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48화 (248/425)

제248화. 암도진창 (4)

천경을 둘러싼 천국과 제국의 공방전은 치열했다. 하루에도 수천 발의 포탄을 쏟아부으며 성벽을 연거푸 공격해오는 제국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수성군 사이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면서 성벽 주변은 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즐비하게 깔린 시체와 온통 균열이 간 성벽은 보는 자체로 사람의 기를 질리게 했다.

하지만 공격자들은 아직도 공격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백 발의 포탄을 성벽으로 퍼부으며 다시 수천의 병사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사다리를 든 병졸들이 진격해오자 그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천국 병사들이 응사했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눈이 터져 죽는 병사부터 폐부에 구멍이 뚫린 채 질식하는 자까지 다양한 희생자들이 나왔다. 제국 병사들도 그냥 당하지 않고 성벽 위로 응사했다. 양쪽 모두 숙련도가 형편없다 보니 성벽에 다가설 때까지 희생자는 많지 않았다.

다시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졌다. 제국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성벽 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요마 놈들이.”

천국 여영의 일원으로 방어전에 참가한 요희는 숨을 헐떡이며 칼을 내질렀다. 막 사다리를 타고 오르던 제국 병사가 그 칼을 쳐내려다 균형을 잃었다. 그것을 본 요희는 칼을 잡는 대신 발을 뻗어 사다리를 걷어찼다. 육중한 무게를 가진 사다리를 사람 하나의 발길질로 걷어내긴 어려웠지만 진동을 줄 수는 있었다.

그 충격에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졌다. 요희는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손에 쥔 칼에 힘을 주었다.

“요마들이 작정을 했군.”

그 옆에서 창을 휘두르던 사내가 손길을 쉬며 말했다. 적은 끝도 없이 밀려와 공격의 한계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것도 한곳만 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가며 공격을 하고 있어 방어를 위해 그 움직임에 맞춰야 하는 수성 측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좌측에 깃발이.”

요희는 사내의 말에 반응하다 멀리 제국의 깃발이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을 보았다. 그녀의 말에 사내의 인상이 굳어졌다.

“요마들이 올라와선 안 돼.”

“그럼, 제가.”

“먼저 가.”

사내는 그녀가 막던 자리까지 막으려고 창대를 좁게 잡고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요희는 그런 사내를 일별하고 급히 성벽을 따라 뛰었다. 좁은 성벽 위에서 적과 아귀다툼을 하는 동료들을 지나쳐 얼마를 달린 그녀의 눈에 깃발과 그 아래에 가득 들어찬 적이 보였다.

그 주변은 온통 천국 병사들의 시체들이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야만적인 머리 모양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자들이 보였다. 제국에서도 특히 용맹하다는 북방 팔기 출신의 병사들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생각처럼 그 앞에 있는 자들은 특별히 용맹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오승도 휘하에서 북방 전역을 경험했던 병사들이었다. 북적도 상대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라 사실상 제국군의 최정예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자.

신식 군대인 회군보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는 병사들이었다.

“계집?”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며 천국 병사들을 도륙하던 한 사내가 막 그 앞으로 달려온 요희를 보고 희죽 웃었다. 북방에서는 여자가 전장에 나서는 일을 더러 볼 수 있었다.

북방 유목민의 전통인데, 사내들이 전투를 마무리 지으면 여자들이 가서 패잔병들의 숨통을 끊고 전리품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런 북방 출신들에게 여자가 전장에 나서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전투에 끼는 일은 거의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전투력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떨어졌다.

요희는 자신을 비웃는 사내의 시선을 느끼며 칼을 짧게 잡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그런 여영의 도전에 대도로 응수했다. 묵직한 대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코앞을 스쳤다.

요희는 한 걸음을 물러서며 그 공격의 궤적에서 황급히 물러섰다. 간격을 재어본 듯한 공격이었다. 사내는 이를 드러내고 웃다 다시 입을 열었다.

“계집이 전장에 나선 것은 뜻밖이군. 남방엔 싸울 사내가 부족한가?”

“닥쳐라. 요마.”

요희는 그 말에 짤막한 욕설로 대꾸하며 다시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이 날카롭게 교차하는 와중에도 제국 병사들이 꾸역꾸역 성벽으로 올라왔다. 천국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제국군의 기세도 가볍지 않았다.

피로 얼룩진 성벽 위에 제국 병사들의 수가 차츰 늘어갔다. 천국 병사들은 피와 기름으로 미끄러운 곳에서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

요희는 두 번 칼을 마주한 적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적은 두어 번 칼을 휘둘러보고 그녀의 공격 반경을 대충 가늠한 모양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칼을 움직이며 거리를 좁혀왔다.

요희는 주변의 공기를 살폈다.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은 어려웠다. 주변에서 급히 달려온 동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사내를 빨리 쓰러트려야 했다.

‘가자.’

요희는 자세를 낮추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 사내의 대도가 일직선으로 그어져 왔다. 거리를 계산하고 찔러온 것이라 공격은 매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공격의 약점을 읽고 있었다. 상대는 힘 싸움에 익숙한 사내들의 싸움법대로 전투를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난 여자야.’

요희는 검을 옆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검면을 비스듬히 치곤 앞으로 쭉 나섰다. 공격을 옆으로 흘리며 유연한 여성의 장점을 살린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사내는 당황하며 주먹으로 응수하려 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비수를 보았다면 그런 멍청한 판단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희는 기다렸다는 듯 비수로 상대의 손가락을 쳤다.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핏방울이 튀었다. 손가락이 허공을 나는 동안 사내는 잠시 평정을 잃었다.

그녀는 그대로 세 걸음을 더 나아가 사내의 품에 안길 듯 파고들며 뒤로 빼냈던 손을 찔러 넣었다.

“억.”

사내가 고통스런 음색을 내며 거꾸러지자 요희는 그를 타넘고 앞으로 나갔다. 그 앞에 있던 제국의 군관이 반응을 보였다. 군관은 품에서 권총을 꺼내 그녀에게 응수했다.

갑작스레 불꽃이 터져 나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급하게 쏜 총격이라 군관의 사격은 부정확했다. 총구가 흔들렸는지 총탄은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녀는 쥐고 있던 칼을 날렸다.

군관은 다음 동작을 취할 틈도 없이 목젖에 칼이 박힌 채 뒤로 넘어갔다.

전투는 난전이었다. 앞과 뒤 곳곳에서 쌍방의 병사가 얽혀 싸우다 보니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의복도 비슷하다 보니 일단 주변에 오면 칼을 휘두르고 보는 모습이 역력했다.

요희는 군관의 목에 박혀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후퇴! 후퇴!”

누군가 성벽 위에 꽂혀 있던 제국의 황룡기를 뽑아 성벽 아래로 내던졌는지 제국 병사들 사이에서 후퇴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깃발 하나로 기세가 오고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나, 그 깃발은 전장의 상징이었다. 상징이 꺾인 군대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사납게 달려들던 제국 병사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일부는 사다리를 타고, 일부는 성벽 아래에 가득 쌓인 시체 위로 뛰어내렸다. 급속하게 후퇴하는 적을 보며 요희는 검을 성벽 위에 꽂았다.

“살아남았나.”

촌각 전만 해도 함락의 위기에 몰린 것처럼 심각한 분위기였다. 모두가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국군이 물러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들이 버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제국군이 물러간다.”

누군가가 외쳤다. 요희도 성벽 가장자리로 다가섰다. 후퇴하던 제국군이 멀찌감치 물러나고 있었다. 그들은 아예 공성 자체를 포기한 듯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두드릴 작정으로 포진해 있던 대포까지 물러서고 있었다.

천경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어째서?

요희는 황룡기를 펄럭이며 물러나는 제국군의 뒤를 힐끗 보았다. 천경의 방어가 만만치 않아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면 저리 물러날 이유는 없었다.

대포는 그냥 그 위치에 남아 다시 포격을 시작해도 좋았다. 그러나 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모두가 의문에 찬 눈으로 제국군의 뒤를 보고 있는데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병사들 사이에서 알겠다는 빛이 맴돌았다.

“익왕 전하가 오셨다. 익왕이 오셨어.”

천국 제일의 명장인 익왕이 왔다면 제국군의 철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전력으로는 익왕이 거느린 천국 주력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요희는 물러나는 적을 바라보다 이마를 쓸었다. 이제 천경의 위기는 끝이 난 듯했다.

***

펄럭이는 깃발 아래 천국의 명장 익왕이 서 있었다. 천국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을 짊어진 왕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망원경을 자신의 눈에 가져갔다.

그의 시야 앞으로 수만은 됨직한 제국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 공성전으로 지친 것은 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천국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를 포기하고 적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한 번 적이 움직였다는 것은 다음에도 강을 건너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다가올 승도와의 대결을 생각하면 다른 결과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적은 우리를 보고 당황한 눈치입니다. 우리 군의 위세만 보고도 물러날 모양이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곤란하오. 제국군을 돌려보내면 적은 다시 강을 건너올 테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괴멸시켜야 뒤를 걱정하지 않을 거요.”

익왕은 주변의 의견을 일축했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줄일 수 있을 때 적의 전력은 확실히 줄여야 했다. 그는 그렇게 일을 진행해야만 그나마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제국군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천경의 방어군까지 동원해 오승도와 대적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실낱같지만 그 가능성에 거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와 대결하기도 전에 괴물이 차려 놓은 판 위에서 허둥거리는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예, 전하.”

익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수에게 신호를 보내게 했다.

곧 천국군의 제1진이 대열을 갖추고 적과 대적할 준비를 마쳤다. 천국의 공격을 이끌 선봉은 항마군이었다. 이미 수차례 제국과의 대결에서 활약한 바 있는 이 신식 군대의 전투력이라면 승산은 점쳐볼 만했다.

그 뒤를 잡병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받쳤다. 익왕은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창두로 적의 진형을 파괴하고, 그 간극으로 나머지 병력을 쏟아 승부를 보려 했다.

“부대 전진!”

왕의 명령이 전해지자 깃발을 높이 든 항마군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천경의 성문이 열리더니 만이 넘는 군마가 쏟아져 나와 그 뒤를 받쳤다. 전체 병력의 규모는 천국 쪽이 제국을 압도했다. 질적으로도 뒤지지 않으니 승리는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

천국 군대의 도도한 흐름이 전진해오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국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익왕의 군대가 도착한 순간부터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대인, 우리가 아무래도 이용당한 것 같습니다. 교활한 상인 놈에게.”

장수들이 입술을 깨물며 꺼낸 말에 양국번이 수염을 매만지다 답했다.

“그에게 이용당했다. 결과적으로 그리되긴 했지만 우리가 기회를 살리지 못한 탓도 있소이다.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도강을 결심하진 않았을 테니.”

양국번은 자신이 수 싸움에서 승도에게 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가 계산했을 때 천경을 쳐서 함락시킬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천국 내부에서 들어온 첩보 등을 고려할 때, 천경의 방어 병력은 불충분했고, 적은 이쪽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오승도의 공격에 대비해 주력을 서쪽에 빼두고 있었으니 시간적으로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공성에 실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국군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기회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능성에 승부수를 던졌고 실패했다. 그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전략가는 적과 아군의 전력과 제반 조건을 살펴 싸우기 전에 승패의 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할 필요가 있었다. 그 예측의 정확성이 높은 자야말로 일류. 그 예측을 놓고 겨룬 수 싸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본 승도와 예측하지 못한 양국번의 차이는 컸다.

승도는 처음부터 제국이 천경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자신의 장기짝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을 통찰하고 있었다.

“대인, 일은 이미 벌어진 마당입니다. 기왕 이리된 것, 군을 최대한 수습하여 물리는 것이 최선인 줄로 압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오. 우선 적을 놀라게 하여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으니 회군을 선두에 세웁시다.”

양국번의 명이 내려지자 기수들이 깃발을 움직였다. 곧 회군을 상징하는 깃발이 앞으로 쑥 나섬과 동시에 수천의 병졸들이 움직였다.

지난 전투에서 엄청난 타격을 받은 탓에 전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회군은 그 규모에서 항마군의 적수가 되기 어려웠다.

양국번은 회군이 전열을 갖추는 것을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병력이 좀 모자라는 것 같은데.”

“그러합니다, 대인.”

“홍적의 회군이 적을 감당하긴 어려운 듯싶으니 중앙군의 정예를 좌우로 보내 받치게 합시다.”

양국번은 일단 회군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북방 출신의 정예들을 더하기로 했다.

천국을 올해 토벌하기 위해 제국이 전력을 기울이며 북방에서 불러온 정예 병력인 만큼 그들은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다른 자도 아니고 괴물 오승도 휘하에서 종군하며 실력을 쌓은 자들이었다.

양국번은 명령을 내리고 천리경을 들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적의 물결이 실로 인상적이었다. 적의 선두는 모두 서역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 역시 통일된 듯했다.

‘월비들도 서역식 군대를 만든 것인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은 아니었다. 오승도와 상승군에게 호되게 당하며 보고 들은 것이 있다면 그 정도 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들도 학습을 하는 인간이라면.

양국번의 시선은 이내 회군으로 옮아갔다. 진을 갖춘 병사들은 자리를 갖추고 정지해 있었다. 그 뒤로 어렵게 갖춘 서역식 포병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가 열세이긴 해도 포병의 화력을 생각하면 적의 공세를 단념시킬 수도 있었다.

포병들은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일제 사격을 퍼붓기 위해 양각을 조절하고 있었다. 조절을 끝낸 대포들이 한두 발씩 초탄을 쏘며 거리를 가늠했다. 경험이 부족한 동방의 포병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포격하기 어려웠다.

양국번은 그 포성을 들으며 적이 움직임을 멈추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전진해오던 적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쪽 포병의 위력에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몰랐지만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도도 잠깐이었다. 정지한 적의 뒤로 느릿느릿 끌려온 십여 문의 대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경에서 끌고 나온 대포였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저쪽 역시 대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쌍방의 포병이 정렬을 마침과 동시에 서로의 전열을 향해 포문을 개방했다.

초탄은 무지막지한 아이언 볼이었다. 거리가 가깝다면 양철통(산탄)을 퍼부어 밀집 대열을 파괴했겠지만 거리가 있을 때는 바닥을 튕기며 나가는 강철 구가 제격이었다.

전열을 향해 쏘아져나간 아이언 볼은 바닥을 튕기며 개구리처럼 뛰어올랐다. 그것들은 단박에 사람의 머리나 팔다리를 치고 나갔다. 운이 나쁠 때는 한 발에 서너 명이 병신이 되거나 죽었다.

포탄이 오가는 동안 양국번은 침음성을 삼켰다. 양쪽의 대포 보유 문 수를 따지면 제국 쪽이 확실히 우세했다. 하지만 제국군이 위치한 자리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수적 열세를 의식하여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쪽으로 움직인 제국군은 마른땅 위에 있는 반면, 천국군은 지대가 낮은 논과 늪에 걸쳐 있어서였다. 그 차이는 치명적이었다.

제국군의 포탄은 바닥을 튕기지 못하고 푹푹 박히기 일쑤였지만 천국의 포탄은 제국군의 진영을 몇 번이고 튕기며 지나갔다. 포병에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 있었다면 제국군이 이곳에 진을 쳤을 이유가 없었다.

한마디로 경험 부족이 부른 실수였다.

“우리가 포격전에서 불리한 것 같소.”

“위치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을 향해 역으로 내려가서 공격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방어 위치를 버리고 선공을 가하자?”

“예, 대인. 이대로 포격을 주고받으면 우리 전열이 먼저 무너질 것이 자명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전열이 깨지면 어차피 끝이었다.

양국번은 심각한 표정으로 적의 포탄이 만드는 결과를 지켜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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