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곰들을 꺾다 (1)
“우리가 너무 늦었다. 야만인들에게 바보처럼 속았어.”
볼로코프 대령은 이를 갈며 연대의 행군을 독려했다. 연대의 기수가 쉴 새 없이 앞뒤로 오가며 병사들을 재촉하고, 장교들이 평소보다 짧은 호흡으로 병사들의 걸음을 당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흘러간 시간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속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장 근처에 도달한 것은 최초 교전이 벌어진 지 다섯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이때쯤에 이르러 전투는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전투에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대령은 후속 부대와 포병의 방열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평소라면 이런 무모한 명령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다급했다.
하지만 그 명령은 실수였다. 적은 ‘다급하게’ 전장에 지원을 올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포병을 쓸 수 있었겠지만, 그들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전군 돌격!”
“황제 폐하 만세!”
흰 군복들이 깃발을 흔들며 앞으로 내달렸다. 총검을 꼬나 쥐고 달리는 그들의 앞으로는 수십 량의 마차가 선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 선은 포병이 없다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죽음의 선이기도 했다.
마차로 보병들이 쇄도하기가 무섭게 마차 위에 있던 상승군 장교가 사격을 알리는 기를 올렸다.
신호가 내려지기가 무섭게 무지막지한 기관포, 미트라예즈가 총신으로부터 불을 뿜기 시작했다.
오렌지 빛 불꽃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전면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총탄에 흰 군복들의 돌격은 순식간에 장렬한 죽음의 서사시로 돌변했다.
“아악.”
정면에서 사격을 받은 병사들이 짚단처럼 쓰러지자 그다음 열의 병사들이 화망에 노출되었다. 기관포들의 기계적인 사격이 이어질 때마다 한 개 열씩 증발해 버렸다.
화력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전투에서 상상해보지 못한 무지막지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후, 후퇴!”
병사들과 함께 돌격을 했던 장교 몇이 급하게 외쳤다. 흰 군복들은 그 명령을 구원의 빛으로 여기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기관포들은 물러나는 적을 향해서도 무자비한 사격을 퍼부었다.
불과 오 분. 그 오 분 사이에 대대 규모의 병력이 시체로 변했다. 전장에 남은 것은 끔찍한 주검들뿐이었다.
블라코프는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그제야 조금은 냉정이 돌아왔다. 전장은 급하다고 ‘서두르면’ 더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멍청하게 굴고 말았다. 엘리트 장교인 그가.
블라코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포병부터 다시 방열한다. 보병은 재정비하고, 참모는 후속 부대에 상황을 전파하도록.”
“예, 각하.”
블라코프는 ‘아직 아군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애써 안심시키며 포병의 방열을 지켜보았다. 포성은 아까부터 뚝 끊어져 있었지만.
포병이 방열을 하는 동안 아군 연대 하나가 뒤따라 도착했다. 전군이 한 번에 행군하기에는 초원의 사정이 좋지 않아 도로를 따라 마차를 옮겨야 했던 까닭에 연대들은 최초 돌격 이후 한 개씩 뱀처럼 늘어져 행군해오고 있었다.
후속 연대의 연대장이 블라코프에게 물었다.
“지금 급하게 전장에 합류해도 시원찮은 판인데, 지금 여기서 뭘 꾸물거리는 겁니까?”
블라코프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눈앞의 참상을 가리켰다.
“저건 뭡니까?”
연대장이 대경실색하며 물었다. 수백 구의 시체가 널린 전장은 조금 전에 생긴 것처럼 보였다.
“아마 말로만 듣던 서방의 신병기일 거요.”
“한 문으로 수십 명분의 화력을 낸다는 그게 저 물건인가.”
연대장은 그 화력에 공포를 느낀 듯 침을 삼켰다.
“당장 돌파는 어려울 테니 포병이 배치되길 기다려야 하오.”
블라코프의 말에 연대장도 수긍했다. 왜 공격을 서두르지 않느냐는 말은 더 꺼내지 않았다.
포가 방열을 마치자 블라코프는 기다리지 않고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발사!”
장교가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갈아버리는 것을 보았으니 그도 감정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튕긴 강철 구는 그대로 마차를 직격했다. 굉음과 함께 마차 한 량이 산산이 부서졌다.
보병과 달리 마차는 상당히 큰 표적이었기에 강철 구를 쏘는 대로 쉽게 명중시킬 수 있었다.
포병 장교는 한 문을 명중시켰다는 데 고무되어 다시 손을 들었다.
“발사!”
두 번째 포격은 짧은 시간에 재차 이루어졌다. 포탄은 바닥에 즐비한 시신을 짓이긴 탓에 방향이 조금 수정되었다. 몇 발의 포탄이 엉뚱한 방향으로 튕기긴 했지만 이번에도 두 량의 마차가 박살났다.
점점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기관포들은 빠르게 제거 수순을 밟았다. 포격이 다섯 차례쯤 이루어졌을 때 남은 기관포의 수는 겨우 여섯 문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한 차례의 포격만 더 가하면 전장에 합류할 수 있으리라.
장교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병대가 빨리 기관포를 쓸어 내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포병의 마지막 포격이 마차들을 강타했다. 무지막지한 강철 덩어리는 단박에 마차를 쪼개며 상승군의 깃발까지 부러트렸다.
기관포를 운용하던 포병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모두 부서지는 것을 보고 슬슬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적이 달아나는 것을 본 블라코프는 그제야 칼을 뽑아 들고 기수를 향해 명령했다.
“연대 돌격!”
그 옆에 서 있던 연대장도 이에 질세라 크게 외쳤다.
“우리 연대도 돌격한다!”
두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수천 명의 흰 군복이 함성을 지르며 시체로 가득한 벌판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달아나는 적병들을 추격해 조금 전까지 포성이 들려오던 전장을 향해 나아갔다.
블라코프와 장교들도 말에 오른 채 전진하는 연대 병력의 뒤를 따랐다.
흰 군복들은 얼마간의 추격전 끝에 시계를 제약하는 와디의 강안 둔덕을 넘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장교들도, 병사들도 모두가 와디 앞에서 얼어붙었다. 그 앞은 시체가 끝도 없이 널려 있었다. 만 구가 넘는 시신이 널린 전장은 보기에도 참혹하고 끔찍했다. 곳곳에는 부러진 연대의 깃발들과 버려진 장비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 언저리에 검은 군복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해 있었다.
그것을 본 블라코프는 깨달았다. 자신들이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아주 늦지 않게’ 도착했는지도 몰랐지만, 기관포에 묶여 잠깐의 시간을 허비한 사이에 적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쪽이든 결론은 하나였다.
이번 전투에서 그들은 철저한 구경꾼이 되어 조국의 패배를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기랄.”
블라코프는 욕설과 함께 자신의 모자를 내팽개쳤다.
“우리가 저 야만인들에게 졌단 말인가?”
더 싸워볼 필요도 없었다. 전열을 갖춘 적을 치기에 그들의 병력은 너무 약했다.
주력 병력은 전멸해 버렸고, 보급품이 있는 모이셰바로 가는 길은 적이 선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전을 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각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교 하나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블라코프는 한참 적을 응시하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핏방울이 맺혔다.
“이대로 철수한다. 상부에서 별도의 명령이 더 있다면 그때 지시에 따르도록 한다.”
“그럼.”
“우리가 졌다.”
블라코프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 사실을 구태여 확인하기 위해 남은 병사들의 목숨을 던지는 것은 멍청한 삼류가 하는 짓이었다.
대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흰 군복들은 군기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것으로 신의 선공으로 시작된 양국의 전쟁은 사실상 결판이 나고 말았다.
***
상승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날, 보무도 당당하게 동쪽의 전략적 요충지 모이셰바로 진출했다. 그들은 마을이 ‘철저히 파괴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집들은 한 채도 상하지 않았고 주민들도 대피를 가지 않았다.
입성은 오전 11시에 이루어졌다. 최초 입성의 영광은 이번 전투의 최대 공훈을 세운 기마 보병대대가 맡았다. 기마 보병은 한껏 기분을 내며 길가로 나온 아가씨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여자들은 관례대로 승리한 정복자들에게 꽃다발 등을 주었다. 상승군 병사들은 이 환대(?)에 얼떨떨하게 여겼지만 사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무수한 정복자들이 스쳐 지나간 대륙 중앙부에서는 승리자에게 몸을 낮추며 가능한 한 우호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여자들의 꽃다발을 받은 기마 보병들은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의 부대기를 높이 들어보였다.
승도는 마을을 돌아본 다음 중앙에 위치한 촌장의 집에 사령부를 차렸다. 그 집은 미카엘 대공이 거처로 쓰고 있었는지 고급스런 태피스트리가 곳곳에 깔려 있었다.
휘하의 장교들이 테이블 등을 대충 정리하고 지도와 각종 집기를 정리하는 동안, 승도는 참모를 불러 모이셰바에서 접수한 물품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곳에서 접수한 물품은 대부분 보급품입니다. 적은 물품을 거의 파기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습니다. 비스킷과 빵, 밀가루, 육포 등의 식품이 거의 이백 일분은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승도는 일부나마 물자의 파괴가 진행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적은 물자를 그대로 넘겨주었다. 이곳 마을의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 흙과 돌로 지어져 불을 지르기 곤란했던 데다, ‘파괴 작업’을 진행하기에는 물자가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면 적의 그런 판단은 꽤 현명한 것이었다. 불을 질러 물자를 파괴한다고 해도 상승군이 당분간 사용할 정도는 충분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파괴를 해서 얻을 것은 이곳 주민들의 증오심뿐이었다.
향후에도 이곳을 통치해야 하는 루시의 입장에서 주민들의 민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이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한 모양이군요.”
승도는 대충 적의 생각을 읽었다.
군사적으로도 적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막대한 물자를 고스란히 남겨두는 만큼 이쪽은 그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도망치는 입장에서 그 같은 시간 벌이는 꽤나 유용한 수였다.
그렇지만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상대의 행동은 그저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려는 것에 불과했다.
승도는 물자 접수에 대한 보고를 끝낸 후, 마을에 있던 주민들로부터 적의 동향에 대한 정보 청취를 받았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루시 군대가 마을에서 약간의 보급품만 챙긴 후, 동쪽으로 후퇴했다고 말했다. 동시비르 관구 방향으로 물러나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루시는 동서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적도 패배했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터.
조만간 협상 제안이 올 가능성이 높았다.
승도는 주민들로부터 정보 청취를 끝낸 후, 부대에 휴식을 주었다.
이튿날, 승도는 기마 보병을 마을의 동쪽으로 진출시켜 퇴각한 적을 추격하게 하고, 3여단을 남쪽으로 보내 부하라를 다시 접수하게 했다.
혹시나 모를 적의 ‘마지막 노림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가 각 부대를 꼼꼼히 배치하여 루시의 반격 가능성을 완전히 상쇄한 오후, 동쪽으로부터 사자가 찾아왔다.
사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흰 군복에 금빛 견장을 단 고급 장성이었다.
장군이 직접 사자가 되어 방문하자 승도도 조금은 놀랐다. 그는 방문자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게 했다.
방문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내였다. 혈색이 좋은 사십 대 특유의 여유로운 얼굴에 깔끔한 정복을 입고 있어 보는 자체로 꽤 ‘격’이 있어 보였다.
승도는 상대를 자리로 안내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방문자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시한 후,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루시 제국 전쟁 계획 위원회 위원 겸 투르 한국 방면군 사령관 보좌역 알렉세이 중장입니다.”
“신의 총리대신 오승도입니다.”
승도도 신분을 밝혔다. 알렉세이는 그 신분을 듣고 조금 놀랐다.
“신의 총리대신께서 직접 사자를 맞아주신 줄은 몰랐습니다.”
“특별한 손님이라고 들었으니까요.”
승도는 차를 권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알렉세이는 승도가 권한 차를 한 모금 맛본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이렇게 각하를 찾아뵙게 된 것은 한 가지를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안이라니요?”
“신과 루시 양국의 무익한 전쟁을 멈추기 위한 제안 말입니다.”
“강화 교섭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승도는 상대의 제안에 피식 웃었다.
“좋은 말씀입니다만, 조건이 맞는 이야기일 때만 가능하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이는 각하께도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각하께서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마칠 유일한 기회일 테니 말입니다.”
“유일한 기회라.”
승도가 미덥잖다는 빛을 보이자 알렉세이가 수염을 매만졌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군은 아직 전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은 승도도 알고 있었다.
패배한 잔존 병력이 아직 두 개 연대는 되었고, 서쪽의 적도 네 개 연대에 달하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완전한 패배를 말하기에는 아직 수를 던져볼 여지가 있다는 점은 그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 정도로 그에게 위협을 가하기엔 너무 미약한 패였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패는 이미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개전 시부터 지금까지 스무 개에 달하는 귀국의 연대를 상대해 그 태반을 날려 버렸습니다. 이제 여섯 정도 남은 귀측의 잔존 연대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 부분은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 제국의 군사력은 각하께서 보신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삼백 개 이상의 연대를 동원할 수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승도는 상대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그 말에 알렉세이는 조금 당황했다. 상대가 자국의 군사력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여유를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걸 알고 계시다면 이야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 군사력은 그처럼 강대합니다. 한 번 패한다면 두 번, 두 번 패한다면 세 번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귀국은 그럴 여력이 있습니까?”
이제 근대 군사력을 겨우 건설하기 시작한 신은 그럴 여력이 없다.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그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승도는 순순히 인정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각하께서는 지금 강화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귀국에 최선의 이익이라고 저는 감히 권고 드립니다.”
“하하하.”
승도가 웃자 알렉세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제 제안에 왜 웃으시는 겁니까?”
“그야 귀국의 군사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섭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귀국의 군사력이 백만을 넘는다고 하지만 실상 이 시비르로 보낼 수 있는 힘은 몇 만이 되지 않을 겁니다. 병참의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도 패배하는 만큼 다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알렉세이는 상대가 병참을 지적하자 약간 당황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추가 증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강변했다.
승도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귀국의 정치적 입지가 변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신에게 귀국이 패했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계속해서 전쟁을 할 여력이 되겠습니까?”
승도는 냉혹한 국제 질서를 입에 올렸다. 지금까지 루시는 동에우로페의 패권국으로서 주변국을 위협하며 세를 유지해 왔다.
그런 만큼 그 군사력이 ‘의심’받는다면 주변국의 도전을 받을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동방의 미개한 국가 따위에게도 패하는 군사력이면 할 만한 상대일 거다. 그런 의구심 어린 시선이 하나둘 고개를 든다면 루시는 동방으로 군대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형편이 될 수 없었다.
승도는 바로 그 점을 짚었다.
“…….”
알렉세이는 승도의 그 한마디에서 상대가 에우로페의 정치적 환경까지 고려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은 처음부터 백 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 상대를 그들은 너무 쉽게 보고 싸웠는지 몰랐다.
알렉세이는 이 협상에서 많은 것을 내주어야 ‘강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