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95화 (295/425)

제295화. 망라 (3)

매일 늦은 시각까지 현안을 챙기며 일을 하던 승도가 모처럼 일찍 퇴청을 했다. 그 밑의 관료들은 상전이 제시간에 물러간 덕분에 신바람을 내며 귀가할 궁리를 했다.

승도는 그 분위기를 알면서도 모른 척 의관을 바로 하고 관청을 나섰다. 경호를 맡은 상승군의 호위 몇이 그 좌우로 따라붙었다.

그가 일찍 퇴청을 한 것은 황궁에 들러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친분이 거의 없는 사이에서 다소 관계를 개선하자면 자주 얼굴을 보는 것보다 좋은 일도 없었다.

인간관계에서 친밀함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려울 때 자주 마주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승도는 이를 통해 황실 내에서 황제를 제어할 확실한 수단을 쥐고자 했다.

왕조 국가에서 군주를 다룬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점을 쥔다고 해서 간단히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힘을 가졌다고 아주 어릿광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당한 세와 명분만 가지면 언제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군주였다. 그렇기에 승도는 황실을 다룸에 있어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자신의 여동생에게 공을 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승도가 황궁으로 들어서자 금군이 길을 막아섰다. 요식적인 행위였기에 그는 용건을 간단히 밝히고 궁으로 들어섰다. 금군 역시 그의 수하에 떨어져 있어 출입을 막을 일은 없었다.

구태여 절차를 밟는 것은 관례를 아주 무시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너무 관례를 무시하는 모습만 보이면 명분을 중시하는 제국을 통치함에 무리수가 있었다. 명분을 무시하는 것은 그만한 이익이 있을 때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적당했다.

그가 내전에 들자 환관과 궁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비켜섰다.

검은 관복이 복도를 따라 바람을 만들며 길을 열었다. 검은 신이 나무 바닥을 울리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승도는 내전 복도를 지나 궁의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황실의 인사 외에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지만 명목상으로는 황후의 부름을 받고 온 것으로 해두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승도는 뒷짐을 진 채 황후가 기다리는 방 앞에 멈추어 섰다.

“마마, 총리대신 오승도가 인사를 여쭈러 찾아뵈었습니다.”

“드시라고 하세요.”

안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도는 그 목소리를 여러 번 들어 그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궁녀들이 문을 열어주자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섰다.

방 안은 소녀의 취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숙함과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역의 인형을 좋아하던 아이의 주변에는 보석과 화려한 금은붙이가 즐비하게 널려 눈을 어지럽게 했다.

승도는 황후가 앉아 있는 발 너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마마.”

“편하게 말씀하세요, 오라버니.”

“아닙니다. 신은 이 나라의 집정대신인 몸. 법도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알았어요.”

소녀는 짧게 대꾸하고는 앞에 놓인 차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는 그윽한 향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궁녀를 불러 승도에게도 그것을 내주도록 했다.

앞에 찻잔이 놓이자 승도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황궁에서 독살이 흔히 일어나곤 하지만 ‘독’은 그렇게 쉽게 구할 수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황실이 승도를 증오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당장 죽여서 볼 이익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상승군을 비롯한 그 휘하의 강맹한 세력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승도의 후계자가 건재하니 그 세력의 붕괴를 노릴 수도 없었다. 당연히 그 결과는 황실의 파멸이다.

황실이 자멸하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은 그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려고 해도 황궁 내에 깔린 승도의 눈과 귀가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승도는 여동생이 준 커피를 한 모금 들었다.

커피는 소녀의 취향에 맞게 우유가 적당히 들어가 있어 달고 부드러운 향이 났다. 그는 몇 모금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소녀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어, 혼사 일에 오라버니가 신경을 써주셨다고 들었어요.”

“아닙니다.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이었습니다. 부담을 가지실 일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불편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기꺼이 손을 써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어도 될까요?”

소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궁에 오던 날만 해도 자신을 이 불편한 곳에 밀어 넣은 가족들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적응의 동물이었다. 그 불편을 해소하게 해줄 대상이 불편을 만든 이와 같다면 웃음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처지를 낫게 해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승도는 그 입장을 계산하고 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지요?”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승도는 적당히 선은 그었다. 약속해줄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것은 약속의 값어치를 떨어트리게 마련. 권력자가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권력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였다.

그 약속의 무게가 떨어지는 순간 그를 중심으로 모인 세력의 결집력이 떨어지고 만다.

“그럼,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무얼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승도가 묻자 발 너머의 소녀가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다 궁녀에게 건넸다.

궁녀가 소녀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공손히 바쳤다. 승도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보고는 수염을 매만졌다.

여동생이 건넨 것은 몇 가지 원하는 것을 적은 서신이었다. 거기에 담긴 것들은 노리개를 비롯한 단순한 것에서부터 말벗을 삼을 아이에 이르기까지 꽤 여러 가지가 쓰여 있었다.

‘말벗을 데리고 온다는 부분은 조금 걸리는군. 이건 자칫 잘못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황실에는 아무나 사람을 들일 수 없었다. 검증된 고관대작의 자제들 혹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아이들만이 궁중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자나 남자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복잡한 궁중 생활의 예법에 익숙하게 만들어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었고, 황실에 충분히 충성심을 가질 시간을 가지기 위한 부분도 있었다.

“이걸 들어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승도가 묻자 여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는 ‘부탁’을 들어주는 오라버니에게 기대는 것인지 몰라도 승도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사람은 부탁하는 쪽에서 부탁을 들어주는 쪽에 숙이게 마련이다.

정치적으로 여동생과의 결속을 강화하자면 부탁은 들어주는 편이 좋았다. 다소 불편함을 감수할 가치가 있느냐를 생각해 본다면.

승도는 잠시 셈을 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마마.”

“감사해요.”

“대신 신도 하나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청이요?”

소녀가 조금 불안한 눈으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보호를 받은 만큼 남편과의 거리가 멀어진 입장. 거기에 오라버니의 청을 들어주면 사이가 더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 눈에 담겼다.

“그렇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신이 생각하기에 황실 내부의 안정은 그 무엇보다 우선될 일입니다. 하여 빨리 후사를 보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 말에 소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부끄러운 말을 다소 차갑게 느껴지던 승도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 몰라서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얼른 말을 꺼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저를.”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부터 사례태감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승도는 느긋하게 말했다. 본시 황실에서 황제가 여자를 안는 순서는 환관들이 결정했다.

그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황제의 여자들에게 순서를 배분하였는데, 현재 황제에게 있는 여자는 황후 한 사람밖에 없었다.

현 조정의 최고 권력자인 승도가 ‘여동생’을 걱정하는 모양새로 한마디 압력을 넣으면 사례태감이 순서를 누구에게 정할지는 자명한 이치였다.

물론 황제가 여자를 안기에는 매우 어린 나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승도는 가능한 한 빨리 황제가 후사를 보게 한 다음 적절한 선에서 그를 퇴위시키거나 제거할 생각이었다.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어가자면 여동생을 섭정으로 세우는 편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사라도 만든다면 지금보다는 처지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사랑 따위의 이야기를 내뱉기엔 남편과의 관계가 나빴고, 정을 주고받을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보다 나은 입지를 가지고 살길 바라는 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의 전부였다. 승도는 그런 여동생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

제국 황실 내의 권력 구도는 크게 세 개의 축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황실 어른들이 있는 황태후전과 새로운 궁중 권력을 대변하는 황후 전, 그리고 황족들의 왕부가 그것이었다. 이중 전자는 환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황후는 궁녀들의, 왕부는 황실의 친족 회의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존의 권력 구도는 오승도의 등장과 동시에 망가졌다. 선대 황제의 첩들, 즉 비빈들은 새로운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승도의 장막 아래로 숙이고 들어갔고, 자연히 그들과 결탁한 다수의 환관과 궁녀들도 그 흐름을 따라갔다.

거기에 더해 황후 전까지 승도의 여동생이 차지하고 앉으면서 황실 내의 권력 지반의 반절 이상이 오승도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정도만 해도 황실의 목줄을 틀어쥔 판인데, 황족들 상당수가 지난 정변에 휘말려 숙청당한 탓에 황실 친족회의의 힘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권력 구도로 보자면 세 개의 발 중 하나가 부러지고, 둘을 오승도가 다 차지한 꼴이니 황실 내에서 그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승도의 의사대로 황실이 돌아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황제도 그런 사정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자존심이 단단히 상했던 터라 황후에게 ‘분풀이’를 하고 며칠 외면하는 것으로 벌을 주었다.

그리고 총애하는 궁녀를 찾는 것으로 화를 삭였는데, 오늘 그 잠깐의 낙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무어라 했나요?”

소년이 거친 음성으로 물었다. 태감은 날이 선 반응에 쩔쩔매며 답했다.

“오늘은 황후 마마와 주무셔야 하옵니다.”

“그건 짐이 결정할 일이에요. 태감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소년은 평소답지 않게 강경하게 나갔다.

“하오나 그리하시는 것이 법도이옵니다.”

“법도, 법도. 황후와 자는 것이 법도라 하였나요. 하면 왜 그 무례한 자는 법도를 마음대로 어기는 것입니까.”

소년의 미간이 구겨졌다. 매일 숨통을 조여 오는 권신의 압력에 힘없는 군주의 설움은 커져만 갔다.

그 위안을 얻을 곳은 아무런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그를 위로해주는 이들의 품밖에 없었다.

적어도 황후는 그런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같은 편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계산 정도는 있어도 내 편이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더구나 첫날밤에 팽개쳐 놓았다고 침전을 나가 제 오라비가 마련해둔 처소에서 잔 꼴을 보면 철저히 오승도의 수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자와 어떻게 잠을 자겠는가?

황제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폐하, 법도를 어기신다면 문제가 생기옵니다.”

“문제라니요.”

소년이 강하게 되물었다.

“총애하는 이씨를 궁에서 쫓아내실 작정이시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요?”

“폐하께서 법도를 어기시면 필히 조정에서 말이 나올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궁에 압력이 들어올 것인데, 폐하께서 그 뒷감당이 가능하시겠는지요. 소인은 그것이 걱정될 따름이옵니다.”

뿌드득.

소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결국 협박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좋아하는 여자를 쫓아내겠다는. 소년으로서는 그 협박을 이길 힘이 없었다. 그의 미간이 잠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였다. 힘이 없다는 것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황제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아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마마, 황제 폐하께서 드셨사옵니다.”

태감의 말에 소녀는 조금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얼른 문 앞으로 다가섰다. 과연 오라버니는 그 말에 힘이 있었다. 자신을 그토록 싫어하던 황제가 방 앞에 오게 만들 정도로.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소녀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이자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짓던 황제가 얼른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소녀가 문을 닫고 따라오자 침상 위에 털썩 앉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다 말했다.

“원하는 대로 되었군요. 인정하지요. 그대의 가문에 힘이 있다는 것을.”

소년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황후를 보았다. 소녀는 당황한 빛을 보이다 고개를 들고 반문했다.

“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에요. 그래, 원하는 대로 내가 여기에 왔으니. 그대의 오라비가 원하는 것처럼.”

“폐하.”

소녀는 조금 당혹스런 얼굴을 보였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손을 홱 당겨 침상 옆에 앉혔다.

그는 갑작스런 손길에 놀란 소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요. 대신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두세요. 내 사생활에 더는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 달에 한 번. 그 이상은 그대를 찾지 않을 테니 거기서 타협했으면 좋겠군요.”

“폐하.”

소녀가 냉담한 말에 흠칫 떠는데 소년이 그녀를 가볍게 밀쳤다. 소녀는 그 손길을 이기지 못하고 비단 금침 위로 넘어졌다.

소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소녀의 옷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는 그에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조금은 놀란 여성 특유의 방어적인 자세. 소년은 그 반응에 초를 훅 불어 끄며 물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던가요?”

대답은 없었다. 단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짓는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을 따름이다. 승도가 일을 주문하긴 했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태연하게 일을 치를 만큼 그녀는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는 피식 웃고는 그 옆에 모로 누웠다.

“생각이 없다면 내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군요.”

“아니에요. 폐하.”

소녀는 얼른 남편의 말을 부정했다.

“태도는 아니지만 짐과 자기를 원한다. 마치 짐의 자손만을 얻길 바라는 것 같군요.”

소년은 누운 채로 소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은 실감했지만 그녀의 태도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소녀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장시간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 있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소녀가 막 입을 열려는데 황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좋아요. 그대가 짐의 씨를 바랄 뿐이라면 그걸로 되었어요.”

소녀는 그 대답에 입술을 꼼지락거리다 다물었다.

소년은 누운 채로 금침을 당겼다. 그 바람에 비단 금침 아래에 깔리게 된 소녀가 얼른 손을 뻗어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소년은 소녀를 향해 거리를 조금 좁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의 숨소리가 느껴질 것만 같았다.

“폐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소녀에게 손을 댄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그에게 그 이상을 바랄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그 침묵을 이기는 수단으로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로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소년을 향해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소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소녀 쪽을 보았다. 여자는 눈을 감고 그의 애정이라도 갈구하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황제는 여성 특유의 달콤한 향기를 느끼며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탐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움직임에 조금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레 백사처럼 길고 흰 팔이 소년의 등 뒤로 돌아가 매듭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단단히 결박한 채로 혀를 섞어오자 소년도 자연스레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는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며 자신의 몸이 차츰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몸이 뜨거워지는 것과 반대로 그의 이성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두 남녀는 뱀처럼 얽힌 채 비단 금침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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