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16화 (316/425)

제316화. 전략가들 (2)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이다.’

루시의 전략가 수보로프는 다음과 같은 말로 ‘루시적인 전략’의 모델을 제시했다. 광대한 공간은 적의 그 어떤 전략조차 파탄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변수였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그 전략의 요체라 할 수 있었다.

수보로프의 전략은 조국 전쟁에서 로망스 황제 필립을 대파하며 최고의 전략으로 칭송받았다. 전쟁의 천재조차 굴복시킨 그 전략에 이의를 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전략에도 사실 몇 가지 약점은 있었다.

수보로프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침략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그만큼 적에게 영토가 유린당하는 개념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면 취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실제 조국 전쟁 과정에서도 황제 필립의 군세를 피해 ‘내륙에서의 결전’을 방침으로 세웠지만, 대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압력으로 충분히 적을 끌어들이기도 전에 무익한 전투를 몇 번 반복한 바 있었다.

다행히 로망스 군이 장기간의 원정으로 지쳐 있어 황제 필립에게 결정타를 먹지는 않았지만, 이 정치적 부담이란 부분이 간과할 수 없는 약점이란 것은 분명했다.

약점은 정치적 부담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수보로프의 전략은 적이 내륙 깊숙이 진출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상대가 여기에 걸려주지 않는다면 접경 지역의 영토만 빼앗긴 채 손해만 보고 끝난다는 데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보로프의 전략은 광대한 영토를 필요로 했다. 이 전략의 모든 단점을 감수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토가 작으면 이런 전략은 시행할 수조차 없었다.

오스티아가 필립에 대항해 수보로프의 전략을 시행했다면 로망스 군대가 지치기도 전에 수도가 간단히 함락당하고 영토의 핵심부가 모두 점령당하고 말 것이다.

이 같은 단점이 있다 보니 수보로프의 전략을 실제로 강행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는 그런 자신의 나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떤 적이 오더라도 패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연합왕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눈 아래로 여겼다.

그의 원대한 세계 전략에서 유일한 적수는 강대한 해상 제국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그의 눈치를 보는 비루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는 요리사가 내온 철갑상어 찜과 어린 사슴 구이, 고급 치즈와 송이를 곁들인 거위 요리를 맛보다 맞은편에 앉은 어린 대공 비에게도 같은 그릇을 가져다주게 했다.

금발의 소녀는 황제가 권한 음식을 사양하지 않고 맛보았다. 그녀가 식기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보며 황제는 일상의 평온함을 느꼈다.

거대한 대제국의 황제라 해도 사람인 이상 가끔은 ‘인간적인 안온함’에 잠기고 싶어 했다. 그는 그 기분을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막내딸 마리아 대공 비와의 식사에서 얻곤 했다.

마리아가 송이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을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홀의 문이 열렸다. 황제는 찬바람이 훅 들어오자 인상을 쓰며 열린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은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다음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넸다.

“폐하, 동방에서 급히 들어온 소식이 있습니다. 전쟁 계획 위원회의 세르게이 원수가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전쟁 계획 위원회에서?”

황제는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 대공 비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알현실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는 인기척이 있었다. 시종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 황제의 도착을 알리자 고관 하나가 급히 예를 표시했다.

그는 그만 자리에 앉아도 좋다고 말하고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황금 의자에 앉았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원수는 알현을 청한 용건을 밝혔다.

“폐하, 오늘 오전에 긴급한 소식 하나가 동방에서 날아왔습니다. 무도하고 미개한 신의 야만인들이 폐하의 군마를 공격하고 폐하께서 승인하신 투르 한국의 국경을 범했다는 소식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원수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폐하. 야만인들은 우리의 군대를 공격하고 폐하께서 승인하신 나라를 침략했습니다. 우리 제국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그 야만인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우리에게 도전을 했단 말인지 모르겠군.”

황제는 원수가 미리 가져다 놓은 전문을 읽어보고는 혀를 찼다.

“폐하, 이 문제는 가볍게 보실 사안이 아닙니다. 동방에서의 우리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패한다면 그렇겠지만, 짐의 군대가 그리 우습지는 않지 않소?”

황제는 조금 전의 당혹감을 떨치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세계 수위를 다투는 열강의 지도자로서 자국에 대한 긍지가 배여 나는 말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서전에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셔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필요하다면 미카엘 대공이 새로 전령을 보내 원조를 요청하겠지. 그렇지 않소?”

황제의 반문에 세르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야만인들이 우리에게 도전을 했다면 필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터. 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연합왕국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례한 것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짐이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는데, 저들이 이런 모험을 강행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소.”

황제는 연합왕국이 신이란 장기짝을 앞세워 도전을 해왔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게 여겨졌다.

지금은 연합왕국이 국력을 기울여 신을 도와줄 입장도 아니었고, 로망스와 루시의 사이도 조만간 개선의 일로를 밟을지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런 판에 연합왕국이 에우로페 바깥으로 눈을 돌려가며 루시와 대치를 한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물론 신에 대한 남하를 견제하는 포석에서 제식민 제국에 군대를 전진 배치하는 수를 두긴 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작금에 와서 우리에게 손을 쓰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무리수를 두었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원인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경의 생각대로 연합왕국이 그들의 배후에 있다면.”

황제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우리 입장에선 확실히 그 수를 깨부수는 것이 최선이 되겠지. 그렇지 않소?”

“옳으신 판단입니다.”

“그럼 기왕 일을 하는 것 확실하게 준비해 두도록 하시오. 만에 하나 미카엘 대공이 지원을 청한다면 어느 정도의 병력을 요구할 것 같소?”

“생각하긴 어렵지만 서전에 다섯 개 연대가 모두 박살이 났다고 가정한다면 최소 여덟 개 연대 이상을 요구해올 겁니다.”

“여덟 개 이상이라. 어렵지는 않은 숫자군. 전쟁 계획 위원회에서 준비할 수 있는 육군 부대는 얼마나 되오?”

“이곳 페테르부르크 관구에서 한 시간 안에 여섯 개 연대, 그리고 중앙 관구에서 네 시간 안에 열 개 연대, 그 외의 지역에서 삼 주 이내에 삼백 개 연대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혹 지원을 요청한다면 충분히 차고 넘치는 병력을 보낼 여유는 있습니다.”

“병력이야 충분하다지만 그걸 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니요?”

“물론 그렇습니다.”

황제도 그 거대한 대군을 모두 동방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최대 열 개 내외의 연대를 보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 이유는 시비르의 특성 때문이었다. 시비르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볼모지가 대부분인 땅이라 농작물조차 자급이 되지 않는 땅이었다.

말하자면 이곳 ‘본토’에서 시비르에 주둔하는 병력이 요구하는 ‘식료품’까지 전부 열악한 교통로를 통해 지원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부담이 있다 보니 시비르 전역에 유지되는 루시의 군대는 기껏해야 열다섯 개 연대를 넘지 못했다. 거기에 열 개 연대만 더해도 시비르와 에우로페 간의 병참선은 그 과중한 부담으로 질식할 것이다.

“일단 경이 지원 요청이 오는 즉시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원군을 편성하는 작업을 지휘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하나 더.”

“하명하십시오.”

“이번 건에 그 연합왕국 놈들이 끼어 있다면 다른 방면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수 있으니 국경에 경계령을 내리고 전쟁성 대신을 내 방으로 보내주시오. 알겠소?”

“예, 폐하. 모든 것은 신께서 가호하시는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러가시오.”

세르게이 원수가 허리를 굽힌 다음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황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전문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연합왕국 놈들은 도대체 무슨 승산을 보고 이 도박을 벌인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놈들이야.’

***

승도는 국경 지역에서 2여단이 고전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적지 않게 실망했지만 재빨리 전략의 수정에 착수했다.

그에 따라 2여단 쪽으로 화력을 보충해줄 목적에서 3여단을 후방으로 돌려보내고, 1여단만으로 공세를 이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적 병력이 엄청나게 줄어든 상황이라 1여단만 가지고도 싸움은 해볼 만했다. 중요한 것은 본국과의 연락을 유지하도록 후방을 평정하는 것이었다.

승도의 전략적 선회에 따라 상승군은 겨우 3,500명으로 이루어진(그간의 진격 과정에서 비전투 손실 등으로 이탈자가 꾸준히 발생) 1여단 하나로 수백 마일을 나아가며 적과 겨루는 난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상승군의 전력이 이처럼 뜻하지 않게 대폭 줄어들자 루시의 장성들은 ‘일전’을 한 번 겨루어 보아도 좋지 않은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보로프의 전략에 기초하여 계속해서 결전을 회피하려는 알렉세이의 방침에 불만을 가졌다.

그 불만의 목소리가 계속 높아지자 알렉세이도 별수 없었다. 그는 교전을 벌이는 것이 상당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승도의 역량을 시험할 겸 한 번 싸움을 벌이기로 했다.

그가 고른 전장은 시비르 관구의 중심인 부하라로 통하는 주된 교통로의 하나인 ‘알바 호반’이었다. 이곳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메말라 붙은 호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초지였다.

이 초지를 전장으로 고른 이유는 호수의 가장자리에 남은 나무들 때문이었다. 물이 차올랐다 메마르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 주변에는 숲이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 숲은 군대의 움직임을 가려주는 좋은 차폐물 역할을 하는 동시에 ‘화력’에서 열세일지 모르는 루시 군대에게 좋은 우군이 되어줄 수 있었다.

전투가 유 시계 전투(근접전)가 된다고 가정하면 승산은 충분했다.

알렉세이가 알반 호반에 병력을 포진시킨 채 도전의 뜻을 보이자 부하라를 향해 진격하려던 승도도 그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배후에 적을 남겨두고 전진할 경우, 이 호반의 적과 진격 도상에 남아 있을지 모를 적이 뭉쳐 협격을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승도는 이 위험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알반 호반으로 1여단을 진출시켰다.

상승군이 호반으로 다가오는 동안, 알렉세이는 호반의 숲에 3개 연대를 숨겨두고 1개 연대를 메마른 호수에 포진시켰다. 적이 미끼를 물어 호수로 들어오면 세 방향에서 협격을 가해 괴멸시키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석양이 깔리는 호반 앞으로 대규모 군마가 나타났다. 그들은 황룡의 깃발을 들고 있었고, 하나같이 검은 군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신의 최정예. 오승도 정권이 자랑하는 최강의 군대, 상승군 제1여단의 병사들이었다.

용병들은 그들을 상징하는 여단의 깃발을 황룡기 옆에 나란히 매단 채 걸음을 멈추었다.

승도는 정지한 병사들의 앞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그 앞으로 광대한 숲이 모습을 보였다. 그 숲 안에 자리한 메마른 호수에 적의 연대 하나가 군영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사전 정찰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을 들고 숲을 살핀 다음 장교 몇을 불렀다.

“숲에서 본인이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부족해서 묻는 겁니다. 숲에서 교전을 벌일 때 일반적으로 화력의 감소 폭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합니까?”

“거의 8할 이상은 줄어든다고 보셔야 합니다. 거기다 아군의 기관포도 가지고 들어가기 어려운 지형이라 화력 감소는 9할 이상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승도는 그 대답에 턱을 가볍게 만졌다.

“그렇다고 한다면 적이 호반에 진을 친 이유도 알 만하군요. 이곳이라면 화력의 열세를 경감할 수 있을 테니.”

승도는 적이 기관포에 혼쭐이 난 터라, 화력의 열세를 경감하기 위한 조처로 이곳을 전장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구태여 호수에 진을 친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 이유는 짐작이 가능했다.

‘분명 호반의 숲에다 병력을 숨겨두었을 테지.’

그는 적의 의도는 짐작했지만 상대가 얼마나 많은 병력을 숲에 숨겨 두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숲으로 그냥 들어서기엔 문제가 많았다.

일단 숲에 들어서면 기동력이 크게 상할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한 지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승도는 그 생각을 하다 자신이 그간 유용하게 써먹었던 병기 하나를 떠올렸다.

‘열기구를 쓰면 숲에서도 지휘는 가능하지.’

하늘을 가릴 정도의 숲이라면 열기구도 소용이 없겠지만 이곳의 나무들은 적은 양의 수분을 섭취하며 살아야 하는 종이라 그 키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잎도 풍성하지 않아 하늘에서 내리는 명령을 지상에서 수신하긴 쉬웠다.

공중에서의 정찰까지 쉽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래도 숲은 숲이다. 높은 하늘에서 숲에 가려진 적 병력의 규모와 배치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승도는 생각을 마치고 장교들에게 숲으로 들어갈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각 부대는 중대 단위로 나누어졌다. 대부대 단위로 운용하려 해도 숲에서는 비효율적이었다. 소부대 단위로 운용하는 편이 차라리 편리했다.

승도는 대대급 부대 지휘관들을 열기구에 태워 각 부대를 동시에 통솔하게 하는 한편, 지상의 부대들은 열기구에서 관측하며 지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색상의 천을 깃발에 함께 끼워서 들고 다니도록 했다.

이 같은 조처로 지휘관이 숲에서 움직이는 부대의 위치와 행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통솔할 수 있었다.

승도는 대강의 지시를 마친 후 자신도 열기구에 올랐다. 부대 지휘는 각 지휘관들이 눈이 빠지게 천을 보며 할 테니, 승도 자신은 열기구에서 같은 열기구들에 타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신호를 보내 지휘를 하면 그만이었다.

열기구가 준비되자 승도는 여단장과 더불어 그것에 탑승했다. 공병들이 줄을 당기며 열기구의 상승을 조절하는 동안, 승도는 망원경을 들고 숲을 내려다보았다.

지도에서 보고 판단할 때와 달리 숲은 생각보다 넓고 광활했다. 이 광대한 숲에서 지도만 보고 지휘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지휘관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눈으로 보고 지휘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개별적인 전투가 될 수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화력을 상쇄하고 최고 지휘관의 역량까지 봉쇄하는 이상적인 곳이다.

승도는 이 전장을 고른 적의 안목에 경의를 표시했다. 상승군의 장점을 정확히 상쇄할 수 있도록 최적의 자리를 골라낸 점은 칭찬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상대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넓은 세계를 보고 사고의 지평을 넓힌 자였다.

이번 싸움은 적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의 전술적 역량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화력이 봉쇄된다고 해도 그는 전쟁의 천재, 에우로페를 평정한 전쟁 황제였다. 그의 역량이라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싸울 수 있었다.

거기다 그에게는 ‘용병’들이 있었다. 근접전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상승군의 최정예 병력.

연합왕국조차 근접전을 벌이기를 꺼려하는 전장의 악마. 십만 대군을 토막 쳐 한 식경 만에 박살내버린 대륙의 전설. 그가 지금 꺼낸 카드는 바로 그런 병사들이었다.

그의 전술과 용병들이 있는 한, 이 싸움에 승산은 충분했다.

승도는 자신에게 승산이 충분하리라 여기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 싸움만 이기면 부하라까지는 별 무리 없이 곧바로 전진할 수 있다. 그러면 적이 증원 병력을 보내오기에 앞서 부하라를 확보하고 중장기전에 대비한 물자 비축을 할 수 있겠지.’

그의 생각대로만 풀린다면 루시는 시비르 전역에 대한 통치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강화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단시간에 부하라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그 방법밖에는 없을 테니까.

적이 구걸하는 강화만 끌어낸다면 동방에서 신의 위치는 확고해질 것이다.

열강조차 쉽게 넘볼 수 없는 군사강국으로, 동시에 열강을 공격해 승리한 국가로서 번 속국들로부터 패권도 확실히 인정받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신은 반석에 선다. 그의 가족과 가문을, 그의 이익을 지킬 번듯한 울타리가 자리 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과정의 하나였다.

승도는 주먹을 가볍게 쥐어 보인 다음 망원경을 들었다. 멀리 그를 도발한 자, 알렉세이의 군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승도는 그 군영을 보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한바탕 싸움을 벌일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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