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28화 (328/425)

제328화. 도박사 (3)

“아군 연대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선형진에서 활자로 진형을 재편, 적의 양익부터 공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모의 보고에 알렉세이는 손을 저었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만 벌면 충분하지. 두 시간만 벌면 이기는 승부에서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네. 전열을 두텁게 쌓아 적의 공격을 흡수하며 시간을 버는 쪽으로 가지.”

알렉세이는 탄력 있는 방어로 시간을 버는 방향으로 전술을 선택했다.

두터운 방어선으로 시간을 벌어 동쪽 부대가 모루의 역할을, 서쪽에서 달려올 아군이 망치가 되어 적을 철저히 섬멸하는 것이 그가 구상한 이 전투의 결말이었다.

“각하의 명령이다. 각 부대는 선형으로 전열을 펼치고 축차 방어를 준비한다.”

참모 하나가 명령을 전하는 동안 부관이 그에게 말했다.

“각하, 적이 계속해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휘부의 위치를 좀 더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일단 이동하지.”

알렉세이는 지휘부의 이동을 결정했다. 연대기와 나란히 걸려 있던 극동 원정군의 깃발과 황제의 쌍두 독수리 깃발이 기수들의 손에 들렸다.

기수들이 깃발을 들고 말에 오르자 알렉세이도 말에 올랐다. 적의 함성 소리는 어느새 지휘부가 있는 곳까지 들릴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적의 전투력은 탄복할 만큼 경이로웠다.

‘하지만 우리에게 도달하기엔 터무니없이 느리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부하들에게 출발하라는 눈짓을 했다.

루시 군대의 지휘부가 말을 타고 후방으로 물러가는 동안, 검은 군복들은 성난 파도가 되어 적 연대의 중앙을 완전히 쪼개고 들어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베고 죽이며 지휘부의 막사까지 육박했다. 사령관의 깃발도, 황제의 기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상징성’이 있는 장소인 만큼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지휘부의 막사 앞을 지키던 마지막 전열이 돌파당했다. 검은 군복들은 적들의 목을 날리며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대신제국 만세!”

그들 중에 섞여 있던 기수가 신의 황룡기를 들고 적의 지휘부 막사 앞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다. 적의 사령부를 점령했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지휘부가 있던 자리에 난데없이 적의 깃발이 흔들렸다. 최전방에서 싸우던 루시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이미 중앙을 돌파당한 상태에서 절망적인 싸움을 벌이던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때 멀리서 전열의 후퇴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흰 군복들은 ‘진형’을 재편하기 위해 물러서라는 신호를 받고 황급히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검은 군복들은 순순히 그들을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번뜩이는 총검이 등을 돌리고 물러나는 루시 보병들의 뒤를 노렸다. 피가 튀고 비명이 울릴 때마다 바닥엔 시체가 늘어갔다.

어느 전투든 팽팽한 접전이 벌어질 때는 사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한쪽이 무너지며 후퇴가 시작될 때에야 사상자가 폭증하는 법이었다.

루시 군대도 그랬다.

“악귀 같은 놈들.”

유리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며 총검을 휘두르는 적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다행히 동료가 쏜 권총 덕분에 적병의 어깨가 부서져 공격이 빗나가 살았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동방 군대가 근접전에 약하다는 평가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역에서는 ‘동방 군대의 후진성’과 ‘전의 없는 오합지졸’ 같은 면모를 두고 자주 우스갯소리로 삼곤 했다.

유리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었던 터라, 이번 출병에 참가하며 전쟁이 아주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2선급 연대 여럿이 날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거야 ‘야만인’들 특유의 비열한 속임수와 머릿수를 앞세운 공격이 큰 몫을 차지했을 거라 여겼다.

그런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지난 호반 전투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어도 그런 착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빨리 후퇴해야 한다. 아군 전열까지 가야 살 수 있다.”

경험 많은 부사관 하나가 외쳤다.

서역에서의 전투만 무려 열 차례를 치르고 페테르부르크로 전입을 받았다는 그는 실전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에게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제공해 주었다.

유리는 애써 심장이 질러대는 비명을 참으며 군화를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어김없이 비명이 뒤따랐다. 그들의 뒤를 빠르게 추격해오는 적병들은 냉혹하게 총검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거리에 들어온 아군을 모두 쳐 죽이고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급히 뒤로 뛰던 유리의 앞으로 한 무리의 검은 군복들이 끼어들었다. 중앙을 분단한 다음, 아군의 퇴각까지 막으려고 움직이는 적의 괴물들이었다.

그들은 기이하게 생긴 기형 칼을 휘두르며 도망치는 아군 병사들의 목을 수확하려 했다. 일부 병사들은 그 사마귀 같은 적의 공격에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추격해오는 적에게 포위당해 덜미를 잡혀 몰살당하고 만다.

답답한 마음에 유리도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길을 뚫어.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가지 못하잖아.”

몇몇 병사들이 마음이 급한 나머지 욕설까지 내뱉자 머뭇거리던 자들이 어기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애써 용기를 내기 위해 ‘우라’를 외치며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럿이 앞으로 내달리자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다. 유리도 그 파도의 일원이 되어 적을 향해 덤볐다.

그것을 본 적들은 냉소를 짓더니 칼을 교차하듯 쥐고는 그대로 마주 달려왔다.

양자가 격돌하기가 무섭게 사람 머리가 허공으로 날았다. 물론 머리가 비산한 쪽은 흰 군복들이었다.

사람 몇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생명을 잃은 고기가 되어 도살당하는 광경은 역시 살풍경했다.

화약 병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냉병기’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작은 구멍 하나를 멀리서 뚫어 적을 죽이다 보니 원시적인 야만에 익숙해질 일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런 익숙함은 실전 경험이 충분한 이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귀티 나는’ 정예 보병들은 전장의 잔혹함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훈련은 잘 받았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동료 몇의 목이 날아가자 나머지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악귀 같은 검은 군복들은 그 효과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흰 군복들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통에 유리의 순서도 빠르게 찾아왔다. 그는 다가오는 적을 보다 이를 악물며 총검을 내질렀다.

총검과 기형 칼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적은 그에 오히려 흥분을 느낀 것처럼 이를 드러냈다.

상대가 재차 칼을 휘둘러 오려던 순간 유리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총검을 돌려 공격을 막으려는데 적 병사가 별안간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공격의 궤적을 놓치고 말았다.

유리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군 병사 하나가 마지막 힘을 다해 적의 군화에 총검의 쇠붙이를 박아 넣은 덕에 살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앞으로 뛰었다. 뒤에서 추격해오는 적을 생각하면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검은 군복들 사이로 난 짧은 틈으로 그는 몸을 피했지만 나머지는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포악한 살인자들은 제 입에 들어온 전공을 놓아 보낼 정도로 인간애가 넘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 하나에 일정한 추가 수당을 약속받은 용병.

그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적병의 목을 잘라야 했다. 인간애 따위의 사치스런 감정에 칼을 주저할 자들이 아니었다.

덜덜.

유리는 어느 순간 자신과 마주 달리던 동료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떨었다. 조금 전까지 숨을 쉬고 있던 그 많은 전우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승리’를 말하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해, 가게나 하나 열자고 말하던 고향친구들,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넉살 좋은 바람둥이들까지 모두 죽었다.

전쟁은 출발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끔찍한 죽음과 상실뿐이었다.

이런 곳을 만만하게 생각하고 전장에 참가했다니.

유리는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을 하며 아군 전열을 향해 달렸다.

패잔병들이 후방의 새로운 전열로 들어오는 동안, 지휘부를 옮긴 알렉세이는 전황을 보고 서전에 너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군은 그 충격의 여파로 계속 밀리고 있었고, 적은 두 번째 방어선까지 밀고 들어온 상태였다.

두 번째 방어선은 새로 가세한 여러 개의 연대 병력을 펼쳐 구축한 강력한 방벽이었지만, 이 선도 지탱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한 번 기세를 잃는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했다.

알렉세이는 한 번 정도 적의 호흡을 끊고 그 공격력을 잠시 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민 끝에 기수를 불렀다.

***

“적 전열이 상당히 두텁습니다. 계속해서 돌파하기에는 아군의 소모가 매우 클 겁니다.”

승도도 부관의 견해에 동감했다. 서전의 기세를 타고 적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적의 새로운 부대들은 충격에 휘말리지 않은 채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단순한 돌격을 이어가기엔 문제가 있었다. 이미 두 번째 방어선과 충돌한 시점에서 상승군의 공격 속도는 아까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병사도 제법 상해 있어 전투가 끝날 즈음에는 손실이 엄청난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전장을 보며 다음 명령을 고심하고 있는데 적진에서 포성이 울렸다.

느닷없이 쏟아진 포탄은 양군이 밀집한 전열 사이로 떨어졌다. 포탄은 바닥을 튕김과 동시에 양쪽 병사를 동시에 쓸어버렸다. 이쪽의 강맹한 기세를 꺾기 위한 적의 냉혹한 판단인 듯싶었다.

병사들의 팔다리가 연거푸 잘려나갔다. 머리가 날아간 채 허물어지는 자도 있었다. 강철 구가 쓸고 지나간 자리로 시뻘건 피의 길이 만들어졌다.

보기에도 끔찍한 그 길 위로 잘려나간 사람의 육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승도는 망원경으로 전장을 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이 포격 때문에 공격의 흐름이 끊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포격의 여파로 상승군의 공격이 그 기세를 잃고 주춤했다. 예리하게 적을 밀어붙이던 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적은 그 시간을 이용해 계속해서 후미의 대열을 정비하며 소모적인 전투를 이어갈 태세를 다지고 있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다섯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을 싸워도 승부를 내기 어려웠다.

과거 연합왕국의 막강한 강적, 알링턴 공작이 구사한 ‘넘을 수 없는 붉은 방벽’처럼 말이다.

승도는 아군의 움직임을 보다 입을 열었다.

“중앙 돌파를 계속 이어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병력을 나누어 우측부터 밀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우측부터 말입니까?”

승도는 장교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측은 시계상 적 포병이 타격하기 곤란한 지점입니다.”

승도는 적 포병의 위치를 감안한 공격 지점을 선정했다. 적은 급하게 방열을 하느라 진형의 좌상단에 치우친 곳에 포병을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포병이 중앙까지는 제대로 지원을 할 수 있었지만 우측은 그리하기가 어려웠다. 사거리가 있어 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자기편 병사들을 더 많이 죽이며 쏘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적이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이유는 없었다.

승도의 설명에 장교들도 대충 적의 포병 위치를 가늠해보고 그럴듯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긍정’의 빛을 보이자 승도는 기수를 불러 명령을 내리게 했다.

곧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공격 제대의 상당수가 우측으로 돌려졌다. 우익으로 돌아간 상승군은 재차 맹렬한 기세를 찾아 적을 사납게 밀어붙였다.

포병의 압력만 없다면 역시 적을 미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승도는 상승군이 다시 우측부터 압력을 가하는 것을 보고 포병 지휘관을 불렀다.

“곧 적이 우측에 손을 쓰기 위해 대응할 준비를 할 겁니다. 그 전에 좌측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해야 합니다.”

“좌익에 포격을 집중하란 말씀이십니까? 공세는 우측으로 돌리시지 않으셨습니까?”

포병 지휘관이 의아한 듯 물었다.

공세는 언제나 한 지점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야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법이었다.

한데 승도는 자원을 분산시키길 요구하고 있었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이번 전투의 승패를 중앙에서 낼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승도는 지휘관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처음부터 그는 일관되게 중앙을 돌파해 단기전으로 싸움을 끝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우측으로 병력을 돌린 것은 적의 주의를 측면으로 돌리기 위함이지 중앙 돌파를 포기해서가 아니었다.

이어 좌익으로 포격을 가하는 것은 다시 적의 주의를 좌측으로 끌기 위함이었다. 우와 좌에서 번갈아 적을 흔들면 상대를 충분히 혼란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중앙 돌파의 가능성은 조금 전보다 훨씬 높일 수 있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돌파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적 포병의 공격력은 중앙으로 집중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 예비대를 투입해 승부를 낸다.’

승도는 아직 사령부 직할로 3여단의 보병 대대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 대대는 적과 아군의 소모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중앙에 돌파구가 열리는 즉시, 전장으로 달려가 승부에 쐐기를 박을 마지막 비수였다.

물론 적에게도 아직 예비대가 남아 있긴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장을 격렬하게 만들어 적의 예비대를 싸움터로 불러내야 했다.

예비대만 없다면 적의 지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다음부터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승도는 당과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전투는 어느덧 네 시간이 훌쩍 넘도록 진행되었다. 양군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다. 투입된 총병력의 수는 루시가 우세했지만 ‘서전’부터 축차로 소모를 당한 까닭에 전장에서의 수적 우세는 계속 상승군이 점하고 있었다.

소모전이 지속되면서 루시는 그나마 남은 예비 병력들까지 모두 전장에 쏟았다. 그들은 ‘당초’ 예상한 두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상승군과 싸웠지만 그들에게도 거의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피칠갑이 된 채 서로의 목숨을 노리길 몇 시간, 병사들의 동작은 눈에 띄게 둔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승군은 자신들의 우세를 살려 조금씩 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용병들은 끝까지 저항하는 적의 전열에 계속해서 충격을 가한 끝에 얇은 저지선을 유지하고 있던 적 몇을 쓰러트리고 적의 후방까지 나아갔다.

적 전열 끝까지 진출한 검은 군복들이 자신들의 여단 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중원 돌파에 성공했다는 듯 힘껏 흔드는 깃발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처참한 혈전과 공방을 상징하는 그 붉은 깃발을 본 순간 승도의 눈에 불꽃이 번뜩였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이 신호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있었다.

그는 대번에 큰 소리로 명령했다.

“이걸로 승부를 내겠습니다. 대대에 전진 명령을!”

장교는 사령관의 명령에 즉시 답했다.

나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황룡의 기 아래에 서 있던 검은 군복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지금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생생한 병력이었다. 이들이 전장으로 전진하며 ‘신의 영광’을 노래했다. 제국의 위상과 명예를 말하는 그들의 군가에 전장에서 녹초가 된 채 싸우던 병사들도 입을 벌렸다.

그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군 최후의 예비대가 투입된 것은 승리의 순간을 의미했다.

승리가 보인다고 생각하자 상승군 병사들은 마지막 안간힘을 냈다. 그들은 역시 지쳐 있던 적을 거세게 밀어붙이며 적의 전열을 뒤로 밀어냈다.

곳곳에서 전선이 뒤로 밀려났다. 흰 군복들은 정신없이 밀리며 무수한 시체를 남겼고, 연대와 대대의 깃발들이 부러진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군악대가 열심히 루시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힘을 내도 대대 병력의 예비대가 들어온 시점에서 전황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시 지휘관들은 이 절망적인 상황을 보며 탄식했다. 그들은 두 시간이 지나면 아군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세 시간이 지났을 때도 ‘상대의 기만’으로 조금 늦는다고 믿었었다.

네 시간이 지났을 때 그들은 뭔가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승부가 적이 짠 판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루시 지휘부는 중앙으로 쇄도하는 검은 군복들의 새로운 대열을 보고 군악대에 퇴각 명령을 알리게 했다. 더 싸워봐야 승산을 기대할 여지도 없었다.

루시의 남은 병사들이 죽음의 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승도는 입 안에 넣고 굴리던 당과를 깨물었다.

당과는 산산이 부서지다 여린 잇몸에 상흔을 만들었다. 당과의 단맛 사이로 번지는 비릿한 피비린내는 처참한 승리의 맛을 닮아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쪽에서 달려오고 있을 적을 격퇴하고 모이셰바로 진격하여 승리를 확정짓는 일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