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18화 (318/425)

제318화. 전략가들 (4)

검은 군대는 대륙을 휩쓰는 재앙, 메뚜기 떼처럼 몰려왔다. 소리를 지르며 내달려오는 적을 본 흰 군복들은 소총을 잡았다. 그들에게는 잘 준비된 진지도 있었고 대포도 있었다.

적을 상대할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불안감이 치밀었다. 검은 물결 속에서 포효하는 적 보병들의 외침 때문일까?

“모두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장교가 외치고 고참병들이 그 말을 받아 외쳤다. 병사들은 재빨리 총탄을 장전했다. 볼가닌도 종이포를 입에 물고 사격을 준비했다. 그사이에도 적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 왔다.

“조준!”

장교가 날카롭게 명령했다. 병사들은 그에 반응해 총구를 적 쪽으로 향했다. 이제 사격 명령만 내리면 된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며 적을 보는데 적병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쿠크리를 들고 금방이라도 그들을 향해 돌격할 것 같았던 적은 제자리에 멈춘 채로 칼을 내려놓았다. 대신 등에 차고 있던 총을 꺼냈다.

볼가닌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적은 돌격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총을 쥐었다. 신형 소총이라고 해도 라이플이 아닌 이상 사거리는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흰 군복들은 적이 무슨 생각인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후방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알렉세이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를 발견했다. 적 보병들은 ‘무작정’ 돌격하다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묘한 대열을 갖추고 정지해 있었다.

루시 군대의 보병 연대가 구축한 긴 전열을 반원형으로 압박하는 형태로 말이다.

반원형으로 직선을 어떻게 압박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수학을 알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곡선은 직선에 비해 같은 공간에서 보다 긴 길이를 자랑했다.

긴 길이만큼 병사들이 일선에 더 서서 화력을 발휘한다고 가정한다면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알렉세이는 적이 서역인들의 심리, 즉 야만인들이라고 얕보는 ‘고정관념’을 역으로 이용해 유리한 한 수를 손쉽게 차지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적이 보인 수부터 간단한 것은 없었지만 적은 사소한 것 하나부터 이익을 챙겨가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 하나가 먼저 ‘큰 그림’을 그리고 판을 짠 그의 의도를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었다.

‘놈은 일류다.’

알렉세이는 경각심을 높이며 기수에게 명령해 전열의 병사들에게 교전을 준비하는 대신, 몇 발 물러서라고 명령했다. 적이 전진해와 총격을 퍼붓는 즉시 순식간에 패배로 흐를 흐름을 예감해서다.

기수가 신호를 발하자 흰 군복들이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북소리와 함께 흰 군복들이 물러서자 테이블에서 포도주를 들던 장군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망원경을 들었다 놓으며 분주하게 명령을 내리는 알렉세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알렉세이 경, 그리 어렵게 생각하며 지휘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교전을 벌여도 우리 전열을 돌파할 능력은 없을 겁니다. 그 상태에서 배후 공격을 받으면 적이 무슨 재주로 승리를 꿈꾸겠습니까?”

“느긋하게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야만인들의 움직임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장군들의 말에 알렉세이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이들은 지금 자신이 왜 뒤로 부대를 물리라고 지시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야전에서 구른 블라디미르는 이 상황을 알아보았는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알렉세이는 장군들에게 응대하는 대신 포병을 불러 전열의 최 우측으로 대포를 옮기게 했다. 두 문뿐이지만 그것이면 적의 반 포위 압박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어 중앙의 전열을 좀 더 물려 활 모양으로 바꾸었다. 적이 돌격을 해오면 가능한 그 충격력을 상쇄하기 위한 나름의 수였다.

알렉세이는 병사들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망원경을 들고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적은 아군이 물러나는 것을 보자 재빨리 따라오는가 싶더니 그 움직임이 다시 멎었다. 이쪽이 물러나며 대열을 재편한 것을 확인한 듯했다.

이쪽이 반응을 보이면 즉시 대응을 한다. 적은 손해를 보는 싸움을 하려 하지 않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상당히 까다로운 적이군. 손실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건가?’

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손실을 무릅쓰는 전투를 종종 치러야 했다. 적을 기만하기 위해 거짓으로 패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적의 주력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하기 위해 약한 부대를 던져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가 손실을 감수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그런 교전 방식을 할 수 없다면 일류가 될 수 없었다. 분명 적은 손실을 감수하는 전투를 할 필요성은 있었다.

숲에 아군의 병력이 더 남아 있을 거란 사실은 적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단시간에 호수의 아군 연대 병력을 전멸시키고 협공의 가능성을 분쇄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류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도 판단력은 이류.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가 승도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것은 나름의 제약에 묶여 최상의 실력을 낼 수 없는 여건 때문이었다.

상승군은 제한된 병력과 원정군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안고 있었다. 거대한 대군과 본토라는 이점을 가진 루시 군대와 싸움에 있어 손실은 최대한 피하고, 그러면서도 단시간에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모순된 목표를 달성해야 하다 보니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회가 보이면 움직이지만 손해가 눈에 보이면 수를 두기를 꺼린다. 이것이 오승도가 현재 보이는 행동 패턴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다. 시간을 준다면 우리야 고마운 일이다.’

알렉세이는 보병이 숲의 삼면을 차지하고 적을 협격해오면 그때는 승기가 확실해질 거라 믿었다. 물론 적 보병이 숲 전투에서 보인 초인적인 전투력을 감안하면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생각을 애써 떨치며 멈춘 적 보병의 전열을 주시했다.

검은 군복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대신 망원경을 움직이던 그의 눈에 이색적인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건.’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하늘을 나는 기구였다. 그는 그것을 본 순간 적이 어떻게 숲에서 유기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는지를 알았다.

저런 수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내심 탄복하면서도 상대의 패를 모두 읽었다고 생각했다. 적이 열기구를 이용해 ‘넓은 시야’를 자랑하긴 해도 특별히 내세울 패가 더는 없을 듯싶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망원경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려던 차에 흰 군복들의 전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보병 대열에서 일었다. 전열을 활모양으로 재편하며 가장 약해진 끝 지점에 일어난 폭발에 휘말려 병사 여럿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알렉세이는 그 공격에 당황했다. 적이 대포를 숲 안으로 가지고 들어 왔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숲에 길을 내지 않고서는 경포조차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적은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모순의 비밀은 바로 박격포였다.

승도는 조립이 가능한 소형의 박격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 박격포들은 병사들이 짊어지고 옮길 수 있었기에 1여단의 포병들은 그것들을 분해한 다음 숲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상승군이 호수 안으로 들어와 시간을 질질 끈 것처럼 보인 것은 박격포를 조립할 시간을 벌기 위해 보인 여유였다.

그리고 반 포위 압박을 가해 루시 군대가 활 모양의 진형을 치도록 만든 것은 박격포로 최상의 효과를 얻기 위한 한 수였다.

알렉세이는 그 의도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상대가 박격포를 때린 지점이 최악의 장소라는 것은 대번에 눈치챘다.

적이 타격한 지점은 포병을 지키는 가장 얇은 방벽이 있는 곳이었다. 2문의 대포가 무력해지면 이 싸움은 볼 것도 없었다. 포병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그렇지 않은 보병.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장군들도 그 포격을 보고 창백한 얼굴로 바뀌었다.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뜻하지 않게 전투가 어려워질 것처럼 보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승도 각하 만세!”

멀리 적진에서 함성 소리와 함께 적 보병들이 전진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그저 압박으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적 보병들이 발소리를 높이며 다가왔다.

알렉세이가 가까워지는 적 보병들을 보다 기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된 포위를 하기 전에 숲의 보병들에게 원조를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제1중앙 시비르 연대와 제4, 5 서부 시비르 연대에 공격 명령을!”

***

상승군의 검은 파도와 흰 물결이 전열의 끄트머리에서 조우했다. 검고 흰 선이 마주 선 순간 쌍방은 무자비한 총격을 교환했다. 화력 면에서 우세한 쪽은 역시 포병과 후장식 소총의 이점을 살린 상승군이었다.

그들의 가공할 공격에 흰 군복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하나가 쓰러질 때마다 화력의 격차는 급격히 벌어졌다. 상승군은 적이 적당히 줄어들자 총을 집어넣고 쿠크리를 들고 적진으로 쇄도했다.

중포가 산탄을 쏘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 자기편이 섞여 있어 포도 탄 공격은 큰 효력을 내지 못했다. 상승군 병사들은 적병들의 머리를 쳐 날린 후, 단숨에 중포까지 다가가 미리 준비한 못을 박아 넣어 포를 마비시켰다.

알렉세이가 급히 보병을 보내 대포 쪽을 지원하게 했지만 상승군은 목적을 달성하고 재빠르게 뒤로 빠졌다.

그들이 유연하게 뒤로 빠진 다음 박격포들이 연대를 두드렸다. 일방적인 포격에 루시 보병들의 전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상승군이 그 상황을 보고 마지막 돌격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으려 한 순간, 그들의 배후에서 대규모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기구 위에서 상황을 관제하고 있던 승도는 그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부분의 그림을 읽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던 그였지만 한 번 ‘오판’을 저지른 바람에 숲에서 나올 적의 규모를 잘못 계산하고 말았다.

승도는 급히 전방에 전개된 병력에서 각각 1개 대대씩 차출하여 좌측과 우측 측면을 막게 했다.

후방에 대기시킨 하나의 예비대로 저지하기에 적은 너무 많았다. 물론 숲에 남겨진 예비대는 ‘야생의 전사’들답게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해 상승군의 뒤로 들어오는 적은 모조리 목을 쳐 날리고 있었지만, 측면으로 오는 적까지 막기엔 수가 너무 적었다.

상승군은 정면에서 상대하는 적까지 더해 세 방위에서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온통 사방에서 총격이 오가는 통에 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흰 군복들이 곳곳에서 밀고 들어오자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총격이 오갔다. 흰 군복들이 안전한 후방까지 들어오면서 상공에 떠 있던 열기구에도 총탄이 날아왔다.

몇 번의 총격이 이어진 끝에 승도와 동승했던 여단장 헨들릭도 총탄을 한 발 맞았다. 그는 어깨에 총을 맞고 급히 몸을 움츠렸다.

승도는 이를 갈면서 적이 판 함정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신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역시 ‘판’ 자체를 꽤나 질척하게 만든 상대의 수완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적이었다면 애초에 오판할 여지조차 없었을 테니까.

‘교전이 난전 양상으로 변했어. 이건 곤란하다.’

승도는 망원경을 내린 다음 전장을 유심히 살폈다. 측면에서 밀고 들어온 흰 군복들은 박격포를 노리며 전진해오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을 빨리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전장을 훑다 이에 대응할 적절한 수를 찾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명령을 신속하게 전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손을 들어 공병들에게 신호를 보내 열기구를 내리게 했다. 공병들이 줄을 당겨 열기구를 내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대응 방법이 착착 구상되었다.

생각을 마친 승도는 열기구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병사 몇에게 헨들릭의 치료를 맡기고 직접 지휘에 나섰다.

“보병 중대 하나를 박격포 앞으로 이동시키세요.”

“박격포는 우측에 화력을 집중해서 타격점을 형성하세요. 적이 접근할 기회만 주지 않으면 됩니다.”

“좌측은 계속해서 물러나며 시간을 버세요. 거기서 5분만 견뎌주면 수가 나옵니다.”

승도는 쉴 새 없이 명령을 쏟아내며 장교들을 독려했다. 그의 명령에 빠르게 밀리던 상승군은 조금씩 질서를 찾으며 정리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대오가 가지런해지자 먼저 화력의 밀도가 높아졌다. 그렇게 상황이 변하자 측방에서 밀고 들어왔던 적 보병들의 공격도 그 탄력을 잃고 차츰 늦어졌다.

승도는 적의 공세가 둔해지는 것을 보면서 전방에서 전열 전투를 벌이는 병사들을 보았다. 이쪽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연대 규모의 적과 잘 싸우고 있었다. 후장식 소총의 이점 덕분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피해가 꽤 있었다. 전쟁을 자신의 그림대로 그려 손실이 거의 없는 전투를 추구하는 그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국면이었다.

승도가 전국을 보며 다음 수를 궁리하고 있는데 숲에서 장교 하나가 달려왔다. 그는 피칠갑이 된 얼굴로 다가와 보고했다.

“각하, 후면 숲의 적은 모두 목을 잘랐습니다. 이제 우리 대대 병력은 예비대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 보고에 승도는 힘이 났다. 전장의 지휘관에게 예비대는 장기를 둘 수 있게 만드는 장기짝이자 예술가의 붓과 같은 존재였다. 예비대가 없는 지휘관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승도는 반색하며 장교에게 즉시 명령했다.

“숲의 대대 병력을 좌측면의 적을 향해 돌진시키세요. 이쪽을 쓸어버리고 그대로 전진해 전방의 적까지 타격해 이번 승부를 끝내 버리도록 하세요.”

“예, 각하.”

장교가 힘차게 대답하고 숲으로 달려갔다.

승도는 새로운 병력이 전장에 가세하기를 기다리며 박격포의 타점을 전진시켜 우측의 적을 공격하게 했다. 우측의 적이 시의 적절하게 자기 군대를 돕지 못하도록 하는 포석이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숲속에서 함성 소리와 함께 검은 물결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좌측의 보병들과 총격을 나누고 있던 흰 군복들의 배후를 급습했다.

갑작스레 쏟아진 적의 모습에 흰 군복들은 당황했다. 후미 공격에 2개 대대 병력을 할당한 그들로서는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군이 괴멸당하고 배후를 공격당할 가능성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검은 군복들은 성난 물결처럼 닥친 다음 쿠크리를 휘둘렀다. 전열을 재정비하여 화력점을 형성할 기회조차 없었다. 전열로 일단 돌입을 허용한 순간부터 사람 목이 과일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닥치는 대로 목과 팔이 잘려 나가고 총이 바닥을 굴렀다. 대열 사이에 호랑이가 뛰어들어 양들을 도륙하자 흰 군복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 광경을 본 좌측의 검은 군복들도 총을 등에 메고 쿠크리를 뽑아들며 돌격했다.

총은 사람 하나를 죽이기 위해 열 발 이상의 총탄을 쏘아야 했지만 칼은 단 한 번의 칼질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쿠크리가 살육의 주역이 되고 몇 분 되지도 않아 좌측을 공격하던 흰 군복들의 태반이 시체로 변했다. 숲이 아니라 평지에서 벌어진 도륙이라 더 충격적이었다.

피로 칠갑을 한 상승군 보병들은 여세를 몰아 전방의 아군을 도우러 몰려갔다. 순식간에 아군 부대가 연달아 쓸려나가자 총격을 나누던 흰 군복들도 공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적이 아군 대열을 향해 육박해오자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루시 장군들은 급히 말을 가져온 다음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지휘부가 깃발을 들고 후퇴하자 군악대의 ‘후퇴 연주’가 뒤따랐다.

그 연주가 결정적이었다.

아직 교전을 벌이고 있던 전방과 우측의 흰 군복들은 후퇴 명령을 듣기가 무섭게 전면적인 패주 양상을 보였다. 일부는 무기를 던지고 달아나기도 했다.

검은 군복들은 달아나는 적을 쫓으며 쿠크리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메말랐던 호수는 어느새 사람의 시체와 핏물을 잔뜩 머금고 찐득하게 변했다.

승도는 후퇴하는 적을 보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이마에서는 약간의 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흡사 이번 전투는 악몽의 제3차 오스티아 전역을 떠올리게 했다. 그 당시 그는 최전방에 나갔다가 오스티아 대군의 반격을 받아 사단 하나만 거느린 채로 6개 사단의 오스티아 육군에 포위당한 끔찍한 경험을 맛보았다.

그 전투에서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평생에 흘릴 땀을 다 흘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전투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땀을 잔뜩 흘린 모양이었다.

승부의 초반만 해도 압승을 예상했지만 ‘한 번의 오판’ 때문에 중반에서 어려운 싸움을 겪어야 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가 이길 수 있었던 요인을 결과적으로 정리하면 우수한 병사들의 자질과 적의 유기적이지 못한 움직임 덕분이었다.

적은 지나치게 포위 공격을 의식한 탓에 각 부대를 너무 넓게 퍼트려 공격을 했고, 그 바람에 공격에는 허술한 부분들이 있었다.

승도는 그 허술한 부분들을 골라가며 제한된 병력을 적절히 쪼개 방어했고, 그것이 이번 전투를 역전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승도는 땀을 대충 닦아낸 다음 적이 달아난 북쪽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싸움만 보아도 적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자원을 가용할 수 있는 상대인 만큼 앞으로의 싸움은 지금보다 험난하고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패하기 위해 도박을 한 것은 아니지.’

승도는 젖은 손수건을 꽉 쥐어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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