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상승군 (2)
상승군의 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방수는 절망에 찬 눈으로 포격을 바라보았다. 벌써 서른 발이 넘는 포탄이 외벽을 뚫고 들어왔다.
포탄이 복도를 튕기고 지나갈 때마다 작게 만든 총안을 보기 위해 늘어서 있던 병사들이 잘 다진 육편이 되었다.
천국군의 방어 준비는 말 그대로 무의미했다. 그나마 적의 화력이 부족했다면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상승군이 가져온 대포는 너무 많았다. 후장식 대포 수십 문이면 끝도 없는 강철의 비를 내릴 수 있었다.
“거기. 다른 생각하지 말고 제 위치를 지켜라.”
군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방수는 그 말에 얼른 자신의 총안에 눈을 가져갔다. 상승군은 무익한 보병의 전진을 선택하는 대신 포병이 토루를 무력화시키길 기다렸다.
과거 연합왕국과 로망스 간의 전투에서 요새화된 건물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던 상승군의 수뇌들(왕국 장교단과 오승도)은 공격을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포탄이 다시 벽을 뚫고 들어온 순간 방수는 머리를 움츠렸다. 강철 구는 그대로 그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그 옆에 서 있던 병사의 가슴을 으깨고 지나갔다. 뜨거운 핏물이 확 튀었다.
이백 명도 넘는 병사들이 피할 곳도 없는 좁은 공간 안에서 강철 구를 두드려 맞고 으깨졌다. 천국 지휘부도 여건이 허락했다면 후퇴를 지시했겠지만 그들이 물러서면 상승군 보병들이 다시 전진할 것이 뻔했다.
천국 수뇌들은 이들의 희생으로 시간을 벌며 전열을 정비하고 적의 압력을 꺾기 바랐다.
방수는 움츠린 채로 있다가 뒤쪽으로 난 출입구를 통해 아군 병사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사상자가 늘어난 상태에서 토루 유지가 어렵다고 본 지휘부의 지원 결정이었다.
상승군은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포탄만 쏟아부으며 좀처럼 전진해오지 않았다. 이가 갈리는 시간이 계속 흘러만 갔다.
토루는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멀리서 보면 흡사 벌집을 연상하게 했다.
“빌어먹을 요마들.”
손가락이 날아간 사내가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방수는 그 옆에서 반쯤 남은 물을 들이켰다.
긴장된 시간이 계속되다 보니 물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벽이 크게 진동했다. 대포알이 벽을 뚫고 들어와 동료들을 으깨는 모양이었다.
그때 군관이 말했다.
“적이 온다.”
그 말에 방수가 조금 전 뚫린 구멍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 너머로 수천의 적 병사들이 새카맣게 몰려오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공격을 가해오는 것은 검은 군복을 입은 적의 정예, 상승군 보병들이었다.
“요마들이 온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몸을 일으켜 구멍 주변으로 달라붙었다. 팔과 다리가 날아간 자들도 엉금엉금 기어 구멍 주변으로 다가섰다.
부상병의 생존율이 극히 떨어지는 이 시대에 ‘부상’은 곧 죽음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차피 자신이 죽은 목숨이라 여기고 총을 들었다. 기왕 죽을 거라면 천국과 자신의 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나았다.
천국이 있어야 그들의 땅이 있고, 땅이 있어야 가족들이 살 수 있었다.
총구에 천국 병사들이 소총을 들이밀려던 찰나에 상승군의 새로운 포격이 떨어졌다. 이번 포격은 폭발을 통해 얼을 빼놓는 유산탄 공격이었다.
폭음과 동시에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공격 직전에 가해진 절묘한 포격에 천국 보병들은 방어자의 이점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검은 군복들은 빠른 속도로 토루 근처까지 접근했다.
“뭘 하나. 적이 코앞까지 왔다.”
군관이 목소리를 높이고서야 병사 몇이 허겁지겁 총을 들고 구멍 밖으로 내밀었다. 경험이 있다면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행동은 그들의 위치를 적에게 노출시키는 짓이었다.
노련한 상승군 보병들은 그 드러난 총을 보고 위치를 파악했다. 막강한 후장식 소총은 그 순간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소대 단위로 조를 이룬 검은 군복들은 총이 드러난 곳들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번갈아가며 쉬지 않고 사격을 가하다 보니 천국 병사들은 감히 밖을 내다보고 조준을 할 생각도 못 했다.
그런 공격은 애초부터 맞을 가능성이 없었다. 집중된 화망을 형성하지 못하는 총격은 상승군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방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토루의 아래까지 몰려온 적의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피해도 내지 않고 밀고 들어온 적들은 그 상태에서도 사격을 계속 퍼부으며 천국 보병들을 위협했다.
이제 그들이 가져온 도끼로 토루의 문만 부수고 들어서면 이 중요한 방어의 요충이 상승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방수는 옆에 놓여 있던 요강을 들었다. 제 위치에서 볼 일을 해결하라는 이유로 천국은 토루 안에 약 삼백 개의 요강을 준비해 주었다. 이 요강은 당연히 온갖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 고약한 투척 물을 구멍을 통해 문 앞까지 다가온 적을 향해 내던졌다.
와장창.
자기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분변이 퍼졌다. 공격자들은 이 예상치 못한 물건에 놀라며 잠시 진입을 머뭇거렸다. 나머지 병사들도 뒤늦게 요강을 뒤따라 던졌다.
분변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이 없는 병사들이라도 고약한 배설물이 발목까지 찰 정도로 쌓이면 그것을 건너는 것에 망설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승군 병사들이 잠시 머뭇거린 사이 천국 보병들은 겨우 충격에서 벗어났다.
총안으로 총을 내미는 병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상승군의 견제 사격도 점차 힘을 잃었다.
아무리 막강한 후장식 소총이라 하더라도 사격을 아예 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공격을 퍼부으려면 제한된 곳에 화력을 집중해야 했다.
한데 공격할 곳이 늘어나자 그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점차 천국 보병들의 공격이 상승군 보병들에게 먹히기 시작했다.
전장식 소총이 둔탁한 총성을 낼 때마다 검은 군복들이 연거푸 쓰러졌다. 사격 훈련을 잘 받지 못한 천국 보병들이라고 해도 양군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거기다 엄폐된 상태에서 안정감을 가지고 총을 쏘다 보니 천국 보병들의 공격력은 개활지에서 발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검은 군복들은 몇 번의 총격을 주고받다가 후퇴 신호를 받고 일단 물러섰다. 상승군의 지휘관들이 전투를 상당히 긴 흐름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후퇴였다.
전투를 짧게 보았다면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토루를 밀어붙여 적이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정이 어떻든 천국 병사들은 저 무서운 오승도의 개(?)들을 물리친 것에 고무되었다.
“아까 자네가 요강을 던졌나?”
“예에.”
방수는 그 행동이 그렇게 칭찬받을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임기응변의 행동이 잠깐의 시간을 벌어 상승군의 공격을 저지한 것도 사실이었다. 군관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잘 해주었네.”
군관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방수를 지나쳐갔다. 방수는 그의 손이 어깨에 와 닿은 순간에야 자신이 얼떨결에 한고비를 넘겼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를 사로잡은 것은 두려움이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고, 적 보병들이 밀고 들어올 때는 긴박감에 압도당해 몰랐었지만, 지금은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포탄에 맞아 죽은 병사는 둘째치더라도 총안을 통해 날아온 총탄에 부상당하거나 죽은 병사가 부지기수였다.
노련한 상승군의 사격술은 엄폐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강요할 만큼 대단했다. 잘 훈련된 정병과 잡병의 차이는 그만큼 컸다.
토루를 끼고 싸우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승부는 기대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까 적을 향해 전진했던 항마군이 완전히 갈려나간 이유도 알 만했다. 이 무서운 괴물들과 맨몸으로 싸웠으니까.
방수는 몸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두렵나보군.”
손가락이 날아간 병사가 그를 보며 말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냥 홀가분하다네.”
“어째서 그리 편하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방수의 반문에 병사가 총안에 걸쳐두었던 총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산다는 게 죽는 것보다 두려우니까. 이 전쟁에서 우리가 진다면 천국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역적이 되는 거야. 그때 우리 가족들이 어떤 대접을 받을지 생각해봤나?”
“…….”
“생각해보지 않는 얼굴이군. 그걸 생각해 본다면 죽는 건 별로 두려운 일이 아니라네. 죽고 나면 역적이 될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의 말에 방수는 이 전투의 무게를 새삼 자각했다. 전투에서 지면 땅은 둘째치더라도 가족들이 노예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죽음은 정말 가벼운 것이었다.
“이제 몸이 떨리지 않나?”
병사가 다시 묻자 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앳된 청년의 얼굴이 조금은 결의 어린 빛을 띠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
“천국 군대는 토루를 기점으로 제법 잘 버티고 있습니다. 꾸준히 증원 부대를 보충하며 거점을 악착같이 사수하는 것이 이쪽의 정면 공격을 최대한 오래 견디며 시간을 벌 생각인 것 같습니다.”
승도는 자신과 동승한 장교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적의 의도는 훤히 읽혔다.
그가 탑승한 기구에서는 전장 전체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포병의 공격이 좀 더 강력했다면 저 방법이 먹히지 않았겠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위력이 없군요. ‘이름 없는 병사들의 집’처럼 말입니다.”
승도가 이름 없는 병사들의 집을 언급하자 장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없는 병사들의 집은 반혁명 전쟁 당시 연합왕국 보병 대대 하나가 버티고 있던 강력한 보루였다.
이 보루를 손에 넣기 위해 로망스 제국의 자랑인 근위 보병연대가 파상 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들은 그 공격을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것도 로망스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포병대의 포격까지 받으면서.
보루에 쏟아부은 포탄이 자그마치 이천 발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천국 역시 그런 보루의 힘을 빌려 버티고 있었다. 왕립 육군처럼 보충도 받지 않고 신들린 방어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승군의 공격을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시간을 끌면 자신들이 유리해진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전장에 동원된 병력만 놓고 판단하면 저들에게도 역전의 기회가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가 두 개의 여단과 약간의 정의군만 가지고 전면에서 주도권을 쥐며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보자면 천국은 압도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상승군의 피로를 충분히 높인 상태에서 공격을 가한다면 천국도 좋은 승부를 해볼 수 있었다.
단순 보병 간의 싸움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포병이 받쳐주면 그 싸움은 할 만했다. 교환비를 두 배 수준으로만 맞추어도 상승군이 자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장에 나온 병력만 가지고 승부를 벌일 때의 이야기다. 승도는 이길 패를 다 깔아놓고 있었다.
처음의 움직임으로 주도권을 쥐고 적에게 수세를 강요한 것도 계획이었고, 시간을 끌며 방어전을 펴도록 만든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
전투를 길게 끌면 지치는 것은 천국 역시 마찬가지다. 이 상태에서 후방에 상승군의 결정타가 나타나면 전투는 어떻게 될까?
배후까지 차단되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순간 오합지졸들의 붕괴는 정해진 수순이다.
“역전의 기회를 준다면 그렇겠지요. 일단 저쪽도 생각은 복잡한 모양이군요.”
승도가 손가락을 들어 천국 진영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서 천국 보병들이 전열을 한창 재편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와해된 항마군과 같은 줄에 서서 전진하려던 보병들이었다.
그들은 일순간에 동료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반쯤 공황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야 겨우 전열을 회복하고 있었다.
천국 지휘부는 이 병력이 준비되었음에도 움직임을 유보하고 있었다. 좌익 토루들로 상승군의 공격이 집중되고 있음에도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2여단 병력이 우측 토루를 공격해올까 걱정하는 듯했다.
천국이 그런 걱정을 하는 데에도 이유는 있었다. 일단 우측에 있는 2여단 병력은 매우 크고 강력했다.
여단 자체는 3여단과 규모가 다르지 않았지만 외형상 이쪽은 정의군 병력을 포함하고 있어 그 수가 3여단의 세 배가 넘었다.
당연히 천국 입장에서는 상승군의 주력(?)이 위치한 이쪽 방향에서 제대로 된 공격이 날아올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느긋하게 적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좌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상승군의 포병대가 다시 포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토루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보충 병력을 계속 밀어 넣고 있어 단시간에 함락될 가능성은 없었다.
“적의 시선을 정면에 잡아두는 것도 좋지만 토루를 하나 정도는 깨 두어야 전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전과 확대를 하기에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대인의 말씀대로입니다.”
“덫을 하나 팠으면 합니다. 적의 방어선이 한 번 크게 흔들릴 정도로.”
승도의 말에 장교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좋은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 있습니다.”
승도는 전장을 보며 구상한 전술을 꺼냈다. 적의 방어에 가장 위협이 되는 부대는 바로 상승군의 포병대였다.
토루를 끝없이 타격하고 적 포병이 제대로 된 방어 위치에 배치될 수 없게 만드는 그들 때문에 천국은 제대로 된 방어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포병대를 미끼로 던져준다면 적은 무슨 생각을 할까?
승도의 말에 장교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포병을 미끼로 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쪽이 역으로 무너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승도는 손가락을 저었다.
“아닙니다. 포병을 절대 내주지 않을 테니까요.”
승도는 적진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먼저 2여단이 가진 포병을 3여단 방향으로 이동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2여단과 3여단 사이의 공간을 움직이는 동안 포병은 고스란히 적에게 측면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호위 병력도 잡병으로 적당히 붙이면 적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미끼를 물게 될 것이다. 그가 토루 공략이 되지 않아 성급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승리를 위한 변수가 있기를 바라는 입장에선 그렇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조바심, 그 승리에 대한 갈망이 적을 덫으로 인도할 것이다. 승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호위를 붙이지 않는다면 포병을 어떻게 지키실 생각이십니까?”
“3여단의 포병으로 지켜야지요. 이쪽 포병을 움직이기 전에 3여단 포병을 적당한 위치로 옮길 생각입니다.”
승도는 포병 전문가답게 정확한 교차 사격을 가할 지점을 골랐다. 그 위치로 3여단 포병이 이동하여 옆구리에서 적에게 산탄 공격을 퍼부으면 적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열기구에서 보고 판단할 때 최상의 위치였다. 목화가 수확된 대부분의 지역과 달리 그곳에는 아직 수확되지 않은 목화가 남아 있었다.
포구가 향하는 방향을 천국으로부터 숨길 수도 있었고, 적 보병의 예측 이동 동선을 타격하기에도 알맞았다.
“포병으로 적 보병을 사냥한다는 말씀이군요.”
“산탄은 언제나 보병의 천적이 아닙니까?”
승도는 가볍게 답했다. 산탄의 위력은 18세기부터 끔찍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 위력이 최고조로 발휘되었던 ‘모래톱 전투’에서 연합왕국 해군은 단 한 번의 일제 사격만으로 2천 명의 로망스 육군 보병을 증발시켰었다.
승도는 그런 끔찍한 전훈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적절한 조건과 위치만 갖추어지면 포병만으로도 보병을 능히 분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인의 말씀대로 적을 유인해서 잡는다고 하면 그다음부터는 싸움이 편하겠군요.”
잡병을 1개 연대 정도 붙이면 천국은 최소한 보병 두 개 연대 이상의 규모를 보내올 것이다. 그만한 전력이 떨어져 나오면 일시적으로 천국은 토루에 보낼 병력의 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틈을 이용해 토루를 취하면 상승군의 승리는 보다 완벽하고 확실한 것이 될 수 있었다.
“그 정도 이익은 있어야 주사위를 던져보는 맛이 있는 겁니다.”
승도는 망원경을 다시 눈에 가져갔다. 멀리 보이는 적진은 아직 수만의 대군에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숫자와 달리 수세에 몰려 있는 것은 적이었다.
승도는 그 적진의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깃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말을 탄 채 전장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 사내는 아마 이번 전쟁에서 그의 적수로 나왔을 천국의 왕, 익왕이라고 여겨졌다.
한때 그의 허를 찌를 정도로 놀라운 재능과 투지를 보여준 자였지만 역시 그는 대륙에서 나고 자란 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세계를 경험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힌 승도와의 격차를 좁히기에 그는 부족함이 많았다.
‘유감이군. 내가 천하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대를 거두어 썼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서로 엇갈린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