이 막부군의 우익에 집중되었다.

“장군의 개새끼들. 배에 낀 기름을 오늘 다 뽑아주마.”

조마 무사들은 사납게 을러대며 막부군의 진영에 뛰어들었다. 기존 무사들의 공격만으로도 뒤로 한 걸음씩 밀리던 막부군은 새롭고 강한 적의 공격에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시체가 바닥에 즐비하게 깔렸다.

물론 시체의 대부분은 막부의 것이었다. 막부 무사들은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그나마 막부의 무사들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뒤를 보이고 달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장군에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상황이 급속히 나빠지자 막부 쪽이 움직임을 보였다. 중앙의 병력을 좌우익으로 급히 이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조마가 기다린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순간이었다.

모리가 손을 들자 기수들이 깃발을 힘껏 흔들었다. 조마의 문장을 품은 깃발이 파도처럼 흔들리자 좌우익을 위협하며 금방 달려들 기세로 있던 기병이 중앙으로 복귀했다. 그 움직임에 막부 쪽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적의 예비대가 바닥난 상황이라 마음 놓고 병력을 움직인 그들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적의 반전이었다. 조마 기병은 중앙에서 집결한 다음 그대로 고지대를 향해 치고 올라갔다.

“적을 막아야 한다. 모두 총검을 세워라!”

조마 기병이 무서운 속도로 육박해오자 막부 병사들이 급히 총검을 들었다. 긴 창으로 이루어진 대열이 만들어지자 그 앞에서 기병들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처음부터 마상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 기병들인 까닭에 그들의 움직임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조마 무사들은 말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칼을 들고 총검의 대열로 파고들었다. 막부 병사들이 아주 잘 훈련되었다면 단단한 방진을 이루고 접근을 용납하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훈련도는 높지 않았다. 막부 병사들은 무기를 몇 번 섞다 허점을 보였다.

노련한 조마 무사들은 이내 그 간극을 파고들어 칼을 휘둘렀다. 능숙하지 못한 장병은 능숙하게 휘두르는 단병에 약한 법.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손에 익지 않은 총검은 칼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무사들은 막부 병사들의 목을 쳐 날리며 길을 텄다. 신이 기적을 명해 바닷물이 갈라지듯 그들은 파죽지세로 막부군의 중원에 돌파구를 만들며 밀고 들어갔다.

장군이 있던 곳이 순식간에 사정권까지 들어갔다.

“좋아.”

모리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이제 막부에서 좌우익의 군대를 불러들이면 승부는 결정 날 것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장군의 깃발이 있는 곳까지 무사들이 침투했음에도 적은 병력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놈들이 움직이지 않아?”

모리는 뭔가 일이 꼬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런 눈을 했다. 분명 장군은 위협을 받고 있을 것인데 적이 반응이 없었다. 그럼?

그때 아카가 다가와 고했다.

“주군, 우리 판단이 빗나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장군은 주력이 옮겨간 자신들의 우익으로 이동해간 모양입니다. 중앙에 남은 것은 장군이 아니라 깃발인 것 같습니다.”

“뭐, 그럼?”

모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리되면 모든 병력을 투입한 조마는 상황이 끝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끝장이다.’

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놓았다. 손에서 천하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바로 이것인가 싶었다.

“주군.”

아카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모리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모리는 짤막한 욕지거리로 그 모든 감상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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