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준비된 무대 (4)
대하를 도하한 제국군은 단련들과 합세한 후 방어에 용이한 몇 군데의 중요한 고지를 선점했다.
이 고지들은 동남부 해안으로 이어지는 주된 교통로를 감시할 수 있는 요지들이었다. 양국번은 회군에 이 고지들의 방비를 맡기고, 고지와 고지를 잇는 취약 지점에 나머지 병력을 집중시켰다.
천국은 제국 쪽에서 방어 준비를 하는 걸 알면서도 느리게 움직였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제국 측이 우세하다고 믿어야 대하를 건너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리한 쪽에서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양유는 전략을 그렇게 세웠다. 제국군에게 시간을 주고 만전의 태세를 갖출 기회를 준 것이다. 물론 그가 멍청해서 그런 전략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제국군은 존재 자체가 약점이다.’
양유는 제국군의 부정부패에 익숙했다. 최고 사령관이 바뀌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그 구폐가 싹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군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가정이 그 전략의 출발점이었다.
신식 군대인 회군은 그 문제에서 벗어났을지 모른다. 양유는 그 정도는 인정해 주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았으니 기존 틀로 바라보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하지만 나머지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양유가 세운 전략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적의 약점을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적의 전체 병력이 정예한 군대가 아닌 이상 그 약점을 찌르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기실 거기에 이유가 있었다.
그가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 적은 지형을 충분히 파악하고 결정적인 요로와 방어의 요충에 정예 병력을 배치하며 나머지 선과 면에 잡병들을 배치할 테니까.
그는 이 잡병들을 쳐 제국군 정예 병력을 만신창이로 만들 생각이었다. 정예 강군도 배후가 위험한 상태에서는 제 실력을 내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양유는 이 일전으로 적의 잡병은 물론이고 온존되어 있던 적의 정예까지 일거에 소탕할 생각을 품었다.
멀리서 마필이 급히 달려왔다. 전방으로 내보낸 척후였다. 군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양유는 사방으로 부지런히 척후를 돌리고 있었다.
척후는 사령관의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각하, 적의 배치에 대한 보고입니다. 영산에는 검은 까마귀의 표식을 단 군대가 있었습니다. 총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검은 까마귀라면 그 소문만 무성한 회군이겠군.”
양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군은 천국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주요 적 중 하나였다. 승도의 상승군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강적이었지만 새롭게 등장한 회군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서역식 장비와 편제를 갖춘 이 군대는 장차 남쪽으로 내려올 제국군의 창두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양유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장수가 말을 받았다.
“회군이 영산에 있다면 우회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우회가 가능한 곳에 정예를 두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우회가 힘드니 그곳에 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우회의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우회는 가능하네. 병사들에게 줄 병량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다면.”
병참을 포기한다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양유의 말에 장수의 눈이 커졌다.
“병참을 생각지 않는다면 군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병참이 없는 군대는 있을 수 없었다. 양유가 그걸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터. 양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일리가 있네. 그 부분은 계산을 해두었지.”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지리를 보게. 영산과 그 주변의 고지들에 회군이 배치된다면 그 병참은 어디에서 보충하는 것이 좋겠나?”
“고지들과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에 병량을 두면 좋을 겁니다.”
“바로 그거지. 적이 병량을 어디에 두고 있을지 우리는 알고 있으니 그 약점을 찔러 우리 병참을 확보하는 것이네.”
적이 어디에 방어선을 펼지 알고 있다면 그 보급의 중심을 어디에 둘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천국은 이미 이 지역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터라 지리에 익숙했다.
천국 군대는 양유의 명령에 따라 전력을 나누었다.
그 전력의 핵인 항마군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아갔고, 일부는 제국이 점한 고지들을 위협하려는 자세를 갖추었다. 제국군이 예상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 심장에 비수를 박아 넣으려는 계책인 것이다.
전마에 탄 양유는 길게 늘어선 항마군의 대열을 쓸어 보았다. 군은 정강하고 예기가 높았다. 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시기심을 보이고 있긴 했지만 서익은 천국에 필요한 인재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만한 군대를 길러내기도 어려웠을 테니.
항마군 병졸들은 질서정연하게 열과 오를 맞추어 움직였다.
대열에서 낙오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장시간 행군을 할 경우에는 군 병력의 1할에서 많게는 6할 이상까지 전력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항마군에는 그런 문제가 거의 없었다.
행군 끝에 항마군은 애초 표적으로 삼은 단련들의 방어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뜻밖에 자신들을 향해 나아온 적의 대군을 보고 크게 놀랐는지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양유는 그런 적을 보고 코웃음을 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전진.”
그 명령에 따라 대열이 전진했다. 천국의 깃발을 높게 든 항마군이 움직였다. 총을 들고 움직이는 동작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그 기세에 단련들이 급히 방어 위치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항마군의 장수들은 그런 적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손을 들었다. 병사들은 그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동작을 멈추었다. 단 한 번의 명령에 통일된 움직임을 보이는 군대.
정예하기로 이름난 붉은 코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움직임을 단련에 비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적이 매우 정예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단련 지휘관들은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이곳을 한 번 타격했던 그 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저들은 기존 월비들과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항마군은 위협적인 모습만 보인 채 잠시 움직임을 늦추었다. 하지만 곧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밝혀졌다.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단련들의 진영에서 하나둘 공포에 질린 자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일전에 단련들을 괴멸시키지 않고 살려 보낸 효과가 십분 발휘된 것이다.
공포는 전염병과 비슷한 속성이 있어 빠르게 전파되는 효과가 있었다. 적의 전열이 어수선해진 것을 확인한 항마군 장수들이 재차 손을 들었다.
“천부의 이름으로 요마들을 멸하라!”
“와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총을 들고 돌격했다. 총검을 끼울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의 돌격에 단련들이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천국 병사들은 거리를 적당히 좁힌 다음 총격을 퍼부었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몰이사냥을 당하듯 달아나던 단련들이 쓰러졌다.
시체가 즐비하게 깔리는 것을 보고 있던 양유가 지도를 보았다. 이 승리는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별반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 배치된 잡병들을 격파한 것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주력 부대를 몰고 와서 낸 일인 이상 이보다 더한 성과를 내야 했다.
이들 잡병들이 방어하는 지역을 뚫고 들어가 적이 반응하기 전에 병참의 요로까지 나아가야 승리가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한 번의 승리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전날 제국의 공세를 이끌었던 오승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천국의 군대를 수차례 연파하며 천경까지 꾸준히 전진해 왔었다. 그의 공격이 의미를 가졌던 것은 천국 군대를 격파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위치까지 그 군대가 전진할 수 있었던 데에 있었다.
만약 오승도의 군대가 천경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지 않았다면 천국 쪽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어가며 반격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적에게 무리수를 두게 만들 만큼 압박을 주어야 전투의 승리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었다.
양유 역시 그만한 성과를 내자면 적의 병참을 틀어쥐고 그 목줄을 잡아야 했다. 그로써 적을 다급하게 만들면서 각개 격파의 여지를 만들어야 확실한 승리를 낼 수 있었다.
병력이 부족한 천국으로서는 그 정도의 승리가 아니면 곤란했다. 이번 전역에서 강북 대영의 창날을 부러트려야 차후 다가올 오승도의 공격에 대항할 여력을 보존할 수 있어서다.
양유는 흩어지는 단련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너머, 그 들녘의 저편에는 그가 노리는 최종 목표로 다가갈 열쇠가 있었다. 그 열쇠만 손에 넣는다면 이번 전투는 승리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쥔 다음 기수에게 신호를 보내게 했다.
***
양유의 빠른 공세는 강북 대영을 당황하게 했다. 그들은 천국 군대의 느린 움직임과 눈에 보이는 부대 전개를 보고 적이 제국군에 대해 평면적인 반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이 그 의표를 찔러 배후로 돌아오면서 그 예상은 철저히 배신당했다.
적은 전혀 공격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길을 따라 주력 부대를 돌려 공격해왔다. 병가의 상식에 비추어 본다면 병참을 아예 포기한 무모한 공격이었다.
문제는 그 무모한 공격이 회군을 비롯한 공격군 전체의 병참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까지 나아왔다는 점이었다.
서찰이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던져졌다. 회군의 사령관 이홍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를 믿고 신식 군대를 맡긴 양국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 같아 그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멍청한 놈들. 이중으로 방어를 하게 했으면 아군이 내응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벌어야지.”
그는 측면을 맡긴 단련과 제국 녹기의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겨우 한나절 만에 팔천이 넘는 병력이 무주공산처럼 돌파 당했다. 그들이 무너진 덕분에 적은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 들어와 제 마음대로 활개를 치며 역으로 제국군의 목줄을 졸라오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무능한 아군이라는 옛 격언은 틀린 것이 없었다.
“당장 회군의 병력을 모아 병참선을 회복해야 합니다. 양곡이 끊어지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장수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면에는 적이 남아 있잖습니까?”
적장이 의도한 것인지 몰라도 적은 고지 앞마다 병력을 남겨 회군을 묶어두게 했다. 필시 회군이 뒤로 물러서려 하면 그들의 뒤를 잡으려 할 것이 눈에 보였다.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일단 뒤가 끊어지면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닐 겁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경험이 없는 이홍적은 그 심각성을 몰랐지만 얼치기 군대에게 ‘뒤’가 없다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도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황을 일으켜 군대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서역 병법을 익히고 그 군제에 흥미를 가져온 이홍적도 지금 상황에선 달리 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서역 군대에 대한 이론에 익숙할 뿐, 그 흉내를 내는 군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부족했다. 흉내를 낸다고 해도 그 본질은 동방 군대이기 때문이다.
회군이 진정한 서역식 군대가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군을 나눠 적에 대항해야 합니다.”
“군을 나누어 대항을?”
사령관이 묻자 장수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차지한 곳이 일단 고지대인 만큼 적은 쉬이 덤벼들기 어려운 이점이 있습니다. 절반의 병력을 남겨 적을 견제하게 하시고, 남은 병력만 데리고 돌아가 자웅을 겨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절반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 하니 적도 서역식으로 단련된 군대인 듯싶던데.”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병참이 끊어질 위기에서 제국군이 달리 선택할 수단은 없었다. 이홍적은 굳은 얼굴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나절 후, 회군은 절반의 병력과 주변에 배치된 일부 단련들을 가지고 병량을 둔 화관 쪽으로 움직였다. 그 수효는 모두 사천. 수로도 열세였지만 질적으로도 항마군에 비해 열세였다. 잡병들의 비율이 높아서다.
양군의 전력은 한쪽에 크게 기울어 있었다. 대등한 전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홍적은 적의 군세를 직접 보고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지만 이 교전에서 패한다면 강북 대영의 내년 공세는 사실상 물 건너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로서는 이 교전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부대 전진.”
“부대 전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기수가 깃발을 움직였다. 제국군을 상징하는 황룡의 깃발이 느릿느릿 하늘을 갈랐다. 명령이 내려지자 제국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움직였다.
그 중심을 이루는 회군은 기강이 반듯하게 서 있었지만 좌우 날개를 맡은 단련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열도, 오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에 불만을 표시하기에는 그 병력조차 아쉬웠다.
제국군이 앞으로 나아오자 천국도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병력을 세 개의 열로 나누고 다가오는 제국군을 기다렸다. 지난날 승도에게 지겹도록 당했던 삼열 일제 사격을 구사하기 위함이었다.
천국 병사들이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총탄을 장전하는 사이, 제국군은 한 발 한 발 거리를 좁혔다. 이홍적은 적이 가능한 빨리 총을 쏘기를 바라며 긴장된 시선을 던졌다.
전열 전투에서 총탄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파멸적인 효과를 내었다. 명중률과 살상력 모두. 그런 이유에서 사격은 적이 먼저 하게 하고 거리를 좁힌 다음 쏘는 쪽이 유리했다.
총탄을 맞으면서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만 있다면.
곧, 제국군의 선두가 천국군의 사정권에 들어섰다. 천국군은 기다렸다는 듯 첫 번째 사격을 퍼부었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화약 연기가 전장을 자욱하게 덮었다.
총성이 이어지는 동안 제국 병사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기강이 그나마 살아 있는 회군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앞으로 움직였지만, 단련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는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장전을 시작했다.
그 모습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지금 뭘 하는 건가?”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이홍적이 짜증을 냈다. 그나마 군기가 든 회군만 보아오던 그로서는 이 어처구니없는 추태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수가 그 명령을 받아 급히 깃발을 흔들었다. 다시 전진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독촉을 받은 군관들이 언성을 높인 탓인지 단련들의 대열이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회군만 앞으로 돌출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자연히 천국 군대의 화력도 회군 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조준!”
그 짧은 시간 동안 장전을 마친 천국 군대가 두 번째 사격을 준비했다. 정상적으로 교전이 진행되었다면 회군이 먼저 사격을 퍼부어야 했지만, 단련들이 머뭇거리는 동안에 지휘부는 적절한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 바람에 지나치게 전진한 회군은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사격!”
수천 발의 총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거리도 매우 좁혀진 상태에서 가해진 공격이라 회군 병사들은 한 번에 백 명 이상이 널브러졌다. 너무 엄청난 피해라 나름 정신무장을 다진 회군도 그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회군 군관들이 명령을 내렸지만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서 장전 명령이 먹힐 턱이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천국군의 세 번째 사격이 가해졌다.
이번 공격 역시 파멸적이었다. 이번에는 아까의 배나 되는 인원이 쓰러졌다. 이쯤 되자 단련이 되어 있던 회군도 손실을 견디지 못했다.
연합왕국이나 상승군만큼 오랜 기간 훈련을 받지도, 그만큼 충성할 이유도 가지지 못했던 회군은 일시에 붕괴되었다.
“도망가자.”
“이건 개죽음이야!”
병사들이 하나둘 돌아서자 전열이 무너졌다. 군관들이 독려를 해보려 했지만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국군의 깃발이 버려지고 드높았을 사기는 사라졌다.
이홍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한 패배로 상황이 치닫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역식으로 훈련받은 군대가 이런 추태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회군이 서역식 군대라고는 하나 그 본질을 바꾸기에 훈련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제국군의 중핵이나 다름없는 회군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하자 겨우 용기를 내어 전진하던 단련도 그 충격에 휩쓸렸다.
일시에 수천의 병사가 달아나자 지휘 체계도 무너졌다. 패주 양상을 바꾸기에 지휘관들의 역량은 태부족이었다.
이홍적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곤 이내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해가 바뀌던 연말, 제국군은 내년의 공세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선공을 가해온 천국에 대응하기 위해 야심찬 군사 작전을 벌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실패로 끝났고 천국 멸망을 위해 세웠던 작전은 실행해 보기도 전에 물거품으로 끝났다.
이는 제국의 근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바로 오승도가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무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