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78화 (278/425)

제278화. 천하제패 (3)

그림은 오승도가 그린 구도대로 잡혔다. 양과 산동군은 원치 않은 강행군을 감내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루 오십 리 이상의 강행군 끝에 북 직례 깊숙이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행군의 대가는 결코 값싸지 않았다. 그들은 장시간 동안 병사들을 독려하여 북 직례에 들어선 대신 병사의 절반을 잃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강행군에 상승군에 대한 두려움이 겹치면서 밤마다 탈영이 속출했다.

그들의 군대는 시간이 흐를 때마다 빠르게 약해지고 있었다. 조금의 변수만 더 생긴다면 그다음은 볼 것도 없을 것이다.

“이랴!”

병사의 군화가 말의 배를 찼다. 말은 거칠게 숨을 쉬며 발을 길게 뻗었다. 전령은 양의 지휘관이 쓴 서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넓은 평원을 가로질러 빠른 속도로 산동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병사를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검은 군복을 입은 장교는 망원경을 들고 그 동태를 살피다 주위에 명해 전령을 잡게 했다.

곧 한 무리의 기마가 잘 가꾸어진 밀밭의 가장자리에 출현했다. 갑작스레 적이 나타나자 전령은 당황한 빛을 보이며 반대로 돌아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노련한 사냥꾼들은 이미 그 후미 쪽으로도 몇 명의 병사를 보내두고 있었다.

이내 적의 올가미에 걸린 전령이 총격을 받고 말에서 떨어졌다. 병사들은 전령의 품을 뒤져 서신을 꺼내 장교에게 가져왔다.

장교는 서신을 뜯어 신의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자에게 해석하게 했다.

“고귀하신 황실의 대리인, 총리대신 각하께 고합니다. 우리 양의 군마는 이틀 안에 방곡현에 도착하여 근왕군(산동군을 일컬음)을 기다릴 예정입니다. 각하께서 이 서신을 보시고 도착하실 기일을 알려주시면 우리도 행군 속도를 조율하도록 하겠습니다.”

양의 서신 내용을 들은 장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적은 전쟁 경험이 부족한 초출들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경험이 많은 자들이라면 최소한 이런 중요한 정보를 가진 전령을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지역을 가로질러 움직이게 해선 안 되었다.

이건 너무나 멍청한 행동이었다.

오승도가 바보도 아닌데 그 앞에서 전령을 보내고 그 연락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바라다니. 책상 위에서 병서를 읽고 그대로 움직이는 자의 생각이 틀림없었다.

“전령의 몸에서 나온 다른 것은 없었나?”

장교가 묻자 병사 하나가 옥대 하나를 꺼냈다. 일전에 신 조정에서 양의 무리들을 회유하며 보냈을 물건으로 전령의 신분을 보증하는 수단으로 넣어둔 것이었다.

“아마 신분을 보증하는 물목일 겁니다.”

장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런 물건을 가진 전령이라면 여럿 보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옥대를 가지고 중간에서 장난을 쳐볼 수도 있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다 적당히 메마른 체격을 가진 자를 찾았다.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각하.”

산동군의 지휘관들이 한창 북경으로의 진격을 검토하고 있던 와중에 양의 전령이 다시 도착했다. 이번에 도착한 자는 양군의 합류 지점을 통보하러 왔다고 했다.

총리대신은 급히 그들을 막사로 들이게 했다.

곧 메마른 체격을 가진 자가 막사에 들어와 예를 차렸다.

“신분을 보증하는 물건은 있나?”

총리대신이 물었다. 계략에 능한 오승도가 중간에서 얼마든지 장난을 칠 수 있기에 이런 확인은 필수적이었다. 전령은 자신의 품에 들어 있던 옥대를 꺼내 바쳤다. 금과 은으로 장식된 옥대는 보기에도 화려하고 비싸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물건은 황실 창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총리대신 본인의 손으로 양의 지도자들에게 하사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상대가 양의 전령임을 확신했다. 머리가 좋은 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으로 자신이 의심하는 부분이 해소되면 나머지 미심쩍은 부분은 의심하지 못했다.

“확인은 되었군. 이리 가까이 오게.”

“예, 각하.”

전령이 총리대신으로부터 열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그 이상은 호위가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 거리도 수상한 자들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 간격이었다.

산동 총독이 눈짓을 하자 장수 하나가 대신 나서며 전령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그 서신을 읽어보라는 명을 받고 입을 움직였다.

“고귀하신 황실의 대리, 천명을 받들어 역적을 쳐부술 총리대신 각하께 미천한 평민이 인사를 올립니다. 저희 양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와 어제 육망곡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군세를 숨긴 채 역도들의 눈과 귀를 피하고 있사오나 오래 그 눈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루가 칠 주야 같고 이틀이 한 해처럼 기니 병사들의 긴장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부디 각하의 용맹한 군마를 하루빨리 보내주시어 우리 양의 병졸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대업에 힘을 보탤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서신이 낭독되자 총리대신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양의 무리들이 오승도의 움직임에 겁을 먹고 ‘상상’을 벗어난 속도로 진군한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들이 이처럼 빨리 북경 근처에 도달해 있다면 오승도가 준비를 더 해놓기 전에 한 번 들이칠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것이 없지 않았다. 그들이 합류를 기다린다는 장소, 육망곡이 문제였다. 그곳은 평지로 이루어진 북경 근방에서 유일한 협곡 지역이었다. 병사를 숨기기에는 알맞은 장소였기에 논리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육망곡은 대군이라 할지라도 덫에 걸렸다간 한 줌의 적에게도 분쇄되기 쉬운 사지였다. 물론 서신을 가져온 자의 신분이 확실한 만큼 함정일 가능성은 적었다. 양의 지도자들이 배신을 하지 않는 이상은.

그들이 배신할 가능성이야 오승도가 왕작을 약속하지 않는 다음에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총리대신은 자신이 공연한 것을 의심했다고 생각했다.

“육망곡이라면 조금 위험한 곳이 아닙니까?”

산동 총독이 곁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총리대신은 자신의 의중을 가볍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총독도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충 논의가 끝나자 총리대신이 전령을 향해 말했다.

“양의 충성에 우리 황실과 조정은 큰 상으로써 보답할 것이다. 너희의 왕들(총리대신은 양의 지도자들에게 왕작을 약속함)에게 가서 전해라. 우리 근왕군은 밤낮을 재촉해서라도 하루 안에 육망곡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그 말씀, 꼭 전해 올리겠습니다.”

“지금 한 말을 서신으로 써서 전령에게 건네주게.”

총리대신은 전령에게 서신을 써서 주게 했다.

양의 전령이 물러가고 나자 장수들이 다소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각하, 우리 군대는 이미 강행군으로 크게 지친 몸입니다. 이런 처지에 육망곡까지 가려면 하루 백 리를 더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되면 우리 군대는 지금의 반도 남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지친 군대에 백 리 행군은 무리입니다.”

지친 군대에게 하루 백 리의 강행군을 시키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 행위였지만 총리대신은 그 말을 일축했다.

육망곡에 무사히 도착하여 합류를 기다리는 군대가 있는 마당이다. 그들을 조속히 움직여 북경을 들이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경의 생각도 일리는 있으나 지금은 그 정도 손실은 감수해야 할 때요. 근왕군이 지금의 반으로 준다고 해도 반적과 합류하면 그 군세는 아직 적지는 않을 터. 그 전력이면 북경을 도모하기에 부족함이 없소.”

“각하, 지금이 중요한 시기임을 모두가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하루 서두르기 위해 군마의 손실을 무릅쓰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하루가 우리의 승패를 좌우한다면 그래도 그런 소리를 하겠소? 만약 도성 밖에 있을 오승도가 그 하루 사이에 북경으로 돌아가 방어를 지휘한다면? 그때는 어쩔 생각이요?”

총리대신의 반문에 장수들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 지적도 일리가 있었다. 괴물이 성으로 돌아가 방어를 지휘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가정이었다.

그들로서는 일이 그렇게 되기 전에 승부를 내겠다는 총리대신의 논리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지평선 위로 뽀얀 흙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이어 수천의 군마와 기치창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원을 새카맣게 메운 대규모 군세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황룡이 꿈틀거리며 병사들을 굽어보았다. 제국의 황실을 바로 세우고 역적을 토벌하겠다는, 제국의 근왕군이었다.

그 광경을 협곡 위에서 한 사내가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장포를 휘날리며 망원경을 들고 있던 남자는 보기에는 평범한 체격에 다소 여린 외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다면 그 겉모습에서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 오승도.

당대 제일의 야심가로서 제국 조정을 틀어쥔 사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는 적을 보며 혀를 찼다. 이 시간을 계기로 제국 내에서 그에 도전할 자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마지막을 장식할 상대가 이리 간단히 덫에 들어와 주다니. 아쉬움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육망곡을 향해 다가오는 적의 군세를 바라보는 사이, 장교 하나가 다가와 고했다.

“각하. 양쪽도 조처를 마쳤다고 합니다.”

승도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양의 군대 역시 완전한 파멸의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거짓 서신(총리대신의 인장은 제도를 접수하며 손에 넣음)을 보내 엉뚱한 행동을 하도록 만든 지 오래였다.

제도 내의 친 황실파 인사들과 접촉해 공작을 할 동안, 제도로 접근하지 말라는 거짓 서신을 받은 양의 군대는 그대로 평원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을 그 자리에 머물다 근왕군의 괴멸 소식을 듣고 스스로 붕괴하는 것이 그들에게 남은 운명이었다.

천하는 이제 그의 손에 확실히 들어왔다. 그렇게 단언해도 충분했다. 승도는 망원경을 내렸다.

“양쪽도 조처가 끝났다면 남은 것은 덫에 들어온 자들을 확실하게 박살내는 수순을 밟는 것이 전부이겠군요.”

“이제 천하에서 각하의 패도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 벼랑 위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발아래로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 그의 지배를 받을 땅이었다.

근왕군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육망곡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외부에서 관측하기 힘든 긴 초승달 모양의 협곡으로 그 안은 대군을 감추기에 용이했다.

그들은 협곡 입구에서 양쪽에서 보낸 병사를 만나보고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지형이 험했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것처럼 보이는 절벽이 놓여 있고, 군데군데 길이 좁아지는 병목 지점이 있어 유사시 군대의 탈출이 쉽지 않은 구조로 보였다.

만약 적이 이곳에 진이라도 치고 있다면 심각한 곤경에 처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표를 찔러 조기에 당도했으니 그럴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총리대신은 대열의 중간에서 말을 몰아가며 총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승도, 이자도 생각해보니 웃긴 면이 있소.”

“어떤 면을 말하시는 것이신지요?”

“북경의 코앞에 육망곡이 떡하니 있는데 여기로 양의 군마가 숨어들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요. 눈과 귀가 있다고 과시한 그자라면 여기 숨어드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않소?”

“하지만 야음을 틈타서 강행군을 해 숨어들었다면 모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수천의 낙오병까지 남겨 군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도 어렵다면 말입니다.”

“하긴 그렇소.”

병법의 이론만 놓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왕왕 생각지 않은 변수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의 영역에 도달하곤 했다. 총리대신 일행은 좁은 병목 지점을 지나 협곡의 초입을 넘어섰다.

그때 그들을 수행하던 장수 하나가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고했다.

“각하,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협곡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반적의 군마가 적진 않을 겁니다. 그런 군대가 왜 협곡의 초입을 넘도록 그 머리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야 반적 놈들도 강행군을 하며 병사의 수가 크게 줄어든 탓이 아니겠나?”

총리대신은 장수가 건넨, 뜻하지 않은 운명의 경고를 스스로 차버렸다. 그는 이것으로 확실히 죽음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윽고 협곡의 중간에 접어든 근왕군의 선두가 양(?)의 군대와 접촉했다. 근왕군의 군관 하나가 말에서 내렸다.

“우리는 조정의 근왕군이다. 총리대신 각하의 명을 받들어 그대들의 왕을 만나 북경 진격을 논의하고자 한다. 지휘관을 만나볼 수 있겠나?”

그 물음에 양(?)의 군대가 둘로 쫙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의 너머에 검은 군복을 걸친 자들과 백마를 타고 있던 자가 모습을 내비쳤다.

“귀하가 양의 경왕(양의 지도자들에게 내려진 왕작 중 하나)이시오?”

“경왕? 그게 누구에게 준 왕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붙은 관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내려준 왕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양의 지휘관에게 군관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양의 지휘관은 그런 군관을 보며 미소를 짓다 말을 이었다.

“나는 제국 총리대신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강주 관리사란 관직으로 더 잘 아는 사람이겠지요.”

그 말에 군관이 대경실색했다.

“역적 오승도!”

승도가 손을 들자 허름한 차림을 한 양의(?) 군대가 뒤로 물러나고 검은 군복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경악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근왕군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검은 군복들이 앞으로 나서자 그가 큰 소리로 명했다.

“상승군은 들어라. 천자의 명을 받들어 천하를 어지럽힌 무능하고 부패한 자들에게 죽음으로써 그 죄를 치르게 하라.”

“황제 폐하 만세!”

상승군 병사들은 일부러 명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해 만세를 외친 다음 후장식 소총을 들었다. 그 신속한 반응에 신의 군관들도 다급하게 외쳤다.

“돌격!”

길은 좁아 피할 곳이 없었다. 돌아설 곳이 없으니 살길은 하나. 적을 죽이고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들이 우레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든 순간 콩 볶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화약 연기가 번졌다.

불꽃이 번뜩일 때마다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용기 있게 달려들었던 근왕병들의 선두는 순식간에 잘 다진 고기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승도가 손을 들어 앞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검은 군복들이 척척 소리를 내며 전진했다.

그들은 일정한 시간마다 기계적으로 총구를 앞으로 향하게 하며 총격을 퍼부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화력 앞에 근왕병들은 뒤로 피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떼로 죽어나갔다.

곧, 이 무시무시한 총성은 총리대신이 있던 곳에도 들려왔다. 그는 이 공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때 협곡 위에도 한 무리의 검은 군복이 나타나 협곡 아래에서 혼란에 빠져 있던 근왕병들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총리대신은 그제야 자신들이 함정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적이다, 적이야!”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병사들과 군관들 사이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높아졌다. 온 사방에 적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자비한 적의 총화에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죽어나가니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총리대신도 이 퇴각 행렬에 끼어 뒤로 날아나고자 했다. 상황을 모르는 병사들의 물결이 뒤에서 가로막자 마음이 급해진 자들은 동료를 향해서도 칼을 휘둘렀다.

아비규환, 이전투구. 이미 근왕병들은 군대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그저 달아나고자 하는 인간의 무리로 전락한 군대는 비명을 지르며 협곡 입구로 달아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곳도 이미 사지로 변해 있었다.

협곡 입구는 이미 달려온 몽족 기병들이 낙타와 염소의 말린 똥을 무더기로 쌓아 불을 지핀 터라, 탈출할 길 자체가 없었다.

병사들은 앞으로도 뒤로도 달아나지 못했다. 일부는 용기를 내어 화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지만 짐승의 말린 똥은 굉장한 화력을 내고 있어 그 불길을 넘을 수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렇게 불길을 넘어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불길 너머에는 잔혹한 몽족 기병들이 마상에서 칼을 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잔혹한 학살의 현장에서 총리대신과 총독은 절망을 맛보았다. 날개가 있다면 몰라도 인간에게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남은 것은 죽음.

총리대신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돌아가신 형, 선제가 국정을 부탁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는 형에게 약속했었다. 제국을 바르게, 올바르게 이끌어 어린 조카의 힘이 되어 주겠다고.

하지만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권력에 취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제국의 국정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어쩌면 오늘의 패망은 돌아가신 형님 폐하가 내리신 인과응보인지도 몰랐다.

총리대신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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