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55화 (255/425)

제255화. 천국패망 (2)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태양이 떠올랐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들판 위로 거대한 군대가 다가오자 천국 사람들은 성벽 위로 올라와 그들의 정체를 알고자 했다. 그 중에는 천국의 군주, 금수전도 있었다.

면류관을 쓰고 용포를 두른 왕의 출현에 병사들이 무릎을 굽혀 예를 표시했지만, 그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내관이 건넨 천리경을 받았다. 그의 운명이 달린 상황에서 허례 따위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천왕은 그 자신이 운명의 도박에서 패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천부와 천형이 도와주시는 그라고 해도 눈으로 보아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익왕이 가지고 간 세 개의 별이 보인다면 말이다.

천왕은 천리경에 눈을 가져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대군을 향해 시선을 가져가던 그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곧 시야에 거대한 인마의 물결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인영을 제대로 분간할 순 없었지만 선두에 선 자들이 든 깃발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천왕은 그 깃발을 보다 천리경을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폐하.”

내관이 당혹스런 음성으로 떨어진 천리경을 주웠지만 천왕에게는 천리경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힘이 빠진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 균형을 잃었다.

우스꽝스런 왕의 모습에 내관들이 그를 부축했다. 천왕은 그런 내관들에 기댄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천하가, 천부께서, 천형이. 나를 버렸다.”

그의 말에 내관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 말은 익왕의 군대가 패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지평선 저편에서 다가오는 군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인마의 선두에서 깃발을 든 기수들이 천경 쪽으로 쭉 나아온 덕분에 그들의 정체를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제국의 황룡기와 강주 상승군의 깃발이었다.

“천국이 이걸로 끝났다고?”

병사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패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익왕의 군대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이상과 대의가 여기서 끝장났음은 명백했다. 천경에는 저들을 상대할 군마가 없었다.

“우리 군대가 패하다니. 천부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니.”

“천형께서 지상천국 건설을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아니었던가?”

믿음이 깨졌다. 자신들이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던 신념이 깨졌다. 이상천국에 대한 희망이 무너진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종교적 광신에 의지한 종교 국가가 그 동력을 잃은 순간, 그 존재는 의미를 상실하게 마련이었다.

천국 지도자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왕들은 힘없이 다가오는 적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아직 투지를 잃지 않은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운명의 선택에 순응하는 빛을 보였다.

유일하게 후일을 도모할 뜻을 보인 것은 천왕의 인척으로 왕작을 받은 서왕이었다. 서왕에게는 아직 그의 영지와 세력 기반이 남아 있었다. 천경에 모든 기반을 둔 천왕과 다른 왕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손에 쥔 패가 있는데 역적이 되어 목을 내놓는 것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적을 바라보던 왕들을 향해 말했다.

“적이 다가오고 있는데 이대로 성에 머물러 계실 생각입니까?”

“하나 우리에겐 군사가 없지 않나. 모든 것이 이미 끝났다.”

“우리에게는 군대보다 강한 대의가 있습니다. 대의만 있다면 병사를 모으는 것은 쉽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수만 대군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했다고 모든 걸 잃은 얼굴을 하시는 겁니까?”

서왕은 다른 왕들에게 투지를 내비쳤다. 하나 그에 호응하는 자들은 없었다. 왕들은 이미 만사가 끝장났다고 여기는 얼굴들이었다. 유일하게 싸울 의지를 가지고 있던 서왕은 그런 지도자들의 표정을 보고는 장포를 펄럭이며 등을 돌렸다.

이 천경이 끝장난 이상 그가 살길은 영지로 돌아가 군대를 수습한 다음, 오승도가 지난날처럼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운이 좋다면 목숨에 더해 천국을 다시 재건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셈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천왕이 그를 불렀다.

“간아, 어딜 가느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대의를 이을 겁니다.”

“그러냐.”

“예, 하니 저를 막지 마십시오.”

“막지 않겠다. 대신 네게 부탁이 하나 있다.”

천국의 최고 권력자 금수전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왔다. 오승도, 그 악마만 없었다면 대륙의 일인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사내가 부탁을 했다.

서왕은 숙부의 부탁이란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태자를 네게 맡기겠다. 네가 이상을 꿈꾼다면 천국 왕실의 혈통이 필요할 터, 네 야망을 위해. 그리고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말이다.”

“태자 전하를 말입니까?”

“어차피 반적의 손에 죽을 거라면 네게 운명을 맡겨보는 것도 좋겠지.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서왕은 숙부에게 두 손을 모아 읍을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서왕의 모습이 사라지자 동왕 양유가 입을 열었다.

“이제 천국이 망하는 판입니다. 지금 태자 전하를 탈출시킨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적어도 내 눈앞에선 죽지 않을 것 아니요.”

천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왕이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왕궁으로 가 태자와 몇몇 수행원들을 챙겨 탈출을 준비하는 동안, 상승군은 천경의 성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협상의 절차도 밟지 않고 곧장 포병대를 배치하고 공성을 준비했다. 공격자들은 천국에 항복을 권유하는 것은 불필요한 절차라고 여기고 성벽을 돌파한 후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간 천국 병사들이 보여준 광신적인 모습을 본다면 여러모로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었지만.

상승군은 대포의 방열을 마치기가 무섭게 포문을 개방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는 허울뿐이었다. 머릿수도 채우지 못한 오합지졸 천여 명이 전부였다.

천둥 같은 포성과 함께 상승군의 첫 포격이 가해졌다. 긴 포신을 따라 가속된 강철 덩어리들이 무시무시한 쇳소리를 내며 성벽에 들이박혔다. 초탄은 대단한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가뜩이나 전의를 잃고 있던 수비 측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기엔 충분했다.

초탄으로 대강 성벽의 방어 정도를 시험한 포병은 아이언 볼로 성벽을 부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판단했다.

포병 장교들은 포탄의 탄 종을 산탄으로 바꾸었다. 성벽 위의 적만 쓸어내도 공성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이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천국의 잔존 세력들에게 오승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과시하기 위해 불필요한 공격이 필요했을 뿐이다.

상승군은 포술 훈련이라도 하는 양 여유롭게 포격을 개시했다. 성벽 위로 한 번에 백 발의 산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포격이 가해질 때마다 성벽 위는 피바다로 변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성벽 아래에서 무자비한 포격을 보며 전율했다. 오승도의 무력은 천국이 재기를 도모해도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공격을 보고 상승군에 대항하려는 모든 시도가 무의미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천국의 잔존 병력은 이 포격과 질서정연한 적의 모습을 보고 하나둘 무기를 놓았다. 최후까지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지도층 인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소수의 광신적인 병사들뿐이었다.

포격이 시작된 지 삼십여 분이 지났다. 충분히 적을 위압했다고 판단한 상승군은 포격을 중지하고 보병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천국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 전진이었다.

함성 소리와 함께 검은 군복들이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텅 빈 성벽을 단숨에 타고 올랐다. 뒤늦게 일부 천국 병사들이 저항을 위해 덤벼들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일방적으로 쓸려나갈 뿐이었다.

교전이 시작되고 몇 분 후, 천경의 성벽 위에 제국의 깃발이 걸렸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공성전이긴 했지만 그 전개 과정은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방어군이 있는 성을 희생 없이 손에 넣은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 전율적인 승리는 상승군의 가공할 위력과 오승도의 이름을 천하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강주가 천국을 대신해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

기나긴 내전은 끝났다. 전란의 종식은 평화를 가져왔다. 동시에 강주의 지위를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곳까지 올려놓았다.

천국에 협조적이었던 강상의 일부 인사들을 반역으로 몰아 쓸어버리고, 그 자리를 행상에 협조적인 자들로 채운 덕에 상계 장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상품과 물류를 손에 넣고 대하를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행상의 힘은 대륙 경제 그 자체를 논할 만큼 강력해졌다.

행상의 힘은 비단 경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천국 잔존 세력의 색출을 구실로 천국의 영역 곳곳으로 진주한 상승군의 위력 앞에 강남의 군현들이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복직된 지방관들은 상승군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통치 행위를 할 수 없었던 탓에 실상 강주의 괴뢰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런 실태는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천국의 잔존 세력을 명분으로 내걸고 강남을 틀어쥔 오승도와 대립하는 것은 무리였다.

무엇보다 강주는 매우 교활하게도 조정에게 그럴듯한 명분까지 보여주었다. 천경에서 탈출한 서왕 일행이 대하 하류에 약간의 지반을 가지고 버티도록 살려둔 것이다. 그들은 대국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강주가 강남을 장악할 명분이 되어주는 훌륭한 도구였다.

조정으로서는 이들이 토벌되지 않는 한, 천국 잔존 세력 소탕을 빌미로 강남을 차지한 강주에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다.

승도는 이런 정부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강주는 강남을 확실히 장악했습니다. 대하 이남의 거의 모든 군현에 우리 영향력이 강고하게 스며들었고, 여기에 대해 조정에서 관여할 여지는 전무합니다. 한다고 해도 당분간은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겠지요.”

관리사의 말에 장내에 모인 행상의 지도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사실상 강주가 독립된 지위를 차지했음을 인식했다.

“하지만 조정에서 그냥 손을 놓고 있진 않을 겁니다.”

한 행상이 입을 열었다. 정계에 선을 대고 있는 행상들은 노회한 정치가들의 술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생리를 아는 만큼 조정에서 이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 점은 승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까지 하려면 권모술수에 능해야 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 중에는 위험한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제거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주와 승도는 이제 존재 자체로 부담이 되는 위험한 세력이었다. 파멸해주면 좋은 집단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쪽도 여기에서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다음 포석은 제국 정계에 둘 생각입니다.”

“강남을 쥔 우리에게 정치가들이 경계심을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제국 조야에서 그에게 경계심을 가진 자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된 파벌인 총리대신의 파당은 물론이고 태후를 정점으로 뭉친 황실 보수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오승도의 존재를 위험한 도전자의 위치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그들의 경계심은 오승도가 보여 온 놀라온 전공과 성장, 그리고 이번에 보여주었을 군사력으로 더 높아질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승도가 손을 내밀 상대는 그들이 아니었다. 이들 세력과 손을 잡아봐야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변방의 지방 실력자와 손을 잡는다는 인상 정도를 가진 황실 권력자들과 결탁해봐야 큰 이문을 얻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많이 가진 자들과 손을 잡아봐야 남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적게 가진 자와 손을 잡아야 많이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전이라면 위험을 감안해 건너지 않았을 다리이나 지금은 달랐다. 이 제국에서 군사적 실력으로 그를 위협할 존재는 더 이상 없었다.

외부의 위험한 변수인 연합왕국은 당분간 강주의 행보에 제동을 걸기 어렵게 만들었고, 로망스는 강주의 입장에 우호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열강이 관망 혹은 우호의 태도를 견지하는 이상 그의 패는 최상이었다.

바로 지금, 외부 여건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야말로 도박의 수를 낼 때였다. 그가 천국을 이 시기에 무너트리며 자신의 힘과 역량을 과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손을 잡는 것은 황실 보수파도, 총리대신의 파당도 아닙니다. 제3세력입니다.”

“정계의 제3세력이라면.”

오유도가 아들의 말을 받았다. 그는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정의 중앙 요직을 장악한 것은 황실 보수파와 총리대신의 파당이나, 관리가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무수한 실무 관료들이 있었다.

한 줌의 관료로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이들의 손발이 되어줄 관리 없이 제국 경영은 무리였다.

“예, 조정의 하급 관료들입니다.”

“그들은 정계에 영향력이 별로 없는 자들이 아닙니까?”

“물론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뒷배가 생긴다면 힘을 쓸 수 있는 자들이기도 하지요.”

승도는 정계의 생리를 입에 담았다. 하급 관료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영향력이 적다 할 수는 없었다. 그 배경이 되어주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행사하는 힘은 천차만별이었다.

요컨대 귀족 가문의 자제가 하급 관료로 임관하여 출세 코스를 밟아 나간다고 가정할 때, 그가 하위 관료에 머문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그 배경이 막강한 귀족 가문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승도는 하급 관료들을 포섭하고 그 뒤에 자신의 이름을 실어줄 생각이었다. 그들을 강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창구로 쓰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제국 조야에서 그를 대변하는 자들이 늘면 강주의 입지는 더욱 강고해지고, 그 지반이 단단해지는 만큼 강주를 배경으로 가진 자들의 힘은 더 커진다. 그 선순환 구조가 이어지면 고위 관료들 중에서도 기꺼이 오승도의 개가 되려는 자가 나올 터.

자연히 피를 흘리지 않고도 강주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급 관료들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게 한다. 하나 그리하려면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할 것인데.”

“생각해둔 적임자가 있습니다.”

승도가 답하자 오유도가 물었다.

“누구를 말하느냐?”

“위해충입니다.”

승도의 대답에 행상들이 잠시 술렁였다. 그 탐욕스런 탐관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로서는 그가 강주의 수족이 되어 움직여줄 것이라는 말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자라면 몰라도 그는 무리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다루기 곤란한 자입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반문에 승도가 고갤 저었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그자여야만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물음이 돌아오자 승도가 좌중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조정이 썩었다는 것은 여러 대인들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제국이 부패한 것을 모를 정도면 귀가 먹고 눈이 먼 상인이라는 것이니까.

“그 부패한 조정에서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이겠습니까?”

“부패한 물에는 부패한 자가 제격이다?”

반진유의 반문에 승도가 미소를 보였다.

“맞습니다. 해서 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거듭된 실수로 조정에서 입장이 곤란해져 있습니다. 욕심이 많고 출세욕이 큰 그는 우리 쪽에 기꺼이 포섭될 유일한 고위 관료일 겁니다.”

“하지만 대인, 그자는 너무 썩었습니다. 그를 쓴다는 것은 강주의 면이 그만큼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부패한 자라 해도 우리 입장만 충분히 대변해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인들의 존경이 아니라 조정이 보내올 견제에 대해 포석을 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승도의 말에 행상들이 진중한 표정으로 동감의 뜻을 보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 안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행상들이 모두 동의의 뜻을 보이자 승도는 건문을 들어오게 했다.

이제 강남을 평정한 그의 눈은 무력이 아닌 정치력을 겨룰 전장, 북경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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