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화룡점정 (2)
열강들의 관심을 돌릴 포석을 둔 승도는 내정 개혁의 속도를 높였다. 그가 이번에 주안점을 둔 부분은 부정부패의 혁신이었다. 과거 강주에서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부패 청산에 성공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방 단위의 청산과 대륙 단위의 청산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중앙은 지방에서 너무나 멀었고, 그 명령을 수행할 관료들이 부패한 상태에서 일이 제대로 진행될지는 의심스러웠다.
과거 ‘선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던 개혁 법안들이 부패 관료들의 배를 불려주는 ‘악법’이 되고 만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무 관료 전체를 교체하지 않는 이상 부패 척결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승도의 생각은 달랐다.
‘부정부패는 나라를 좀 먹는 악이다. 부패를 두고 제국이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제국이 반석에 서려면 부패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
승도는 조정 대신들 앞에서 단언했다. 부패를 척결하지 못하면 모두 옷을 벗을 각오를 하라고.
그가 이 같은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근대화를 추진한 서역 열강들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모두 부패척결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연합왕국과 겨룰 정도로 강력했던 로망스 제정 역시 그랬다.
제정이 에우로페를 호령하고 연합왕국과 자웅을 겨루었던 것은 본질적으로 투명한 행정의 뒷받침이 컸다. 부패하지 않은 관료들이 제국의 내정을 떠받쳐준 덕분에 ‘반농업 국가’에 머물러 있던 로망스가 최강의 산업대국 연합왕국과 겨룰 수 있었다.
국력이 로망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신은 그 필요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앞으로 열강의 간섭을 배제한 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덮고 갈 수는 없었다.
일부 관료들은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승도에게 몇 마디 조언하기도 했다.
“각하, 대나무는 너무 뻣뻣하기에 구부러지지 않고 부러지는 법입니다. 제국의 만세일계를 위해 큰 뜻을 내세우신 것은 알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성사될 수 없습니다. 시일을 두고 차차 해결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부패 관료들을 모두 쓸어내면 행정에 공백이 클 것입니다. 공백은 무능과 부패보다 더한 악입니다. 각하, 제국을 위해 개혁의 속도를 조절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없진 않았지만 승도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가 조회에서 강경한 방침을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전역에 방이 붙었다.
‘부정부패한 관료들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처벌할 것을 집정대신으로서 선언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관료의 부패에 대해 신고를 하는 자에게는 ‘부정부패’로 횡령한 재산의 1/10을 보상으로 지급하며, 부패 혐의자로 지목된 관료는 즉시 관직을 박탈하겠다.’
선언의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공갈 정도로 넘어갔겠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여러 차례 증명해 보였다. 군사적 실력으로 그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의 내전과 전쟁에서 증명했고, 정치적으로도 무자비한 숙청과 유자들에 대한 탄압을 통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이 괴물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은 그의 강렬한 적의 앞에 선다는 뜻. 관료들은 일단 지레 겁을 먹고 탐욕스런 손길을 늦추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은 왕왕 있게 마련.
주가현에 재직 중이던 이완이라는 현령이 분위기를 모르는 관료 중 하나였다. 그는 조정의 명령을 평소처럼 구호에 그칠 것이라 예단했다. 사실 사치스런 생활을 감당하자면 부패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완은 조정의 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휘하 관헌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걷을 인두세는 특별히 쌀로 받으라고 명했을 텐데, 그걸로 진행했겠지?”
그가 묻자 간사한 염소수염을 단 관헌이 앞으로 나서며 소매를 모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가현의 되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잘했네.”
이완은 흡족한 빛을 보이며 수염을 매만졌다. 보통 세금을 거둠에 있어 정부는 정확한 도량형(단위)을 가지고 징수해야 했다. 역대 황제들도 도량형의 통일을 중요하게 여겨 자, 척 등을 정확하게 잰 다음 각 지방에 내려 보내 기준으로 삼게 했다.
하지만 탐관들은 정부 기준의 도량형을 무시했다. 그들은 조정에서 내려준 됫박은 창고에 고이 모셔두고 자신들이 특별히 제작한 ‘징세용’ 됫박을 가지고 세금을 걷으려 했다.
주가현의 되란 것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보통의 한 되가 1.8리터 정도의 부피를 가진다고 한다면, 주가현의 한 되는 자그마치 5.4리터의 부피를 자랑했다. 세금을 낼 때 이 되를 쓰면 세 배나 더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잉여분은 당연히 탐관의 몫이다.
“거두어들인 물목은 어디에 두었나?”
“계산을 위해 조정의 자, 척을 가지고 다시 정산하고 있사온데, 세 시진이면 대충 정리가 될 것이옵니다.”
“세 시진이라. 이번에 이문은 얼마나 남겠나?”
“인두세야 총액이 제한된 것이라 수입이 크진 않을 것이옵니다. 많아야 은자 천 냥이나 남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현령이 아쉽다는 빛을 보이자 염소수염이 손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하오니 이번에 한 건 더 해치우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요번에 현령 대인의 부친께서 환갑을 맞이하지 않으셨습니까. 현령께서 현을 자애롭게 잘 통치해주신 덕에 백성들이 잘 먹고 사니 부친의 생신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축의금을 걷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이완이 무릎을 탁 쳤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었다. 강요는 아니지만 현령 부친의 생신 축하 명목으로 압력을 슬슬 넣으면 백성들이 알아서 낼 수밖에 없었다. 관과 척을 지면 얼마나 피곤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일전에도 공덕비 건설 등으로 남겨 먹은 경험이 있어 현령은 그 이야기에 구미가 당겼다.
“좋은 생각이네. 그거까지 하면 이번 달에는 은자 이천 냥은 넘게 남겨 먹을 수 있겠어. 아니 그런가?”
“그러실 겁니다.”
“이 정도면 몇 달만 바싹 더 당겨서 목 좋은 현으로 옮길 청탁금도 마련할 수 있지 싶군.”
이완이 웃으며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목도 컬컬한데 모두 기루에 가서 한 잔씩 들지. 이번엔 특별히 내가 사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대인.”
“현승도 수고가 많았네. 이참에 내 따로 수고비를 챙겨줄 것이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탐관들이 미소 띤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부패로 다져진 끈끈한 유대감이 그들의 눈빛을 따라 흘렀다.
현령이 대청을 내려오자 관헌들이 그 뒤로 쭉 섰다. 오늘 한탕 크게 하고 기루로 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발걸음은 가볍고, 어깨는 절로 춤을 추었다.
그들이 무리를 이루어 관청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쾅.
관청의 문이 발길질에 험악하게 출렁거리다 힘없이 뒤로 밀렸다. 이어 수십 명의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당혹스런 광경에 이완이 소리를 높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누구이기에 감히 관에서 소란을 부리는 것이냐?”
그러자 쏟아져 들어온 자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품에서 관인이 찍힌 서찰을 꺼내며 외쳤다.
“조정의 명을 받고 감찰을 진행 중인 감찰관이다. 주가현령 이완. 네놈을 조정의 명을 위반한 부패 혐의자로 보고 추포하겠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뭐, 뭣?”
이완은 그 말에 쇳소리를 냈다. 감찰관이라니?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감찰관이 뜨면 관계에 소문이 퍼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감찰관은 거짓부렁일 것이다.
“감찰관이 온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네놈들은 가짜다.”
“하면 이 관인은 어찌된 것인가? 우리가 조정의 명을 위조라도 했단 것이냐?”
감찰관이 냉랭하게 반문했다.
감찰관은 조정의 부패를 감시하기 위해 행상의 상인들을 ‘감찰역’으로 임명한 오승도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임시 직위였다.
상인들을 이용해 부패한 관계를 응징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탐관들의 허를 찌르기에 충분했다.
이완도 눈이 있어 관인이 가짜가 아니란 것은 알아보았다.
“그, 그건 아니네만.”
“하면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총리대신 각하의 명을 정면으로 거역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감찰관은 오승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무지막지한 폭군이 나오자 이완의 태도도 바뀌었다. 감찰관을 정말 그자가 임명한 것이라면 그는 이번에 잘못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반항해도 결과는 파멸뿐이다. 그냥 순순히 잡혀가는 것이 유리할 듯싶었다.
이완은 입술을 깨문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극적인 세제 개선과 부패 척결은 단시간에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정책 수행에 있어 손발이 되어줄 행상이 있다는 것이 승도와 과거의 실패한 개혁자들의 차이였다.
표면상의 수치만 놓고 보면 제국의 국정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승도는 이 효과가 일시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속적으로 처방을 내리면 그 효과가 영구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승도는 자신의 심복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 논의를 나누었다.
“앞으로 우리 제국은 길어도 사 년. 짧으면 이 년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강이 우리 일에 개입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각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건문이 그 말을 받았다.
제국이 단시간에 ‘극약 처방’을 받고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오승도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시간은 부족하고 갈 길은 멀었다. 지금은 호흡을 느리게 가져가기보다 빠르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
“하오시면 개혁의 속도를 지금보다 빠르고 광범위하게 가져가자는 말씀이십니까?”
호부 대신이 물었다. 승도는 미소로서 그 말에 긍정의 뜻을 보였다.
“그렇습니다.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변화의 폭을 지금보다 넓히려는 것이 이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먼저 관이 장악하고 있는 광산을 민간에 전부 불하할 생각입니다. 개발권은 모두 풀고 염철 전매제도 폐지할 생각입니다.”
재정 면에서 상당한 손실이 올 수 있는 사안이기에 호부 대신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않은 폭탄 같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승도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경제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국가의 세입만 생각하면 이는 손해지만, 이들을 철폐하면 민간 부문의 급격한 성장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경제 규모의 성장은 곧 세입의 증가. 단기적으로 손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국가 재정에서 본전은 나올 것이라고 승도는 생각했다.
“광산을 모두 불하하면 일단 광물에 대한 통제는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잠채(몰래 광물을 채굴)도 성행할 것이고, 반정부 세력이 힘을 키울 근거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반정부 세력이 모인다고 해봐야 우리에겐 막강한 군사력이 있습니다. 제어 가능한 위험입니다. 잠채 역시 문제는 안 됩니다. 광산의 세율을 대폭 인하하고 잠채에 대한 ‘고발 제도’를 실시하면 합법적으로 광산을 운영하는 자들이 늘 겁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광산의 생산을 정부에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승도는 간단히 대답했다. 강주에서 광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해본 경험이 있어 이 부분은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염철제 철폐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소금과 철의 통제를 풀면 그만큼 나라의 세입이 대폭 감소합니다.”
“그 역시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승도는 차분하게 문제점과 이로 인한 이익을 비교하며 자신들의 심복들에게 이해시켰다. 그냥 일을 이렇게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지만 국정 운영은 그렇게 주먹구구로 할 수 없었다.
통치자와 실무 관료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같은 관점에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해야 통치자가 생각한 대로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승도는 이 부분을 경시했다가 제정 시절 한 번 호된 맛을 본 적이 있어 설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 교육 정책을 손보아야겠습니다. 현재의 학문은 너무 이론적인 부분에 치우쳐 제국의 미래를 도모하기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실용적인 학문, 양이들의 문물을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해서 제국의 주요 도시들에 8년 과정의 ‘학교’를 세워 필요한 인재를 길러낼 생각입니다.”
“강주처럼 완전히 양이들의 문물만 배우는 교육 과정으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자들의 반발이 강하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도 생각해 두었습니다. 교육 과정에 ‘도덕’을 강조하는 쪽으로 해서 유자들의 학문을 조금 가르칠 생각입니다. 그렇게 구색을 맞추면 그들도 마냥 크게 떠들진 못할 겁니다. 이쪽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을 보고도 반발한다면 그땐 매를 들어야겠지요.”
승도의 이야기에 건문이 입을 열었다.
“각하, 양이들의 학문을 가르친다면 다수의 교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강주에서는 필요한 인재를 수급했지만 제국 전역에서 이 같은 학제를 밀자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양이들을 구한다고 해도 대륙의 대부분은 강주처럼 양이의 언어에 능통하지 않습니다.”
건문의 지적은 타당했다. 강주에서조차 양이의 언어에 능한 학생들을 충분히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양이 교사들을 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승도가 수염을 매만지며 답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 문제는 강주에서 길러낸 인재들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려 합니다. 거기에 강주 출신(통역용)과 외국에서 추가로 들여올 양이 교사들을 더하면 어느 정도는 구색을 맞출 수 있을 거라 본인은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급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호부 대신이 입맛을 다셨다.
호부 입장에서는 이러한 예산 투자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재정의 수지를 겨우 흑자로 돌려놓았는데 각종 정책 개편으로 도로 적자가 될 판에, 대규모 투자를 하라고 하니 난색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승도는 교육 정책의 변화야말로 이번 개혁의 핵심이라 여겼다.
약소국이던 프리지아가 로망스의 뒤를 물 수 있을 만큼의 국력을 키운 근원이 어디에 있던가? 바로 교육 개혁에 있었다. 그들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기초 교육을 제공했고, 이를 통해 막강한 과학 기술력을 확보했다.
그 어느 국가보다 먼저 확보한 후장식 소총을 비롯한 각종 기술 특허들. 그 원천은 바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보편 교육에 있었다.
신 역시 열강과 대등하게 성장하려면 교육을 손보아야 했다. 그래야 막강한 연합왕국의 압도적인 과학 기술력을 따라잡아 그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여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공포 정국을 형성한 지금이 개혁 속도를 높이기에 최적의 시기입니다.”
정권은 초창기의 강맹함을 잃지 않고 있었고 반대파들을 서슴없이 쳐내며 그 입을 막고 있었다. 현재의 여건이야말로 개혁을 추진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었다.
“각하께서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호부 대신이 승복의 뜻을 보였다. 재정 문제로 염려하긴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행상 출신. 승도의 의중이 재정 문제보다 훨씬 중요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승도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그 입으로 모였다.
“신분제도 손을 봐야 하겠습니다.”
“……!”
지금까지 들은 것도 폭탄선언이었는데 이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신분제를 손본다. 대륙의 수천 년 역사에 일대 획을 그을 발언이었다.
사람들 중 먼저 평정을 찾은 건문이 물었다.
“신분제는 어떻게 손을 보실 요량이십니까?”
“명목상의 신분제는 당분간 내버려둘 생각입니다. 관념적으로 사용되는 실제의 신분, 즉 사농공상의 체계를 없애겠다는 말입니다.”
승도는 직업에 따른 신분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대륙의 뿌리 깊은 관념. 상인을 천시하고 관료를 높게 보는 풍조를 없앤다. 그 말은 실로 무거운 의미를 지녔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호부 대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인들에게 그것은 염원과 같은 일이었다. 승도는 힘 있게 답했다.
“가능합니다. 그 일을 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승도는 손질을 통해 자본가 계급의 지위를 끌어올리고 경직된 관료 사회에 위기감을 불어넣을 생각이었다. 고정된 지위에 안주한 자들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제국을 변화시키자면 이런 것도 모두 바꾸어야 했다.
승도는 밤이 늦도록 심복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개혁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모두 설명했다. 그 구상은 제국을 열강으로 이끌기 위한 거대한 야망의 교두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