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65화 (265/425)

제265화. 폭풍전야 (1)

오승도와 북경의 건문, 제국 정부가 저마다의 수를 두며 대막으로 시선을 던질 무렵, 제국 주둔군과 대막 유목민들 사이에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교하고성에서의 패배로 본국과의 연결이 차단될 것을 우려한 주장대신이 군세를 모아 초원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대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본국과의 연결이 장기간 끊어질 경우,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반면, 유목민들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제국의 주둔군이 건재한 상황에서는 혹시나 제국 본토에서 증원 군이 왔을 때 그만큼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해서다.

유목민들은 교하고성의 점령으로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대막 전역에 보여준 터라,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던 자들까지 진영에 끌어들여 그 세를 폭발적으로 불린 상태였다.

유목민들이 가진 군대는 대략 삼천이었다. 제국 본토에서 거리가 먼, 인구가 희박한 이 땅에서 삼천은 어마어마한 대군이라 할 수 있었다.

주장대신 측의 군세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가 가진 군대는 모두 사천이었다. 광대한 대막의 통제를 위해 제국이 유지하는 병력의 수가 원래 적은 탓이다.

이곳 대막에 병력이 적은 이유는 엄청난 유지비용이 큰 몫을 차지했다. 제국 본토의 최서단인 옥문 관까지 물자와 병력을 보내는 것만 해도 제국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역대 왕조들이 옥문 관 서쪽으로 영토를 가급적 넓히지 않으려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옥문 관에서 서쪽으로 황량한 초원을 따라 수천 리. 그 엄청난 거리를 넘어 대막의 도시들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 적은 규모의 군대라 해도 그에 드는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자면 성조가 이만 대군을 거느리고 대막으로 진공한 것이 예외적인 사례일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주장대신의 휘하에 모인 군대가 사천이라는 것은 제국이 교하고성 탈환에 얼마나 큰 의지를 품었는지를 증명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들의 의지가 굳다고 해서 유목민들이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 한 번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제국으로부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유목민들의 군사 고문으로 사전 정찰에 나선 파블로프 소령이 망원경을 들었다. 제국군은 짧고 긴 쐐기꼴 진을 갖춘 채 포진하고 있었다. 양군 모두 기마이다 보니 보병 방진을 걱정하지 않는, 중앙 돌파에 중점을 둔 진형이었다.

파블로프가 망원경을 들고 제국군의 진영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본 족장이 물었다.

“이번 전투는 어떨 것 같습니까?”

지난 전투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조언을 준 파블로프인지라 족장은 기대를 갖고 물었다. 물론 그 조언을 해주지 않았어도 유목민들은 쉽게 그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기까지 약간의 시행착오와 희생을 치렀을 거란 점만 뺀다면 말이다.

족장의 물음에 파블로프가 망원경을 내렸다. 이곳 전장은 지형의 이점을 양자 모두 누리기 어려운 평평한 평지였다. 이런 전장에서는 병력의 수와 화력의 우세를 점한 쪽이 유리했다.

이 점에서 제국의 우세는 확고했다. 제국군은 유목민들보다 많은 대포와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병력의 머릿수도 우세했다. 루시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이렇게 대치할 상황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적의 포병이 따라올 수 없는 지점에서 결정적인 교전을 벌인다면 적의 화력은 자연히 상쇄된다.

파블로프는 이 같은 기본 지침을 족장에게 이야기했다.

“일단 이번 전투는 쉽지 않습니다. 정면에서 적과 대적하는 것은 무리이니 일부러 달아나는 기만술을 써야 합니다.”

“그런 행동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소?”

초원 부족들에게 있어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은 수치였다. 특별한 이유(이기기 위한 술수)가 없다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적을 유리한 전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입니다. 이쪽도 포병이 있고 저들도 포병이 있습니다. 이때 한쪽이 포병을 쓰지 못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쓰지 못하는 쪽이 불리할 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바로 그 같은 수법을 쓰려는 겁니다.”

“적의 포병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후퇴라 이거요?”

“맞습니다. 이쪽 포병이 준비된 위치로 끌고 오는 것이 전략의 주된 부분입니다. 그것도 충분한 거리를 달려 지치게 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파블로프는 몇 가지 부분의 안전장치도 더했다. 기병은 기동성이 좋은 병과라 불시의 공격을 당해도 탈출하기 쉬웠다. 하지만 한창 추격전을 벌이느라 전마의 체력을 소모한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친 말은 보병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포병의 표적으로는 제격이란 뜻이다.

“하지만 적이 그리 쉽게 속겠소?”

“적을 속이려면 이쪽도 확실히 피를 흘려야 합니다.”

파블로프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완곡하게 말했다. 대초원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어서 파블로프의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한 번 패한 다음 지정된 방향으로 기마를 몰고 후퇴, 포병으로 두드리고 적을 역으로 박살내는 것이요?”

“그런 셈입니다.”

파블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의도대로 유목민들의 군대가 배치되었다. 낙타에 견인되어 온 포와 포를 운용할 병사들은 30리 후방에 남겨졌고, 기병의 일부는 포병 주위에 예비대로 대기하였다.

이들은 포병의 포성과 동시에 적 기병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기병들은 제국군이 진을 친 곳으로 나아갔다.

유목민들이 전열을 갖추어 앞으로 나아오자 주장대신 한정원이 그 군세를 살폈다. 대신은 유목민들의 기동성을 알고 있어 정찰대를 다수 운용하지 못한 까닭에 적세를 이제야 눈으로 확인했다.

“적 군세가 기천은 되겠군. 반적들의 무리가 저리 많으니 교통이 마비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한정원이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아갔다. 조금 더 적의 진을 확실히 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장수들 몇이 호위하듯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적은 단합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들입니다. 우리 팔기의 힘이라면 간단히 으스러트릴 수 있을 겁니다. 포병으로 일시 포격을 가해 혼란을 주고 기병을 중원으로 투입해 소탕해 버리시지요.”

장수 하나가 고했다. 그의 어투에서는 팔기에 대한 믿음이 배어 있었다. 무능과 부패에 절어 무너진 본토의 팔기들과 달리 초원지대의 팔기들은 아직 그 용맹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평화에 찌든 시기에도 국경을 넘나들며 변경을 어지럽히는 유목민들을 상대하느라 나태해질 시간이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제국의 최정예요, 제국 국방의 일선을 담당하는 보루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한정원은 그 병사들을 믿고 야전에 나왔던 터라, 장수의 강공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도 효과는 있겠지. 반적들을 쓸어버리고 바로 교하고성으로 움직여야 할 터이니, 시간을 많이 줄 수 없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식경 안에 요절을 내겠습니다.”

“좋아. 황제 폐하의 성지를 더럽히는 반적들을 쳐낼 공을 자네에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대인.”

장수는 대신에게 예를 표시하고 말 머리를 돌렸다. 한정원은 그 자리에서 천리경을 꺼내 전장이 될 적진을 훑었다. 곧 제국 포병이 첫 번째 포성을 울렸다.

육중한 포성과 함께 초원 저편에 흙먼지가 일었다. 느닷없는 공격에 유목민들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리저리 말들이 뛰고 병사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제대로 된 군대 조직을 갖추지 못한 자들의 한계였다.

한정원은 그것만 보고도 자신들이 이겼다고 자신했다. 이어진 포격에 유목민들의 진형이 크게 요동쳤다. 바로 다음 순간, 굵직한 외침과 함께 요란한 말발굽이 지축을 흔들었다.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반적들을 쳐라!”

“와아아!”

기마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지를 향해 물밀듯이 질주했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유목민들의 진형에 번진 동요가 더 커졌다. 십여 초 만에 최종 가속에 들어간 제국 팔기들이 창을 높게 들고 돌입에 들어갔다(이곳 제국 기병들의 주 무장은 총과 활이지만 회전을 위해 창을 선택함).

뒤늦게 그에 맞서 유목민들이 이쪽을 향해 마주 달리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효과적인 진형과 기세, 가속도를 탄 제국 기병의 물결과 교차한 순간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수십 명이 우수수 떨어졌다.

충격의 순간 낙마한 자들의 대부분은 유목민들이었다. 유목민들의 진형은 단번에 대나무로 쪼개지듯 둘로 갈라졌다. 그 예봉으로 진이 갈라지자 유목민들은 대번에 전의를 잃은 듯 보였다.

“후퇴! 후퇴!”

유목민들 사이에서 후퇴를 알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목민들이 황급히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자 제국 기병들이 속도를 높여 그 뒤를 밟았다.

한정원은 점점 멀어지는 팔기들을 보며 천리경을 내렸다. 싸움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었다.

***

말을 타고 달아나는 반적들을 쫓던 장제가 침을 뱉었다. 벌써 몇 리를 추격해 왔는지 몰랐다. 추격해오며 쓰러트린 적만 벌써 둘이었다. 좀 더 추격하면 이번에 모인 반적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앞에서 달려가는 적 기병들과 거리가 좁아지는 순간만을 고대하며 묵직한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거 토끼 사냥 같지 않아?”

말을 몰던 동료가 말했다. 초원에서 토끼 사냥은 상대가 지칠 때까지 추격하여 잡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지칠 때까지 도망가는 유목민 사냥은 토끼 사냥에 비유할 법했다.

“토끼 사냥은 모르겠고 어서 돌아가서 술이나 한 모금 하고 싶네.”

“하긴 목이 좀 타는군. 저 빌어먹을 것들만 잡히면.”

그들은 이죽거리며 말을 몰았다. 드넓은 초원에서는 복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적을 추격하며 농담을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농담을 나눈다고 해서 긴장을 푸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잠깐 방심하면 적이 반전해서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그 위험을 아는 만큼 병사들은 입은 놀아도 눈은 놀지 않았다. 적을 향한 그 눈빛은 언제나 예리한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십 리를 넘게 달렸다. 말도 사람도 전력을 다해 달리다 보니 차츰 그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구력이 좋은 품종의 말들도 장시간 고속을 내면 급속하게 체력이 감소하게 마련이었다.

일반적으로 말은 몇 시간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체중이 킬로그램 단위로 감소하곤 했다. 열량의 소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달리도록 만들어진 동물이 아닌 탓이다.

말의 속도가 슬슬 떨어져가자 장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말들이 지치는 걸 보니 놈들도 지치겠어.”

“그렇겠군.”

제국군이나 유목민들이나 쓰는 말은 같았다. 동일한 초원에서 같은 풀을 먹고 자란 품종이기 때문이다. 제국군이 사들이는 말은 모두 유목민들이 기른 것이니 차이가 있을 수가 없었다.

장제는 심호흡을 하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적들의 무리를 보았다. 이제 숫자를 백 정도만 헤아리면 그 무리의 뒤를 잡고 창질을 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고 긴, 무익한 추격전도 끝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토끼 사냥도 끝이다. 모두 힘을 내지.”

모두가 싸움이 이제 끝날 거라 여겼다. 거리가 좁혀진 상태에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않는 적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병법의 이치로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승리의 순간을 예감하고 있던 찰나였다. 일순 적 기병들의 대오에 이상한 기미가 보이더니 그들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갑작스런 그들의 움직임에 제국 기병들은 반응하지 못하고 잠시 그 움직이던 방향대로 계속 나아갔다.

그들은 유목민 기병들이 움직이며 만든 먼지의 장막을 뚫고 깨끗한 풍경 속으로 들어섰다. 그다음 순간 장제의 입이 딱 벌어졌다.

“포병이다!”

그들의 앞에는 낙타가 끌고 온 수십 문의 대포가 있었다. 유목민 따위가 어떻게 대포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대포라고?”

동료들이 반응할 틈도 없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목민 포병들이 포문을 개방한 것이다. 초원에서는 가장 단순한 포병 운영이 가능했다. 바로 직사다. 달려오는 기병을 향한 직사는 그야말로 끔찍한 위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피해!”

일순간에 유목민 포병이 포탄을 날렸다. 이 포탄은 제국군에게 끔찍한 손실을 강요할 악마의 병기, 산탄이었다.

폭음과 동시에 수천, 수만 개의 쇠구슬이 기병과 말을 휩쓸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욕설이 뒤엉켰다. 그 혼란상은 기병 스스로가 일으킨 먼지 구름으로 더해졌다.

뒤쪽의 기병들은 상황도 모른 채 내달리다 산탄으로 낙마한 동료들을 짓밟았다. 초원은 핏물로 붉게 적셔졌고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혼란에 빠진 제국 기병들의 대열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하는 동안, 유목민들의 두 번째 포격이 가해졌다.

포성과 동시에 날아온 악마의 손길이 다시 기병들을 휩쓸었다. 말들이 쓰러지고 기병들이 낙마했다. 혼란의 와중에 겨우 이 아비규환의 도가니를 빠져나온 기병 몇이 뒤늦게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적 포병을 향해 쇄도하려 했다.

그러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신선한 유목민 기병들이 출현했다. 유명한 기병 장교 앙젤 공의 말을 빌자면 승패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속도를 잃은 기병은 보병보다 무력하다.’

그 말은 여러모로 맞는 말이었다. 혼란에 빠져 제 기능을 잃은 데다 지친 이들을 상대로 처음부터 전속력을 낼 수 있는 신규 기병의 출현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이 기병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둔기를 가지고 있었다.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들이 중세 기사들을 때려 죽였듯 그들 역시 둔기로 제국 기병들을 도륙할 참이었다.

제국 기병들에게 속도가 있었다면 둔기 따위에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속도가 없었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며 둔기를 휘두를 적을 상대할 능력은 이미 결여되어 있었다.

장제는 어깨를 관통한 쇠구슬이 주는 고통을 느끼며 절망적인 속도로 다가오는 적의 새로운 기병을 보았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정말 빌어먹게 즐거운 광경이군, 그래.”

기병들은 황급히 말을 몰아 적 포병의 사정권 밖으로 움직였다. 지친 데다 적에게 뒤까지 보이며 물러서는 입장이니 학살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단숨에 뒤를 따라온 유목민 기병이 휘두른 철퇴가 제국 기병의 두개골을 두부처럼 부수고 들어갔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뇌수와 핏물이 반짝이며 초지로 떨어졌다.

장제는 자신을 빠르게 따라오는 적 기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말 머리를 돌렸다. 둔기를 든 채 거리를 좁혀오는 적병의 이가 누렇게 보였다.

장제는 그를 향해 똑같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고는 창을 높게 들고 달려들었다. 그가 기합 소리를 내며 달려든 순간 둔기를 든 적병이 날래게 제 무기를 휘둘렀다.

장제가 팔의 통증 때문에 몸의 균형을 조금 흐트러트린 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대신 철퇴는 그의 어깨를 산산이 부수고 지나갔다. 창은 노련한 유목 기병의 머리를 관통하는 대신 허공을 찔렀다.

장제는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철퇴는 피했지만 그의 목숨은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제국 기병들이 낙마했다. 머리가 박살이 나 떨어지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는 공격을 피하다 낙마하기도 했다.

유목 기병들은 장제처럼 낙마한 자들을 처치하기 위해 몇몇이 방향을 바꾸어 되돌아오기도 했다. 장제는 마지막 남은 동료들의 핏물이 초원을 적시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싸움은 바야흐로 일방적인 양상을 보였다. 서전에 승리를 맛보며 승세를 누리려 했던 제국 기병들은 예상하지 못한 적의 한 수에 완전히 덜미를 잡혔다.

이 일대 역전극에 가세하기 위해 조금 전 이탈했던 유목 기병들까지 되돌아왔다. 제국 기병에게 승산은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제국 기병을 역으로 추격해 완전히 섬멸하고 주장대신의 진영이 있는 곳까지 짓쳐들었다.

그제야 겁을 먹은 주장대신 한정원은 오로목제를 향해 부리나케 말을 달려 달아났다.

주장대신이 머물던 진영이 허물어지자 족장이 파블로프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번 작전은 훌륭했소. 모두 훌륭한 도움이 있었던 덕이요.”

“별말씀을. 전사들의 용맹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족장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제국 주장대신이 달아난 서북쪽 방향을 응시했다.

이제 오로목제를 손에 넣고 제국의 간섭만 물리치면 그들의 꿈은 성취된다 할 수 있었다.

지독한 패왕, 신제국 4대 황제 성조의 원정 이래 잃어버렸던 그들만의 깃발과 강역을 말이다.

족장이 승리의 저 너머에 있을 그들의 꿈을 바라보는 동안, 파블로프는 이 전쟁에서 자국이 얻을 이익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내의 동상이몽 속에 일대 회전은 막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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