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오로목제 (4)
도시가 불타올랐다. 잔인한 정복자는 과거에 번창했을 비단길의 요지, 오로목제를 철저하게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제국의 이름 앞에 반기를 든 자들을 응징함으로써 ‘본’을 보이려는 의도에서였다.
승도는 아비규환의 도가니에 빠진 도시를 말 위에서 굽어보았다. 언제나 전쟁에서 패한 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과 굴욕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패자들에게 잔인하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이 전쟁에서 진다면 신이, 그리고 그의 세계가 같은 운명을 맛볼 것이기 때문이다. 신사적인 전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마상에서 불타는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데, 장교 몇이 그 옆으로 말을 몰아왔다. 막 입성한 1여단의 무자비한 살육을 지켜보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던 서역인들이 입을 열었다.
“각하, 반적들을 철저히 응징하여 본을 보이려는 생각은 십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적절한 선은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1여단은 지금 여자와 아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며 파괴하고 있습니다.”
승도는 그 말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러라고 지시했습니다.”
“너무 잔혹하다는 말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전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릴 만큼 우리의 힘이 강합니까? 그런 사치스런 고민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승도는 장교들의 말을 잘랐다. 그는 대막 침공을 시작하기에 앞서 ‘잔혹한 구상’을 밝힌 바 있었다. 폭압적인 점령지 정책으로 대막 유목민들을 루시의 영토로 쫓아 버리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 수단으로써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말살 정책’을 내놓았다. 사실 이러한 방법은 과거 중원의 왕조들이 몇 차례 시도한 것이기도 했다.
승도는 망원경을 든 채 자신이 만든 지옥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여자들. 그리고 그 뒤를 추격하는 병사들. 버려진 채 우는 아이들. 자신들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마주 들었다가 죽는 남자들. 한 폭의 잘 그려진 비극이 그 눈앞에 있었다.
인간적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자비를 베풀어 학살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을 적에게 보여선 안 되었다.
지금의 그는 유목민들에게 가장 잔인한 ‘악마’이자 ‘파괴자’로 인식되어야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침략자. 그 손에 들어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야 유목민들이 대막에서 달아날 것이다.
그는 타오르는 도시를 지켜보다 당과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다디단 당과의 맛이 혀에 닿았지만, 왜인지 무척 쓰게 느껴졌다. 자신의 딸과 아내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이 지르는 비명 때문일까? 아마 그럴지도 몰랐다.
승도는 입에 넣은 당과를 씹어 삼키고는 망원경을 내렸다.
‘이것도 못 할 짓이군.’
무수한 전쟁을 치른 그도 오래 지켜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 자신이 내린 명령의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망원경을 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승도가 고개를 흔들자 장교 하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피곤하십니까?”
승도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마음 한쪽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자비한 살육의 명령을 내리고 그 ‘학살의 무게’를 짊어지는 만큼 피로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무게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감정이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
“조금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승도는 장교의 권유를 받아 새로 쳐둔 군막으로 향했다. 보통의 권력자라면 ‘편의’를 위해 호화스런 마차를 하나 준비해놓고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병사들에게 불필요한 위화감을 주면 그만큼 그들과의 유대감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병사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친밀감이 얼마나 큰지 아는 승도로서는 그런 멍청한 짓은 피했다.
그가 군막으로 들어서자 하인 몇이 약간의 물을 준비했다. 손과 발을 씻을 물이었다.
승도는 대야에 담긴 물을 보다 손을 저어 그것을 물리게 하고는 냉수 한 잔만을 취했다. 그 물을 마시고 그는 하인들이 준비해 놓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군막에서 나서자 멀리 보이는 도시는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승도는 도시 쪽을 바라보다 주변이 시끄러워진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병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 온 화려한 복색의 사내 여럿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병사들은 그들에게 발길질을 가해 억지로 머리를 숙이게 한 다음 승도에게 고개를 숙였다.
승도는 옆에 있던 장교에게 물었다.
“이자들은 누굽니까?”
“오로목제에서 잡아온 자들인데 신분이 높을 것 같다고 1여단에서 특별히 추렸습니다.”
“그래요?”
승도는 포로들을 서늘한 눈으로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차림을 보니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끝에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그대들은 혹 족장의 지위를 가진 자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들은 순순히 대답했다. 눈앞에서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며 약탈하는 꼴을 보았기에 뻣뻣하게 굴면 어찌될지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그러지 않더라도 정복자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것은 없었다.
“족장이라면 우리 신의 작위를 받은 사람들일 텐데, 작위가 어떻게 됩니까?”
“후작입니다.”
“백작입니다.”
그 대답에 승도는 생각 외로 거물들이 잡혔다고 여겼다. 신은 전통적으로 왕작 외에도 오등작의 작위를 내렸는데, 이 작위들은 평범한 이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작위를 받으면 바로 제국의 당당한 제후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작이나 백작만 하더라도 상당한 식읍을 받을 수 있는 위치라 대막에서 이 작위를 받은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자들이라면 신생 투르 한국에서도 지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꽤나 높으신 분들이셨군요. 그래, 우리 제국을 배반하고 역당의 무리에 투신해서 오늘 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할 말은 없습니까?”
“죄인이 무슨 할 말을 아뢰겠습니까?”
“부디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선처라, 선처.”
승도는 그 말을 곱씹다 별안간 광소를 터트렸다. 그 웃음에 놀라 두 족장이 고개를 숙였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도시가 불타고 나라가 망하는 판에 고작 한다는 말이 선처를 부탁한다는 겁니까?”
두 족장은 냉소가 담긴 반문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승도는 그들의 태도를 보다 관복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좋습니다. 선처를 베풀어드리지 못할 것도 없군요. 관대하게 처우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재빨리 이마를 땅에 찧었다.
승도는 그 꼴을 지켜보다 좌우에 명했다.
“이자들을 끌고 가 가죽 부대에 넣어 ‘자비로운 최후’를 맞도록 도와주세요.”
승도는 냉혹한 명령을 내렸다. 죄가 없는 민중들도 쓸어버리는 판에 특권층이라고 살려줄 이유는 없었다. 이 처참한 전쟁을 하게 만든 장본인들을 왜 살려주어야 할까?
그는 ‘제국의 귀족’이라는 이유에서 약간의 자비를 내렸다. 초원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가죽 부대 안에 들어가서 말에 질질 끌려 다니며 죽는 죽음이 편안할 지는 의문이지만.
승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족장들이 절규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려 주십시오.”
“일어나, 돼지들아.”
병사들은 절규하는 족장들을 발로 걷어찼다. 질질 끌려가는 족장들을 보던 승도는 장교들에게 재차 명령했다.
“앞으로는 굳이 신분이 높은 자들이라고 내 앞에 끌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세요.”
승도는 딱 잘라 명령했다.
***
‘초원에 악마가 강림했다. 그 악마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의 목숨을 거두어가고 있다. 악마들의 군대를 피해야 한다.’
대막 전역에 소문이 쫙 퍼졌다. 정주민들과 달리 한곳에 정착해 살지 않는 유목민들은 ‘소식’의 전파가 매우 빨랐다.
그들은 오로목제에서 일어난 대학살에 공포를 느끼며 서쪽으로,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목민들이 ‘집단적인 탈출’을 시작하자 대막에 남아 오승도의 배후를 교란할까 생각했던 티무르도 더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병사와 물자를 보충할 방법이 없는 이상 그 후방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백으로 도대체 뭘 한단 말인가? 그나마 그 오백을 먹일 식료품도 구하기 어려운 판이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대령의 기병들과 함께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처럼 탈출이 이어지자 오로목제 학살 한 달 후의 대막 인구는 오승도의 침공 이전과 비교해 삼분의 일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상승군은 이 같은 방식으로 ‘대막의 조기 안정화’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루시 쪽에서는 그렇게 쉽게 안정화시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고약한 방식이었다.
승도는 제국에 빌붙기로 한 친 제국파들을 우대하고 그들에게 ‘군대’를 모으게 하여 병참선을 만들었다. 껄끄러울 수 있었던 후방의 적을 ‘공포 전략’으로 모조리 쫓아 내버린 다음이라 병참선 확보는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향후의 루시 본토 침공을 위해서라도 이 사전 정지 작업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승도는 이 작업을 오로목제에 설치한 사령부에서 지휘하여 단시간에 완수했다.
딸깍.
승도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말을 옮기고 있는데, 옆에서 차 다기가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서기인 엘리자베스였다.
여자는 그가 다기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찻잔을 정리하고 과자의 대용으로 쓸 말린 육포 몇 점을 놓았다.
그녀가 전방까지 온 것은 그만큼 대막이 안정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승도는 엘리자베스가 가져다 놓은 다과를 맛보며 루시에 대한 다음 수를 고민했다. 광활한 곰들의 영토로 침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참의 부담도 부담이지만 군사력의 열세가 가장 큰 문제였다. 제한된 병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상대하며 점령지까지 획득하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거대하기 그지없었던 로망스 대 육군조차 곰들의 영토로 쳐들어가는 과정에서 급속하게 줄어들었던 전례가 있었다. 루시가 잘 싸워서가 아니라 그들의 판도가 너무 넓은 탓이었다.
점령할 때마다 병력을 분산시켜야 하니 수십만 대군을 가진 대 육군이라고 해도 병력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육십만 대군이 북적의 수도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는 겨우 이십만으로 줄었다. 전염병 등의 요소를 감안해도 그 축소의 폭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다 보니 내륙 깊숙이에서 전력을 온존하며 결전을 준비한 루시와의 대결에서 고전을 면하기 어려웠다.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는 얻을 수 없었고 무익한 전투만 되풀이하며 적의 수도까지 확보했지만 병력이 너무 줄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철수 과정에서 이어진 북적의 대반격에 로망스 대 육군은 형체도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병력의 태반이 증발해버려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지금도 북적의 영토로 쳐들어갔다간 그 같은 전철을 반복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방어만 할 수 없었다.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그 전쟁 의지를 확실히 꺾어야 했다.
요컨대, 적의 시비르 통치에 꼭 필요한 핵심 교통로와 도시를 탈취하여 그 지배를 흔들어 놓는 것도 방법이었다. 잃을 것이 눈에 보인다면 그들도 다소 다급해질 터, 강화를 구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수백 마일은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병력이 모자랐다.
승도가 육포를 씹으며 지도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다시 들어왔다. 그녀의 인기척에 승도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비서는 ‘손님이 왔다’고 대답했다.
방문자가 왔다는 말에 내심 궁금하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임시로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제법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서역인이 있었다.
나이는 마흔 정도에 군인처럼 보이는 자였다. 계급이 있다면 대령 정도?
승도는 적당히 상대를 훑은 다음 인사를 건넸다.
“접견을 청했다고 하셨습니까? 듣기로는 루시에서 오신 손님이라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미카엘 대공 전하의 사자입니다.”
“그래요?”
미카엘 대공이라면 승도도 아는 자였다. 그는 지난 북방 전쟁 이후 방어적으로 바뀌었던 극동 정책을 다시 공세적으로 바꾼 자라 승도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여기 전하의 전언입니다.”
“어디.”
승도는 사자가 건넨 편지를 받았다. 고급스러운 크라운 재질의 종이에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문장에는 황금 가루를 뿌려 그 권위를 여실히 돋보이게 했다.
승도는 밀랍 봉인을 뜯은 다음 서신을 꺼냈다.
미카엘 대공의 전언은 아주 간략하면서도 절절한 한마디를 담고 있었다.
‘우리 강화합시다.’
승도는 미카엘 대공의 편지를 읽으며 상대가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렇지만 상대는 ‘강화’를 제안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알맹이가 없는 시간벌이용 제안인 셈이다. 그런 제안을 구태여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승도는 사자에게 물었다.
“여기 강화를 하자는 전언이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공 전하가 따로 전한 말은 없었습니까?”
“없으셨습니다.”
“그럼, 하나 묻겠습니다. 대공께서 별말씀이 없으셨다면 이 제안은 기만으로 보낸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제안은 친필로 손수 적으시며 제게 꼭 답을 받아오라 명하신 것입니다. 기만일 리가 있겠습니까?”
승도는 의자에 허리를 붙였다.
“좋습니다. 그 제안이 진짜라고 믿어드리지요. 그럼 서신을 한 장 써드릴 테니, 가서 쉬도록 하세요.”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자는 공손하게 예를 표한 후 응접실에서 물러갔다. 승도는 편지를 이리저리 매만지다 피식 실소를 지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가 다가오자 승도가 편지를 건네주며 물었다.
“이 제안이 사실일 것 같습니까?”
서역 처녀는 그 편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말했다.
“전형적인 시간벌이용 제안 같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시간벌이용이지요. 그렇지만 이 제안을 하면서 보인 태도가 너무 노골적입니다. 시간벌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눈에 띄도록 보이게 했다면 뭔가 의도가 있겠지요.”
“그 말씀은.”
“이들이 시간을 벌어 뭘 해보려는 속셈인 듯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뭘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 우릴 조급하게 만들 생각이든지.”
승도는 상대의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상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가 이런 수를 던져 무엇을 얻으려는지가 중요했다.
승도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루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우리가 움직이길 바라겠지요.”
“그럼 움직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심리적인 함정일 수 있으니 문제입니다.”
승도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며 입맛을 다셨다.
역의 역을 원하는 전략을 취하며 이 서신을 보냈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적은 현재 일선에 배치된 병력이 모두 날아간 입장이라 정말로 시간 벌기를 원할 수도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간 후 역공을 가하기를 바란다고 한다면 그럴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적의 수준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역의 역을 바란 경우라면 적이 정말 멍청할 수도 있고, 뛰어날 수도 있어서였다. 천재와 바보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듯 이 경우도 거기에 속했다.
정말 멍청해서 눈에 보이는 제안을 보냈다면 말할 필요도 없는 삼류지만, 역의 역을 노리고 제안을 보냈다면 적은 일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생각하게 만들고 나머지 경우의 수, 자신을 루시 영토로 끌어들이게 하는 쪽도 간단히 볼 수 없었다.
그저 끌어들이기를 바란다면 이류겠지만 앞의 두 가지 경우까지 계산하고 끌어들이려는 구상을 해냈다면 대단히 위험한 적수였다.
그런 적은 과거 전쟁 황제 필립의 시절에도 몇 만나지 못했다. 물론 그 중 하나가 루시에 있었지만.
승도는 대공의 서신을 심각한 눈으로 보며 장고에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