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296화 (296/425)

제296화. 남하정책 (1)

붉은 코트들은 이틀에 걸친 교전 끝에 강도의 동쪽 해안 요새 대부분을 점령했다.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룬 성과인 만큼 승리에 대한 만족감은 컸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지만 그 자신감은 오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야음을 틈타 기습적으로 점령당한 포대에 대포를 재배치한 강도 수비군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해협으로 들어와 있던 프리깃 한 척이 집중적인 포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병만 서른 명 가깝게 부상당하면서 왕국 쪽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수로의 폭이 넓었다면 포격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했겠지만 피할 곳이 없는 곳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붉은 코트들은 여기에 반응하여 즉시 반격을 꾀했고, 강도 수비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인 끝에 해협으로 전진 배치한 포대를 도로 걷어냈다.

일단의 해프닝은 해협의 지배권에 대한 원정군 수뇌부의 불안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붉은 코트들은 강도 점령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이번 원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승도는 오경석의 보고에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럭저럭 목표에 근접한 결과였다. 연합왕국이 이웃 번국에 불필요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은 심히 곤란한 일이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일은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어. 조만간 김씨 가문에도 여동생을 하나 보내야겠지.’

승도는 예정된 정략혼을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포석을 둠으로써 혹시나 ‘서역’과의 전쟁으로 고무된 려의 호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고, 동시에 황실과의 국혼으로 황제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려 왕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안전장치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럼 누굴 보내야 하려나.’

그에게는 모두 열 명이 넘는 여동생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어린아이는 황실에 보냈고, 남은 아이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차 이미 시집을 가거나 혹은 혼담이 오가는 상태였다. 명문가에 시집을 보낼 때는 혼담이 없는 여성을 보내는 것이 관례인 터라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 열 번째 여동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성정도 꽤 담백하고 기도 드세니 이 일에 적합할 듯싶었다. 지나치게 문약하면 이역만리에서 혈연동맹의 의의를 살리기 어려우니 말이다.

승도는 대충 여동생을 보내는 것으로 동방에 대한 포석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이 정도면 향후 몇 년간의 대책이 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동쪽은 대충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되었지만 동영이 문제야.’

그는 그 고약한 섬나라 쪽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골머리를 앓았다.

동영은 ‘북적’의 눈을 돌리게 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승도가 예상한 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동영의 또 다른 물결을 조기에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그의 실수였다.

‘막부가 북방에 신경을 분산하더라도 열도를 제어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졌다고 계산했다. 한데 지금 상황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동영은 봉건적인 특성을 가진 나라였다. 독립된 영주가 있고 독자적인 번국들이 있었다. 중앙 정부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지방 세력들이 있다 보니 일반적인 국가의 잣대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난 동영 내전에서 승도는 막부가 충분한 승리를 얻었다고 판단했다. 조마는 철퇴를 맞고 그 세가 반 토막이 났으며 다른 외양대번들도 막부의 힘을 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앙에 대항할 만한 번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니 막부가 웬만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문제가 날 것은 없었다. 적어도 승도는 정세를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달랐다. 어느 틈엔가 조마를 비롯한 서부 외양대번들이 결속을 했던 것이다. 그 연대는 수면 아래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어 외부에는 거의 정보가 돌지 않았다.

그 바람에 승도가 원하던 그림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북적의 견제라는 이익을 얻은 대신, 막부의 안정적인 동영 지배가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우리가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기반을 다질 즈음에 우호적인 막부가 전복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승도는 냉정하게 판을 평가했다. 막부의 존립이 신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 정세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의 구상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가능성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동영에서 얻는 무역 이익도 조만간 끊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승도는 상황이 위험하게 흐를 가능성도 짚었다. 왕국 상인들과 동업을 하여 동방 무역에서 이익을 거두고 있었지만, 막부가 무너지면 그 무역의 판은 새로 설계해야 했다.

만약 판을 새로 짜게 된다면 이미 동영 무역에서 웬만큼 기반을 닦은 연합왕국 상인들이 그와 손을 잡으려 할까?

이익은 홀로 독식할 때 가장 큰 법이다. 그들이 승도와 손을 계속해서 잡을 이유는 없었다. 자본에서 의리를 찾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결과적으로 이번에 짠 틀은 단기적으론 이익, 장기적으론 손해가 나게 생겼어.’

그가 앞으로 그리려는 그림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개혁 정책에서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당장 추진 중인 조선소와 제철소, 제강소, 제련소, 기기창, 탄약창, 도로, 철도, 운하, 방적 공장, 그 외에 자본을 들여와 건설해야 할 병기창에 이르기까지 돈이 들어갈 일은 천문학적으로 많았다.

강주양행과 손을 본 제국의 재정, 그리고 새롭게 추가할 홍삼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큰 사업들이었다. 향후 몇 년간 원활하게 이 거대한 계획을 밀어붙이자면 안정적인 수입이 절실했다.

‘그러자면 이문을 더 벌어들일 곳이 필요하다.’

승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자신이 양행을 생각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강주양행.

당시에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투자 금을 모으는 주식회사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국의 최고 권력자라면 그런 형태로 돈을 모을 필요는 없었다.

과거에도 아주 좋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중앙은행!”

중앙은행은 세금을 거두지 않고 국가의 재원을 충당하는 ‘국가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과거 연합왕국이 세율을 높이지 않고 거대한 경쟁자들을 물리칠 군비를 만들어낸 방법도 바로 중앙은행에 있었다.

이 중앙은행 제도를 채택한 국가들은 단숨에 강국의 반열에 올랐었다.

오승도가 지휘한 로망스 제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정 역시 중앙은행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가 만든 중앙은행은 연합왕국과 달리 정부가 ‘통제’하는 관치금융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형태야 어떻든 당시에 운용했던 로망스 중앙은행은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전쟁을 지탱하며 제정의 경제를 유지한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우수한 세제도 중요했지만 은행이 없었다면 로망스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

승도는 뒤늦게 중앙은행을 떠올린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시행해본 중앙은행을 얼른 떠올리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은 금융제도가 워낙 낙후되어 있어 신용 화폐(지폐)보다는 금속 화폐가 선호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자금 확보 용도로 중앙은행을 얼른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중앙은행을 운용할 만한 인재가 중앙 정부 부처에 전무했다. 그러나 그건 기존 조정의 문제였다. 승도는 의지가 있다면 그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중앙은행에 필요한 자금도, 그리고 이를 운용할 인재도 행상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중앙은행 제도만 정착시킨다면 사실 산적한 국내의 자금 문제는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대량의 화폐 공급에 따른 인플레이션 문제만 해결한다면 말이다.

물론 이 부분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기존의 신은 화폐 공급이 경제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는 화폐 공급 순 부족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화폐의 공급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경제 성장을 훨씬 가속화할 수 있었다.

이 제도의 시행에서 유일하게 걸림돌이 하나 있다면 역대 왕조들이 발행했던 ‘교초’로 인한 신용 화폐의 신뢰성 획득 문제였다. 그것만 해결한다면 중앙은행 제도는 순조롭게 정착할 수 있었다.

승도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도 있었다. 그는 ‘뜻밖에’ 떠오른 해결책에 미소를 지으며 붓을 쥐고 날렵하게 서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오랜 전통에 빛나는 동방의 보석, 페테르부르크에도 첫서리가 내렸다. 고요한 눈이 모든 것을 뒤덮은 가운데 겨울의 궁 알현실로 두 명의 사내가 찾아왔다.

황실 시종장은 예법에 따라 방문자들을 한 시간 기다리게 한 후에 황제와의 면담을 허락했다.

금빛 왕관을 머리에 두른 군주는 독수리가 음각된 홀을 든 채 세 명의 근위병으로부터 경호를 받으며 알현실로 들어섰다.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자 두 사내는 한 손을 가슴에 붙이며 예의를 표시했다. 황제가 앉아도 좋다는 뜻을 보이자 둘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자신의 자리로 준비된 금빛 의자에 앉은 후, 두 방문자를 냉랭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대사가 여긴 어쩐 일이요?”

루시는 공식적으로 연합왕국과 상호 외교 사절을 교환하고 있는 터라, 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고 있는 이 남자의 신분은 대사였다. 공사보다 한 등급 높은 외교 주재 사절이긴 했지만, 실상 가진 권한은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권특명공사들보다 적다 할 수 있었다.

대사는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긴 후 황제를 보며 말했다.

“예. 본국으로부터 전문이 도착하여 폐하께 접견을 청할 일이 생겨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접견을 할 일이 생겼다. 우리와 관련된 일이요?”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는 그 말에 나른한 실눈을 하고 있던 호박색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모신 적이 있던 근위병들은 그 표정 변화를 통해 이 군주가 상대의 말에 흥미를 가졌음을 알아보았다.

“재미있는 이야기구려. 귀국에서 우리와 관련해 접견을 청할 일이 있다니. 반혁명 전쟁 이후 실로 오랜만의 일인 것 같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용건이 정확히 뭐요?”

황제가 묻자 대사가 단어를 신중하게 고른 후 입에 올렸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사안입니다. 바로 신에 대한 침략 행위입니다.”

“신에 대한 침략 행위라. 그 건이라면 아마도 그 초원 문제를 말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맞습니다, 폐하.”

“그 문제라면 그곳 원주민들이 알아서 독립한 문제이지 우리가 연관된 사안은 아니잖소.”

전형적인 발뺌이다. 대사는 그 수법을 이미 안다는 듯 황제의 언사를 받아쳤다.

“물론 원주민들이 알아서 독립했다면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건에 폐하의 장교와 병사들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원주민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대포로 무장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전략에 따라 신의 군대를 쳐부수었다. 이거 정말 신기한 일 아닙니까? 그 무기를 구해줄 상대는 신과 폐하의 군대, 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이지 않겠소.”

황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이라고 단정하시는 이유라도 계십니까?”

“그야 부패한 작자들이니 제 살점을 잘라 팔아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아니 그렇소?”

“그들이 부패한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쉽게 설명이 될 사안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신에 개입했다?”

“예. 우리 왕국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상모략이요. 우리 제국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고 이미 가진 영토도 충분하오.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겠소.”

“폐하, 우리 왕국에서는 이미 귀국에서 일을 벌였다는 충분한 물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사는 딱 잘라 말했다. 연합왕국이 그 정도로 대단한 정보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실상 그가 입에 담은 건 ‘허세’다. 상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대사의 발언에 황제의 수염이 씰룩였다.

“뭐, 좋소. 그 문제에 우리가 개입되었을 가능성까진 있을 수 있겠지. 거긴 워낙 먼 변방이니까. 하지만 그 문제에 왕국이 이리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모르겠구려.”

“그야 폐하의 제국이 워낙 공격적으로 팽창정책을 이어가기에 보이는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재미있군. 세계에서 제일 큰 영토를 가진 귀국이 우리더러 공격적인 팽창을 운운하니 말이오.”

황제는 냉소를 지었다.

“그 문제는 이 건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폐하. 이유야 어떻든 신은 우리 왕국의 국익이 결부된 나라입니다. 여기에 대한 폐하의 과도한 팽창욕은 우리 쪽에 심각한 우려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려라. 그래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초원에서 폐하의 그림자를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초원에서 그림자를 물려달라.”

대사의 발언에 황제가 의자에서 허리를 떼었다.

“그게 곤란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요?”

“그리 말씀하신다면 우리 왕국도 별도의 조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장중립동맹 전쟁을 한 번 더 일으키는 수밖에요.”

대사는 강경한 발언을 입에 담았다. 무장중립동맹 전쟁은 과거 연합왕국과 로망스의 전쟁에 휘말린 중립국들이 ‘무장중립’을 선언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연합왕국이 일으킨 일대 전쟁을 말했다.

무장중립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자위적인 차원에서 자국의 상선을 건드리는 즉시 동맹을 맺은 중립국들의 해군을 파견할 수 있다는 선언을 말하는데, 이는 해상을 지배하며 각국의 선박을 닥치는 대로 임검하는 연합왕국 입장에선 아주 눈꼴신 이야기였다.

왕국은 이 동맹에 가담한 중립국 세 나라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막강한 함대를 보내 두 나라를 박살냈다. 마지막 순서가 루시였는데 마침 황제가 바뀌면서 정책이 반 로망스로 확 기울어진 덕에 양국의 대결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둘이 붙었을 때 누가 박살이 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루시의 거대한 육군은 연합왕국의 식민 제국에 무력을 투사하기 곤란했지만, 연합왕국의 막강한 해군력은 루시의 수도를 직격할 수 있었다.

싸운다면 전략적으로 불리한 쪽은 루시였다. 대사가 이렇게 강경한 발언을 내뱉을 수 있는 배경에도 결국 힘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 말은 위협이요?”

“폐하의 궁정에 드나드는 이로서 드리는 충고로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양국의 전쟁은 상호 간에 득이 될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대사는 다시 겸손한 어조로 돌아갔다.

황제는 그 말에 수염을 매만졌다. 연합왕국은 그간 열강들을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하며 자신들의 의중에 따라 끌고 다녔다. 폭압이라도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그 태도에 대해 루시도 상당히 굴욕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그렇지만 지금 물러서기엔 지난번에 얻은 이익이 너무 컸다. 더욱이 동영까지 넘보자면 연합왕국의 심기를 헤아려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난날처럼 쉽게 굴복하지 않을 자신감도 있었다.

제국에서 새롭게 건조하고 있는 신형 장갑함들과 수도 주변에 구축 중인 대규모 포대들이 뒷받침된다면 왕국 해군의 위력 과시도 어느 정도는 무시할 만했다.

몇 년 정도만 시간을 끈다면.

황제는 대사의 말에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 이야기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리다.”

“어느 정도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정치적으로 위신이 달린 문제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것은 알 거요. 대신 이쪽도 선물을 하나 내놓지.”

황제가 나름의 타협안을 내놓자 대사가 물었다.

“어떤 선물을 말입니까?”

“프리지아 문제에서 귀국의 입장을 대변해 주겠소.”

황제의 말에 왕국 대사는 잠시 주판알을 튀겼다. 최근 몇 년 동안 프리지아와 로망스가 결속하여 중앙 에우로페의 질서를 흔들고 있었다. 이 묘한 기류 때문에 연합왕국 전통의 우방 오스티아가 힘을 쓰지 못하고 위축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왕국은 이 흐름을 깰 필요가 있었는데, 거기에 루시의 지지는 아주 좋은 돌파구가 되기에 충분했다.

대사는 잠시 셈을 해본 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초원 문제’도 상당히 중요하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역시 프리지아 문제였다.

본국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우선하여 보고 있었던 까닭에 루시 정부의 지지 선언을 좋은 선물로 여길 공산이 컸다.

“좋습니다, 폐하. 충분한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왕국 하원에서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면 우리 정부도 또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야 물론이요.”

황제는 대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열강은 서로의 이익에 대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지만 당분간 서로를 자극하지 않는 편이 더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 기한은 공교롭게도 신의 내정 개혁이 궤도에 오를 시간과 겹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