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개혁정국 (1)
주변국이 차례로 사절을 보내오면서 오승도 정권은 외부 세계의 인정도 확고히 얻었다. 외부의 인정은 곧 정권의 공인. 신생 정권은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정세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북으로는 북적이 계속해서 남하의 기회만 엿보았고, 내부적으로는 낡은 체제의 문제가 상존해 있었다. 열강의 경제적 수탈도 계속되고 있었고, 은의 순 유출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승도는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정책들을 손질하는데 그치지 않고 몇 가지 과감한 방안을 추가했다.
먼저 불필요한 비용만 먹는 백만 제국군의 감축에 들어갔다. 전력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대부분의 녹기와 팔기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여기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승군을 앞세운 무자비한 진압 앞에 반발은 쑥 들어갔다. 물론 무턱대고 밥줄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승도는 군에서 퇴직시킨 인원들을 공사 현장으로 보내 일거리를 주었다.
최소한의 물러설 공간은 만들어주고 강경한 조처를 꺼냈기에 그의 강수는 먹혀들었다. 이 조처로 백만 제국군은 단계적으로 삼십만 이하로 감축되었다.
하지만 국방 분야의 개혁은 민중들에게 별로 체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은 것은 바로 세제 개혁이었다.
승도는 기존의 무능한 관리들은 부패했기에 혹은 실무를 잘 몰라 넘어갔던 부분들에 대해 촘촘한 그물을 쳤다. 복잡하고 머리만 아픈, 탐관들을 위한 특별세는 모두 철폐되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부에 따라 차등을 둔 누진세였다. 이 세금은 부호들로부터 세금을 뜯어 그만큼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이가 갈리는 일이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양평의 대지주로 편안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석송은 관에서 붙인 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 매일 거르지 않던 식사마저 입에 넣지 못했다.
세는 언제나 부유한 자들의 편이라 천한 것들과 같은 세만 내도 의무를 다했다고 추앙을 받아온 것이 법도인데, 많이 가졌다고 더 내라는 것은 동서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악법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악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잘 몰랐지만 이 누진세는 과거 로망스 제정에서 실시한 정책이기도 했다. 황제 필립은 이 정책을 통해 중산층의 세 부담을 줄여 정권의 안정성을 얻은 바 있었다.
이미 재미를 보고 효과를 본 정책을 오승도가 철회한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석송이 앓는 소리를 내자 출타를 했다 돌아온 장자가 놀란 얼굴을 하고 방으로 얼른 들어왔다.
“아버님, 무슨 일이십니까?”
“관에서 방을 붙였다고 하는데 이제부터 재산을 많이 가진 만큼 더 내라고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는구나.”
“아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과거 성조 황제께서 실시한 지세 지주 부담제만 해도 말이 많았는데, 많이 가졌다고 더 내라니. 이건 지주들더러 죽으란 소립니다.”
“맞다. 이건 지주들더러 죽으란 소리다. 얘야, 오늘 친구들을 보고 왔다고 했느냐?”
석송이 물었다.
“예. 친구 녀석들과 시화를 좀 읊다 왔습니다.”
“그 녀석들 거인이라고 했었지?”
“예. 모두 거인들입니다.”
지방 향촌 사회에서는 신분이 비슷한 자들끼리 어울려 산다. 조금이라도 격에 맞지 않는 자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상인은 상인끼리, 관리는 관리끼리, 유자는 유자끼리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인은 글을 쓰는 정도를 넘어 문장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실력을 가진 유자. 어려운 시험을 몇 번이나 합격해야 얻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진 자들이니 글 솜씨는 일가견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송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네 친구들에게 글을 좀 쓰게 하여라.”
“글을 말입니까?”
“그래, 이번 조정의 명에 대한 비판 글을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석종이 놀라 주변을 살피는 듯 고개를 움직였다.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놀란 것이다. 그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속삭였다.
“아버님, 지금 그 말씀은 너무 위험합니다.”
“안다. 하지만 앉아서 조정에 피 같은 재산을 내놓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하오나.”
“더구나 작금 조정을 틀어쥔 자가 누구냐? 역적 놈이다. 그런 놈에게 어찌 조상의 피땀이 밴 재산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이더냐?”
석송은 아들을 향해 ‘역적’에 대해 떠들었다. 물론 오승도가, 천하의 무례한 도적놈이란 것은 석종도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적 놈이 무섭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늘처럼 높은 지방관들도 오승도가 기침 한 번 하면 고개를 움츠렸고, 오승도가 상인 하나만 내려 보내면 그 앞에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을 듯 실실거리곤 했다.
그것만 보아도 그 역적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개 지방 토후 따위가 그 명을 거스르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아버님, 그 역적이 천하의 권력을 가졌다는 걸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안다. 아니까 하는 말이다.”
석송의 대답에 석종이 침을 삼켰다. 그의 부친 석송은 그리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관직에 출사하기도 했고 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정말 어리석은 자라면 이 넓은 토지를 경영하며 가문을 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걸 해냈다는 것은 석송 역시 정치적 감각이 있다는 뜻. 석종은 아버지의 속내를 들어보기로 했다.
“아버님께서는 이 일에 승산이라도 있다 여기시는 겁니까? 들키면 집안이 절단할 일입니다.”
“있다마다. 역적은 지금 정권을 쥔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다. 그런 처지이니 여론이 일어나면 놈도 한 발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일이다. 성조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라면 몰라도 놈은 신하의 위치에 있지 않느냐.”
그 말은 옳았다. 오승도가 황제 이상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해도 그 위치는 어디까지나 신하. 그 권력이 강건하더라도 디디고 선 지반이 허약했다.
“하지만 아버님, 만에 하나란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자가 물러서지 않고 이 일의 뒷조사를 시작하면 우리 가문은 끝장입니다.”
“하니 드러나지 않게 하면 될 것 아니냐. 밤에 믿을 만한 것들을 시켜 벽서를 붙이게 하면 될 것이다.”
석종은 아버지의 의지가 굳은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긴 해도 잘만 풀리면 세를 아낄 수 있는 일. 그는 따르기로 했다.
석종이 뜻을 받들기로 하자 석송이 서랍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툭 던져주었다. 석종이 무슨 돈인가 해서 아버지 얼굴을 보았다.
“입막음 값이다. 네 친구들이라 해도 일을 시킴에 있어 철저히 공범으로 만들어야 일의 안정을 꾀하기 쉽다.”
석종은 아버지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험한 일을 맨입으로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비단 주머니를 들고 방을 나서자 석송이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천한 장사치 놈 주제에 감히 우리 가문의 부를 넘봐? 어림도 없는 소리. 역적 놈에게 줄 돈은 한 푼도 없다. 이 재산은 오롯이 우리 가문이 대대로 물려갈 것이야.’
그는 곰방대를 잘근 깨물었다.
***
개혁에 대한 반발은 갑작스런 제도 개편에 대한 부담과 피로를 느낀 지방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 차츰 그 목소리를 높여나갔다. 지방의 일부 관료들은 ‘벽서’ 등을 통해 정부 시책을 비판하는 행위에 대해 엄중히 대처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공공연히 무시하기도 했다.
이런 암묵적인 지원 속에 유자들이 한데 모여 불만의 목소리를 폭발시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정보가 공유되고 그 반발의 목소리를 서로가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유자들은 본격적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다.
정부는 각 지방 장관들에 명해 허가되지 않은 유자들의 행동을 제재할 것을 명령했지만 그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일부 일선 지방관들이 그 명령을 못들은 척 묵살해버린 탓이었다.
그에 따라 각지에서 몰려든 수천의 유자들이 북경으로 상경하여 거대한 인파를 이루었다. 이 불만의 행렬은 그 수가 늘면 늘수록 자신감이 느는 것을 느꼈다.
그 강력한 저항의 물결이 몰려들자 조정에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일부 청림당 관료들은 저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개혁을 일부 미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승도는 이 혼란스런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 그를 향해 건문이 물었다.
“각하, 어찌하여 상황을 그저 보고만 계십니까?”
그 물음에 승도는 웃으며 답했다.
“불이 확실히 커져야 빈대를 확실히 태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계속해서 반발 세력으로 남을 것들입니다. 수면 위로 떠올라 신나게 떠들도록 그냥 두세요. 그 목소리가 커지면 그간 입장이 모호하던 회색들도 그 색깔을 분명히 할 겁니다.”
“그럼 대인께서는.”
“때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적아가 분명해지면 그때 싹 쓸어버려도 늦지 않으니까요.”
그 대답에 실린 잔혹한 뜻을 읽은 건문은 조용히 소매를 모았다. 그의 상전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정치가라면 부담을 느껴 주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사내는 그런 것쯤은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정치를 해본 경험이 그리 없을 것이 분명한 이가 어떻게 이토록 노회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지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승도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황제는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제국의 언론을 대변하는 ‘유자들’이 때로 일어나 오승도의 정책을 성토하는 상황은 권력을 회복할 수 있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오승도가 탄핵되는 장밋빛 미래까지 꿈꾸었다. 물론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황제 본인부터가 잘 알았다.
아마 잘되어도 그 입지를 줄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만 되어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에서 운신의 여지가 넓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국혼 문제도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 있을지 몰랐다.
황제가 그 장밋빛 희망에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데, 환관이 와서 총리대신이 독대를 청해왔다는 사실을 고했다.
평소라면 오승도가 독대를 청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품었을 황제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궁지에 몰린 것은 그가 아니라 역적 놈이었다.
필시 역적 놈은 황실의 권위를 빌어 문제를 무마하려 할 터. 이참에 협상을 잘 하면 황실의 입지도 좀 회복할 수 있을지 몰랐다.
황제는 그런 계산을 품고 독대를 허락했다.
곧 내관이 나가서 총리대신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전했다.
잠시 후, 검은 관복을 입은 사내가 황제의 침전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평소와 달리 그 표정이 다소 어두운 듯도 싶어 황제는 쾌재를 부르며 그에게 물었다.
“독대를 청하셨다 들었어요. 근자에 북경이 소란스러운 것과 경의 독대가 상관이 있나요?”
“있습니다, 폐하.”
승도의 단도직입적인 대답에 황제는 미소를 보였다. 자신의 패가 우위에 있다 여긴 도박사의 미소다. 그는 자신의 패에 굴복하게 될 상대를 여유롭게 보며 소매를 털어 움직였다.
“상관이 있다고 한다면 혹 황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폐하. 과연 영명하십니다.”
“그래요? 그럼 경이 내게 무얼 부탁하려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볼까요.”
황제는 승리자의 빛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물었다.
“예, 신은 황실의 존엄과 영광을 위해 이번에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불충한 무리들이 일어나 소란을 부리고 있습니다. 신은 평범한 수단으로는 도저히 이들 무리를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면 짐더러 그들에게 해산하라 명을 내려달라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폐하.”
“짐이 왜 그들을 해산시켜야 하나요? 정당한 언로를 보장하는 것은 덕이 있는 군주의 도리가 아니던가요?”
황제는 며칠 전 배운 제왕학의 일부를 입에 올렸다. 꽤 똑똑한 반격이었지만 노회한 능구렁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수였다. 애초부터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말을 내뱉은 승도의 적수가 되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승도는 어두운 빛을 보이던 얼굴에 불현듯 차가운 빛을 떠올렸다. 그는 표정 정도는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노회한 정치가. 황제를 가지고 노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언로를 보장하신다는 말씀은 지극히 옳사옵니다. 하나 그들은 황실의 조칙에 따라 내려진 정당한 포고를 무시하고 제 뜻을 조정에 강요하는 자들이옵니다. 그들이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정의 지엄한 법도를 어기는 역적이라는 뜻.
따라서 폐하의 해산 명령이 없다면 신은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뭐, 뭐요?”
황제가 경악하여 물었다. 북경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대규모 유혈을 피하는 것이 법도였다. 과거 정변에서 그 신성한 법도가 깨지긴 했지만 그때는 전시였고 지금은 평시다. 평시에 법도가 깨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다시 아뢰어야 하옵니까?”
승도가 반문했다. 황제는 그 반문에서 자신이 처음부터 할 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절한다면 승도는 역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유자들을 전멸시킬 것이다. 그를 추인한다면 해산시킨 직후 모두 잡아다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황제에게 손해가 가는 장사였지만 전자의 피해가 배로 컸다. 유자들이 모두 몰살당하면 앞으로 오승도와 대적할 이들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후자의 피해도 작지 않은 것이 이를 고르면 황실이 오승도와 결탁하여 유자들의 뜻을 꺾은 것으로 비친다.
실로 교묘하고 간악한 강요였다.
“어, 어찌 경은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한단 말이요. 좋게 타일러 조정의 시책을 이해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소?”
“신도 그리하고 싶사오나 밀린 국정 현안이 산적하여 유자들에게 내어줄 시간이 없사옵니다. 신은 제한된 시간을 쪼개어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이를 뿌득 갈았지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처음부터 오승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침전을 찾아왔을 때부터 그의 선택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다 겨우 답했다.
“좋아요. 경의 뜻대로 해산 명령을 짐의 이름으로 내리겠어요.”
“자애로우십니다, 폐하. 불충한 자들까지 아끼시는 폐하의 마음은 천하를 감동시키고도 남을 것이옵니다.”
“말은 되었어요. 조서를 꾸며 내려줄 것이니 그만 물러가 보세요.”
황제가 짜증스런 투로 말했다. 승도는 그 불편한 심기를 알기에 빙긋이 미소 지으며 소매를 모았다.
“하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가보세요.”
승도는 예를 표시하고 황제의 침전에서 물러났다.
‘꼬맹이 녀석, 제법 화가 났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봐야 별수 없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너는 내 적수가 될 수 없어. 겨우 네게 질 정도였다면 로망스 황제에 오르지도 못했겠지.’
승도는 냉소를 지으며 황궁의 계단을 내려섰다. 그가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 궁녀가 그 곁으로 얼른 다가섰다. 궁녀는 신분이 꽤 높았다.
승도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었다. 여자는 승도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천녀가 각하를 뵙사옵니다.”
“이 답응(答應: 성은을 입은 궁녀)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이 답응이라 불린 여자는 선제의 여자로, 궁내에서 퇴물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하지만 아직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여서 위를 향한 열망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폐하의 침전에서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승도는 그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실은 천녀가 며칠 전에 떠도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사온데 폐하께서 궁녀 하나를 총애한다 하옵니다. 증인도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특정한 궁녀를 총애해요?”
“예, 밤마다 그 궁녀를 불러다 시침을 든다는 말도 도는 걸로 아옵니다. 상세한 내막을 원하신다면 증좌를 모아 올리겠사옵니다.”
이 답응은 승도에게 황제의 동정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고했다. 물론 황제가 성적으로 궁녀를 총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나이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황후’로 선택된 여자를 건드리기도 전에 궁녀를 건드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용하기에 따라 황제를 공격할 수 있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승도는 이 답응에게 기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의 귀가 아주 시원해진 기분입니다. 이 답응의 상재(商才: 정4품에 해당하는 궁녀의 벼슬) 승급에 대해 언질을 주도록 하지요.”
그 대답에 이 답응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기다렸다 고자질을 한 보람이 있었다.
“각하, 앞으로도 천녀는 각하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와주세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답응이 고개를 허리께까지 숙이는 사이 승도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권세가 커지는 만큼 궁중에 그의 눈과 귀도 늘고 있었다. 황제 따위는 그의 새장에 갇힌 참새나 다름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