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망라 (2)
쇠붙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에 받친 함성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굳건한 전의로 무장한 적의 공격에 붉은 코트들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예상하지 않은 포격에 이은 돌격으로 혼란스런 상황에서 벌어진 난전은 그들의 전투력을 상당히 반감시켰다.
금빛 수실이 칼에 맞아 떨어지고 빛나는 훈장이 바닥을 굴렀다. 소위는 권총을 꺼내 달려드는 적을 쏘아 쓰러트리며 악을 썼다.
“야만인들 따위에게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빛나는 왕국의 명예다. 죽여라!”
총성과 고함 소리로 그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자 소위는 옆을 달려가는 기수의 깃발을 빼앗아 힘껏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장교가 선두에 서서 사기를 높이는 것은 왕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고위 지휘관이 위험을 감수하며 군의 사기를 높였다. 에우로페의 전통이자 연합왕국 지휘관들의 미덕이기도 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교가 솔선수범하여 앞으로 나서자 잠시 당황하던 붉은 코트들도 이내 기세를 되찾았다.
그들은 소위를 앞에 두고 칼을 휘두르며 반격을 개시했다. 체격이 크고 힘이 좋은 붉은 코트들이 흐름을 되찾자 누런 군복들의 기세도 이내 주춤해졌다. 맹호처럼 달려들던 자들이 하나둘 쓰러지자 나머지도 차츰 뒤로 밀려났다.
시체가 쌓이고 비명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저항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빌리는 왕국의 사자기를 휘둘러 달려드는 적병 하나를 쳐서 쓰러트리고는 그 앞에서 칼을 휘두르던 적장을 향해 나아갔다.
아까 대포를 쏘기 전 미소를 보였던 늙은 장수였다.
진무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양이를 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날카로운 대도를 곧추세운 장수의 기세에 소위도 권총을 치우고 칼을 뽑아들었다.
둘은 그대로 매섭게 쇠붙이를 부딪쳤다. 충격의 순간 힘과 체력의 차이를 이기지 못한 늙은 장수가 두 걸음을 물러섰다. 빌리는 자신의 우세를 확신하며 있는 힘껏 상대를 밀어내며 확보한 공간으로 발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힘이 실린 발길질에 진무사가 균형을 잃고 자빠졌다. 그 위로 소위가 달려들며 칼을 내리쳤다. 진무사는 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팔이 반쯤 다치고 말았다.
흥건한 선혈이 두터운 갑주 사이로 흘러나왔다. 피 칠을 한 채 숨을 헐떡이는 적장을 향해 빌리가 외쳤다.
“항복해라!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그 외침에 진무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말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의사소통은 되지 않아도 상대의 몸짓만 보아도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항복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부패하고 썩은 군대라 할지라도 강도의 군대는 지방의 군기 빠진 자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수도 방위의 첨병으로서 언제나 날카롭게 다듬어진 정예였고, 충분한 전의를 유지할 만큼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그러니 항복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진무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 대신 성한 팔로 칼을 고쳐 잡으며 일어나려 했다. 상대가 끝까지 전의를 보이는 것을 본 소위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부상한 적을 죽이는 것은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명예로운 항복은 모두 받아주는 것이 왕국의 전통. 그 전통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니 기분이 썩 나빴다. 하지만 전쟁은 기분이 좋고 나쁨을 따져가며 하는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소위는 권총을 다시 꺼내 일어나려는 적장의 머리를 향해 쏘았다.
저항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일부는 팔다리에 총을 맞아 바닥을 기면서도 돌멩이를 던져가며 적의를 표시했다. 그 끈질긴 투지에 왕국 장교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지만 그 저항에도 끝은 있었다. 해병들이 피를 피로 씻는 전투를 벌인 끝에 저항은 완전히 멈추었다. 교전 개시 사십여 분 만의 일이었다.
해병대는 사자기를 성루에 올리고 자신들의 승리를 해군에 과시했다.
사상자는 약 이십여 명. 압도적인 화력과 조직력을 고려하면 과한 숫자의 피해였다. 최초 공격에 동원된 사백 명의 해병 가운데 5퍼센트의 손실을 본 셈이다.
이만한 피해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면 향후 전망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해병 장교들은 피와 시체가 깔린 성내의 전경을 둘러보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영감, 양적들이 남파 진을 손에 넣고 계속해서 북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옵니다.”
응서는 자신의 앞에 도착한 전령의 보고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름대로 방어를 시작할 시간 정도는 벌 것이라 예상했는데 전혀 그러질 못했다.
양적들의 전투력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풍문으로만 들어온 양이들의 능력은 ‘못 싸울 것은 없다.’ 정도였지만 실상 겪어보니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응서는 강도 지도를 굽어보다 객원으로 머물러 있던 경석에게 물었다.
“대인,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혹 총리대신 각하께서 양적들을 상대하시며 부리신 계책 같은 것이 있으시다면 언질을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양이들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방법을 알 것이다. 응서는 그리 생각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경석은 그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승도가 대단한 인간인 것은 사실이나 보지도 않은 곳에서 계책을 만들어 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리에 필요한 조건 정도는 만들 수 있어도 전투 자체를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벌써 세계를 정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경석은 그리 이야기를 하려다 승도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어 한마디 해주기로 했다. 어려운 건 아니고 간단히 써볼 만한 방법은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계책이 하나 있긴 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응서가 관복자락을 바로 했다.
“속임수를 쓰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속임수라니요?”
응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반문했다.
“우리 총리대신 각하께서는 적이 원하는 것을 이용해 속이는 일에 능하셨습니다. 양적이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도를 차지하는 일이지요.”
응서가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을 하자 경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강도를 차지하려면 강도의 동쪽을 따라 올라와 요새의 포대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 대포를 없애는 것이 양적이 원하는 일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바로 그 점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요새가 무용지물이라고 보이게 하면 양적을 간단히 속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포를 빼서 양적을 속인다?”
응서는 그 말에 감이 오는 것을 느꼈다. 상당수의 대포를 미리 빼둔다면 양적들은 포대가 무력화된 것으로 여기고 북쪽으로 올라가버릴 것이다. 그들이 지나가고 난 다음 대포를 포대로 다시 배치시키면.
‘뒤를 따라 올라올 양선을 칠 수 있다. 양선을 깨트리면 자연히 양적들은 크게 당황할 것이다. 자연히 적은 그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불리한 지형이라도 기꺼이 감수하고 공격을 해올 터. 그때 승부를 본다.’
응서는 금세 결론에 도달했다. 범장이긴 해도 그도 병법을 모르진 않았다. 숟가락으로 떠먹여준 것 정도는 받아먹을 머리는 있었다.
“훌륭하신 계책입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희 총리대신 각하의 병법을 응용하여 생각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경석의 말에 응서는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단시간에 요새를 깨트릴 정도로 가공할 화력과 힘을 가진 적을 상대할 방법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았다. 양적이 아무리 강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불시에 공격을 받으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좁은 해협에서 운신의 여지도 없이 두드려 맞는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닙니다. 대인의 한 말씀에 눈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살았습니다.”
응서의 과장된 말에 경석은 미소를 보였다. 물론 양이가 패퇴할 것이라 여겨 웃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석년에 오승도가 양적을 상대로 얼마나 고전했는지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이 싸움에서 양적이 패할 리는 없다. 운이 따라준다면 각하께서 바라는 최상의 결과가 나올 터. 일이 그리되길 바라야겠지.’
경석은 나름의 셈을 해보며 응서가 수하 장수들에게 명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
지배력을 확고히 한 승도는 자신의 다음 구상을 구체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강주 무관학교 등을 나온 자들을 군대에 등용하는 한편, 상인 출신들을 대거 관계에 진출하게 했다.
기존의 학문을 갈고닦은 관료 계층을 대신할 ‘합리주의’ 실무자들의 전면 등장. 이 조처는 강고한 신분제 질서에도 굉장한 파장을 가져왔다. 예의 승도가 생각한 신분제의 붕괴, 바로 그것이었다.
“상인 따위에게 관직이라니?”
유서 깊은 관료 사회에서 관료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미 감찰관 제도를 통해 지방 관계에 폭격을 가한 승도에 대한 불만도 강했던 터라 관료 사회의 저항은 집단적으로 나타났다. 일부는 집단 태업을 벌이기도 했고, 상당수는 집단 사직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승도의 대응은 단호했다.
“제국 정부는 관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는 사직을 모두 받아들이고 태업을 벌이는 자들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했다.
승도가 이토록 과감한 시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제국 관료들이 ‘행정 실무’를 실질적으로 담당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제국 민중과 실제적으로 접촉하는 향촌 사회의 공무는 대부분 관품도 없는 지방의 서리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들 비실무 관료들은 군살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들이 버티고 있는 한 실무와 관련된 영역에 배분해야 할 지원과 배려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이렇듯 관료에 대한 철퇴를 거듭 휘두르자 과거 시험에 대한 열기는 지난 십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우가 박해지니 인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수십 년간 과거를 지망해온 자들조차 세태가 변화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큰 비용이 드는 과거시험을 망설이는 판이니 그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대신 상업에 대한 열기가 유례없이 높아졌다. 누진세 등으로 거상들에게 일부 부담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기존에 부당하게 거두어지던 황실의 특별세 등이 모두 폐지되어 부담은 되레 적어져 있었다.
거기에 외국 상인과의 재판 등에서도 정부가 나서서 이를 적극 지원하며 국내 상업 보호를 부르짖으면서 ‘상인’도 할 만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호랑이 아가리를 향해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하던 행상이 ‘최고의 일자리’로 불리게 되었고, 소금쟁이라고 불리던 염상이 ‘안정된 일자리’로 대접받았다.
관료와 상인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변화하면서 제국 사회 내부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능한 인재들도 기존의 과거만을 바라보던 구조에서 탈피해 상업으로의 진출을 고민했다. 그 변화를 대변하듯 지방 곳곳에 상인 출신 관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쉬, 물러가거라. 진대인 행차시다.”
“쉬.”
몰이꾼들이 추임새를 넣으며 사람들을 쫓았다. 구경꾼들이 거리 주변으로 물러난 채 천천히 다가오는 가마를 보며 수군거렸다.
“진 대인이라면 얼마 전까지 비단 장사를 하던 그분 아닌가. 한데 그분이 왜 가마를 타고 오는 겐가?”
“소문 못 들었나? 진 대인이 이곳 현의 현승이 되었다고 하더군.”
“현승? 상인이?”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현승은 현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장관의 자리다. 현령 다음의 요직으로 권력 서열 2위의 자리라 할 수 있다.
그런 자리를 상인이 앉는다? 명예직은 줘도 실직은 주지 않던 기존 관례에 비추어보면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총리대신 각하도 상인인데 뭘 그리 놀라나?”
“아니 그래도 총리대신 각하야 일세의 영웅이시니 그렇다 쳐도 평범한 상인들까지 관직에 오르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나?”
“그래도 보고 있지 않나.”
“세상 참 달라졌군. 상인이 관리라니.”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가마를 보았다.
흔들거리는 가마 안에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고 있던 살찐 사내가 창을 슬쩍 올렸다. 그는 금의환향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이들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천한 상인이라고 깔보던 놈들도 이젠 비웃지 못할 거다. 건방진 유자 놈들. 상인이 관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배가 아플까.’
진씨는 그 생각에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간 천한 돈벌레 운운하며 온갖 모욕을 주고 횡포를 부리던 것들 앞에서 목에 힘을 줄 생각을 하니 어깨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게 다 오승도 각하의 은덕이시지. 그분이 아니셨다면 우리 같은 천것들이 관리가 될 꿈이라도 꾸었겠나. 그분이 계셔야 우리가 앞으로도 어깨에 힘을 주고 살 수 있지. 암. 그분께서 천년만년 권좌에 계셔야 우리 뒤가 안전해지는 법이야.’
진씨는 그리 생각하며 가마에 몸을 묻었다.
새로 관리가 된 이들 상인 출신들은 이처럼 오승도 정권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기존 관료들이라면 반감을 가질 일도 이들은 우호적인 눈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자들이 지방으로 대폭 투하가 되면서 정권의 정책 시행에 반감을 품을 만한 지방 유지와 단련의 활동은 사전에 제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권 차원에서 지방 안정을 목적으로 둔 포석이었다.
승도는 정치적으로 ‘우군’을 만들어 이익을 나누어주는 데 상당히 능했다.
제정 시절에는 자본가와 귀족에 파멸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그들을 괴멸시키고, 그 대신 중산층의 세 부담을 줄여 그들의 지지를 이끌었다.
이곳 신에서는 거꾸로 지주와 관료를 압박하고 대신 상인 계급을 자신의 절대적인 지지층으로 만드는 정책을 취했다.
일견 과거의 정책과 비슷한 면이 있다면 상류층을 적으로 하고 중류층을 우군으로 삼는다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오승도가 기존 사회의 지배계급을 증오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들을 절대 악으로 여겨서도 아니었다. 전적으로 사회의 중간 계급을 우방으로 만드는 편이 자신의 입지와 정책 방향 유지에 가장 유리해서였다.
진씨의 가마가 관청 앞에 도착하자 미리 도열한 서리들이 눈도장을 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중간 계급 출신인 서리들은 새로운 상전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인 출신 상전이든 관료 출신 상전이든 그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관료 출신들이었다.
관료 출신들은 승이 상인 출신이란 사실에 기가 막혔는지 인사도 나오지 않았다. 진씨는 가마에서 내려 관병과 서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다른 관리들은 인사를 나오지 않았는가?”
답이 보이는 물음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물은 것은 자신도 관료라는 사실을 관병들에게 인지시키는 행위다. 상인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한 만큼 주어진 권위를 챙기는 일에 능했다.
“예, 대인.”
“현령 대인께선 어디 계신가?”
“정무를 보고 계십니다.”
관례적으로 승이 부임하면 현령이 관청 문까지 나와 맞아야 했다. 이것은 지방 최고위직끼리 지키는 일종의 예의였다. 하지만 현령은 그 예를 지키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만큼 상인 출신 관리가 못마땅하다는 말이다.
진씨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가 관청에 들어서자 미리 정무를 보고 있던 현령이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진씨가 다가가 예를 표하자 현령은 이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업무에서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얼굴을 보기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씨는 이런 거부감을 보고도 자신의 자리를 눈치껏 찾아 들어갔다. 지금껏 관료들에게 실컷 짓밟히며 고초를 겪은 상인들이 이 정도 반발에 관계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도리어 그 저항은 상인들에게 그 자리를 더욱 지켜내고 말겠다는 반발심만 주었다.
이러한 상인 출신 관리와 관료 출신의 대립은 지방 곳곳에서 벌어졌다. 양자의 첨예한 대립은 관계에 처음으로 진출한 상인들이 불리할 것 같았지만, 그 뒷배가 되어주는 오승도의 입김 탓에 막상막하의 구도를 이루었다.
청림당 관료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다소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승도에게 마냥 반발할 수도 없어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승도가 그린 밑그림이 제국이란 백지 위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