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화룡점정 (5)
풍악이 울렸다. 황궁 가운데로 난 어도를 따라 붉은 비단이 깔렸다. 그 위로 흰 면사를 쓴 소녀가 눈을 내리깐 채로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라 스무 명의 여자들이 뒤를 따랐다.
어도의 좌우로 선 문무백관들이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붉은 비단을 밟으며 궁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녀는 과거라면 감히 이 신성한 대지에 발을 붙일 자격도 갖지 못했을 신분이었다.
사농공상의 말석.
천한 상인의 딸로 태어난 여자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왕공 귀족의 자제들조차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는 성역에 그런 신분이 들어온다는 것부터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수식해주는 단 하나의 이름이 그 파격을 가능하게 했다.
제국 총리대신 오승도.
제국 최고의 권력자로 조정과 군을 한 손에 거머쥔 사내가 바로 그녀의 배경이요, 이 혼사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이유였다.
검은 관복을 입은 거인은 꽃신을 조심스레 옮기는 여린 소녀의 모습을 느긋하게 보았다. 소녀는 주변의 무수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걸음 하나, 손짓 하나도 느릿느릿 행하고 있었다. 조용하게 장원에서 살던 아이에게는 매우 불편한 세상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혼사를 물려주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야. 이 혼사는 가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승도는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여동생을 일별했다. 소녀는 차갑게 느껴지는 제 오라비의 눈빛을 느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오씨 가문의 여식이 가까이 다가오자 높은 단 위에 머물러 있던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녀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아름다운지 혹은 성품이 착한지 따위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녀가 오승도와 사이가 좋은가 하는 부분이었다. 그 오라비와 사이가 좋다면 황실에서 그의 운신이 보다 어려워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것만은 곤란했다.
“폐하, 단 아래로 내려가시지요.”
황제의 곁에 있던 환관이 고했다. 소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 아래로 한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지금은 역적의 뜻대로 혼사를 치르지만 그 뜻대로 호락호락 휘둘려주지 않겠다고.
소년은 단을 다 내려온 다음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앞에서 멈춘 소녀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키는 소년보다 조금 더 컸고 피부는 눈처럼 희었다. 면사 너머로 표정을 알 수 없는 소녀가 미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이가 열셋이라고 했으니 소년보다는 한 살이 더 많았다. 중원에서는 예로부터 남자보다 여자의 나이가 서너 살 위인 혼사를 최고로 보았던 터라 소녀가 연상인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 예법에 따라 소년이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민간의 풍습과 달리 지존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옥좌 위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 군주의 법도였다.
소년이 손을 내밀자 소녀가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소년은 그 손을 퉁명스럽게 잡아채고는 그녀를 단상 위로 인도했다.
소년은 옥좌 옆에 미리 마련된 의자에 소녀를 앉히고 자신도 옥좌에 앉았다. 소녀는 만인의 눈이 집중된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혼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행사에 참석한 왕국 공사 하워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거창한 제전이 대내외에 보이기 위한 행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승도의 권력을 만방에 과시하는 동시에 그 권력의 지반을 다지는 작업. 이 일이 마무리되면 오승도 정권은 이전의 정권 못지않은 탄탄한 지반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공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혼사를 축하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앞으로 나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한 혼사임에도 불구하고 북경에 상주하고 있던 외국 외교사절들과 ‘인질’ 격으로 머무르고 있던 번국의 관료들, 그리고 제후들이 참석하여 모양새는 과거 어느 때의 황실 행사에도 뒤지지 않았다.
예복을 차려입은 사절들이 차례로 들어와 선물을 바치고 황제에게 경의를 표했다. 공사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에버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연합왕국에서 폐하의 혼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요.”
환관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동방에서는 허례를 좋아하여 수사에 과장을 넣기 좋아했다. 수만 리 바깥의 연합왕국에서 황실의 혼사 따위를 어찌 알겠는가? 그저 공사가 왕국을 대표하여 참석했을 따름이다.
더구나 신의 번국을 침공할 군대까지 보낸 상태라 ‘축하 사절’을 보낼 입장도 못 된다. 신에서 당장 축객령을 내려도 시원찮을 사절인 셈이다.
공사도 자신이 썩 좋지 않은 방문객임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점을 의식했기에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힌 채 예를 차렸다.
“폐하, 저는 연합왕국의 여왕 폐하와 국민들을 대표하여 황제 폐하와 신 황실의 경사에 축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무궁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연합왕국은 이 혼사를 통해 신이 안정과 번영의 길로 나아가 지난날과 같은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 혼사가 덕과 풍요가 함께하는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저희의 자그마한 선물을 바치겠습니다.”
공사가 어느 정도 수식된 인사를 마치고 손짓하자 에버튼이 미리 준비한 궤짝을 앞에 내려놓았다. 궤짝 안에는 상아로 만든 각종 장난감과 시계가 들어 있었다.
황제의 나이를 고려하여 공사가 나름대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단시간에 준비하기에는 쉽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언제고 한 번은 쓰일 거라 생각하여 미리 조달해둔 덕에 이리 쓰이게 되었다. 공사의 준비성이 빛을 본 대목이었다.
그의 선물에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 승도를 난처하게 만드는 자들이라 그렇게 여기는 듯싶었다.
공사가 선물을 바치고 물러나자 승도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오씨의 힘을 확실히 보이고자 했다.
소년은 ‘역적’이 앞으로 나오자 이맛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 옆에 있던 소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이의 표정에서 자신의 결혼 생활이 편치 않으리란 것을 예감하고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승도는 단상 앞에 선 다음 황제를 향해 고했다.
“폐하, 황실의 경사에 저희 오씨도 예와 성의를 표시하고 싶사옵니다.”
“오씨 가문에서 말이요?”
“그러하옵니다. 궤짝을 가지고 들이도록 하세요.”
승도가 명을 내리자 오씨 가문의 가솔들이 커다란 궤짝 여러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궤짝이 내려지자 승도가 그것들을 열게 했다.
그 안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반짝이는 빛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광채가 가시고 나자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린 궤짝 안에는 은으로 만든 칼과 총이 잔뜩 들어 있었다. 총과 칼!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나왔다.
무기는 황궁 안에 감히 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총과 칼을 본 황제와 환관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병기가 주는 의미는 간단했다. 오승도가 원한다면 이 성역에 그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들여올 수 있었다. 군대라도 말이다.
이 물건들의 등장은 황실의 권위와 법도보다 오승도의 권력이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들은 도대체 무엇이요?”
“폐하의 권위가 굳건하게 반석에 서시길 원하는 작은 정성이옵니다. 칼은 폐하의 힘을, 총은 서역 문물을 수용하여 신의 국세를 떨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가 이것들을 가져온 뜻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건 황제도 잘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를 추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죄를 추궁하는 것은 힘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황제에게는 오승도의 이 무엄한 행위를 꾸짖을 힘이 없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후 하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황궁에 무기를 들여와도 아무도 입을 열 수 없다니. 이것이 오승도가 가진 권력이란 말인가?”
오승도의 무기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그 권력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아직 승도의 지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던 뻣뻣한 자들조차 이 경악에 찰 광경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오승도의 힘은 수백 년 황실을 우롱하고도 남을 만큼 막강했다. 그 정권은 이미 그런 행동을 뒷받침할 정도로 반석에 놓여 있었다.
“신의 충성을 받아주시옵소서, 폐하.”
황제는 입술을 질끈 깨물다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지참금이라면 받아두지요.”
“감사합니다, 폐하.”
승도는 웃으며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소년은 그 넉살 좋은 광경을 보며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으음.”
이날 혼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끝났다. 하지만 혼사의 주역은 황제가 아니라 오씨였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오씨의 천하를.
***
밤이 깊었다.
기나긴 행사로 떠들썩한 구중궁궐에도 적막이 찾아왔다. 금남의 구역인 내궁은 외부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까닭에 침전에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황족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대기 중인 궁녀들 몇이 근처에 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소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긁적이다 침상에 털썩 앉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다소곳하게 앉은 소녀를 보다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오씨의 여자라고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하지만 소녀를 때렸다간 문제가 생길 거란 것 정도는 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바깥의 궁녀들은 바로 오승도의 눈과 귀이고, 그 시선을 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책잡힐 일은 가능한 한 만들지 않은 편이 좋았다. 이럴 때는 연씨를 불러 그 품에서 잠에 드는 편이 좋을 텐데, 첫날밤을 소박 놓았다간 또 문제가 될 테니 그리할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짜증나는 여자였다. 황제는 술잔을 내려놓고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무거운 가채를 쓴 채 자신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다.
소년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환관이 가져다 놓은 무화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과육을 맛보며 그는 이 불쾌한 시간을 잊으려 했다. 그가 달달한 과육의 향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소년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날 불렀나요?”
“네에.”
소녀는 수줍은 듯 말끝을 흐렸다. 소년은 그제야 과육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라도.”
“저, 제 가채를 좀 내려 주셨으면.”
가채는 경우에 따라 수 킬로그램에 달할 정도로 무게가 나갔다. 여린 목으로 가채를 지탱하는 것은 그래서 상당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소녀가 무심한 남편을 향해 먼저 말을 건 것도 결국 이 고통을 참기 어려워서였다.
“가채를 내려달라?”
“네에.”
“그건 혼자서 해도 되지 않나요.”
황제는 못마땅하다는 듯 대꾸했다. 정치적으로 그녀를 잘 다독여 제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에 조금은 있었지만, 오늘 혼사에서 오승도가 보인 작태를 보니 그럴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렸다.
정치적으로 단수가 높았다면 그런 무례야 웃으며 털어 넘겼겠지만, 아직 그는 어렸다. 소년에게 노회한 정치가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오나 소녀가 직접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
소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소년의 억센 목소리가 끼었다.
“그리 법도를 잘 아는 집안에서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른답니까?”
“폐, 폐하.”
황제가 노여워하는 듯하자 소녀는 금세 창백해진 얼굴이 되었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그녀로서는 이 상황에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법도도 모르는 무도한 집안에서 났으니 혼자 가채를 내려도 문제될 것은 없을 겁니다. 혼자 하세요.”
소년은 차갑게 말했다. 취기도 오른 터라 평소에는 쉽게 하지 않았을 강한 언사도 나왔다.
“소, 소녀는 법도를 모르지 않사옵니다.”
“그래요? 그대의 오라비는 그러지 않은 것 같던데요.”
황제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하오나.”
소녀가 난색을 표하자 황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되었어요. 시끄러우니 이만 자도록 하세요.”
황제의 말에 소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가채를 한 채로 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것을 이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목은 벌써 부러지기 직전이라고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소년은 먼저 침상에 올라가 누워버렸다. 그가 자신에게 아예 신경을 꺼버렸다는 것을 안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혼사를 치르며 예감한 것이긴 했지만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스러웠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인지 쇠 비린내가 입 안에 풍겼다. 소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조금이라도 피로를 덜 수 있는 자세로 침상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데 침전의 문이 열리더니 궁녀 몇이 조용히 들어왔다.
소녀는 손으로 얼굴을 만지다 인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세요?”
“쉿. 조용히 하세요, 마마. 폐하께서 깨시겠어요.”
“아.”
소녀는 그제야 얼른 입을 다물었다. 궁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녀를 부축해 침상에서 멀리 떼어 놓았다. 그들은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마마, 폐하께서 아직 가채를 벗겨주지 않으셨는지요?”
“네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가 손을 보아드리겠습니다.”
궁녀들이 얼른 머리로 손을 가져가자 소녀는 놀라며 손사래를 저었다.
“가채에 손을 댈 수 있는 건 오직 폐하만 가능하신 일인데.”
“괜찮사옵니다. 총리대신 각하께서 허락하신 일이옵니다.”
궁녀들이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오라버니께서요?”
“예. 그러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궁녀들은 승도가 문제를 막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승도는 황제가 여동생의 가채를 벗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정략혼에 내보낸 여동생에 대해 남이나 다름없게 여기고 있긴 했지만 인간적인 동정심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첫날부터 곤욕을 치를 여동생을 위해 약간의 배려를 해주기로 했다.
궁녀들을 보내 가채를 벗기게 한 것이 그중 하나였다. 그는 여동생이 밤새 잠도 못 자고 목이 부러질 것을 걱정하며 지내는 처지는 면하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 배려가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배려를 통해 그녀를 ‘지옥’에 밀어 넣은 데에 대한 원망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노회한 정략가는 자신의 감정조차 정치적인 이해득실과 결부하여 사용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은 침전이 불편하시면 미리 준비한 처소에서 주무셔도 된다고 하셨사옵니다.”
“그러면 폐하께서.”
“폐하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천녀가 폐하께 사정을 고해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건.”
소녀는 그 배려(?)를 거절하려다 입술을 오므렸다.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던 남편과 같은 방에서 긴 밤을 보내는 것은 나름대로 무서운 일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오라비의 배려를 받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처소를 옮기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요.”
소녀가 머뭇거리다 대답하자 궁녀들이 따라오란 시늉을 했다.
소녀는 잠이 든 채 비단금침을 당겨 덮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지방을 바라보았다. 저 선을 넘으면 자신의 남편이 된 소년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란 것 정도는 예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년에게 순종하며 살기에는 그가 보여준 냉랭함이 너무 컸다. 소녀는 망설임을 끝내고 궁녀들의 뒤를 따라 침전의 문을 넘어갔다.
황제로선 오승도의 ‘쇼’ 한 번에 분기를 잠시 노출했다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올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을 황후를 확실하게 승도의 패로 넘겨주었다. 가뜩이나 불리한 입장에 있는 황제로선 좋지 않은 악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