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반격의 조짐 (1)
한차례의 공방전 이후 루시 군대는 더 이상의 교전을 회피하며 지속적인 후퇴를 감행했다.
과거 조국 전쟁 당시에도 로망스 육군을 상대로 무익한 교전을 벌였다가 밀리자 일관된 후퇴로 전환한 바 있어 그 행동을 이상하게 볼 이유는 없었다. 기존의 수보로프 전략으로 회귀했다고 본다면 오히려 타당한 것이었다.
승도는 승세를 몰아 부하라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슬슬 병참을 준비할 필요를 느꼈다. 대량의 가축을 몰고 전진하다 일정 시점에서 이를 육포 등의 완전식품으로 바꾸는 작업을 병행하긴 했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보급을 충당할 수는 없었다.
소모된 총탄과 포탄도 채워야 했고, 전투로 망실된 대포며 피복도 보충이 필요했다. 병사 역시 보충이 불가피했다.
그렇기에 승도는 대막으로 전령을 보내 우호적인 제국파 부족들의 협조 하에 ‘보급 부대’를 운용하도록 지시했다. 보급 부대는 제국의 옥문관에서부터 대막을 지나 루시 국경 지대까지의 물자 운송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물론 승도는 여기에 대한 포상도 약속했다. 자신이 기대하는 목표에 미달하더라도 족장들에게 보다 높은 작위 및 상당한 은급을 주기로 한 것이다.
공포로 강압하기보다 확실한 ‘동기 부여’를 하는 쪽이 배신의 위협을 낮추고 일을 확실하게 할 수 있어서였다.
승도는 병참 문제를 이렇게 매듭짓고 2, 3여단이 합류하기를 기다리며 부하라로 가는 도상의 진격로를 검토했다.
진격 도상은 기마 보병으로 정찰을 시행했다. 병사를 아끼는 차원에서 유목민들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정보’는 신뢰할 수 있는 병사들의 눈과 귀를 빌리는 것이 확실하다는 승도의 판단에 따라 상승군에게 맡겨졌다.
정찰을 보낸 후 승도가 임시로 만들어진 막사 안에서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전령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장교들과 이리저리 토론을 하던 승도는 갑작스런 전령의 도착에 그를 가까이 오게 했다.
전령은 정찰병이 아니라 본국에서 온 병사였다.
승도는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건네받은 다음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장교들은 그가 전문을 읽는 동안 입을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다.
승도는 전문을 모두 훑고는 표정을 찌푸린 채 종이를 내려놓았다.
“무슨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한쪽 팔에서 총알을 빼내느라 붕대를 감고 있던 헨들릭이 물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교들을 향해 말했다.
“본국에서 전문이 왔는데 동영 정부가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막부가 말입니까? 그럼?”
승도는 그들의 웅성거림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대외 무역의 이익이 위협받게 된 셈입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돈을 필요로 하는 오승도 정권에 악재인 소식이었다. 막부가 전복된 것은 전적으로 이 곰들의 농간이 큰 몫을 차지했다.
이제 동영의 패권을 차지했을 신생 동영 정부가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문제였다. 새 정권을 차지한 자들은 막부와 우호적이었던 신에 꽤나 껄끄럽게 굴 것이란 점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물론 대체할 상대가 없다면 행상에게 계속 미소를 보이겠지만, 연합왕국 상인들이 다른 배를 타기로 작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이 ‘부분’도 적절하게 조율할 수 있습니다.”
승도는 단언했다.
신이 루시를 꺾는다면 그의 제국은 수천 년 동안 중원이 누려왔던 전통적인 질서 속의 위치를 다시 공인받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영의 신생 정부 따위가 뻣뻣하게 굴 수는 없었다.
불편하게 굴더라도 행상의 이익을 심각하게 건드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신의 국력이 명백하게 그들의 위에 있다는 사실이 이 전쟁으로 증명이 될 테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국의 패권만 확인된다면 동영은 종속 변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국 장교들도 동의했다. 그렇긴 해도 동영이 우호적인 막부일 때와는 사정이 다르긴 했다. 이익 부분에서도 손해를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 적성국으로 돌아설 수 있는 미묘한 관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승도는 그 점을 구태여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보다 동영의 막부가 전복되었다면 려에도 여파가 있지 않겠습니까?”
장교 하나가 정권 교체의 위험성을 언급했다. 승도도 동영 정부의 교체가 가져올 위험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아마 없진 않을 겁니다. 일단 막부와의 관계가 끊어졌으니 양국 간의 관계는 단절될 것이고, 무역도 마비되겠지요. 하면 경제 규모가 작은 려에 상당한 불황이 찾아올 겁니다.”
려의 대 동영 무역 규모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중요한 화폐의 재료인 구리와 은을 동영에서 거의 구해오는 려인 만큼 그 타격은 적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화폐 불황을 계기로 려의 정권조차 전복될지 모른다. 승도로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도미노였다. 현재의 김씨 정권은 그가 혈연 동맹으로 다져둔 맹방이기 때문이다.
승도는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 루시를 제압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제국을 중심으로 동방의 질서가 재편되면 려의 김씨 정권을 지원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승도가 본국에서 들어온 소식을 가지고 열을 올리는데 병사 하나가 다시 막사로 들어왔다. 아까 보낸 정찰병이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했다.
“각하, 부하라로 가는 도상을 백 리 이상 확인했지만 적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적은 아무런 방어 준비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승도는 보고를 듣고 동방 문제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 문제는 전쟁 이후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적이 부하라까지 길을 비워 두었다는 말입니까?”
“예, 각하.”
“그렇다면 이자들이 부하라까지 그냥 내주겠다는 말인데.”
승도는 턱을 매만졌다. 부하라로 가는 도상은 모두 초원이긴 했지만 방어에 유용한 지형도 없진 않았다. 사발처럼 움푹 땅이 꺼지는 지역들도 더러 있었고, 메마른 강이 흐르며 만든 천연의 방벽도 있었다.
적당히 이용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방어에 이용이 가능한 곳들이었다. 하지만 적은 그 모든 방어 지형을 이용하기를 포기했다.
그 말은 수보로프의 전략대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철저하게 아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여 약화시킨 후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도가 눈에 보였다.
문제는 그 의도를 알면서도 내륙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앞서 ‘동영 문제’와 ‘려 문제’만 생각하더라도 루시와의 전쟁은 길게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가능한 한 빨리 제국의 패권을 확인하여 이들 국가로부터 얻은 이익을 안정적으로 획득해야 제국의 정치, 경제면에 안정성을 유지하기에 좋았다.
전쟁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면 동영은 물론이고 려의 김씨 정권까지 전복될 수 있었다. 거기다 북경의 황실을 비롯한 잠재적 저항 세력들이 꿈틀거릴 여지도 늘 수밖에 없었다.
승도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이런 부분들을 해결하자면 역시 단기적으로 루시의 강화를 끌어내는 수가 최선이었다. 처음에 부하라 점령을 입안했던 것도 정치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수보로프의 전략입니다, 각하. 아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여 결전을 벌이려는 의도가 자명합니다. 진격은 재고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도 위험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 내륙에서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과 대치할 경우 아군은 필패일 수 있습니다.”
승도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군이라고 해서 항상 유리하지는 않았다. 대군이라고 해도 한 전장에 투입 가능한 전력이 적다면 그 상대는 대군이 아니라 ‘약소한 규모의 적’ 여럿에 지나지 않았다.
부하라를 점령한다면 내선의 이점을 살려 대군을 격파할 여지가 있기에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마냥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대군이 아니라 ‘병참 문제’가 신경 쓰였다. 대막의 유목민들에게 병참을 맡기긴 했지만 그들에게 맡긴 부담이 너무 컸다.
옥문관에서 대막을 지나 루시 국경 근교까지 막대한 양의 물자를 운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위험은 사실 생각하기도 쉽지 않았다. 물자를 실은 가축에 전염병이라도 돈다면?
혹은 국경 지대에서 대막에서 밀려나간 대막 유목민들의 공격을 받는다면?
이런 부분들은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이었기에 생각 이상으로 일이 꼬일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물론 승도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최소한의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은 이미 군내에 확보해두고 있었다.
“적의 수적 우세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부분이라면 본관의 능력으로 충분히 타개할 수 있습니다. 문제라면 전쟁이 길어져도 루시가 강화를 해오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루시가 시비르 통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장기전을 택한다면 승도는 최악의 곤경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만큼 감수해야 할 몫이기도 했다.
승도는 장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부하라 진격에 대한 부분을 조율했다.
***
알렉세이는 호반에서 벌인 전투 덕분에 다소 편한 입장이 되었다. 장성들은 그 전투에 얼이 빠져 그 이후부터 그의 전략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 점은 확실히 좋았지만.
‘문제는 적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단 거였지.’
사면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며 전투력을 발휘한 강인한 군대도 인상적이었지만, 임기응변의 잔 수를 연달아 내며 루시 군대의 우세를 반감시킨 적장의 솜씨도 눈부셨다.
그가 적장의 입장이었다면 소부대를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정확하게 시간을 벌어낼 수 있었을까?
‘그렇진 못하겠지.’
알렉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미카엘 대공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똑똑.
“들어오시오.”
대공은 자신의 소파에 앉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최근에 보고한 전황 보고를 읽고 있었는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대공이 음료를 한 모금 넘긴 다음 말했다.
“전황 보고를 보았는데 호반에서 적에게 패했다고 들었소. 당신이 나섰다면 그래도 호된 맛을 보여주리라 믿었는데, 어떻게 된 거요?”
“적의 실력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방의 군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전방 5개 연대를 날려버린 순간부터 그 점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니 확실히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적은 일류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류? 에우로페의 기준으로 말이요?”
대공이 뜻밖이란 듯 물었다.
알렉세이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는 빛을 담아 긍정의 뜻을 내놓았다.
그가 본 것처럼 상승군은 이미 일류의 군대로 거듭나 있었다. 강주에서 연합왕국과 겨루던 시절만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삼류였다. 에우로페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수준 이하’의 군대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 기간 훈련을 거듭하고 실전 경험을 쌓으며 강해졌다. 비단 알렉세이가 본 1여단 병력을 제외하더라도 상승군은 충분히 강력했다.
거기에 최신예 병기를 들려주었으니 에우로페의 그 어떤 강군과 자웅을 겨루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질적으로 뒤지는 쪽은 오히려 루시였다. 에우로페 이류의 군대를 가지고 일류라 평할 상대와 비교하니 부족한 것밖에 없었다. 장교들은 적에 비해 경험이 모자랐고, 장성은 무능했으며 병사들은 용기와 기술이 밀렸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싸운다면 수적 우세가 ‘압도적’이지 않은 이상 승산은 없었다. 과거 6일 전역을 치른 전쟁 황제 필립 정도의 천재가 아니고는 무리였다.
“제가 보고 경험한 바로는 그랬습니다, 전하.”
“경이 그렇게 보았다면 그렇다고 생각하오. 그러면 부하라를 내주어야 하겠지. 그렇지 않소?”
장군들이 결전을 치러보면 부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우겨 ‘한 번 야전’을 벌여보긴 했지만 결과는 보는 대로였다.
“맞습니다. 당초 계획대로 부하라를 내주고 100마일 후방에 진지를 구축하며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100마일 후방이면 도시가 아니라 민가도 보잘것없는 오지의 마을인가.”
대공은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입맛이 뚝 떨어졌다. 민가에는 쥐와 벼룩이 들끓어 고귀한 황족이 머물기엔 불쾌한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불편을 따져가며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렉세이는 그런 대공의 심기를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면 역시 본국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원 요청은 보내셨습니까?”
“그건 보내두었소. 길어도 몇 주 안에 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할 예정이니. 내 절절한 편지를 보았다면 전쟁 계획 위원회에서도 연대 열은 보내주지 않겠소?”
알렉세이는 대공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 열이면 승산은 충분합니다.”
“한데 좀 더 확실하게 몇 개 연대를 더 부르지 않고 왜 열 개요?”
대공이 물었다. 제국에는 남아도는 것이 군대였다. 백만 대군이라는 말에 걸맞게 제국 육군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전시 동원령이 내려지면 제국 육군은 자그마치 백이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갖추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군이 보유한 보병 연대만 오백을 넘어가게 된다.
평범한 국가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중부와 서부 에우로페 모든 국가의 연대를 합쳐야 나올 만한 숫자라고 할까.
연합왕국이 루시를 상대로 직접 육상 전력을 투사하려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병참 문제 때문입니다.”
“그거라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본국과의 교통로에서 지탱 가능한 병참 한계는 좀 더 높지 않았소?”
대공이 묻자 알렉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계신 부분은 정확하지만 계절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알렉세이의 대답에 대공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계절은 바야흐로 겨울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북방의 혹한은 평소보다 동물과 사람의 에너지를 쉽게 앗아가곤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본국과 시비르 간의 교통도 상당히 나빠지기 쉬웠다.
이렇게 되면 병참에도 악영향이 미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물자를 운송하는 동물들이 동사하거나 혹은 추위로 보급품이 파손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전선’을 생각해두고 병력을 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을 간과했다간 병사들이 전장에서 굶주리는 일이 벌어지기 십상이었다.
“이해했소. 그건 그렇고, 경에게 다소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해줄 것이 있으니 한 번 보시오.”
대공은 아까 읽고 테이블 위에 남겨둔 전문 하나를 알렉세이에게 건넸다.
알렉세이는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읽었다. 몇 번 전문을 읽은 그가 조금 밝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동영의 정부가 전복되었다면 꽤나 유쾌한 일이군요.”
“그런 셈이오. 돈줄이 하나 마르게 되었으니 신은 좀 더 다급한 입장에서 우리를 공격해오게 될 터, 시간을 가지고 전역을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선 잘된 일이 아니겠소?”
“맞습니다. 적이 다급해진 만큼 그 입장을 찌르기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소.”
“무엇이 말씀입니까?”
알렉세이가 물었다.
“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100마일을 더 밀고 들어오면 우리는 어찌해야 되겠소?”
“더 물러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잖소. 유목민들을 생각하시오.”
대공의 말에 알렉세이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그는 그 생각을 하고 보니 이쪽도 마냥 유리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망할 놈의 적은 대막의 유목민 수십만을 루시 영토로 계속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수십만의 통제 불가능한 인구가 루시 영토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제국군과 행정망이 더 후방으로 물러난다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까?
‘제국 영토에서 독립국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알렉세이는 적이 이쪽을 생각지도 못한 올가미에 밀어 넣었다는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실로 간단히 생각할 사안은 아니군요.”
“그렇소. 그 문제 때문에 부하라에서 물러나더라도 약간의 지연을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소.”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물러났다간 제국 영토에 불미스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여기에 대한 보완 대책을 강구해 보시오. 내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도록.”
대공의 주문에 알렉세이는 허리를 굽혔다.
“전하께서 안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알렉세이는 대공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방에서 나온 알렉세이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적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위협적인 한 수를 두고 있었다. 그도 나름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은 상식 밖의 수를 두며 커다란 판을 짜고 있었다.
상대는 역시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니었다. 과연 루시를 선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위험한 적이었다.
‘전통의 적 우스만, 아니 오스티아의 위협에 준하는 위협으로 간주할 만한 상대다. 다시 한 번 신중을 기해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알렉세이는 입술을 깨문 다음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대공의 방에서 멀어져가는 그의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