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63화 (263/425)

제263화. 회군 출병 (2)

승도가 관사로 돌아오자 자그마한 소녀가 두 손을 모아 배꼽 아래에 붙이고 인사를 했다. 그의 딸 희였다. 그녀의 인사에 피로가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승도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시녀에게 그녀의 일과에 대해 물었다. 희는 아버지와 있는 것이 조금은 멋쩍은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승도는 아쉬운 마음에 딸아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주고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해진 인사를 마쳤다는 기쁨에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아버지로서의 허탈감과 즐거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승도가 방으로 돌아오자 은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어느덧 만삭이 된 여인은 제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워 보였다.

승도는 그런 아내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침상 앞에 마련된 작은 탁자에는 따끈한 김을 내는 찻주전자가 있었다. 필시 희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은비가 시녀를 시켜 차를 준비한 듯싶었다.

승도는 아내의 배려가 담긴 차를 찻잔에 따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늘은 그녀와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었다.

그가 찻잔을 매만지다 잠시 망설이는 빛을 보이자 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남편의 행동에 익숙해져 있어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가 먼저 물꼬를 터주자 막혀 있던 입이 열렸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실은.”

승도는 시장에 구경을 나갔다가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은비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가 말했다.

“서방님이 그 자리에서 방관하시기로 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는 긍정의 뜻을 보였다.

“가급적 관이 상계에 개입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섭니다. 관이 개입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면 그만큼 상인들은 관을 통해 이해관계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되면.”

“부정부패의 사슬이 다시 자라난다 그 말씀이시지요?”

아내는 현명했다. 승도의 뒷말을 짐작하고 꺼낸 대답은 그의 생각과 일치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순리대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걸리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상인으로서 가진 자존심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의 대답에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법이 아니라 자존심이 걸리신다고요?”

“그래요.”

승도는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근대적인 사법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신에서 ‘법’으로 유무죄를 단죄하는 것은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컸다. 근대적인 사법 제도 하에서도 ‘자의성’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음은 그 자신의 재판에서도 경험한 바, 승도는 법적인 부분을 문제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상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와 같은 천박한 상인 하나를 허용함으로써 상인 계층 모두가 천박한 돈벌레요, 더러운 협잡꾼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정말이지 불쾌한 일이었다.

고고한 구름 위의 세계를 노리는 그에게 그런 인식은 잘 닦인 비단옷에 튄 구정물과 다름없었다.

“그럼 그 일에 끼어드실 생각이신가요?”

“그걸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자잘한 건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는 승도 자신보다 평범한 사람에 가까운 은비의 시선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명쾌했다. 승도가 그녀의 조언을 구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남편의 기대(?)에 찬 시선을 받은 은비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서방님께서 마음에 걸리신다면 해결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일에 개입하란 말인가요?”

“큰일을 하실 분이 사소한 곳에 신경이 분산되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요.”

일리는 있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내가 개입한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를 키울 수 있습니다. 나는 행동 하나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권력자니까요.”

“그래서 행상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간단히 손을 쓰시는 것이 어떨까요? 권력을 쓰는데 문제가 된다면 상계 안에서 스스로 해결하게 하면 되니까요.”

아내의 단순명료한 말에 승도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일을 복잡한 잣대에 놓고 해석하며 지내다 보니 이것저것 재어 일 처리가 오히려 어려웠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의 고민을 단순하게 해결해 주었다.

권력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행상에게는 거대한 자산이 있었다. 그들의 인맥과 돈이라면 고리대업자 하나 손보는 것은 어린아이 팔 비트는 것보다 쉬웠다.

승도는 고민을 해결해준 아내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이튿날, 승도는 상경 공소의 책임자를 불렀다. 공소의 책임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 앞에 출두한 채 명을 기다렸다.

강상이 파멸한 이후, 상경에서 제일가는 상인의 반열에 오른 이였지만 오승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는 이 강력한 권력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몰라 머리를 조아렸다.

“백 대인.”

“예, 대인.”

그가 부름에 답하자 승도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에 요대라는 자가 있던데 그를 알고 계십니까?”

“요대,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백씨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천한 고리대업자 하나의 이름을 모른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승도가 할 일은 강주 관리사가 아니라 행상의 영수로서 ‘상도덕’을 어지럽힌 자에 대한 관리를 백씨에게 지시하면 그만이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고 조처를 취하는 것은 백씨가 할 일이었다.

“어제 시전에 나갔다가 다소 불쾌한 구경을 했습니다.”

“불쾌한 구경이라고 하시면.”

백씨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권력자가 불쾌하게 여겼다면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상계는 권력자가 기침만 해도 태풍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 요대라는 천한 자가 고리대로 상인들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리대가 좋은 대접을 받는 일은 물론 아니나 그래도 정도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자들이 독버섯처럼 하나둘 늘어 상인의 이름을 값싸게 만들면 백성들이 우리 행상을 보는 눈도 나빠지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런 참람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기우이십니다.”

“아니요. 기우는 아닙니다. 그런 악독한 자 하나가 나타나면 상계의 평판은 그만큼 나빠지게 마련입니다. 석년의 도적들 발호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리대업자 몇 놈이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은 덕에 난을 일으킨 도적들이 상인들의 가산이란 가산은 모두 털어가지 않았습니까? 인심이란 그와 같은 겁니다.”

“예에.”

“그러니 백 대인께서 그 요대라는 천한 자의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잘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승도는 거기까지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 추잡한 이야기는 아랫것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족했다.

“대인께 그 이름이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조처하겠습니다.”

백씨가 손을 모아 읍했다. 승도는 그만 나가보아도 좋다고 손짓을 했다.

로망스에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군의 원수가 산을 보고 기침을 하면 중장이나 소장은 산을 깎으라고 명하고 연대장은 산을 치우게 하고, 대대장은 그 자리에 호수를 만들 준비를 한다는 우스갯소리다.

승도가 내린 명령도 정확히 이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관부의 권력자로서 힘은 한 푼도 쓰지 않았지만 상계의 거물로서 행사한 힘은 이 농담을 현실로 만들었다.

행상 공소의 책임자 백씨는 오승도의 명령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휘하 상인들에게 요대라는 고리대업자를 찾아 장사를 아예 접고 알거지가 되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상인들은 요대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개시했다. 우선 요대의 주 수입원인 고리대를 못 쓰도록 시전 상인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었다. 이자는 요대의 것보다 훨씬 쌌다.

이 대출로 요대의 수입원이 일단 막혔다. 이어 시전 상인들에게 ‘담보’인 딸들을 돌려받게 한 후, 그들의 몸을 탐한 요대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하게 했다. 그로 인해 요대는 엄청난 벌금을 내야 했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한 타격을 입었지만 행상의 상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요대라는 자를 상경에서 치우라는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다음 수순으로 넘어갔다.

그들과 거래 관계에 있는 방들에 돈을 주고 날품팔이 노동자들을 모아다 요대의 사업장에서 날마다 행패를 부리게 한 것이다. 이 공격에 요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사업을 접고 상경을 떴다.

승도는 며칠도 되지 않아 자신이 내린 지시가 말끔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아버님. 흐흑.”

“얘야, 미안하다.”

서로 얼싸안은 채 감격의 상봉을 나누는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오래전 밀밭에서 누이와 뛰어놀던 소년이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승도는 오래도록 그들 부녀를 지켜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

주장대신의 파발이 북경에 도착하던 날, 유목민들은 그 공세를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점과 점을 잇는 선의 차단에 성공한 다음, 제국의 통치 핵심인 점의 괴멸에 착수했다.

물론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들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공격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손해가 너무 컸다. 물자와 인구가 풍부한 도시가 그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드넓은 초원 한쪽에 한 무리의 기마가 나타났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말을 멈추고 그 자리에 대기하였다. 그들이 선 곳 앞에는 대막에서 보기 드문 성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시는 대막의 초원 교통로들 사이에서 발달한 전통적인 교역 도시 중 한곳이었다. 그 역사가 자그마치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곳으로 제국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도시였다.

“족장님, 교하고성이 코앞입니다.”

“그런 것 같군.”

유목민 족장이 서역의 천리경을 쥐고 전방의 도시를 살폈다.

도시의 이름은 ‘교하고성’으로 제국군 일천이 주둔한 곳이었다. 과거 성조가 이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 초원 부족들을 굴복시킨 대원정의 중요 보급 기지를 수행한 곳으로, 대막으로 제국군이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가 도시를 살피고 있는데 그 옆에 있던 자가 말을 몰며 앞으로 나섰다. 그자는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혼혈이 많은 대막에서 백인을 보는 일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의 차림이 눈에 밟혔다.

그는 전통적인 대막 유목민의 복색 위에 은 십자가를 매달고 있었다.

정교회의 상징인 은 십자가를 매달고 다니는 유목민은 평범한 대막 사람으로 보기 어려웠다. 정교회를 믿는 자들은 바로 국경 너머, 북적 출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파블로프 공이 보기에 저 도시를 공격하면 승산이 있겠소?”

족장이 자신의 서역 고문에게 물었다. 정교회의 십자가를 매단 사내, 파블로프 소령은 얼마 전 국경을 넘어와 기존 무기 지원을 넘어선 ‘전술 지도’까지 담당하게 된 자였다.

그는 사령관으로부터 가능한 한 소란을 크게 만들고 제국군을 오랫동안 잡아둘 수 있도록 전투를 이끌라는 지침을 받고 있었다.

파블로프는 망원경을 들어 도시를 보고는 족장에게 답했다.

“승산은 충분합니다.”

“그리 판단하실 만한 근거라도?”

그는 손가락을 벌려 도시에서 가장 낮은 부분의 성벽 높이를 표시했다. 그 높이는 약 삼 미터. 그간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기병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낮은 곳을 타고 들어가면 수성군을 간단히 해치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마의 도약이란 것이 한계가 있지 않소?”

족장이 묻자 파블로프가 전사들이 지고 온 부대주머니를 가리켰다. 식수와 고기 등을 담은 주머니였다. 그가 주머니를 가리키자 족장이 설명을 계속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파블로프는 주머니를 가리킨 손을 바닥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 흙을 주머니에다 채워 발판으로 쓰면 간단합니다.”

그 말에 족장은 금세 성을 공략할 방법을 머릿속에 그렸다. 기병이 성벽 앞으로 날래게 달려가 가죽 주머니를 던지고 선회해서 돌아온다. 이 동작을 몇 번 반복하면 성벽을 뛰어넘을 발판을 만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십 미터 높이의 성벽 정도라면 수만 기병을 동원해도 그 같은 발판을 쌓기란 쉽지 않지만 삼 미터 정도라면 대수롭지 않았다. 이 미터 정도는 기마가 수월하게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발판으로 어느 정도의 주머니만 쌓으면 성내로 들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다음은?

족장은 희죽 웃었다.

교하고성을 지키는 지휘관은 이 이름 없는 변방의 현위로 재직하고 있던 조상이란 인물이었다. 조상은 실력도 변변치 않고 연줄도 없는 전형적인 하급 관리로 하루하루를 무사안일하게 보내기로 소일하는 자였다.

그는 주변의 정세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음에도 오늘의 평화가 내일도 이어지리라 보며 지낸 터라, 갑작스럽게 유목민 군대가 나타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적이다, 적이야.”

그가 겁에 질려 덜덜 떨자 현령도 같이 겁을 먹었다. 현의 장관인 현령 역시 무능하기는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도시를 지나는 유목민들을 쥐어짜 돈을 받을 줄만 알았지 막상 싸움이 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작자들이었다.

이런 이들을 지휘관이라고 믿어야 하는 군관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당연했다. 군관들은 그들의 지시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 년에 한 번 나그네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이들 고위 책임자들과 달리 그들은 짧게는 십 년에 길게는 평생을 이곳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터라 유목민의 습격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백전노장의 군관들이 중심을 잡자 병사들도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누군가 중심을 잡고 명령을 내리면 병사들의 전투력도 달라지는 법.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뀌었다.

하지만 지휘체계가 바로 서지 않아 총체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군관들이 긴장한 얼굴로 초원 저편을 바라보는 가운데, 유목민들이 말을 몰아 성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말을 천천히 몰았다. 위협이라도 가하듯 느긋하게 말을 몰아오는 모습은 흡사 공격하기 전에 항복할 기회를 주는 듯싶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행동은 성으로 접근하기 전에 전마의 체력을 아껴두려는 상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성과의 거리가 웬만큼 좁혀지자 유목민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이를 신호로 전마의 속도가 빨라졌다. 말들이 거친 숨을 내며 급속하게 거리를 좁혀오자 성 위에 있던 군관들이 명령을 내렸다.

“적이 접근할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쏴라!”

그들의 명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구식이긴 해도 총기가 그들의 손에 있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해 어설프긴 했지만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그들의 총격은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지만 재수가 좋게도 말 하나가 비명을 토하며 다리를 높게 들었다 모로 쓰러졌다. 유목민은 낙마의 충격으로 잠시 버둥거리다 겨우 몸을 일으켜 뒤로 움직였다.

하지만 다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쏜살처럼 성벽으로 다가왔다. 그 위치는 가장 취약한 곳이었다. 군관들은 상대가 사다리를 걸치고 대번에 올라오리라 짐작하고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서편 성벽을 지켜라. 놈들이 올라오면 끝장이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갔다. 군관들은 병사들이 늦지 않기를 기원했다. 불행하게도 유목민들 쪽이 좀 더 빨랐다. 그들이 먼저 도착하고 만 것이다.

군관들이 긴장한 눈으로 그들이 성으로 오르는 순간을 지켜보려는데, 유목민들은 말에서 내리는 대신 지고 왔던 가죽 주머니를 성벽 앞에 휙 집어던졌다.

그들은 주머니를 모두 쌓고는 말을 몰아 뒤로 물러갔다. 이어 도착한 유목민 무리도 같은 행동을 하고 물러났다. 군관들은 적이 공성을 하지 않고 그냥 물러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다 ‘잠시’ 그들이 놓고 간 주머니의 존재를 깜빡하고 말았다.

그리고 적이 말을 물린 다음 길게 선회하여 다시 성벽 쪽을 향해 달려왔을 때, 그들은 뒤늦게 위험을 눈치챘다.

“설마 가죽 주머니에 흙을 채워 디딤돌로 만든 건가?”

그들이 경악할 새도 없이 폭풍처럼 말을 몰아온 유목민들이 가죽 부대를 밟고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기마부대가 성벽 위에 올라선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안전한 지형의 이점을 잃고 기마와 대적하게 된 시점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군관들도 그 사실을 깨닫고 급히 제 무기만 챙겨 성벽을 훌쩍 뛰어내려 달아났다. 멍청하게 그 자리에 남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관료 둘, 현령과 현위는 뒤늦게 뒤뚱거리며 달아나려다 유목민이 던진 밧줄에 묶여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유목민들은 그런 제국 관료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유목민과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제국 관료.

이 대막에서 오랜 쌍방의 관계를 역전시키려는 그들의 꿈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