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86화 (286/425)

제286화. 개혁정국 (2)

자색 빛을 띤 황궁 앞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과거 시험을 치를 때를 제외하면 이만한 사람이 모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낙향 관료, 지방의 지주, 부농, 유자 등 제국 향촌 사회에서 지배자로 군림하는 이들 중 힘깨나 쓰는 자들이 멍석을 깔고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 폐하, 무도한 조정의 권신들이 만든 악법을 폐하시고 밝고 참된 뜻을 천하에 비치시어 백성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폐하, 부디 신들의 뜻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신들은 이 자리에서 권신들이 악법을 폐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옵니다.”

“폐하, 신들은 제국을 위해 충정의 말씀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권신들의 요설을 물리치시고 밝고 참된 정치를 펼치시옵소서.”

“폐하!”

그들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장단을 맞추어 번갈아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훌륭한 합주가 만들어내는 화음은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고 듣는 이를 몰아붙이는 맛이 있었다.

그것을 듣고 있자면 천하의 권신들이 백성들을 부당하게 핍박하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물론 현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말하는 백성이란 제국의 여론을 만드는 지배층, 한 줌의 상류층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그 지배하에 있는 대부분의 민중들을 같은 백성의 울타리에 두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민(民)은 바로 자신들이었고, 그 민심이 곧 천심이었다.

군중들은 그런 유자들의 ‘합창’을 구경했다.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다 보니 그들은 앞으로 오승도가 어떤 대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제국의 신성은 평범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는 자였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기다리며 수군거렸다.

“유자들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모르는 것인지 모르겠군.”

“제국 최고 권력자라도 자기들을 아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니겠소?”

“멍청한 짓이요. 총리대신이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지.”

“두고 보면 알 일이요. 여기서 물러나면 신성도 어깨에 힘이 빠질 테니 어찌 나올지.”

“그분이 쉽게 고개를 숙일 분은 아니잖소. 유자들이 헛짓거릴 하는 거요. 아주 호된 맛을 볼 테지. 차라리 잘되었소. 이참에 저치들을 아주 박살을 내주면 좋겠어.”

사람들이 몇 마디를 떠들며 유자들을 보고 있는데 황성의 문이 열리더니 관리 하나가 나타났다.

자색 관복을 입은 고위 관료였다. 그가 나타난 것을 본 유자들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기 싸움에서 조정을 굴복시켰다 생각했는지 기세등등해졌다.

“황제 폐하의 교지를 전한다. 모두 예를 표하라.”

관료는 그런 유자들을 보지 못한 척하며 교지를 펴들었다. 그가 황금빛 성지를 펼치자 유자들이 고개를 숙여 뜻을 받들 준비를 했다.

관료는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교지를 읽어 내려갔다.

“예부터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다. 나라의 곳간이 비어 조정에 큰 뜻이 있어도 백성을 구하지 못하니 이는 짐이 가장 슬프게 여기는 바이다. 들어라. 짐은 제국의 국정을 혁신하고 나라의 기틀을 단단히 하기 위해 큰 뜻을 품었다. 이를 위해 재정을 탄탄히 하고 곳간을 채워 관리들이 의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교서를 내렸다. 이는 천하 만민을 위한 일이요, 제국의 만세일계를 위함이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심을 살피고 백성을 구제하여 옛 성현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천자에게 있어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한 명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짐도 그대들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대들이 정책이 가져올 폐단과 혼란을 염려하여 상소를 올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충성도 올바른 방향을 향할 때에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짐은 이 일이 옳은 방향이라 믿는다. 그대들이 권신이라 칭한 이들은 조정과 제국을 위해 간뇌를 쏟아 일을 하는 이들이다. 하니 그대들은 오해를 내려두고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길 바란다.”

황제의 교지가 낭독되자 유자들은 처음에 그 말에 당혹감을 보였다. 이어 당혹감은 황당함으로, 이어 방향을 잃은 혼란으로 바뀌었다. 오승도의 정적으로 여겨진 황제가 교서를 내려 그 정책을 지지하는 판에 유자들이 무얼 어쩌겠단 말인가?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관료에게 물었다.

“대인, 이 교지가 진정 황제 폐하의 성지가 맞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관리는 불쾌하다는 빛을 보였다.

“지금 황제 폐하의 성지를 무시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무엄하다.”

관리의 일갈에 유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성지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엄연한 불충이니, 말을 더 해봐야 그들의 면만 상할 뿐이었다.

관료는 교지를 거두고 유자들을 향해 선언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폐하의 명에 따라 해산할 것을 명하나니, 황명을 받들도록 하라.”

관료의 명이 내려지자 상당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명목상 황제의 명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명을 순순히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명이 진정 폐하의 말씀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남은 유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가 옳다구나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하나 그 교지에 역적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라 신들은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신들은 황제 폐하께서 친히 해산을 명하시기 전에는 황실을 위해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신들의 충성을 갸륵하게 여기시어 진실한 어심을 보여 주시옵소서.”

“폐하!”

“아니, 이자들이?”

관리는 유자들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유자들과 같은 학맥을 잇고 있어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도란 것이 있었다. 표면상 황제의 성지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것은 엄연히 불충이었다.

이들이 성지를 받고도 물러나지 않는 것은 조정에서 강경책을 쓰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뒷받침되었는지도 몰랐다. 이 자리에 나온 자들의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북경에서 피를 보지 않는 불문율도 있어서다.

그들은 과거의 관례를 믿고 한 번 더 배짱을 부려 조정의 양보를 끌어내어 보려 했다. 소란이 길어지면 불리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오승도란 계산도 있었다.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판단했다. 관리는 혀를 차며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유자들은 관료가 자신들의 뜻을 조정에 전하기 위해 돌아간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광장의 좌측과 우측으로 한 무리의 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내전에서 단 일개 대대로 전 총리대신과 그 역적 무리를 토벌했다고 알려진 상승군의 기마 보병이었다.

그들은 시위 진압 목적으로 지급받은 쇠좆매를 들고 섰다.

쇠좆매는 소의 ‘그것’을 말린 것으로 어지간한 곤봉만 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탄력이 있으면서도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여 이것으로 두드려 맞으면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게 마련이었다.

제국 관병들이 악명 높은 쇠좆매를 들고 나타나자 유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이 경악할 무리들의 출현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조금 ‘배짱’을 부려보긴 했지만 설마하니 무장 군대를 보내 유자들을 제압하겠다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가 꼭 한둘은 있게 마련이었다. 한 젊은 유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수재로 조만간 중앙 관계에 자리를 받을 사내였다.

그는 주변의 유자들을 보며 소리쳤다.

“지금 권신이 군마를 끌어와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나 이곳은 신성한 제도. 저들이 아무리 위협한다 해도 피를 흘릴 수 없는 곳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켜보시고 천하의 이목이 쏠린 곳에서 어찌 저들이 폭거를 저지르겠습니까?”

“옳다. 오승도가 아무리 강대한 권력자라도 그리는 못 한다.”

“우리를 폐하 앞에서 몰아낼 수는 없다.”

그들이 동요의 빛을 잠재우며 자리를 고수할 뜻을 강하게 보이자 상승군 장교들이 피식 웃었다.

그들은 이미 오승도의 명령을 받고 저들을 때려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승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황제의 교지를 통해 무혈로 물러날 기회를 준 이상, 이쪽에서 명분상 손해 볼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정 봐주지 말고 모두 쓸어버리세요. 진압 과정 중에 몇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몇이 죽더라도 그 부담은 능히 감수할 수 있으니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상승군 장교들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대충 황제의 교지가 내려온 지도 반시진이 족히 지나 있었다.

이 정도 기다려주면 ‘유혈’을 피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는 인상은 충분히 줄 수 있었다.

장교 중 하나가 장갑을 낀 손을 들며 외쳤다.

“총리대신 각하의 명령이다. 역적들을 모두 잡아라.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상관없다.”

그 한마디와 동시에 기마 보병들이 지축을 울리며 말을 몰아갔다. 관병이 다가온 순간에야 유자들은 깨달았다. 그들이 반기를 들려 한 권력자는 기존의 관례 따위는 필요하면 언제든 무시할 수 있는 냉혹한 결단력을 가진 괴물이라는 사실을.

***

장조는 오승도가 보낸 밀사와 은밀한 접촉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승도가 특별히 제공해준 상승군 호위 부대의 도움을 받아 본국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사행은 소득이 매우 많았다. 제국 최고 권력자와 친분도 다지고 그와 선물도 주고받은 데다, 사적으로 협력 관계도 맺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소자 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다.”

김씨 가문의 노회한 가주가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 일이 있었는지 부친의 얼굴에는 피로한 빛이 있었다.

장조는 그런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고했다.

“이번 사행에서 소자가 제국 총리대신으로부터 몇 가지 제안을 듣고 왔사옵니다.”

“오승도가 제안을 했단 말이냐?”

“그러합니다. 소자가 보기에 무척 훌륭한 제안이었습니다.”

장조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이번 사행을 다녀오며 처음으로 부패한 자국의 현실이 만들어낸 ‘괴물들’을 보고 그 적의를 느꼈다.

가문의 권력과 지고한 위치도 허상일 수 있음을 깨달은 만큼 그는 보다 안정된 입지를 갖기 원했다.

그 입지를 얻는 방편 중 하나는 오승도와 손을 잡는 것이었다. 강력한 제국 최고 권력자와 손을 잡음으로써 그 후광을 빌려 가문의 영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일단 첫 단추를 잘 꿰려면 오승도와 협력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 제안이란 것이 무엇이더냐?”

부친이 물었다.

“첫째가 신과 려의 국혼이옵니다.”

“국혼이라면 왕실의 결합이 아니더냐? 그리되면 왕실의 권위가 지금보다 높아질 것인데.”

노인은 내키지 않는다는 빛을 보였다. 일부러 김씨 일가가 권력을 쥐기 위해 교육받지 않은 방계 왕족을 세워 왕실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마당이다.

이 판에 왕실의 권위를 올려주는 것은 당연히 자충수. 노인으로서는 수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왕실의 권위는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오씨 가문에서 우리 뒤를 봐주기로 했습니다.”

“반대급부로 오씨가 우리 뒤를 봐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황실과의 혼사로 왕실이 힘을 올려본들 오승도의 후광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오승도가 확실히 뒤만 봐준다면 국혼 정도야 받아줄 만하다.

“그렇습니다. 그 약속의 증표로 우리와 오씨 가문의 혈연 동맹을 제안하였습니다.”

“영리한 포석이군.”

노회한 정치가는 오씨의 포석을 듣고 감탄했다.

황실과 왕실을 표면상에서 결합시켜 양국의 공식 관계를 굳건히 하고, 수면 아래에서는 오씨와 김씨가 동맹을 맺어 이 ‘국혼’으로 맺어진 관계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범인이 내놓을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이 방법이면 우리와 오씨 모두가 안심하고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해. 다른 제안은?”

“두 번째는 양국의 무역을 증진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무역을 늘리자. 그렇게 하면 사행에서 얻는 우리 가문의 수입이 줄지 않겠느냐?”

“그 부분도 총리대신이 신경을 써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이윤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우리 가문에 바로 돈을 내주기로 했습니다. 지금 사행에서 얻는 수익보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보장하였습니다.”

“상인 출신이니 돈 계산은 확실하겠지. 구미는 당기는 이야기야. 하지만 무역의 규모를 늘리면 문제가 있다. 너도 그건 알게다.”

부친의 지적에 장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무역을 늘리면 이에 종사하는 상인이 늘고 대륙의 경우처럼 조정이 통제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위험을 우리가 감수할 필요가 있겠느냐?”

권력의 안정성 측면에서 보자면 돈 몇 푼보다는 변화를 억제하는 편이 이익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노인의 말이 옳았다.

“감수해야 합니다.”

장조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노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찌해서 그리 생각하느냐?”

“작금에 우리 가문은 너무 인심을 잃었습니다. 이 체제를 고수해서는 가문의 영속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가문의 부귀영달에 도움이 될 것이란 게 제 생각입니다.”

“변화를 해야 가문이 영화를 이어갈 수 있다. 그게 차기 가주로서의 네 생각이더냐?”

“그렇습니다.”

“좋다. 네 뜻대로 하마. 제안이 또 있느냐?”

노인이 시원스레 대답하며 물었다.

“신에서 동영을 치려고 합니다. 위의 제안들은 아마 이 세 번째 제안을 위해 꺼낸 것에 가까울 겁니다.”

“확실히 이익으로 묶어 확고한 동맹자로 만든 다음, 우리 협력을 얻어 동영을 도모하겠다. 그럴듯한 생각이야.”

노인은 나름대로 오승도의 의도를 분석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생각이 옳았다. 오승도가 입에 올린 이야기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승도는 동영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일종의 위장술에 가까웠다.

“우리가 이 제안을 따르면 이익도 있을 겁니다.”

“이익이라.”

“우선 동영 오랑캐를 정벌함으로써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업적을 해낸다면 우리 가문은 왕실보다 더한 위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역성도 가능하겠지.”

노인은 서슴없이 무서운 말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 말을 대전에서 떠들어도 그를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강한 권력을 가졌기에 쉬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소자는 그런 이유에서 총리대신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안을 받으면 모두 이익이 된다. 듣기는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조금은 걸리는 부분이 없지도 않다.”

일국의 집정 대신 자리는 그저 운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암투와 모략을 이겨내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다.

그 자리를 수십 년간 지키려면 암투와 모략은 거의 생활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노인은 그런 무서운 정치가였다. 그렇기에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

“세상에는 말이다. 듣기 좋은 이야기가 있고, 듣기에 쓴 이야기가 있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어딘가에 칼이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 이야기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칼이 숨어 있을지 그것이 조금 걱정된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소자가 사행을 다녀오며 몇 번을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경우의 수는 없었습니다.”

나름 조정에서 구른 장조는 자신의 판단에 자신이 있었다. 노인도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들이 오승도의 노림수를 완전히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정치적 경륜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국제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였다.

이들은 연합왕국과 신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주변국들 간에 얽힌 관계가 어떤 이해관계로 이루어져 있는지 정보가 모자랐다.

표면상에 대한 정보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심층적인 부분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이것이 이들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다 아들의 판단을 존중하기로 했다. 차기 가주로 가독을 승계할 녀석이니, 지금부터 판단을 내릴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좋다. 이번 일은 네 생각대로 하마. 단, 한 가지 명심해둘 것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어떤 일이든 결정이 된 다음에는 무를 수가 없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 점을 뼈에 새겨두도록 해라.”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장조가 고개를 숙여 절을 하자 노인은 기꺼운 얼굴을 했다.

그 순간 오승도가 던진 포석의 첫 단추가 꿰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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