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67화 (267/425)

제267화. 폭풍전야 (3)

대륙의 권력자들이 대막에 눈길을 준 채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즐기는 동안, 강남은 서서히 변화의 물결 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행상과 서역의 투자, 안정된 통치(엄밀히 말하면 군정), 외부 문물의 유입 등이 그 변화를 이끌어 낸 동인이었다.

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막대한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건설 현장에서는 수도 없는 노동자들을 요구했고, 새롭게 지어지는 시설들에서도 이에 종사할 노동자들을 원했다.

산업계가 급속히 팽창하며 노동력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자연히 농업에 목을 매고 있던 이들이 보다 나은 수입을 얻기 위해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노동력의 유출은 농업의 변화도 촉발했다. 노동자들의 수가 부족해진 만큼 기존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대우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과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혹은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라고 생각하던 지주들도 이제는 노동력이 귀한 자원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커다란 변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하층민들의 삶이 크게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근대 사회로 이행한 에우로페 열강 대부분이 그러하듯 하층민의 삶은 전근대 사회나 현재에나 나아진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수십 년간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오던 이들의 삶에 개선의 징조가 보인 것만으로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정소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정소는 과거 지주의 밑에서 소작을 하며 밥벌이를 하던 이였다. 지주에게 막대한 지세를 내고 나면 사실 먹고살기가 매우 빠듯했다. 정부가 뜯어가는 각종 명목의 세금까지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그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눈을 뜨면 일을 해야 했고,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져야 했다. 생활은 언제나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살던 형이 과로로 죽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노동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정소는 생각했다. 지금의 그는 적어도 그 시절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 서역과 행상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며 이루어진 변화는 그에게 농토가 아닌 곳에서의 삶도 기회로 제공해 주었다.

방직 공장의 일 역시 고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삯은 농지에서 일하는 것보다 좋았다.

삯도 좋았지만 더 좋은 것은 세금이 없다는 점이었다. 세제의 개선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정부는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해관 등을 통한 관세수입과 염철 등의 전매를 통한 수입, 그리고 토지세에 수입을 기대는 데 머물고 있었다.

노동자들로서는 매우 반길 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약간의 수입 증가도 크게 느꼈다. 물론 그들의 노동 강도에 비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서역 국가들은 이미 1일 8시간의 노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이곳 신에서는 여전히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시간당 수당도 매우 저렴했다.

근대화에 따른 이익은 대부분 자본가와 상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정소가 부지런히 기계를 돌리고 있는데 작업반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교대!”

그 말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를 비키자 그 자리로 다른 노동자가 냉큼 앉았다. 모든 기계는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되었다.

기계를 최대한 돌려 가능한 한 이윤을 많이 얻어내려는 서역 자본가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신에 진출한 서역 자본가들은 이런 점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조처를 자주 자행하곤 했다.

하지만 이를 제지해야 할 강주 관리사는 이런 부분을 묵인하였다. 그가 악인이라서 혹은 이익을 얻는 자본가라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서역 자본가들이 이익을 얻어야 신에 대한 투자를 더욱 늘리고 산업 국가로의 전환을 촉발할 수 있어서였다.

그는 대륙에 투자하는 서역 자본가들에게 상당한 배려를 해주었고, 이러한 배려는 서역인들이 더 많은 투자를 하는 동인이 되었다.

겨우 한 해 사이에 방직 공장과 방적 공장만 여섯 개가 들어섰다는 것이 그 폭발적인 투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정소가 어기적거리며 공장 입구로 걸어 나오자 작업반장이 미리 계산한 일당을 건네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태반이 방에 소속되어 일을 했지만 방직 공장 등에서는 개인 단위로 일하는 자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차례로 일당을 계산 받고 공장의 문을 나섰다. 그들은 주로 공장 주변에 형성된 허름한 가옥에 모여 거주했다. 걸어 다니는 시간도 돈이었기에 집단 가옥에서 살던 삶의 방식을 이어갈 수 없었다.

생활양식의 변화. 이것 역시 근대가 가져온 변화의 일부였다.

기존의 씨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문화가 해체되고 공동체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문화로 진전되었다. 이 변화들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음의 사회 변화와 제도의 변화를 위한 중요한 밑바탕이었다.

강주의 관리들은 이런 부분들을 주의하여 살피게 한 오승도의 지시에 따라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아 정리하였다.

이 변화들은 향후 강주 관리사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는 근거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노동자들 일하는 것도 신경을 쓰시다니. 관리사 대인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너무 많으시다는 말이야.”

공장에서 나와 제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을 지켜보며 한 관리가 투덜거렸다.

그는 강주 관청으로부터 백성들의 삶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준비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민생 시찰에 나선 관료들이었다.

“뭐. 관심이 없으신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럴 테지.”

관리들은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급 관료들의 입장에서 민생 문제에 대해 자료 조사를 명령한 오승도의 조처는 꽤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고위 관료가 민생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혹은 부정부패에 열을 올리면 그 욕을 들어먹는 것은 현장에서 민과 직접 접촉하는 그들 하급 관리들이다.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욕을 들어먹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지역 사회에서 지탄을 받으면 그만큼 그 가문의 명망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한데 서역 양이들이 우리 강주에 생각보다 많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관료의 말처럼 강주에 대한 서역의 투자액은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최초에는 연 은 백오십만 냥을 넘지 않던 투자가 천국이 등장한 이후에는 그 두 배로 늘었고 작금에 와서는 네 배를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 투자는 강주를 넘어 강남 전체의 사회 변화를 서서히 이끌어낼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강주 관리사 대인이 그만큼 서역인들의 호의를 사서가 아니겠나?”

“그야 그렇지요.”

강주 관리사는 서역인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강주 관리사로 재직하며 보인 ‘공정한 재판’도 그 평의 이유 중 일부였지만, 진정 그를 신뢰하게 만든 것은 그의 경제적 수완에 있었다.

강주 관리사는 자신과 손을 잡은 서역 자본가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나누어 주었고, 그 이익은 다른 서역인들에게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인식은 그가 ‘오랜 세월’ 신뢰할 만한 파트너였던 행상의 일원이라는 점으로 더욱 부각되고 강화되었다.

“한데 이렇게 서역 자본이 많이 들어오면 강주에 좋지 않은 것 아닙니까? 보이는 것은 죄 서역의 것들이니.”

관리는 막대한 차관을 빌린 제국 정부가 양이들에게 목줄이 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강주도 양이들에게 목이 잡히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나? 당장 강주의 돈으로 모든 걸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네.”

다른 관리가 그에 대꾸했다. 강주의 자산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근대적인 산업 국가를 건설하기에는 사실 많이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자본도 문제였지만 기술은 더욱 큰 문제였다.

이 부분을 해결하려면 전적으로 서역의 자본과 기술 투자가 필수적이었다. 강주 관리사는 이 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역의 자본가들을 끌어들였다.

과거의 황제 필립이었다면 ‘자본가’들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겠지만, 황금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연합왕국과 행상을 통해 배운 터라 그 태도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승도는 우수한 제도와 혁신에 앞서 경제력의 성장에 방점을 맞추며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그리 움직이는 이유에는 아직 그가 제국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관리들은 강주 관리사가 이룩한 변화의 편린을 종이에 기록하며 다음 대상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눈에 비친 변화는 장차 오승도가 대륙 전체에 만들어갈 거대한 변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광활한 초원은 오랜 세월 농경민족의 손이 닿지 않는 비문명권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 세계의 주인은 말을 탄 유목민들이었다.

유목민들은 이 땅의 지배자로서 그들만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지켜왔다.

그 삶은 수천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유지될 것처럼 보였다. 제국의 위대한 정복군주 성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강력한 정복 군주는 그 오랜 질서를 단숨에 무너트리고 대막을 제국의 판도에 넣었다. 초원의 오아시스와 교역 도시에 제국의 요새와 군대가 들어섰고, 제국의 관리가 파견되어 유목민들의 삶에 개입했다.

그들의 지배에 유목민들은 항거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제국은 그때마다 무자비한 폭력과 탄압으로 응수했다.

필요하면 ‘솎아내기’를 통해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유목민들을 인종청소하며 반기를 든 것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 학습된 패배에 유목민들은 굴복했고 제국의 지배에 순응했다.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자 유목민들은 자유로웠던 조상과 자신들의 문화를 차츰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어느 나라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역사는 현재진행형이 되어 제국의 서북 변경이 소란스러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번 소란이 우리 제국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군.’

요새 사령관의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던 중년의 귀족 사내가 깍지를 모은 손을 책상에 올렸다.

그 책상 위에는 위대한 제국의 정복을 견인한 군주들의 일대기가 담긴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령관이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자 문이 열림과 동시에 건장한 사내가 불쑥 들어섰다. 그는 사령관을 향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상관에 대해 예의를 표시하는 모습에 블라미디르도 손을 들어 가볍게 응대했다.

상관에게 경례를 한 사내는 어느새 제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이 사내의 이름은 파블로프. 대막에 건너가 유목민들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는 육군 장교였다.

사령관은 그에게 앉아도 좋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파블로프가 소파에 앉자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맞은편의 자리에 가 앉았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사령관이 물었다. 그는 이번 일에서 제국 팽창의 돌파구를 얻고 싶어 하는 터라 파블로프의 성과에 대해 기대가 컸다.

“제국 주둔군을 대파했고 곧 오로목제에 대한 공략도 시작할 겁니다.”

소령의 대답에 사령관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되었군. 야만인들을 지휘해 야만인들을 격파하는 일이라 내심 걱정도 많았다네.”

“그렇다 해도 우리 무기가 다수 지원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국군을 이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이 도우신 일이지.”

사령관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신이 도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신의 도움’으로 이겼다기보다는 신의 뜻이 이쪽에 있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의례적인 표현이었다.

소령도 사령관의 입버릇을 알고 있어 그가 공을 깎으려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이제 제국군을 대파하였으니 남은 것은 제국 본토에서 온다는 그 회군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회군이라.”

사령관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자들도 상대할 수 있겠나?”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조국전쟁에서 로망스 대군을 대파한 방식을 구사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면 싸움을 회피한 채 게릴라전으로 일관한다는 거군.”

“그렇게만 해도 적은 자멸하고 말 겁니다.”

소령은 단언했다. 방자의 이점을 누리는 유목민 군대가 패할 가능성은 없었다. 드넓은 루시와의 국경선 전체가 유목민의 보급 거점이었고, 그들의 군대를 숨겨줄 은신처였다. 이를 이용하면 제국군을 피해 다니며 유리한 싸움을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멍청한 야만인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가능할 겁니다.”

“자신 있는 것이 아주 보기가 좋군.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자네 공을 총독 각하와 황제 폐하께 상신하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소령은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은 그런 그를 보며 껄껄 웃었다.

파블로프는 출세욕이 큰 사내였다. 로망스 태생의 오페라 가수를 모친으로 둔 그는 루시 귀족의 사생아로서 세상에 출생했다.

신분적으로 ‘창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오페라 가수의 자녀이다 보니 그의 부친은 그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덕분에 그는 모친과 함께 제도의 거리를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때마침 그의 후견인이 되어준 알렉산드르 백작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 동아줄을 놓치지 않았다. 백작의 도움으로 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우수한 성적으로 그곳을 졸업했다. 이어 서남부 대초원의 반항적인 소작농들과 유목민들을 상대로 한 가혹한 전쟁에서 그 공적을 충분히 세워 근위대의 일원이 되었다.

오페라 가수의 사생아가 근위 기병장교까지 출세했으니 그의 삶은 거기서 충분히 성공했다 할 만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이 거기서도 문제가 되었다.

귀족들로 이루어진 ‘고귀한 근위대’는 이 이질적인 존재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근위대의 장교들은 수시로 이 불쾌하고 천한 존재를 자신들의 부대에서 내보내 줄 것을 전쟁성에 상신했고, 그 끈질긴 요구를 견디다 못한 정부는 파블로프의 임지를 바꾸어 버렸다. 출세가 보장된 근위대에서 이 서 시비르 총독부로 말이다.

그들은 그를 이곳으로 발령 보내면서 일말의 양심을 느꼈던지 소령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 계급장은 허울뿐이었다. 중앙 정계의 줄을 잡을 수 있는 근위대와 변방의 소령은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파블로프는 발령을 받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이렇게 힘없이 밀려가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출세하여 그 누구도 그를 업신여길 수 없게 하겠다고.

소령은 그 맹세를 지키고자 했다. 마침 기회도 나쁘지 않았다. 루시와 접경한 제국은 거듭된 전란으로 변경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있었고, 정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개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그 기회를 잡고 ‘공적’을 세웠으며, 앞으로 그보다 더한 공을 세울 바탕을 닦아두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를 더 넓힌다면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는 차르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운만 트인다면 귀족의 작위와 더 높은 계급도 꿈은 아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중앙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겠지. 오페라 가수의 사생아 따위인 내가 말이야.’

파블로프는 주먹을 쥐어보였다.

“먼 길 돌아오느라 고생했으니 오늘은 그만 가서 쉬게. 작전에 필요한 이야기는 내일 나누도록 하지.”

사령관이 말했다. 소령은 그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모자를 다시 눌러쓴 채 방을 나섰다.

블라디미르는 그런 소령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품에서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고는 쌈지를 넣었다.

‘일은 잘 해주었다. 하지만 자네의 출세는 쉬운 일이 아니야. 자네에게 공을 주면 내가 차지할 공이 부족하니까. 적당한 시기가 되면 자네도 그만 죽어주면 좋겠어. 제국군의 손에 말이지.’

블라디미르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푸근한 태도 대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출세를 갈망하기는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출세 지향적이고 야심만만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출세를 이루어 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시간을 두고 생각해도 되었을 오승도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그의 입에서 회백색 연기가 훅 빠져나왔다. 그 연기는 이내 공기 중으로 흐릿하게 녹아들며 이지러졌다.

사령관은 그 연기가 파블로프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존재는 했지만 이 연기처럼 사그라지는.

그는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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