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천하제패 (1)
양은 부패한 제국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세운 나라였다. 이 나라는 천국과 달리 철저하게 지배 계급을 통치에서 배제함으로써 국가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럴듯하게 국호를 내걸긴 했지만 반란군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집단은 시일이 지나면 자연히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명확한 이상과 목표도 갖고 있지 않았고 제국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들의 군대를 유지하는 근간은 ‘폭정’의 산물로 남은 거대한 군량 창고들이었다. 이 창고들에 비축된 쌀과 밀이 군대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었고, 이 국가를 유지하는 뼈대였다.
양의 지도자들 중 몇몇 영리한 자들은 이런 현실을 명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 정부와의 타협을 통해 스스로의 살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조정에서 던졌던 왕작과 품계 등은 그런 그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정치적으로 그리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었지만 그 제안을 받는 것 외에는 달리 살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제국과의 협상에 목을 매었다.
그러다 제국 정부가 잠시 마비 상태에 빠지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협상을 중단했다. 그런 그들에게 제국 정부는 두 가지 목소리를 보였다.
하나는 황제의 조칙을 내세운 오승도의 명령으로, 이쪽은 해산을 하지 않으면 강경하게 토벌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다른 하나는 산동 총독의 군영에 있는 총리대신의 제안, 그는 자신들에게 손을 빌려주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양의 지도자들은 이 엇갈린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전체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승도의 제안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강주 군대는 대륙에서 절대무적의 위력을 자랑해온 자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언제나 그렇듯 논리 하나로 돌아가진 않았다. 보다 복잡한 정치와 이해관계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교활한 지도자들은 오승도의 명령에 따라 해산할 경우, 자신들이 현재 차지한 특권과 지위도 사라질 것이라 알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라 한 번 손에 넣은 알량한 권력을 손에서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체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해산 대신 총리대신과의 연수 쪽을 주장하고 나섰다.
일은 그렇게 결정이 났다. 양은 총리대신과 연수했고, 산동 총독에게 군대를 보태어 북경으로 진격하기로 결의했다.
드넓은 들판을 따라 수천의 병사들이 늘어섰다. 그들은 평생을 전장에 서본 적이 없는 평범한 농민 출신들이었다. 대열도 갖추지 못하고 명령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전형적인 농민군으로, 그들은 오합지졸이라 불러야 했다.
이 어수선한 군대는 양의 지도자들로부터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산동 총독의 군마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제 움직일 참이었다.
이 허울만 좋은 집단을 지휘할 사람은 유자 출신의 전택이란 사내였다.
전택은 몰락한 유자 출신으로 직접 농사를 짓고 살던, 농민들과 그리 구별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자 가문에서 나고 자라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전택은 병사들의 대열을 보며 앞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 좌우로 장수 몇이 따랐다. 그들은 염상의 소금 밀매 일을 하며 돈을 만진 상인 출신들이었다.
이들 역시 머리를 쓸 줄 아는 까닭에 양에서 상당한 지위를 얻었다.
그들이 병사들을 앞질러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산동 총독의 군대와 합류하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택은 그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리 서둘 필요는 없소. 수적으로 열세인 오승도가 북경을 나와 공격을 할 이유도 없는데 미리 사서 고생할 이유가 있긴 하오?”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오승도의 군대는 수적으로 굉장히 열세에 놓여 있었다. 대하 이북에 올라온 주력이 달려온다면 몰라도 1여단 병력만 놓고 보면 북경과 그 주변을 통제하기도 버거웠다.
그런 처지의 오승도가 수도를 거의 비워두고 움직이는 것은 상리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그 괴물이 과감한 수를 즐겨 사용하는 자라고 해도 말이다.
장수들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오승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한 줌의 군대를 가지고 움직이진 않겠지요.”
“하니 여유를 갖고 움직입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병사들은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라 행군 속도를 높였다간 태반이 전열에서 이탈할 거요.”
전택은 훈련이 되지 않은 군대에 무리한 강행군은 파멸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날 천지회가 그러했고, 남방 전쟁 당시의 제국 육군이 그랬다. 오합지졸에게 행군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장들이 성급했습니다.”
“그럼 되었소.”
전택은 미소를 보이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지휘관들이 말을 몰아 앞으로 사라져가자 대열에서 터덜터덜 걷던 병사들이 무거운 발을 잠시 늦추었다.
“북경에 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데 그게 참말일까?”
“그렇지 않겠나. 천자가 있는 곳에 가서 몇 마디 단단히 하고 우리 요구도 받아들이게 하겠다고 했으니 그리될 걸세.”
“그리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병사들은 이번 내전에서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최소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 수 있기를. 그들은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강북 출신들은 상당한 희망을 품고 북경 행군을 받아들였지만 천국 출신들은 다소 냉소적이었다.
특히 강남에서 죽음의 사선을 넘어 양으로 온 이들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세상 일이 어디 말 몇 마디로 해결될 턱이 있나. 그리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면 천하가 요동치던 천국의 대란 때는 왜 조정에서 백성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게. 그들은 결코 바뀔 자들이 아니네.”
“맞는 말이네. 제국 조정이 부패했기에 이리 대란이 거듭해서 일어나는 판인데 그자들을 어찌 믿나. 그들을 믿을 시간이 있으면 양상군자가 황금을 보고 지나간단 말을 믿지.”
“하지만 북경으로 간다는 건 괴물과 싸운다는 뜻이네. 그 오승도와 말이지.”
“오승도.”
“제국의 영웅 말인가?”
“맞네. 우린 지금 그와 싸우러 가는 길이야.”
지휘관들은 쉬쉬했지만 소문이란 원래 완전히 막을 수 없는 법이었다. 특히 모두가 불길하게 여길 만한 이야기라면 더 빠르게 번지게 마련이었다.
“오승도가 그리 대단한 자인가?”
일부 소식에 어두운 자가 이렇게 반문할 때면 그에게 가장 지독하게 당한 천국 출신들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자가 대단하냐고? 암, 대단하고말고. 기천의 병력만 가지고 십만의 대병을 날려버리는 괴물이 대단하지 않으면 누가 대단하겠나?”
“기천으로 십만을?”
“제국의 신성 아닌가. 그 정도는 우스운 일이지. 천하에 적이 없다는 양이들조차 그자에게 쓴맛을 보고 강주에서 물러났다고 하니 그 강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네. 우리는 바로 그자와 싸우겠다고 가는 길이란 말일세.”
“그럼 우린 어찌 되는 것인가?”
“이기든 지든 반 이상은 시체가 되겠지.”
“그런 자를 치러 간단 건가. 우리 양은?”
“그런 것도 모르고 싸우러 가고 있었나. 딱하군.”
병사들은 걸으면서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주 관리사, 이제는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대륙 최고의 권력자. 과연 그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병사들의 얼굴에 조금씩 불안의 빛이 깊어졌다.
그렇게 양의 군대는 느릿느릿 북동쪽을 향해 전진했다. 대륙 전체를 떨어 울리고 있는 괴물이 머무는 땅을 향해.
***
황금 빛 용이 꿈틀거리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천상을 향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용들로 이루어진 기둥은 천상계를 상징하는 천장을 받들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구천현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대륙의 첫 번째 황제에게 지혜와 힘을 부여한 하늘의 선녀. 즉, 천자에게 하늘의 뜻을 전한, 천상의 상징이 자리한 셈이다.
이 그림과 기둥은 천자의 존엄함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로써 존재하고 있었다.
승도는 이 여덟 개의 기둥을 지나 대전의 앞쪽에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특권이었다.
황제를 뛰어넘는 막강한 권력과 위상이 있어서였다. 사실 조정과 황실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 좌석은 있어선 곤란했다.
그렇지만 승도는 이 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의자는 제국 내에서 누가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지 보여주는 상징인 동시에 반대파를 집결시켜줄 덫이었다.
승도는 느긋하게 대전을 가로질러 의자에 앉았다. 청림당의 관료들이 미소로써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동안 몇몇 대신들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승도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관찰하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늘의 조회 의제는 남쪽에 웅거한 산동 총독과 양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문제였다.
이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을 몽족 측이 알려온 터라 북경에서도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방어 준비를 하든, 먼저 나가서 치든. 물론 결정은 오승도의 몫이었다.
일단 의제가 의제인 터라 일단 논의가 시작되자 토론에 불이 붙었다. 관리들은 신중한 방어 쪽과 과감한 공격 쪽을 주장하며 갑론을박을 벌였다. 방어를 주장하는 쪽은 청림당이었고 공격을 주장하는 쪽은 오승도의 반대파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정권의 안정을 바라는 청림당은 안전한 방향을 원했지만 공격을 주장하는 매파는 이 싸움에서 오승도가 패하기를 원했기에 그가 성을 나가길 바랐다.
설령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를 꼬투리 삼아 겁을 먹었다고 떠들려는 목적에서 의견을 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승도는 대신들의 설전을 지켜보다 손을 들었다. 그가 움직임을 보이자 청림당 관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잘 훈련된 개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반응에 반대편 관료들도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입을 다무니 논쟁을 할 수 없어서다.
승도는 좌중이 침묵한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조정의 중론을 잘 알았습니다. 공격도, 방어도 일리는 있습니다. 본인은.”
승도가 잠시 말을 흐리자 대신들이 침을 삼켰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금은 궁금했다. 권력자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즐기다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짧게 말을 붙였다.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각하!”
청림당 쪽에서 뜻밖이라는 반응과 함께 만류의 목소리가 나왔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이 흥미로운 상황극을 지켜보고 있던 단 위의 황제가 끼었다.
“총리대신이 전장에 나서겠다 말하신 거요?”
“그렇습니다, 폐하.”
“과연 천하의 명장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자신감이요. 그리해 보도록 하시오.”
황제는 맹랑한 의도를 내비쳤다. 승도를 확실하게 떠밀어 그를 끝장내 보려는 속셈이 여실히 보였다. 승도는 꼬맹이 황제의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기꺼이 응해주었다. 어차피 그가 꺼낸 말인데 겁을 먹을 이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물론 그리할 생각입니다.”
“각하, 그리하시면.”
승도는 재차 만류하려는 청림당 대신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곤 엄한 어조로 그들을 질책했다.
“지금 경들은 나를 폐하 앞에서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소인배로 만들 참이요?”
“그, 그것은 아닙니다. 각하.”
“그럼 본관의 판단을 믿으시오.”
승도는 그 한마디로 청림당 대신들을 침묵시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뒷짐을 진 채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태도에서 자신감이 여실히 묻어났다.
승도는 북경을 장악한 순간부터 우위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수를 두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번 경우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상승군 1여단 병력의 태반을 북경에 남겨 두더라도 하찮은 제국군과 반적의 무리는 간단히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의 적수는 열강이지, 한낱 제국의 찌꺼기들이 아니었다. 그따위 적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반적과 제국의 잔당을 청소하는 일은 기마 보병 대대 하나로 족하다. 거기에 유목 기병을 더하면 이 싸움은 필승이지.’
승도는 이번 전역을 어떻게 수행할지도 구상을 마친 상태였다. 기동력이 뛰어난 군대를 이용해 느리고 둔한, 덩치만 큰 적군의 뒤를 공략한다.
느린 양떼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적을 뒤에서 치며 그 살점을 잘라 북경으로 오는 길을 적의 무덤으로 만드는 수가 그가 세운 전략의 요체였다.
이는 유목민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적이 약해질 때까지 뒤를 밟으며 끊임없이 괴롭히는 늑대들의 습성을 베껴 만든 방식. 당하는 자들에게는 치가 떨리는 악마의 전략이다.
승도는 조회를 마치고 느긋하게 대전을 나왔다. 이번 싸움을 통해 상대편 관료들과 황제에게 확실한 힘의 우위를 보여준다.
그들이 ‘죽음의 길’이라고 믿는 곳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얻는다면 도전할 의지를 가진 자들조차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오늘 조회를 연 진정한 이유였다.
승도가 대전에서 나오자 장교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조회가 열린 동안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한 가지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리 줘보세요.”
승도가 손을 내밀자 장교가 들어온 전문을 건넸다. 승도는 그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이번 내전에서 좀 더 관망세를 유지할 것으로 여겨졌던 양이 예상을 깨고 생각보다 빨리 군을 전진시키고 있군. 그렇다 해도 대세를 바꿀 수는 없지.’
승도는 전문을 접고 걸음을 옮겼다. 어도를 내려서자 미리 준비한 마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승도는 그 위에 훌쩍 올라탔다.
“우리도 슬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기마 보병대대는요?”
“조회에 들어가시기 전에 명하신 대로 출동 대기 상태입니다.”
승도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잘했습니다. 대대장에게 30분 안에 서문으로 오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여단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숙친왕의 관저에 있습니다. 모시고 올까요?”
“아닙니다. 그에게 북경의 방어를 맡긴다는 명령만 전하면 충분합니다.”
장교가 그 명에 고개를 숙였다.
“다른 명은 전하실 것이 없습니까?”
“서기에게 하나 전할 것이 있습니다. 연합왕국 공사를 만나 북적의 개입을 확실히 막으라고.”
“예, 각하.”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았다. 혹시나 있을 적의 마지막 수까지 다시 한 번 방어하기로 했다.
세상일이 언제나 그렇듯 궁지에 몰리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도 저지를 수 있었다.
루시와 밀약을 맺고 적당한 이익을 약속한 승도였지만, 더 큰 이익 앞에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곰들의 욕심을 막으려면 연합왕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리첸과 오승도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북적을 제어하기 위해서 연합왕국의 협조가 필요하다 판단하고 동시에 왕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왕국이 원하는 때에 이 내전에 개입할 구실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만전을 기하자면 그만큼 희생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승도는 호위병들과 함께 황궁을 나섰다. 피와 죽음의 향으로 적셔질 전장을 향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