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06화 (306/425)

제306화. 기습 (3)

그레고리우스 대령은 아침 식사로 약간의 계란과 베이컨을 곁들인 담백한 식단을 받았다. 음료로는 동방의 차가 준비되었다.

대령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하려던 차에 은은한 포성이 들렸다.

그는 그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다 큰 소리로 밖에 물었다.

“혹시 오늘 훈련이 예정된 게 있나?”

부관이 밖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부산을 떨다 들어와 대답했다.

“없습니다, 각하.”

“훈련이 없다면 지금 들린 소리는 뭔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관이 대답한 순간 쿵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거인의 뜀박질처럼 땅을 울리는 굉음 사이로 총성이 쉬지 않고 울렸다. 대령은 그 소리에 식기를 놓고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섰다.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는지 막사 밖에는 다른 장교들도 여럿 나와 있었다.

장교들은 연대장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례를 붙였다. 그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각하, 지금 훈련이라도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훈련 계획은 없네.”

그 말에 장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훈련이 아님에도 포성이 연거푸 들린다는 것은 ‘불의의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성은 아군의 것일 가능성이 희박했다. 포성이 들려온 방향의 보병 연대들은 대포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탄약을 보급 받지 못한 상태였다.

포성은 그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란 말인가?

용의자는 둘이다. 투르 한국과 신이다. 이 중 전자는 루시의 후원을 받는 입장이니 제국에 무기를 들이댈 이유가 없다. 동기가 있다면 후자인 신이다.

하지만.

대령은 생각했다. 신이 만약 그들에게 무기를 들이대려 한다면 최소한 여단 다섯 이상은 배치하고 덤벼야 했다. 최소로 잡아도 그 정도의 전력이 없이 도전하는 것은 무모했다.

그러니 신이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지만 사고가 터졌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대령은 이 상황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 정찰 중대 하나를 이웃 부대로 보내도록 했다. 포성이 보병 연대 쪽에서 들려온 이상 이를 살펴보는 것은 지휘관의 ‘경계 의무’에 속했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정찰 결과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장교들 역시 모두 그의 막사에 모인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식사도 하지 못한 빈속으로 앉아 있으려니 속이 영 좋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부관에게 파이프를 가져오게 하여 입에 물었다.

대령은 파이프를 깊게 한 모금 빨아낸 다음 회중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이른 아침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딱딱 두드리며 초조함을 누그러트리려 했다.

그때 막사의 문이 확 걷히더니 모자를 눌러쓴 생머리의 여자가 모습을 보였다. 군에 몇 없는 여성 장교였다.

이번에 정찰을 하러 갔던 나타샤는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경례를 하자 연대장이 자리를 내주며 물었다.

“상황은 파악했나?”

“예, 각하.”

“무슨 일인지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차분하게 설명해보게.”

대령은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타샤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동자에 약간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숨을 고르고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저희 부대는 아라한 동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근접한 루반스키 연대의 진영부터 살폈습니다. 그곳에서 사정을 잠시 청취하였는데, 그곳 연대에서도 정찰을 보내 사정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찰을 보낸 기병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루반스키 연대 쪽에서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루반스키 연대에서 붙여준 기병과 함께 정찰에 나섰는데 이동 중에 뜻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적을 다수 목격하였습니다. 그 적의 정체를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군복과 무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신의 군대가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포로 생활을 하며 보고 들은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확실합니다.”

“그럼 적을 목격하고 곧장 돌아온 건가?”

“아닙니다. 루반스키 연대 쪽으로 가 그들의 접근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연대로 복귀하기 위해 출발하던 차에 그들과 루반스키 연대가 교전을 시작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교전이 벌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나?”

“제 두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녀가 단언하자 그레고리우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일이 고약하게 되었군. 자네 말이 맞는다고 하면 그 빌어먹을 것들이 우리 의표를 찔러 기습했다는 말인데.”

그들의 대화에 장교 하나가 끼었다.

“그렇다면 당장 대응해야 합니다. 우리 연대가 나서지 않으면 적은 아군의 우익을 전부 무너트리고 아라한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제대로 싸울 기회도 얻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확실히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답이 없다. 하지만 신이 공격해온 것이 사실이라면 적의 병력은 3개 여단. 우리가 당장 쓸 수 있는 것은 기병 연대 하나에 루반스키 연대 하나가 고작이다.’

연대장은 이 전력 차이가 너무 크다고 여겼다. 이렇게 그냥 싸우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턱을 매만지다 장교 몇을 지목하며 말했다. 그중에는 나타샤도 있었다.

“자네는 지금부터 서쪽으로 가서 보로네프 연대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게. 사정이 급하니까 곧바로 아라한으로 이동한 다음 포성을 따라오도록 전하고. 알겠나?”

“예, 각하.”

“자네는 아라한으로 달려가서 이반에게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은 모두 준비시켰다가 보로네프 연대와 함께 이동하도록 전하게.”

“명령대로 전하겠습니다.”

장교들이 경례를 하고 차례로 막사를 나섰다. 연대장은 지휘관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적에 대해 파악하고 그 의도를 분석하고 나자 대응책은 신속하게 나왔다. 제시간에 대응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지시 자체는 정확했다.

“각 대대장들은 병사들을 모두 말에 태우고 연병장에서 기다리도록.”

대대장들이 막사를 나서자 대령은 부관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네에게 지금 편지를 두 통 써줄 테니 오로목제로 달려가서 칸에게 먼저 한 통을 전하도록 하게. 그가 당장 지원을 올 수 있도록.”

“칸에게 한 통이라면 나머지 한 통은 어디에 전합니까?”

“미카엘 대공께 전해야지. 전하께서 상황을 알아야 지원을 해주실 것 아닌가?”

대령은 사태를 낙관하지 않고 냉정하게 보았다. 기병 장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레고리우스는 뛰어난 사내였다.

그는 단순한 자존심을 가지고 미카엘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는다거나 칸의 협력을 요구하지 않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농노들을 천하게 보는 것이 흠결이긴 했어도 상황 자체를 보는 눈은 정확했다.

대령의 말에 부관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재빨리 깃털 펜을 들어 종이 위로 글자를 쓱쓱 그려냈다.

현재의 투르 한국 칸도 루시에 유학한 경험이 있어 문자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서신을 두 부 작성해서 넘겨주자 부관은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흰 종이를 접은 서신 사이에 끼운 다음, 그것을 품에 넣었다.

부관이 경례를 하고 막사를 나서자 대령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곤 그 옆에 어지럽게 흩어진 장기짝을 몇 골라 지도 위에 두었다.

얼마 전에 신이 혹시나 공격해오면 어떻게 대항하면 좋을까를 가지고 장교들이 ‘워 게임’을 하며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그는 신의 군대를 상징하는 검은 말들을 아라한의 동쪽에 세 개 두었다. 그리고 아라한을 중심으로 흰 말을 다섯 두었다. 그는 그것을 잠시 보다 말 하나를 치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이 루반스키 연대를 공격할 정도라면 그 배후는 이미 정리를 당했다고 봐야 했다.

그는 남은 네 개의 말을 움직였다. 루반스키를 상징하는 말은 원 위치에,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연대는 아라한으로 옮겼다. 또 자신의 부대를 상징하는 흰 장기말(장기짝)을 루반스키 연대 옆으로 옮겼다.

그는 그렇게 옮겨진 자신의 부대를 보다 이맛살을 구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불리한 싸움이 되겠군.’

그는 지도를 한참 내려다보다 병사들이 모두 집결했다고 대대장들이 보고해오자 입맛을 다시며 막사를 떠났다.

***

루반스키 중령이 지휘하는 제3중앙 시비르 보병연대, 통칭 루반스키 연대는 유형자들의 자손들로 채워진 부대였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극도로 희박하다 보니 귀족 장교들은 이 부대에서 종군하기를 꺼려했다.

부대의 지휘관들은 태반이 몰락 귀족 혹은 망명자 출신들이었고, 지휘관 루반스키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연대에 대한 처우는 썩 좋지 않았다. 제공되는 장비는 언제나 가장 구식의 것이었고 군복도 마찬가지였다. 냄새나고 퀴퀴한 복장은 장교도 예외는 없었다.

이 부대를 찾은 상급자들은 이 같은 점들을 의식해서인지 몰라도 ‘제국에서 가장 미천한 자들의 집단’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 대해 루반스키 연대 병사들은 굳이 반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미천하다고 부르든 말든 대우가 더 나빠질 것도 없는 탓이었다.

부대가 주둔한 주둔지도 그런 입지를 반영하듯 썩 좋지 않은 곳이었다. 잡초만 있는 황량한 땅에 우물 하나 없는 곳을 주둔지로 골라주었기 때문이다.

장교들이 툴툴대긴 했지만 주둔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처우가 열악하고 대접도 시원치 않던 루반스키 연대의 사기가 높을 턱이 없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오승도가 자랑하는 상승군의 정예가 몰려왔다.

“부대 정지!”

장교가 소리치자 검은 군복들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멎었다. 기계적으로 조련된 병사들과는 다소 다르지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태가 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허리춤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고, 어깨에는 긴 총을 메고 있었다. 태반은 루시 보병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단신이었지만 그들이 발하는 위압감은 키의 차이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컸다.

장교들은 그런 병사들의 앞을 쓱 둘러보다 장갑을 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차들이 앞으로 천천히 이동해왔다.

루시 병사들은 상대가 마차를 방패 삼아 전진해 오려는 것인가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목책을 향해 다가오던 마차들은 이내 반전하여 그 후미를 목책으로 향하게 한 채 멈춰 섰다.

적의 기이한 행동을 지켜보던 루반스키는 망원경을 들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다 그들이 목책 안으로 전진해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것이었다면 마차를 앞장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적이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이리저리 망원경을 돌리다 그 이유를 알았다.

적은 마차를 방패로 삼아 목책에서 쉽게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대포로 그들을 때릴 생각이었다. 교활하다면 교활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방어자에게 방어를 강요하고 포격을 가하다니.

그는 적이 자신들의 약점을 알고 포격을 하려는 것인지 의심했다. 그 의심(?)은 사실이기도 했다.

승도는 전쟁하기에 앞서 대규모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루시 측의 군사 기밀이 상당 부분 빠져나왔다. 탄약을 미리 지급하지 않고 아라한에 비축해두는 ‘중요한 사항’부터 부대의 배치 및 편제 규모에 해당하는 기본 정보까지 넘어간 정보는 적지 않았다.

신은 바로 이 광범위한 정보에 근거하여 공격 계획을 진행했고 그 결과는 파멸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패를 보고 도박을 해서 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루반스키는 상대의 의도(?)를 눈치채자 재빨리 부하 장교들을 소집했다. 적이 그렇게 나온다면 포격하기 전에 적과 가까운 위치로 병사들을 전진시켜 포격을 상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일방적으로 대포를 두드려 맞은 후 다음 공격을 당하면 이 허술한 목책은 오래 견딜 수 없었다.

그의 판단에 대해 장교들도 동의했다. 곧 지휘부의 의견이 모아지자 루반스키 연대는 전열을 갖추고 목책을 나섰다. 시간은 정말이지 절묘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목책을 나서던 찰나에 동쪽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그 눈부신 존재가 강렬한 빛을 쏘아 보내며 루시 병사들의 시야에 지장을 주었다. 해가 떠오른 시간에 ‘1여단’과 교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것 역시 오승도가 미리 일출 시간에 맞추어 부대를 움직였기에 가능한 ‘이적’이었다.

병사들이 ‘햇빛’ 때문에 제대로 보고 싸울 수 없다는 점은 매우 큰 문제였다. 루반스키는 그 점을 인식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목책으로 돌아갔다간 갇힌 채로 두드려 맞을 뿐이고, 그렇다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기에는 적이 그냥 구경할 이유가 없었다.

루반스키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부하 장교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장교의 명령과 동시에 흰 군복들이 힘차게 팔과 다리를 뻗으며 앞으로 나아왔다.

적이 전진해오는 것을 확인한 승도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1여단장을 맡은 헨들릭을 보았다. 여단장은 이번 전투에서 신무기의 위력을 자신이 직접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흥분한 얼굴이었다.

승도가 망원경을 든 채 전장을 주시하자 여단장이 부관을 불러 공격 명령을 전하게 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들의 천이 걷히고 악마의 병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보병을 갈아버릴 기관포의 등장에 루시 보병들은 그 끔찍한 위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왔다.

다음 순간 총성이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기관포가 번갈아가며 총탄을 쏘았다. 그 빛줄기는 자신의 이동 경로에 놓인 모든 물체를 무자비하게 관통하며 지나갔다. 의복, 살, 뼈 등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살아 움직이던 수십 명의 인간이 아무 생명력도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끔찍한 기관포의 공격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전열이 붕괴되어 나갔다. 악마적인 신병기는 그 어떤 전술보다도 탁월하게 적 보병을 쓸어버렸다. 그것이 사격을 하며 내는 소리는 기존 전술에 대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분당 수천 발씩 쏟아지는 총탄 세례 앞에 전열은 순식간에 그 의미를 잃었다. 그저 사격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사형수의 행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긴 어려웠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 가뜩이나 사기가 바닥이던 루시 보병들은 뒤로 돌아서 자신들의 군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뛰었다.

그들이 기관포의 사거리 바깥으로 돌아가자 헨들릭이 승도에게 말했다.

“슬슬 보병을 투입해서 끝을 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격은 1여단만으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군영이 너무 좁습니다.”

승도가 공격 지역이 너무 좁다는 이유로 투입 병력을 제한하라고 말했지만 헨들릭은 자신을 보였다.

하긴 기관포에 상대 보병이 싹 갈려나간 마당이다. 남은 보병이라고 해봐야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는 승도에게 모자를 벗어 전투 지휘를 하러 나가겠다는 뜻을 보이고는 성큼성큼 걸어 자신을 기다리는 용병들 쪽으로 향했다.

연대장이 도착하자 용병들 사이에서 함성 소리가 터졌다.

곧 ‘돌격’ 명령이 떨어지자 총검 대신 쿠크리를 뽑아 든 용병들이 거친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쇄도했다.

승도는 그 야만적인 외침을 들으며 망원경 안의 풍경을 주시했다.

이내 목책을 넘은 용병들은 전의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적 보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상당수는 겁을 먹고 무기를 버린 채 항복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하지만 ‘예외’를 제외하고 포로를 잡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용병들은 그런 적을 향해서도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쿠크리가 인간의 머리를 쪼개자 흰 뇌수와 핏물이 땅을 흠뻑 적셨다.

용병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루반스키 중령은 칼을 뽑았다. 사나운 용병들은 흰 군복들의 머리를 쳐 날리며 진영의 중앙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몇몇이 총검을 세우며 덤볐지만 뱀처럼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쿠크리의 적수가 되진 않았다.

장교들도 권총을 뽑았다. 그들은 결투를 하는 양 비장한 표정으로 다가온 용병들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장교들의 사격은 형편없었다.

사실 권총은 자살용으로 지급된 무기였다. 실전에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외가 부 무장으로 권총을 다루는 기병들과 ‘근접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로망스와 연합왕국 장교들이었다.

최초의 사격이 빗나가자 용병들은 거리를 좁힌 다음 장교들을 향해 쿠크리를 겨누었다.

루반스키가 칼을 놓지 않고 용병들을 향해 겨누자 용병들 사이에서 장교 하나가 나와 말했다.

“그냥 무기를 버리시오. 싸움은 끝났소.”

루반스키는 떨리는 손으로 적을 겨누다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순간 용병 하나가 그의 칼을 쿠크리로 쳐 날렸다. 중령은 칼이 날아간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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