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30화 (330/425)

제330화. 곰들을 꺾다 (2)

알렉세이로부터 사전 조율 결과를 보고받은 대공은 낯빛을 찌푸렸다. 상대는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교활했다.

이쪽의 정치적 약점과 국제 정세까지 통찰하고 있어 ‘협상’에서 손해를 보는 부분은 피하기 어려웠다.

대공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면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진 것도 모자라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겠군. 그런 건가.”

“면목 없습니다.”

“으음.”

대공은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그가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인 걸 본 알렉세이는 조심스레 한마디를 더 꺼냈다.

“전하, 약간의 모험을 감수한다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상황을 바꿀 방법이라니? 그런 좋은 수가 아직도 남아 있단 건가.”

“군사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협상에서 사용할 수입니다.”

“협상에서 역전의 여지를 만든다니, 의아스런 이야기군.”

“간단히 말해 협상에서 약간의 불미스런 일을 만드는 겁니다.”

“불미스러운 일?”

대공은 그것이 어쨌냐는 시선을 던졌다.

“일부 호전적인 장교들에게 협상을 ‘파탄’내도록 은밀히 귀띔을 주겠습니다. 협상 장소에서 ‘결투’를 하도록 말입니다.”

“결투?”

그제야 대공이 조금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렇습니다. 결투라는 소동을 일으키면 협상에 대해 이쪽의 일부에서 대단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할 수 있습니다.”

대공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금방 깨달았다.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전쟁을 지속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겠군.”

“예, 전하. 우리의 전쟁 의지를 확실히 보여준다면 저들도 요구 사항을 적절한 수준에서 제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신도 전쟁이 길어지면 좋을 것이 없었다. 유리한 입장을 점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력으로 보자면 그들은 루시의 적수가 되기에 너무 약했다.

루시가 동방에 신경을 쓰기 어려운 처지가 된다 해도 ‘전쟁’을 강행하기로 결심한다면 신을 괴롭게 할 능력은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썩 나쁘진 않은 이야기요. 그렇지만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우리 쪽에서도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안 그러면 신에서도 아예 협상을 거부하는 사태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 부분이라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알렉세이는 이번 전쟁을 사실상 지도한 입장에서 자신이 패전의 책임을 짊어지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자신이 나서서 손실을 감수하는 자세를 보이는 편이 정치적으로 이롭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경이 그렇게 해주겠다면 그리하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알렉세이는 미카엘 대공에게 사전 조율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그의 막사에서 물러났다.

몇 분 후, 알렉세이는 자신의 막사로 몇 명의 장교를 불렀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번 협상에 대해 불만을 보이는 이들이었다. 태반이 국경에서 느닷없이 기습을 당해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 장교들이었다.

그 중에는 긴 머리의 여군 장교도 있었다. 알렉세이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귀관들을 부른 이유는 중요한 임무를 하나 주기 위해서다.”

그의 이야기에 장교 몇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전쟁이 끝난 마당에 무슨 임무가 더 있겠습니까? 야만인의 문서를 들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알렉세이는 그 무례를 탓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미리 작성해둔 서류 한 장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장교들이 서류를 눈으로 훑는 동안 알렉세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신이 요구한 요구 조건들이다. 보니 감상들이 어떤가?”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일개 야만인들이 어찌 우리에게.”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황제 폐하의 신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절해야 합니다. 차라리 전멸할 각오로 싸우는 게 좋다고 여겨집니다.”

그들의 격한 반응에 알렉세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관들의 생각이 옳다. 이런 조건은 거절해야 마땅한 일이지. 하지만 그럴 명분이 없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다시피 명예로운 정전은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 그런 마당에 협상을 깨트리고 나오는 것은 이쪽이 할 일은 아니지. 그렇지 않은가?”

귀족 장교들은 금세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지휘부에서도 협상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단박에 거부하지 못하는 듯했다. 누군가 나서서 ‘모양새’만 헝클어놓아 준다면 다시 일전을 벌려볼 수 있으리라.

그들은 모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 우리가 협상이 깨질 분위기를 만들면 이 조건은 물려지는 겁니까?”

“그렇지 않겠는가.”

알렉세이는 여유롭게 말했다.

사령관 보좌가 그런 의사를 분명히 하자 장교들은 서로의 눈을 보았다. 명예로운 귀족으로서 제국의 굴욕을 좌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우리를 불러 이 문서를 보여주신 것은 ‘결투’라도 해보란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동방인들입니다. 동방 것들이 명예로운 결투를 이해할 리도 없는데, 그 같은 방식이 통하겠습니까?”

장교들이 묻자 알렉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귀관들은 잘못 알고 있군. 그대들이 결투를 걸 상대는 동방인들이 아닐세. 바로 연합왕국 놈들이지.”

“연합왕국 놈들이라면.”

“놈들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이지. 이번 전쟁에서 사실상 우리 군대를 파멸시킨 진정한 적일세.”

그 말에 장교들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해볼 텐가?”

“가능하다면 기꺼이 해보겠습니다.”

“좋아. 귀관들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지.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다. 이번 협상 사절단의 호위 역으로 귀관들을 데리고 갈 테니, 적당한 기회를 보아 시비를 걸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장교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알렉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그만 물러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장교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이 도박이 잘 먹혀준다면 신은 우리에게 큰 소리를 내기 어려울 거다. 협상 역시 기세로 하는 싸움. 잘만 되어서 사람이라도 죽어 나가준다면 더더욱 분위기는 좋아지겠지. 전쟁 배상 문제 정도까진 덮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알렉세이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이번 협상만큼은 그 의도대로 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한 수로 상대가 꾸민 ‘화려한 전쟁’을 용두사미로 만들어줄 참이었다.

아무리 전쟁을 잘 치러도 협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이기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알렉세이는 숱한 전쟁을 통해 그 같은 진리를 깨우치고 있었다. 때로는 패배하고도 협상에서 승리나 다름없는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번 협상에서 부릴 그의 계교는 ‘마지막 역전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전쟁 하나는 인정하지. 내가 그대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협상은 달라. 군략과 정략의 세계는 엄연히 다른 공간. 여기에서도 그대가 초인적인 역량을 보여줄 가능성은 없다.’

알렉세이가 만나본 승도는 아직 젊은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군략도 모자라 정략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 한 수로 전세를 뒤집을 것이라고 믿었다.

***

협상의 아침이 밝았다.

루시 사절단은 신에 얕보이지 않기 위해 모두 깨끗한 정복 차림에 쓰지 않던 예비 국기와 의장용 장비를 들고 ‘요란스럽게’ 모이셰바로 들어왔다.

이들을 맞이하도록 명령받은 비슈누는 일단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 앞에 섰다. 교양 있는 로망스 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자들이 ‘인사차’ 나오자 미카엘 대공은 못내 불쾌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인도를 받아 마을로 들어섰다.

협상 장소는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교회로 정해졌다. 사절단이 교회로 들어가자 그 주변은 양국의 병사들이 반씩 구역을 나누어 경계를 섰다.

비슈누는 주변을 경계라도 하듯 쓱 둘러보고는 이번 전쟁의 상급으로 얻은 질 좋은 파이프(원래는 루시 장교의 소유물)를 입에 물었다.

그가 한 모금 맛을 보려는데 아군 장교 하나가 병사가 경계를 서는 위치를 놓고 적 장교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협상장 주변에서의 ‘기 싸움’이 걸린 문제라 양자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슈누는 그 다툼에 끼고 싶지 않았지만 아군 장교가 손짓을 하는 통에 무시할 수 없어 파이프를 품에 넣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도착하자 연합왕국 장교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사나운 맹수를 옆에 거느린 주인의 심리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톤이 높아진 것은 확실했다.

“여긴 우리가 점령자요. 귀측은 ‘손님’으로서 온 것이고. 그 점은 분명히 해야지. 이쪽이 선다면 서는 거요. 알겠소?”

“하, 웃기는 소리. 이곳은 우리 국토요. 주객을 따진다면 당연히 우리가 주인이고 귀측이 손님인 거지. 우리 땅에서 우리가 경계 서는 위치까지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요?”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 여긴 신의 점령지이지 귀국 영토가 아니요.”

“할양이 된 것도 아닌데 귀측의 영토처럼 군다니.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 같군. 하긴 연합왕국에선 야만인들이 쳐들어와 원래 살던 주인을 밀어내고 그 땅을 차지한 채 주인 행세를 한다고 들었으니, 그 논리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구려.”

“이 더러운 대륙 촌놈이 감히 우리나라를 모욕해?”

언쟁은 차츰 불이 붙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시비로 시작되었지만 말이 감정싸움으로 번지자 그 대립 양상은 점점 심상치 않은 쪽으로 흘러갔다.

“결투다.”

마침내 루시 장교 쪽에서 먼저 ‘결투’란 말이 나왔다. 그러자 연합왕국 장교가 제 모자를 팽개치며 외쳤다.

“좋다. 이 건방진 대륙 촌놈. 우리 왕국과 여왕 폐하를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둘은 결투에 동의하기가 무섭게 공증인을 찾기 시작했다. 결투에는 ‘그 정당함’을 인정해줄 입회인과 이를 공증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이 결투에 참가할 사람을 찾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그 이야기는 양쪽 호위 장교들 전체로 퍼졌다.

사태가 커지자 여단장 알롱이 급히 협상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승도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보고했다.

“각하, 밖에서 결투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협상에 불만을 품은 루시 귀족이 우리 쪽에 작정하고 시비를 건 모양입니다.”

“그래요?”

그때 루시 쪽 한 장교도 협상장으로 들어와 미카엘 대공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대공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놀란(?) 빛을 보이며 승도 쪽을 보았다.

“총리대신 각하, 유감스럽게도 협상 중에 불미스런 상황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쪽 장교들이 협상에 불만이 많아 ‘결투 소동’이 일어난 듯합니다.”

“예. 저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전하.”

미카엘은 그 말에 힘을 얻은 듯 단숨에 말을 이었다.

“아까 우리 쪽에서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습니다. 군부에서는 전쟁을 끝내는 데에 상당한 불만이 있을 겁니다. 협상 내용이 조금 흘러나간 정도만으로도 결투 소동이 벌어지는 판인데, 본국의 전쟁 계획 위원회가 이런 사정을 알게 일이 어떻게 흘러가겠습니까? 필시 양국은 공멸을 각오한 전쟁을 벌이게 될 겁니다. 이런 사정을 헤아려 귀측에서 우리의 체면을 다소 세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승도는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미카엘은 결투 소동 소식을 듣는 순간 조금 당황한 빛을 보였었지만, 그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었다. 처음부터 이 소동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승도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상대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협상에 불만이 있는 세력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협상력을 올리려는 잔 수였다. 그가 경험이 없는 애송이였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산전수전 다 겪은 정략가란 점이 문제였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승도는 자신이 미끼를 물고 한 발 물러서길 바라는 눈빛을 던지는 상대를 보며 상념을 이어갔다.

과거 로망스 공화정 시절 ‘애송이 통령’은 전쟁만 잘하고 정략엔 터무니없이 약했다. 특히 외교적 협상에선 ‘호구’라고 불릴 정도로 약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언제나 전쟁을 잘 해놓고도 협상에서 그 이익을 날려먹기 일쑤였다. 상대의 기발한 심리전과 사탕발림에 넘어가 몇 번을 당했다.

그 중에는 오스티아의 노회한 여우 베른 남작과 벌인 협상도 있었다.

베른은 ‘오스티아’의 정치적 입지가 갖는 중요성을 설파하며 로망스의 양보를 요구했었다. 그러면서 전통의 오스티아가 로망스와 협상을 하는 자체가 오스티아 황실의 대단한 양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의 적절하게 ‘결투 사건’이 벌어지면서 승도는 그에 홀딱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황실이 협상에 응해주는 것이니 그 말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국제 외교에선 상대의 패를 높게 보고 속아 넘어가주면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지. 가진 패가 없어도 액수를 높게 부르는 자가 이기는 곳이 외교 판이다.’

그는 오랜 외교전을 통해 그 같은 진리를 체득했다. 이제 두 번 당할 만큼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승도는 대공을 보고 말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협상하기 곤란합니다. 협상을 하자고 제안하시고 귀측의 군부를 통제할 수 없다면 ‘협상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승도가 의외의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자 대공은 잠시 당황한 빛을 보였다. 승도는 그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승자에게 양보를 종용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푼다면 모를까, 전하께서 양보를 요구하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으음.”

“우리는 귀측에서 협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면 전쟁을 계속할 의향이 있습니다.”

승도가 생각 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대공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알렉세이를 보았다. 그도 승도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모른 눈치였다.

알렉세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공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전하, 일부러 허세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강한 톤으로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렉세이의 조언(?)을 얻은 대공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승도를 보고 자못 위엄 있는 투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 제국은 다가오는 도전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좋습니다.”

승도는 모자를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공을 향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교전을 재개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귀국의 시비르 영토 전체를 먹어치우는 것을 목표로 싸워보도록 하지요.”

그가 정말 협상을 끝낼(?) 모양새를 취하며 교회를 나서자 미카엘은 당황했다.

“알렉세이 경, 이게 어찌 된 거요?”

“우리 위협이 먹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칠 노릇이군.”

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알렉세이와 한참 이야기를 나눈 끝에 백기를 드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로써 루시가 던진 마지막 한 수는 오승도의 배짱(?)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협상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타결되었다.

1. 루시는 신과 동영의 내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양국의 주권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 루시는 그 어떤 명분을 가지고도 개입할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2. 루시는 이번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이상(명목상 전쟁 도발은 루시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국경 전투에서 포로가 된 루시 장교가 루시의 도발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지고 은화로 4,000만 냥을 배상금으로 제공한다. 이 돈은 10년 간 분할하여 지불한다.

지불에 대한 담보는 에우로페와 신대륙에 투자된 루시의 해외 자산으로 하며, 공증은 연합왕국에 맡긴다.

3. 루시는 투르 한국의 승인을 철회하며 이에 대한 지배권이 전적으로 신에 있음을 인정한다.

4. 루시는 신에서 월경한 유목민들을 대막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확인한다(승도는 불씨를 다시 안지 않기 위해 이 같은 조건을 삽입).

5. 이상과 같은 조건에 대한 대가로 신은 점령지를 반환하며, 포로로 잡힌 장교와 사병, 무기 일체를 반환한다.

6. 이상의 협정에서 승전국과 패전국이란 용어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루시가 주장했고 승도가 추인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챙기려는 루시의 노력이다).

이 협상의 타결로 신은 당당한 동방의 패권국이자 새로운 세계열강의 지위를 얻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며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해가던 노 제국의 놀라운 비상이었다.

이를 두고 한 역사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근대 신은 강주에서 제국의 꿈을 키웠고, 모이셰바에서 그 날개를 펼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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