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화룡점정 (3)
오승도의 새로운 법령은 또 하나의 폭풍이 되어 대륙을 뒤흔들었다. 염철 제도의 폐지도 실생활에 미친 파장은 적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느껴진 것은 바로 양학의 도입 문제였다.
양학은 과거 일부 관료들에 의해 몇몇 지역에서 시험적으로 연구된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군사 및 기술에 관련된 일부 서적의 번역에 의의를 두었다고 할까.
그런 판에 양학을 전면에 등장시키겠다는 선언은 제국 사회 전반을 크게 격동시켰다.
“조정에서 높으신 나리들이 이제부터 옛 학문 대신 양학을 가르치겠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이겠는가?”
사내가 주전부리를 입에 털어 넣으며 떠들었다.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들에게 학문이야 남의 나라 이야기다. 하지만 천박하다고, 야만적이라고 비웃던 양이들의 학문을 이제 배워야 한다는 말은 흥미가 가는 이야깃거리였다.
“참이다마다. 내 술 지게를 지고 오다가 관청 앞에 붙은 방을 똑똑히 보았다네.”
“허, 그것 참. 세상이 요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이.”
“한잔 들게.”
그들은 독한 술을 주고받으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취두부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이제 양학을 가르치면 나라가 어찌 돌아가게 될지 모르겠네. 도덕도 모르는 양놈 세상이 되려나.”
“양놈 세상이면 어떻고, 유자들 세상이면 어떤가. 밥술만 잘 뜨게 해주면 그만이지.”
“밥술을 떠도 최소한의 도리는 따져야 하지 않겠나?”
밥을 먹고사는 문제는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수천 년간 내려온 관습, 생활 풍속에 대한 문제도 가볍지는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그래도 높으신 나리들이 어련히 알아서 결정하지 않으시겠나. 한 잔 더 받게.”
사내들은 잔을 주고받으며 높으신 분들의 결정에 대한 생각을 미루었다. 그런 이야기는 가끔 술안주로 떠드는 정도에 그쳐야지 깊게 고민해봐야 그들의 머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제국 민중들은 오승도의 파격적인 개혁 정책에 대해 흥미를 가지긴 했지만, 그 본질을 파헤쳐가며 그 득실을 따져볼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혁이 자신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혹은 해가 되는지를 구분할 줄 몰랐다. 그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일부 유자들은 이런 추세에 반발하여 단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국 정부는 미쳤다. 법도를 모르는 무도한 자에게 천자를 보필하게 둘 수는 없다. 일어나자. 일어나서 무도한 역적 놈에게 무엇이 진정한 질서이고 법도인지 가르쳐주자.”
그들은 오승도의 강대한 무력을 알면서도 양이의 학문을 가져와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신분의 지고한 법도를 무너트리려 한다는 이유를 내걸고 봉기했다.
반군은 곳곳에서 거병했다. 미리 연락을 한 듯 그들의 연계는 제법 훌륭했다. 중원을 관통하는 운하의 일부를 차단했고 제국군의 요새도 몇 탈취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란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반란이 파급 효과를 보려면 ‘정보’에 어두운 농민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군대에 끌어들여야 했는데, 이 점에서 제국 정부는 대단히 영민하게 대처했다.
제국 정부는 평시에 선전 공작을 통해 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퍼트리는 한편,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홍보했다. 이를 통해 정부의 시책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관망’을 하게끔 민심을 조절할 수 있었다.
민중을 포섭하지 못하는 반란군은 결국 물 위에 뜬 기름 한 방울이나 마찬가지.
그 세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오승도의 입장에선 잘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립된 반란군은 전광석화처럼 달려온 상승군에 의해 이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승도는 이렇게 반란군을 싹 날려버린 다음 역모 죄를 씌워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 토지를 국고에 넣었다. 이는 본보기를 보이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제국군의 출동에 따른 전비 부담을 만회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 몇 번의 소동을 통해 제국 정부는 뜻하지 않은 부수입을 얻어 재정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승도는 유자들이 좀 더 많이 반항했다면 더 좋았을 거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본보기를 보여주자 상황을 보아가며 움직이려던 자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력과 강철 같은 지도자의 의지에 의해 뒷받침된 개혁은 그렇게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개혁의 걸림돌이 될 자들은 무력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거나 혹은 이미 그 뿌리가 뽑혀 있었다. 열강은 오승도가 깔아준 멍석 위에서 놀기 바빴고, 황실은 그 손아귀에 잡힌 채 숨도 쉬지 못했다.
오승도의 말 한마디는 바로 정책이 되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개혁 실시 석 달.
승도는 겨우 석 달 만에 자신의 정책을 대륙 전역에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책이 실효성을 가지고 효과를 내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일단 ‘실시’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승도는 내정 문제가 충분히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고 이 건을 당분간 자신의 심복들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급한 불을 끈 이상 그가 주목할 곳은 내정이 아니라 외정이었다.
열강의 움직임을 적절하게 관찰하고 그 행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것. 그것이 그가 외정에서 할 일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정보를 조금 더 흘리기로 했다. 연합왕국이 움직이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그 정보는 곧 몇 다리를 건너 려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던 연합왕국으로 넘어갔다.
탁.
공사는 차를 마시다 찻잔을 내려놓고 에버튼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오승도가 려의 실세인 김씨 가문과 혼사를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정확히는 그 여동생의 혼사입니다.”
에버튼이 부언 설명을 붙였다. 공사는 안경 너머로 예리한 빛을 던졌다.
“그 말은 오승도가 려에 대해 포석을 두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아니 그렇습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에버튼이 보기에도 오승도가 제 가문과 려의 유력 가문의 혼사를 주선하는 것은 려에 대한 포석을 두려는 뜻으로 비쳤다. 국혼의 그늘 아래에서 혼사를 은밀하게 추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실상은 려에 대한 영향력을 배가하여 ‘일전’에 드러난 그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동영 정벌이니, 국혼이니 되도 않은 이야기를 신나게 떠든 이면에 숨겨진 본심은 결국 그것이라고 공사는 추측했다. 참으로 놀라운 수가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의도대로 돌아간다면 연합왕국은 패 한 번 내어보지 못하고 려에서 손을 떼야 했다. 려에 압력을 행사해봐야 신과 려가 무역에 대해 합의를 하고 ‘그 특산품’을 독점 거래하기로 입을 맞추어 버리면 공격해봐야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공사는 이리저리 더 잴 시간이 없다고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하면 오승도의 속셈에 끌려가선 곤란합니다. 이자는 분명 정보를 적당히 흘려 우리가 려를 압박하게 만든 다음, 시기를 골라 갑자기 끼어들어 이익을 챙기면서 려에 대한 영향력도 키우려들 겁니다. 거기에 순순히 넘어가선 안 됩니다.”
“정보 수집은 마치고 행동으로 넘어가기로 결심하신 것입니까?”
“더는 미룰 수가 없을 듯합니다.”
공사가 결심을 굳히자 에버튼도 힘이 났다. 오랜 시간 바라 마지않던 기회가 다가온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동방 함대에 보고하여 함대 출동을 요청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국에 그리 많은 군사력은 필요 없고, 분 함대(정규 함대가 아닌 소규모 지역 함대) 하나를 동원하면 충분합니다. 이곳 선진에 있는 함대와 해병으로 위협하도록 하지요.”
“그걸로 충분하겠습니까? 그래도 나라 하나를 원정하는 일입니다, 각하.”
에버튼은 다소의 우려를 내비쳤다. 과거 나라도 아닌 강주 하나에 연대 병력이 패주한 일을 상기하면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동방 국가라고 해서 지나치게 경시하는 것은 위험했다.
무관의 반문에 공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우리가 정복전을 수행할 것도 아니고.”
공사는 이번 군사 작전의 선을 그었다. 그제야 에버튼도 수긍의 빛을 보였다.
***
려 왕조의 군사력은 ‘병적’만 놓고 보면 대단한 규모였다. 유사시 징집할 수 있는 장정만 백만을 헤아렸다. 하지만 농병일치에 기초한 기존의 군제를 용병제로 바꿈으로써 그 군사력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왕조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백만’이라는 과거의 허무맹랑한 숫자의 서 푼에도 못 미쳤다.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을 대규모로 유지하기에 나라가 너무 가난한 탓이었다.
그 실제 군사력은 약 이만 오천. 이 가운데 태반이 각 지방에 분산되어 있어 중앙 정부가 유사시에 쓸 수 있는 군대는 팔천에 지나지 않았다. 팔천. 일국의 중앙 군사력으로 보기엔 너무나 작고 볼품없는 군대다.
하지만 질까지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낡긴 했지만 장부상의 무기 수량은 모두 갖추고 있었고, 일정한 기간마다 훈련도 실시했다. 신 정도로 군대가 썩어 문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외부의 침입이 있다면 그에 맞설 수 있도록 병사들의 정신무장도 되어 있었다. 서역의 기준에서 보면 오합지졸의 잡병들이지만 과거 신의 군대에 비하면 여러모로 나았다.
누런 갑주를 갖추어 입은 병사들이 두 줄로 도열하여 예를 표시했다. 수도로 통하는 주요 요충지, 강도를 지키는 강도영의 정예 장졸들이 예를 차리자 그 앞에 선 외국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 외국인은 오승도의 사자로서 려를 방문한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오승도의 사촌으로 그를 위해 이미 여러 번 먼 길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북적과도 접촉했었고 고리타분한 조정 관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 ‘외교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을 맡았다.
오경석은 자신의 앞에 질서 있게 정렬한 려의 병사들을 보며 좋은 인상을 받았다. 정예 상승군만큼은 아니지만 이들은 꽤 잘 훈련된 듯했다.
그 생각처럼 이 강도영의 병사들은 대단히 잘 훈련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수도 방위의 최전선에 선, 중앙군의 핵심으로 려 왕조의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었다. 이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는 자는 김씨 가문의 혈족인 김응서란 사내였다.
응서는 이런 국방의 요직을 담당하기에 그 경륜이 턱없이 부족한 자였지만 그 출신 덕분에 이 높은 자리를 맡게 되었다. 김씨 일가 입장에서도 수도 근방에 강력한 부대를 자신들의 혈족이 장악하고 있어야 안심이 되니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응서가 웃으며 오경석을 향해 양 손을 모아 예를 표시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강도영의 지휘관 김응서입니다.”
“오씨 일문의 오경석입니다.”
오경석은 응서의 인사에 답하고는 읍을 한 손을 풀었다.
“대인께서 바다를 건너오실 거라고 미리 기별을 받았다면 준비했을 것인데, 연락을 주지 않고 오셔서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혹 결례가 된다면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응서가 기별 없이 온 것에 대해 섭섭하다는 빛을 내비쳤다. 그는 자신의 가문과 오씨 가문이 곧 혈연 동맹을 맺을 거란 말을 들었던 터라, 이들이 소식도 없이 불쑥 올 것이라곤 생각도 못 하던 차였다.
“아닙니다. 이쪽이 무례한 일입니다. 불청객이 어찌 대접에 불만을 갖겠습니까? 그저 맞아주신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입니다.”
“그리 여겨주시니 다행입니다. 대인께서는 곧장 도성으로 가실 생각이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곳 강도에서 수속을 밟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법도라 들어 잠시 길을 머물렀을 뿐, 시일을 다투어 움직여야 할 듯싶습니다.”
“서두르실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예. 귀국 조정에 급히 상신드릴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오경석의 대답에 응서는 수염을 매만졌다. 여기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관리의 몸으로 그럴 수야 없는 일이었다.
그가 가지고 왔을 이야기는 추후 가문에 들렀을 때 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응서는 주위에 명해 붓과 벼루, 관인을 가져오게 했다. 도성까지 배를 타고 올라갈 때 지방관들의 문정에서 제시할 통행증을 발급해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아랫것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보고 있던 오경석이 한마디 건네었다.
“대인, 이 사람이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 호기심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어렵게 생각 마시고 편히 물으시지요.”
응서가 흔쾌히 답하자 오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강도의 군마는 제법 잘 갖추어진 것 같은데 군세가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삼천 정도 됩니다. 모두 철포를 귀신처럼 다루는 병사들이지요.”
응서가 자못 자랑스럽다는 투로 대답했다. 유지와 훈련에 막대한 돈이 드는 철포병을 삼천이나 보유하고 있다면 확실히 자랑할 만했다. 일개 지방관이 보유하기엔 과한 병력이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려 정도의 소국에서는 정권을 도모할 만한 전력. 김씨 가문이 손에서 놓지 않을 만했다.
응서가 자랑스럽게 강도영의 전력에 대해 떠드는 동안, 오경석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머지않아 연합왕국이 원정을 온다고 가정하면 그 침공군의 규모는 해병 한 개 대대 병력 정도일 터. 그만한 군세를 강도에서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오승도의 지시를 받고 왔다. 승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만간 연합왕국이 려를 도모하려 들 것입니다. 그때 가능하면 연합왕국이 큰 피해를 보고 첫 원정에서 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려가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되어 있지 않다면 방어 태세를 단단히 갖추게 하세요.”
그 말이 다소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어 오경석은 다시 물었다.
“연합왕국이 쳐들어온다면 어디를 방어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승도는 지도에서 한 지점을 쿡 가리키며 말했다.
“강도를 지키게 하면 됩니다. 연합왕국의 지휘관들의 눈이 붕어가 아니라면 그 수도를 단시간에 도모할 수 있는 곳을 고르려 할 겁니다. 지상전을 피하려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왕국의 목줄을 죌 수 있는 위치를 장악하려고 해도 강도는 최적의 입지를 가졌습니다.”
“하면 그 대비는 어느 정도나 하게 해야 합니까?”
“려의 군대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얼마나 배치해야 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방어 병력의 규모를 조언하도록 하세요. 적 병력은 어림잡아 보병 일개 대대로 추산하면 충분할 겁니다. 우리 군대로 치면 상승군 1.5개 대대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오경석은 승도의 말을 곱씹으며 응석의 말을 끊었다.
“준비는 참으로 잘된 것 같습니다. 하면 유사시에 강도를 지원할 수 있는 군대는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말에 응서는 조금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강도의 병력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도 국가 기밀을 유출하는 일인데, 방위의 핵심에 해당하는 병력 지원까지 떠드는 것은 좀 곤란했다.
아무리 혈연 동맹으로 맺어질 사이라도 호의는 적당한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응서가 난색을 표하자 오경석은 대답을 더 요구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응서는 통행증을 만들어 건네주며 말했다.
“대인,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지 못한 부분을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희도 입장이란 것이 있어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제가 대인의 입장이라 해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하면 이 통행증을 들고 도성으로 곧장 가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는 길에 지방관들이 몇 차례 문정을 할 것입니다. 그 문정은 다 받으셔야 합니다.”
응서는 설명을 덧붙였다. 려 왕조의 강역 안에 외국 선박이 드나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해당 지방관의 관할 구역에 이양선이 나타났을 때는 반드시 문정을 실시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국가의 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 명시되어 있어 지방관들로서는 이 법도를 지켜야만 했다.
응서의 설명을 들은 오경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겠지만 이 통행증이 있으면 도성으로 가 려의 조정 신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오경석은 허리를 굽혀 응서의 도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대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 도움, 제국에 오실 때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별말씀을. 이제 합족을 하여 든든한 맹우가 될 입장이 아닙니까?”
응서의 너스레에 오경석은 미소로 응대했지만 그 속생각은 달랐다.
‘합족.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동맹에 지나지 않아. 우리 총리대신 각하께 그런 관계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지.’
오경석은 응서의 배웅을 받으며 배로 돌아갔다.
잠시 후 행상의 범선은 돛을 펼치고 미끄러지듯 강도를 출발했다. 제국이 날려 보낸 불길한 전쟁의 전령. 그 까마귀는 황룡의 깃발을 흔들며 려의 심장부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