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8화. 대승 (2)
마초는 상승군에서 4년 이상을 복무한 경험 많은 병사였다. 그는 승도를 따라 천국 토벌 전쟁에 참가했고, 제도 공략에도 한 팔을 거들었다. 수차례 적을 상대하며 공적을 쌓은 덕에 부 사관의 지위도 얻었고 훈장도 받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승도를 따라 양적을 상대해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말했다. 기회만 있었다면 양적을 상대하여 더 많은 공과 포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승도가 병사들 앞에 나타나 ‘북적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싸움’을 반겼다. 이번에야말로 큰 공을 세워 사관의 지위와 1등 훈장을 받고 말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공을 세울 기회’만 기다리며 동료들과 눈빛을 빛냈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첫 상대는 3여단이 냉큼 먹어치웠고, 그다음 상대는 1여단이 독식해 버렸다.
두 개의 여단이 각각 제 몫을 다해버린 탓에 2여단은 약간의 잔병을 치울 기회도 얻지 못했다.
마초는 실망하긴 했지만 아직 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야속한 영웅은 2여단에 기회를 주지 않았다. 2여단에게 계속해서 후위를 지키라고 했다. 가장 싱싱한 병력을 예비대로 확보하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인지는 몰라도 마초는 그 명에 좌절하고 말았다.
양적을 잡을 기회는 다른 여단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만다. 그 생각을 하니 목이 컬컬해졌다.
마초는 수통을 입에 가져간 채 목을 축였다. 몇 모금을 넘기자 알싸한 향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장교들 몰래 눈치껏 술을 물에 타서 채운 덕에 기분은 조금 좋아졌다.
마초가 수통을 다시 입에 가져가려는데 그의 동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이 모두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도 뒤따라 고개를 돌렸다. 뭔가 모르지만 땅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병사들은 그에 대해 경험이 없어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땅이 진동하는 것 같은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어.”
그들의 말에 마초는 피식 웃었다. 바보 같은 녀석들이다. 경험이 있다면 말들이 달리며 내는 진동이란 것을 알 텐데 말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응? 말이 달리는 소리라고?’
그는 입에 머금었던 술을 뱉어냈다. 그의 구취에 절은 액체가 튀자 그 옆의 병사가 기겁을 하며 피했다.
“기병이다. 북적 기병이다!”
“북적 기병이라니?”
그 말에 동료 병사들이 놀라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가 부리나케 마차 쪽으로 움직였다. 기병이 온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대 기병 방어진을 갖추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피라미드 진이라 불리는 방진으로 대항했다.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보병 방진 안에 대포를 넣고 기병을 때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방식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마차를 대열 사이에 세운 다음 그를 중심으로 진을 쳤다. 화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한 일자 전열이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전열을 갖춘 것을 확인한 다음 포병들에게 사격을 준비하게 했다. 물론 그들이 준비시킨 포는 박격포가 아니라 기관포였다.
강력한 후장식 소총과 기관포.
상승군은 기병에 대항해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신, 다가오면 싹 쓸어버리겠다는 화력 지향적인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이 준비를 마칠 즈음, 지평선 저쪽으로 흙먼지가 일더니 흐릿한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이내 또렷한 윤곽을 이루었다. 그 물체들은 기병이었다.
“정말 기병이었나?”
동료들은 다소 놀란 눈으로 마초를 보았다. 기병을 상대한 경험이 없던 그들은 마초의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노병이 신병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도 사실 이런 부분이 컸다.
경험 많은 병사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 피로 지불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간단히 알려줄 수 있었다.
곧, 상승군의 후면에 나타난 기병은 이들이 아직도 대열을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이쪽으로 곧장 말을 몰아왔다.
전열 전투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도 기병은 여전히 보병의 대열을 돌파할 힘이 있었다. 전통적인 대 기병 방진이 아닌 이상은 한 점에 집중 타격을 가해 구멍을 뚫어낸 다음, 그곳으로 치고 들어가 보병들의 대열을 파괴한다는 방식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었다.
손실은 적지 않지만 승리를 위해 얼마든지 그 대가는 지불할 수 있었다.
기병들이 다가오자 마초는 호흡을 하고는 아군의 포병들을 보았다. 그들은 지난 교전에서 1여단과 3여단이 그랬듯 적에게 악마적인 공격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검증이 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두 차례나 그 위력을 눈으로 보았다. 포병은 믿을 수 있었다.
마초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린 찰나에 기병들이 함성 소리를 높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보병들을 위압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그들은 기병총을 서슴없이 뽑아들고 보병을 겨냥했다. 최종 돌입 시점에서 보병의 대열에 사격을 퍼붓고 일격 이탈할 준비가 된 모습이었다.
마초는 동료들을 돌아본 다음 자신의 총탄을 꺼냈다.
“사격 준비!”
장교가 외쳤다.
보병들은 그 명령에 따라 총탄을 총의 후미에 밀어 넣고 자세를 바꾸었다. 이어 어깨에 개머리판이 오도록 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조준!”
병사들은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총구를 높게 들었다. 보병이 상대라면 총구를 낮게 잡았겠지만 기병을 상대로는 사격 위치를 다르게 가져가야 했다.
기병은 통상 3미터의 거인으로 생각하고 조준해야 했던 까닭에 보병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했다. 보병처럼 1미터 높이를 겨냥하고 쏘게 되면 그 총탄은 대부분 말의 다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거나 혹은 별 피해를 주지 못하기 일쑤였다.
생각보다 말의 하반신은 명중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마초는 자신이 배운 대로 2미터 높이를 겨누었다. 적 기병의 허리 어름 정도의 높이로 말의 상반신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는 조준을 한 다음 장교의 명령을 기다렸다.
“사격!”
장교의 명령과 동시에 상승군 병사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오렌지 빛 불꽃이 연달아 확 켜졌다.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총탄들이 적 기병의 대열을 향해 날아갔다.
히히힝!
총탄 세례가 쏟아지자 기병 여럿이 일순간에 낙마했다. 기병총을 들고 보병들을 겨누려던 기병과 칼을 휘두르던 기병 장교, 그리고 깃발을 든 기수가 연달아 낙마했다.
기병들은 생각보다 강한 화력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후장식 소총은 전장식 소총에 비해 연사 속도도 우수했지만 무엇보다 총신이 길어 총탄의 안정성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그 살상력을 비교할 수 없었다.
회전 운동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총탄은 총신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획득한 후 직선으로 가게 되는데, 그 방향성은 총신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정확해졌다.
그러다 보니 보병의 의도대로 표적을 맞추는 쪽은 후장식 소총이 더 유리했다.
최초의 사격에서 기병의 첫 무리가 우수수 쓰러졌다. 상승군 보병들은 적 기병이 다가오는 짧은 시간 사이에 두 번째 총탄을 장전했다.
전장식이었다면 접근 시간 동안에 한차례의 사격 기회밖에 갖지 못했지만 후장식은 달랐다.
마초는 두 번째 총탄을 장전한 후 기병들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사격!”
장교의 명령에 따라 두 번째 총탄이 불을 뿜었다. 무자비한 일제 사격이 엄습하자 기병들의 무리에서 수십 명이 쓰러졌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상대적으로 기병의 손실도 커졌다.
기병들은 낙마하는 동료들을 애써 무시하며 장애물들을 뛰어넘었다. 부상한 동료와 말을 피하려는 움직임은 처음에만 유효했다. 후속하는 기병들은 그 장애물들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끔찍한 참극을 연출하며 달려오는 기병들의 서늘한 시선이 가까워졌다. 경험 많은 마초도, 지휘관인 장교들도 그들의 용맹한 돌진에 적지 않게 긴장했다.
방진의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기병의 돌격을 맞는 보병의 심리적 불안은 컸다.
보병들이 제 몫을 다하고 불안한 눈으로 기병의 돌격을 지켜보던 찰나에 포병들이 준비한 병기가 가동을 시작했다.
슬슬 섬뜩한 모습을 드러낸 쇳덩이를 본 보병들은 그제야 불안한 빛을 지우고 적 기병을 보았다.
용맹한 적은 언제나 긴장감을 심어줄 수 있는 상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적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마초는 이제야 상승군의 대열을 향해 기병총을 겨누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적 기병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
“허를 확실히 찔렀군.”
브레진스키 중위는 적 보병의 멍청한 대열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 기병의 접근을 알고도 피라미드 방진을 치지 않은 것은 적이 대 기병 방진을 칠 줄 모르거나 혹은 습격 자들의 전력을 오판한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는 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군화로 말의 배를 걷어차 속도를 높였다. 공격을 선도하는 붉은 기병 중대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 먼저 적 대열에 공격을 가하고 싶은 생각이 강렬하게 샘솟았다.
그는 연대기를 창처럼 앞으로 세웠다. 흡사 랜스를 든 중세 기병처럼 모양이 그럴싸하게 보였다.
말발굽이 부드러운 흙을 튕길 때마다 적 보병들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전마의 속도가 최고에 가까워지자 경물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동료 기병들이 내는 말발굽 소리도 천둥처럼 커져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전장’을 가득 메운 기병의 당당한 소음에 함몰되어 적 보병의 위협은 깨끗이 잊었다. 그 굉음은 기병이 보병을 상대로 용맹하게 달려들 수 있는 힘의 근원이기도 했다.
기병의 선두가 일정한 거리에 접어들자 적 보병들이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능숙하게 이쪽을 조준하더니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그 공격에 여러 명의 기병들이 연달아 낙마했다.
브레진스키는 그 공격을 보며 상대가 아주 얼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치기라면 저 정도로 효과적인 일제 사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사격 기회를 먼 거리에서 허비하다니. 그 점을 생각하면 적의 지휘관들은 이류였다. 아니, 삼류일 것이다. 기병을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방진도 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브레진스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점 가까워지는 적병들을 힘주어 보았다.
거리가 더 가까워져 적병의 얼굴을 육안으로 구분할 정도가 되었을 때, 적 보병들이 두 번째 사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수십 명의 기병이 한 번에 낙마했다. 좁은 쐐기 진을 이루어 돌격한 기병을 상대로 낸 전과치고는 대단했다.
‘믿을 수 없다.’
브레진스키는 동료들이 무더기로 낙마하는 것을 보며 적의 소총이 자신들의 것을 초월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야만인들 주제에 에우로페 국가의 군대가 가진 병기를 능가하다니?
그의 조국이 비록 에우로페의 변방에 위치한 낙후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방 국가들보다는 월등한 무기체계를 가진 나라였다. 그런 그들보다 좋은 무기를 쓰는 동방 군대라니.
그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기병들이 함성 소리를 높였다. 마지막 돌격을 위한 신호다. 그 외침에 맞추어 기병 여럿이 기병총을 들었다. 그들은 일격 이탈을 위해 적 보병 대열을 정확히 조준했다.
앞으로 수초 사이에 적 보병들을 쏘고 이탈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 생각하며 적을 겨냥했다. 브레진스키 역시 깃발을 적에게 겨눈 채로 동료들을 응원했다.
그들이 막 적 보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이었다.
적 보병 대열 사이에 있던 마차에서 움직임이 있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곧 그것들이 불을 뿜기 시작하자 그들은 몸으로 그 의미를 배워야 했다.
기관포가 맹렬하게 불꽃을 쏟아냈다. 분당 200발의 총탄을 쏘아내는 신세대 학살자가 위력을 냈다. 그 사신의 빛이 기병의 중앙을 쓸었다.
브레진스키도 깃발을 든 채 앞으로 내달리다 오렌지 빛 섬광을 보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기수가 벌집이 된 채 바닥으로 나뒹굴고 뒤를 따라오던 기병 장교와 기병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무자비한 화력 앞에 기병들의 대열은 순식간에 파괴당했다.
선두가 워낙 순식간에 괴멸당한 탓에 후속하던 기병들은 상황도 모르고 내달리다 그 무자비한 포화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그대로 준비된 ‘살육머신’에 자신의 목숨을 내맡겼고 그대로 분쇄 당했다.
그 광경을 후속하던 기병 장교 하나가 목격했다. 그는 기병 중대 하나가 단 십여 초 사이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을 보고 얼어붙었다.
급히 말 머리를 돌린 덕에 죽음을 면했지만 공포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군함이라도 상대한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전열함의 막강한 화력이라면 기병 중대는 순식간에 녹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 바다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는 급히 동료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앞으로 가면 죽는다!”
그의 외침에 동료 기병들이 말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인간은 평소에 그리 주위에 신경 쓰는 동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둔감한 면이 있어 단체 행동에 휩쓸리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는 동료들의 뒤를 그대로 따르기 일쑤였다.
기병들이 차례로 죽음의 덫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본 장교는 급히 깃발을 가진 동료를 찾았다. 군악대를 대동하지는 않았지만 명령을 위해 기본적으로 기수들은 부대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 앞으로 기수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기수를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령님.”
기수가 침착하게 물었다. 동료들과 함께 돌격을 하다 불려 나와 다소 불편한 기색이 있었지만 어조는 정중했다.
그 물음에 소령은 손가락으로 적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저기로 간 기병들은 전부 죽었네. 자, 봐.”
그의 말에 기수는 약간 옆으로 말을 몰아갔다. 시야가 트인 곳에서 대열의 선두를 바라본 그는 금세 참상을 목격하고 얼어붙었다.
“당장 병사들의 돌격을 정지시키게.”
“예, 예!”
기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급히 깃발을 흔들었다. 그가 깃발을 흔들자 도도하던 기병의 물결이 슬슬 느려졌다. 장교는 그것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빌어먹을. 앞을 봐라. 지금 다 죽으러 갈 셈이냐!”
계급이 낮은 자도 아니고 소령 계급의 장교가 외치자 기병들도 그제야 상황을 인식했다. 기병들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그레고리우스 대령이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왔다.
대령은 잘 진행되던 공격이 갑자기 중단된 데에 대해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하지만 기병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좌우로 갈라지며 참상이 드러나자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앞으로는 수백 명의 병사와 죽은 말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방진도 치지 않은 적 보병들에게 당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다 하도 어이가 없어 가까이 있던 기병 하나를 불러 물었다.
마침 그는 운 좋게도 돌격을 하다 제때 옆으로 빠진 자였다.
“지금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것이, 적 보병들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터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우리 병사들이 쓸려 나갔습니다. 농부가 낫으로 수확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마치 수백 명의 보병들이 연달아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 같은 공격을 맞았다는 말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적이 산탄이라도 쏘았다는 말인가?”
포도 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포탄이라면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포도 탄을 쏘려면 중포를 가지고 와서 쏘아야 했는데, 적 보병들 사이에 그런 대포는 없었다.
하다못해 경포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은 대포는 쓰지도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대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대령은 그리 말을 하려다 헛기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에우로페에서 새로운 무기가 나왔다는 말이 있었다. 새롭고 강력한 전장의 종결자가 나왔다는 말에 대령은 코웃음을 쳤었다.
그때 페테르부르크에서 왔던 장교가 했던 이야기 중에 ‘보병 일개 소대’의 화력을 단번에 발휘하는 괴물이 새롭게 나왔다고 했었다.
그는 그 괴물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피부로 실감했다.
‘야만인들이 그 무기를 손에 넣었다면 말이 된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려던 차에 적 보병들의 전열이 전진해왔다. 장교는 그것을 보고 대령에게 말했다.
“각하, 여기 머물다간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연대의 반절이 순식간에 녹아 버렸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대령은 자신의 판단이 최악의 덫으로 연대를 인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후퇴하는 게 좋겠군. 후퇴 명령을.”
연대장이 후퇴 허가를 내리자 살아남은 기수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제국의 기병들이 돌격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괴멸당한 수치스런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