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발검 (2)
계절이 바뀌는 동안 승도의 귀는 북방을 향해 있었다. 회군의 패배 소식만을 기다리던 그의 초조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령이 그의 막사로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승도는 그 전문을 낚아채기가 무섭게 자신이 도박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전문을 내던지고 무거운 장화로 바닥을 차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천천히 펄럭이며 바닥으로 떨어진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관리사 대인께 서기 건문이 중요한 사실을 고해 올립니다. 오늘 북경으로 회군의 일시 패전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들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증원군 파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회군이 곤란한 입장에 처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정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일은 강주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지침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승도는 건문에게 자신의 포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런 내용을 건문에게 알려줬다가 그가 조정의 손에 잡히기라도 하면 그 정보가 새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런 민감한 정보는 함부로 흘려선 곤란했다.
권좌의 정점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정보를 주고 행동하게 할지를 판단하게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실수를 저지르면 패착이 오게 마련이었다.
강주 관리사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는 행상들을 통해 강북에 제국군의 패전 소식을 널리 퍼트리게 했다. 이는 다분히 제국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장하려는 술수였다.
여기에 더해 그 자신의 돈을 뿌려 강북에서 제방 보수 등을 하게 했다. 사람이 모이면 불만이 표출될 일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움직임 하나하나는 모두 다음 수를 위한 중요한 포석들이었다.
그리고 그 포석은 적중했다.
“이봐, 거기. 줄은 똑바로 서야지.”
수천 명의 사람이 줄을 선 채 급식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얌체 같은 행동을 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이렇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뒤에서 올라가는 목소리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뱁새눈의 사내가 얼른 줄에서 빠져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은 못마땅한 눈으로 뱁새눈을 보다가 다시 자신들의 화제에 집중했다.
“제국군이 패했다고 하던데 그 소식 보았나?”
“대로에 붙어 있던 벽서 말이군.”
“그래. 그 벽서 말이야.”
사람들은 제국군의 패배 소식에 주목했다. 일시적인 패배라곤 하지만 진 것은 진 것. 그들에게 압제의 상징인 제국군의 패배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제국군이 패했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어찌 되긴. 천자도 힘이 없단 게지. 지난날 월비들을 잡지 못했듯이 말이네.”
“제국이 힘이 없단 말인가? 불과 얼마 전에 월비들을 잡을 때만 해도 기세등등하지 않았던가.”
“그야 강주 관리사 대인의 힘이지, 어디 제국의 힘이던가?”
사람들은 제국의 힘을 비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하고 생각하던 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누군가 들고일어나 문짝을 걷어차기만 하면 이 썩은 세상은 무너지고 말걸세.”
사람들은 제국군의 패배와 제국의 권위 실추를 동일한 잣대로 받아들였다. 줄이 앞으로 움직이자 이들도 움직여 식사를 받았다.
식사는 전란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양호하게 나왔다. 찐 감자와 끓인 죽이 식단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식사를 받아드는데 말만 한 처녀 하나가 급히 일터로 달려왔다. 그녀가 달려오자 사내 하나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얘야, 여긴 네가 어쩐 일이냐?”
아버지가 묻자 딸이 헉헉 거친 숨을 내뱉더니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관에서 세를 받아가겠다고 관리들이 나왔어요!”
“뭐야?”
사내가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 주변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나무 스푼을 움직이려던 이들의 동작도 굳어졌다. 그들은 처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의식했다.
“어서 가보셔야 해요.”
“오냐. 일단 가보자.”
아비가 식사를 팽개치고 딸을 따라 달려갔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세를 징수하였는데, 경우에 따라 특별세 명목으로 세를 더 걷기도 했다. 전란이 있을 때면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이번 경우도 그런 예에 속했다. 회군의 치중이 습격당해 병참 손실이 커지자 추가로 물자를 징발하기 위해 특별세를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그들은 달려가는 부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특별세인가. 빌어먹을.”
“세를 걷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들은 관의 처사에 앙심을 품었다. 전란으로 농지가 황폐해지고 물류가 오래 끊긴 탓에 곡물의 값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평시라면 부족한 대로 빚을 내어 먹을 수 있었던 쌀과 밀을 입에 한 줌 넣기 어려운 것이 작금의 세태였다.
이 마당에 세금을 또 걷는다는 것은 백성들더러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방관들도 이런 민심의 풍향을 모르지는 않아 가급적 세를 거두라는 명은 지양하고 있었다. 그들도 머저리는 아닌 터라 천국과 같은 대란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명이 내려온 이상 지방관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부에서 회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징발하라고 명한 이상 그들은 그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염병할 일이군.”
“이래서야 딸 팔고 처를 팔아 세를 내란 말밖에 더 되나?”
사내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근이 들 때마다 신의 백성들은 집안의 자녀들 중 일부를 이웃과 바꾸어 먹으며 고난의 세월을 견뎠다.
때로는 딸을 부잣집이나 기루에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으며, 처를 유곽이나 아편굴에 보내 그 수입으로 세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않으면 관헌들이, 군대가 가만있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백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군대는 먼 변방에 가 있었고, 심지어 패하기까지 했다.
백성들의 반란을 억압하던 힘이 그 존재를 의심받는 시간이 되고 만 것이다.
“난 두 번은 못 하겠소. 첫째 딸년을 기루에 판 것도 밤마다 눈에 밟히는 일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 딸년까지 팔아 세금을 내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
“맞소. 나도 이제는 그런 세는 못 내겠소. 특별세를 내라고 한다면 이 빌어먹을 세상에 침이라도 뱉고 죽어야겠어.”
목소리들이 점점 높아졌다. 과격해지는 목소리들은 군중의 심리를 타고 해일처럼 높아졌다. 그 거센 분노는 울림이 되고 화음이 되어 급기야 임계점을 돌파했다.
드디어 한 사내가 외쳤다.
“무기를 들고 더러운 고관대작 놈들의 관아를 칩시다.”
“갑시다.”
누군가의 외침이 터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노한 물결을 이루어 움직였다. 과거 왕조들이 전란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시기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경계한 이유를 그들은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군중들이 일어나 움직이자 길거리에 있던 관병들은 제 무기를 던지고 달아나 버렸다. 성난 군중은 단숨에 관의 무기고를 접수하고 깃발을 높이 들었다.
제국 내에서 반란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 반란은 심각했다. 거듭된 전란으로 재정과 군사력이 고갈된, 거기다 주력인 회군이 먼 변경으로 출정한 상태에서 일어난 난이라 조정에서는 손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나마 중원에 남은 군사력의 태반은 오승도의 움직임에 대처하기 위해 대하 주변으로 배치된 터라 반란을 진압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반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네 개의 주를 휩쓸었고, 이내 주변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두 개의 성에 그 세를 부식했다. 제국 정부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시기에 일어난 대반란이었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국호를 ‘양’이라 하였다. 양은 부패한 제국에 대한 하층민들의 대의를 대변하고 있어 과거 천국의 지지자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아직 남아 있던 잠재적인 천국의 지지 세력들(오승도가 흡수하지 못한 자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대하 이남에 남아 있던 서왕의 무리도 기회를 보아 대하 이북으로 움직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물론 이 움직임은 제국군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지만, 일부 무리는 대하를 건너 양의 강역으로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이는 강주에게 결정적인 명분을 주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강주 관리사는 이상의 공작 결과가 귀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군의 출병을 명령했다.
천하를 향한 강주의 도박이 시작된 것이다.
***
대하 변에 주둔한 제국군은 태반이 녹기였다. 팔기의 대부분이 전란 도중에 소모되거나 혹은 회군에 편입되어 서정에 나섰기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물론 중앙군의 병력이 없지는 않았다. 팔기도통아문에서 보낸 건요영의 기병이 바로 그들이었다.
제국군은 대하에서 도하가 편리한 세 지점에 집중되어 배치되어 있었다. 주력은 물론 건요영의 기병이었다. 이들과 녹기의 정예 총포 병들이 중앙을 맡고, 나머지가 좌익과 우익을 이루어 각각 강의 상류와 하류를 맡았다.
제국군은 이러한 배치만으로도 상승군의 도강 시도를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억지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혹시나 상승군이 강을 건너오는 일이 발생할 때에는 예정된 위치로 후퇴하여 방어 계획을 수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중원에서 발생한 대란으로 말미암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뭐야? 반란?”
탄탄한 체격을 가진 장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서찰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전령은 그 앞에 엎드린 채 다시 고했다.
“조정에서 즉시 출병하여 반군을 소탕하라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반적을 소탕하려고 군마를 돌리면 역심을 품은 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말 것인데.”
장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역적(?) 오승도의 역심이 확인된 것은 아니나 조정에서는 이미 그가 반기를 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회군이 서북 변경을 진압하고 열강의 지지를 확인하는 대로 강주에 압력을 가할 생각이었으니, 국적으로 단정 지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유리한 패를 쥔 것은 조정이 아니라 오승도, 그 역적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시운을 허락한 것인지 몰라도 중원에서 대란이 일어났고, 그 악한에게 천하를 도모할 명분과 기회를 모두 주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군을 대하에서 돌려 반적 토벌에 나서는 것은 오승도의 북상을 위한 기회만 주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장수는 서찰을 쥔 손을 부르르 떨다 다시 그것에 눈을 가져갔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판단을 하는 것은 일개 장수인 그가 아니라 정부의 몫이었다. 전권을 부여받은 지휘관이라면 몰라도 그는 그럴 권한을 받지 못했다.
그는 서찰을 읽어 내려가다 그것을 구겨버렸다. 전령의 말처럼 제국 정부는 그에게 회군하여 반적 토벌을 우선시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논리상으로 보면 이쪽도 아주 무리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단 반군을 소탕해야 정부에 대한 하층계급의 두려움을 다시 배가시킬 수 있고, 후방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오승도가 공격이라도 해오면 그야말로 최악의 곤경을 면키 어려웠다.
“하는 수 없군.”
장수는 구긴 서찰을 내려놓고 군관 몇을 불렀다. 그들에게 명하여 부대의 이동을 지시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다. 독수리보다 먼 곳을 바라보며 때를 기다리던 야심가가 한 발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콰쾅!
갑작스레 진영 한가운데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그 굉음에 장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막사를 나서자 군관들도 급히 뒤를 따랐다.
그들의 앞에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가 자욱한 곳은 탄약을 비축한 수레였다.
누군가 그 탄약이 폭발하도록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누굴까? 장수는 그에 대한 생각을 했지만 그 고민은 짧았다. 탄약이 몽땅 날아간 이상 그의 군대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음 순간 초병의 날카로운 외침이 그의 귀를 때렸다.
“사, 상승군이 강을 건너온다!”
그 외침은 천 년 전, 유목민들의 중원 침입을 경고하던 그들 조상들의 긴박한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병사들이 개미새끼처럼 이리저리 뛰는 동안 군관들이 장수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장군. 오, 오승도가 역심을 품은 모양입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어, 어쩌다니.”
장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성(수도)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며 지내온 그로서는 탄약이 날아가고 예고 없이 공격이 시작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머릿속에 든 이론들은 이 상황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병사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려야 옳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상승군을 태운 배들이 강의 북안에 도달했다.
배들은 강안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수십 명의 병사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검은 군복들은 질서정연하게 도하를 마치자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도열했다.
그들의 행동은 혼란에 빠져 있는 제국군과 대조를 이루었다. 장수는 역적들의 움직임을 보고서야 자신이 우선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병사들을 모아 명령 체계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군관들에게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불러 모을 것을 지시했다. 그 명령에 따라 군관들이 이리저리 달리는 사이 상승군이 장비를 하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국군이 진영을 재편해도 상관없다는 여유로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전령을 보내는 여유까지 보였다. 상승군의 군중에서 말 한 필이 쏙 나와 이쪽으로 달려왔다. 장수는 그 전령을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게 했다.
오승도가 사사로이 군마를 대하 이북으로 보낸 이유를 일단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진정 역심을 품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다.
장수는 오승도가 가급적 역적질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이 조금 전의 해프닝으로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령은 장수의 앞에 오기가 무섭게 예를 차리고는 미리 만든 강주 관리사의 서신을 낭독했다.
“상장 효렴에게 강주 관리사 오승도가 말한다. 나는 작금에 중원에서 발생한 대란에 강남의 반적들이 가담했다는 심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반란의 진압은 강남 대영의 사령관인 본관의 당연한 책무. 따라서 나는 군마를 강북으로 보내 이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조정의 재가를 받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급하고 중대하여 허락을 구하지 않았으나, 흠차대신이자 천국 토벌의 전권을 가진 본관에게 그만한 권한은 있다고 생각한다. 하니 상장은 본관의 앞길을 막지 말고 한 팔을 거들어 중원의 평화를 회복하는 일에 힘써주기를 바란다.”
강주 관리사의 서신을 낭독한 전령이 입을 다물었다. 그 내용은 실로 오만하다 표현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조정이 반적을 잡을 능력이 있을지 의심스러우니 자기가 강북으로 가서 잡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구실에 지나지 않음은 효렴도 알고 있었다. 조정의 허락도 없이 강북으로 상승군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의 자의대로 군마를 대륙 어디에나 보내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 행동을 방관하면 오승도가 북경으로 전진해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를 용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승도가 이런 서신을 보낸 것은 일종의 명분 쌓기였다. 그가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북상을 했지만 건요영이 앞길을 막았다.
그러므로 ‘역심(?)’을 품은 건요영을 토벌하여 길을 텄다는 웃기지도 않은 논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효렴은 잠시 서찰을 노려보다 전령에게 말했다.
“강주 관리사 대인의 말씀은 잘 알았소. 하지만 본관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사사로운 도강을 막을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소. 그런 내가 강주의 군마를 강북으로 보내는 것은 내 일과 맞지 않소이다.”
효렴은 비록 적절한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무능한 자였지만 용기가 없는 자는 아니었다.
황실의 총애를 받는 귀족 출신답게 그는 자신의 명예와 긍지를 걸고 상대의 명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 그 말씀 그대로 고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효렴은 무거운 얼굴로 강주의 전령을 돌려보냈다. 그는 이 결정으로 자신과 자신의 군대가 파국의 수순을 밟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멀어져 가는 전령의 뒤를 보다 움직이는 군관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중원의 하찮은 도적과 비교할 수 없는 강적, 오승도와 맞서는 일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