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7화. 도박사 (2)
알렉세이는 포성을 듣고 부대를 급하게 이동시켰다. 적이 자신들에게 선공을 걸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긴 했지만, 서쪽의 부대부터 타격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려면 이쪽의 움직임을 정확히 계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설마 적이 암호를 빠르게 해독이라도 했단 말인가?
알렉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암호는 장교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단시간에 해독할 수 없었다. 일부러 ‘불명예’를 저지른 장교들을 골라 보낸 만큼 입을 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상대는 우리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쪽의 작전을 짐작하여 움직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론상으론 가능한 일이다. 수상한 낌새도 있었고, 이쪽이 협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초급 장교도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정확히 읽고 움직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론상으로 가능할진 몰라도 불확실한 가능성에 군의 명운을 걸고 움직이려면 보통의 확신만 가지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적은 이번에도 우리보다 한 수 위에서 움직인 셈이다.’
알렉세이는 솔직하게 상대의 역량을 인정했다. 연거푸 허를 찔린 상태에서 적을 과소평가해 좋을 것은 없었다. 적의 역량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가지고 대적해야 했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기병 장교 하나가 급히 보고했다.
“적이 정면에서 접근 중입니다, 각하. 아군을 노리며 정확히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알렉세이는 전령의 보고에 깜짝 놀랐다. 적이 서쪽 부대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급히 부대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정면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나다니?
그렇다고 한다면 적이 진정 노리는 것은 이쪽이었다.
‘정말이지 대담하기 그지없는 자가 아닌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을 치는 척 위장하여 이쪽 병력을 급하게 움직이게 만들고, 눈을 쓸 시간도 주지 않고 정면에서 후려친다.
시간만 잘 맞춘다면 동쪽의 아군 전력 태반을 분지르고 뒤이어 달려올 서쪽의 아군까지 격파할 수 있는 묘수였다.
상대가 낼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서쪽에서 움직이는 협공의 집게발은 시간에 맞추어 출발했다. 이쪽에서 포성이 울린다면 그들은 쉬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올 터, 늦어도 두 시간이면 적의 뒤를 친다. 두 시간. 도박을 걸기에 매우 부족한 시간이지. 시간을 더 벌 방법이 없다면 이 승부는 우리 쪽에 승산이 있다.’
알렉세이는 셈을 해보고 응전을 결심했다.
“선형으로 퍼진 아군 연대들을 이 지점으로 모으도록 명령을 전달하라. 앞으로 두 시간만 벌면 이 승부는 우리가 이긴다.”
“예, 각하.”
장교가 명령을 전하기 위해 급히 말을 몰아갔다.
알렉세이는 장교가 명령을 전하는 것을 지켜보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곧 검은 바람이 지평선 저편으로부터 불어왔다. 황룡의 깃발을 든 대규모 군세는 그야말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긴 총을 든 검은 군복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적의 대열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아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발사!”
포병이 쏜 포탄은 순수한 강철로 만들어진 아이언 볼. 그 무쇠덩어리가 바닥을 튕기며 적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적의 공격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미미한 인사였다. 포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혔다.
수적 우세를 자신하고 ‘포격’을 생략한 과감한 전진이었다. 지금까지 피해를 적게 낼 것처럼 행동했던 방식을 버린 수라 알렉세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는 필요에 따라 자신의 전술 스타일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적은 이 순간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자마자 병력의 희생을 감수한 전진을 선택했다.
실로 무서운 상대였다. 그렇지만 그 역시 그냥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산탄을 준비한다.”
알렉세이는 포병 지휘관에게 명령했다. 아이언 볼로 적의 예봉을 꺾을 수 없다면 산탄이 제격이었다. 그가 공격을 명령하려던 찰나에 적진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포병이 방열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일순간에 대기를 울린 굉음과 동시에 포병의 앞으로 수십 발의 로켓이 비처럼 쏟아졌다.
콰콰쾅!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대기가 불타올랐다. 백린이 타오르며 만든 무지막지한 연기가 포병의 시계를 단박에 가렸다. 알렉세이는 상대가 사용한 무기를 알아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로켓입니다, 각하.”
“그런 것 같군.”
알렉세이는 연합왕국이 자랑하는 유명한 병기, 콩그리브를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는 발상에 감탄했다. 포병이 포격을 하게 내버려두어 배치된 방향을 확인한 다음, 그 근처로 로켓을 쏘아 시계를 틀어막아 버림으로써 ‘결정적인 교전’ 시점에서 포병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교활하면서도 훌륭한 한 수였다.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 결정적인 피해를 막는다. 탄복할 만했다.
“아군 포병이 무력해진다면 적을 저지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부관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인 데다 적의 화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호반 전투에서 이미 배웠다. 보병 간의 교전은 솔직히 승산이 없었다.
양군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음에도 검은 군복들은 총격을 가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사격 준비!”
장교들이 언성을 높이며 병사들에게 일제 사격을 준비시켰다. 흰 군복들은 재빨리 총구에 총탄을 밀어 넣었다.
그때 적 사이에서 총성이 연이어 터지더니 명령을 내리던 장교들이 하나씩 말에서 떨어졌다. 그 공격에 전투 준비는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전투 지휘를 해야 할 장교들이 저격을 당하면서 흰 군복들은 첫 번째 사격 시점을 놓쳤다.
검은 군복들은 적의 사격이 지연된 틈을 이용해 발을 멈추고 총구를 높이 들었다.
“쏴!”
차가운 음성과 함께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비정한 납덩어리가 하늘을 날았다.
피가 튀고 눈에서 빛이 꺼졌다. 흰 군복들이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뒤늦게 흰 군복들이 사격을 시도했지만 검은 군복들은 적의 사격 시점에 맞추어 몸을 납작 엎드린 다음이었다.
후장식 소총을 가진 상승군은 기존의 전열 전투처럼 서서 재장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적의 유연한 반응에 흰 군복들의 공격은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이대로 전열 전투가 몇 번만 반복되면 흰 군복들이 패할 것이란 것은 자명해 보였다. 대책이 필요했다.
알렉세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다 한 가지 악랄한 생각을 해냈다.
어차피 적이 ‘엄폐의 이점’을 노리고 있다면 이쪽도 동일한 수로 받아치면 된다. 아무리 후장식 소총이라고 해도 이쪽이 엄폐한다면 다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부관에게 명령했다.
“당장 내려가서 병사들에게 시체를 쌓아 방벽으로 쓰게 해라.”
“예?”
그는 뜻밖의 명령에 당황했다. 시신을 방패로 쓰다니?
그가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듯 반문하자 알렉세이는 인상을 썼다.
“군말이 많군. 시킨 대로 가서 하도록. 이건 명령이다.”
“예, 각하.”
부관이 급히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내려가는 동안 알렉세이는 품에 남아 있던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병사들의 명예로운 시신을 욕보이는 것은 그로서도 하고 싶지 않은 명령이었지만 명예도 승리 다음에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패배한 자의 명예 따위는 한 톨의 가치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만들어 병사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휘관의 의무라고 알렉세이는 생각했다.
***
“적의 대응이 꽤나 빠릅니다. 이렇게 되어선 전열 전투로 재미를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각하.”
승도도 망원경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는 턱을 가볍게 매만지다 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가벼운 시간벌이밖에 안 되겠지요. 포병은 방열을 마쳤습니까?”
승도는 전열 전투를 하는 동안 포병에 방열 지시를 내려두었다. 장교는 그의 물음에 큰 소리로 답했다.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즉시 포탄을 발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도 백린을 한 번 쏘도록 합시다. 로켓까지. 이번 공격에 보유한 백린을 전부 소모해도 좋습니다.”
“어디로 쏘라고 명령하면 되겠습니까?”
“적 보병의 머리 위가 좋겠습니다.”
“그 말씀은.”
“백린으로 적을 마비시키고 보병을 돌입시키면 적 보병연대는 완전히 쪼개질 겁니다.”
장교는 승도의 명령에 고개를 숙였다.
“여단장님께도 그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승도는 대답 대신 망원경을 들었다. 장교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기수를 호출하는 동안에도 양군은 치열한 총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적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전장식과 후장식의 차이. 화력의 격차만 아니었다면 아군의 희생은 압도적으로 커졌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가정에 불과했다.
이쪽 역시 기관포를 쓰지 않고 있긴 마찬가지니까(포병 때문에 전진시켜서 사용할 수 없음).
이윽고 둔탁한 포성과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상승군이 가진 화력을 일시에 쏟아붓기라도 한 듯 화려한 불꽃이 쉬지 않고 솟아올랐다.
쾅. 쿵쾅. 쾅.
거인의 발 울림이 대지를 울렸다. 성난 거인이 포효할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승도는 적의 머리 위에서 연거푸 폭발하는 백린 세례를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적을 상대로 쓰기에 백린은 너무 잔악한 병기였다. 인간의 피부에 닿으면 뼈까지 태우고 들어가는 악마의 불꽃이니 말이다.
듣지 않아도 비명이 들렸다. 적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시체로 이루어진 방벽에 의지해 버티던 적의 한 축이 저절로 무너지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백린이 떨어진 자리에서 황급히 물러나고 있었다.
‘용맹한 전사들이여,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백린을 쓰지 않는다면 내 병사들이 상하겠지. 그렇기에 나는 기꺼이 냉혈한으로서 판단하고 명령할 수 있다.’
승도는 적이 무너진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아군의 기수를 보았다. 기수는 승도가 신호를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도는 높이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의 명령을 확인한 기수가 깃발을 흔들자 상승군 사이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대신제국 만세!”
만세 소리와 함께 검은 군복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적을 향해 쇄도했다.
몇 차례의 전열 전투와 ‘백린’으로 쇠약해져 있던 흰 군복들이 급히 총검을 뽑아 그 돌격에 대항했다.
양군이 교차함과 동시에 피 보라가 일었다. 그들은 치열하게 서로를 향해 무기를 내지르며 그 목숨을 취하기 위한 아귀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충격의 순간 우세를 점한 것은 검은 군복이었다. 실력으로나 수적으로나 그들의 우세는 확연했다. 몇몇 부분에서 쌍방의 부대는 교착 상태를 이루었지만 대부분의 지점에서는 검은 군복들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특히 백린이 떨어졌던 곳에서는 굵직한 돌출부를 형성하며 한 무리의 검은 군복들이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용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피가 묻은 칼날을 털어내며 계속 전진했다.
“네놈들이 죽어야 이번 전쟁에서 특별 수당을 더 받는다. 그러니 그만 죽어라.”
용병들은 악당처럼 말하며 상대의 목을 쳐 날렸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발로 밀어내며 적의 지휘부를 향해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갔다.
공격을 선도하던 사내, 비슈누는 몇 명의 적을 해치운 끝에 흰 군복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적 하나를 발견했다.
그자는 말을 탄 채 칼을 휘두르며 아군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제법 군더더기가 없는 검술을 펼치는 것이 상당한 명가에서 검을 수련한 듯했다.
그가 발견한 자는 루시 육군 대령 그레고리우스였다.
그레고리우스는 국경 지역 전투의 패전 이후 ‘약간의 공’을 세워 그 계급이 박탈되지는 않았지만, 휘하 부대를 반이나 날려먹은 탓에 대공과 알렉세이의 눈 밖에 났다.
알렉세이는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사령부 직할의 호위대 장교로 임명한 채 전장을 구경하게 만들었다.
만약 알렉세이의 계획대로 작전이 돌아갔다면 그는 빛을 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승도의 괴물 같은 전투력’이 그에게도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 악마 같은 자의 놀라운 한 수로 알렉세이가 궁지에 몰리면서 사령부가 위기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병력도 모자랄 판에 호위대라고 해서 놀릴 수는 없는 일. 알렉세이는 그에게 전투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그레고리우스로서는 반길 일이었다. 물론 그를 발견한 ‘상대’를 생각하면 행운인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앞에서 쿠크리를 휘둘러 아군 병사의 목을 취하려던 검은 얼굴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가 칼을 휘어 올렸다.
그 강맹한 공격에 검은 얼굴을 한 적이 놀란 표정을 짓다 그대로 목이 달아났다.
그는 다음 상대를 찾아 말 머리를 돌리려다 별안간 ‘애마’가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드는 통에 낙마하고 말았다.
“크윽.”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재빨리 바닥을 구른 순간, 그 자리에 칼날이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망할.’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병사였다.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건방진 새끼.’
나이가 있긴 했지만 검술 실력 하나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그였다. 오죽하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알렉세이가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하면서도 호위대에 남겼을까.
그만큼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황실에서 주최한 마상 검술 토너먼트에서도 우승할 정도였다. 거기다 ‘마스터(보통 에우로페에서는 그랜드 마스터는 기사단장, 마스터는 무기술에 조예가 깊은 검술 수련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쓴다)’의 칭호와 기사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
세계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에우로페에서 초일류로 공인받았다.
그런 그가 변방의 듣도 보도 못한 야만인 한 놈을 상대하지 못할 턱이 없다.
대령은 심호흡을 하고는 칼을 낮게 잡았다. 자세를 낮게 잡는 것은 기본적으로 안정성을 중시한 방어 자세다.
반면 상대는 칼을 높게 잡으며 허리를 펴고 있었다. 검술의 기본도 안 된 야만인다운 모습이었다.
‘단박에 목을 따주마.’
대령은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한 발을 내딛었다. 전장의 소음 속에서도 둘은 서로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에우로페의 마스터와 식민지 출신의 버림받은 사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음 순간 둘의 칼이 무지막지한 가속을 내며 맞붙었다.
충격의 순간, 대령은 자신의 칼이 밀지 못하고 대치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자 한 걸음을 빼며 상대의 칼을 휘어 그 목을 찌르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 순간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승부가 끝났음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생각에 대령은 흠칫 놀랐다.
승부가 끝났다고?
그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상대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더니 가슴을 찔러왔다.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빌어먹을.’
대령은 뒤늦게 자신이 상대한 적의 칼이 기형이란 것을 깨달았다. 에우로페의 토너먼트용 검들과 달리 적의 칼은 곡선이었다.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한 것이 그의 패인이었다.
제아무리 무기술의 달인인 마스터라 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무기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대령의 눈에서 빛이 꺼진 것을 본 비슈누는 칼을 뽑아냈다. 제법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장교 하나를 잡긴 했지만 아직 적의 지휘부는 멀리 있었다.
그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려던 찰나에 우익 쪽에서 긴 나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양군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팔이 들려온 쪽에서는 새로운 루시 보병들이 깃발을 든 채 전장에 합류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