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내치 (1)
동영과 협상을 마친 다음 날, 승도는 연합왕국 공사의 예방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전날 동영 사절로부터 들은 ‘동맹 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공사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전에 전하께서 권좌에 오르시던 시절만 생각해도 북방의 곰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2위의 강대국을 동방에서 꺾을 줄 알았다면 좀 더 잘 보일 것을 그랬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노력해 나가야 할 부분이지요.”
공사는 승도의 대화를 받으며 자신의 잔을 비웠다. 깊은 맛이 배인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인 만큼 둘은 여유를 가지고 상대의 생각을 탐색했다.
“전하, 여기 말씀하신 서신입니다.”
대화 중에 시비가 밖에서 아뢰었다. 승도는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쟁반 위에 담긴 황금빛 서신이 탁자 위에 놓였다.
공사가 그걸 보고 약간 경계심이 든 눈빛을 던졌지만 승도는 모른 척하며 서신을 옆에 두었다.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을 봉한 봉인은 공사의 눈에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 봉인은 로망스 왕실의 것인데. 로망스가 재빠르게 신에 접근이라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야단났군. 견제를 하면 로망스와 신이 손을 잡을 가능성이 생각보다 높을 수 있단 말인데.’
공사는 복잡한 눈으로 서신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승도가 서신을 옆으로 치웠다.
“중요한 서신이라 확인은 해두어야 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중요한 국사는 제시간에 챙겨야지요.”
공사는 손을 저었다. 승도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미끼에 상대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미끼는 문 건가.’
그는 이번 만남에서 공사의 생각을 확실히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승부수를 준비했다. 전날 동영 사절로부터 연합왕국이 견제의 움직임을 보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궁리’에 궁리를 해서 준비한 한 수였다.
그는 전생에 로망스 황제로서 익숙하게 다룬 적이 있는 왕실 문장을 어렵지 않게 흉내 냈다.
이 문장을 이용해 로망스로부터 서신을 받은 척 위장하는 것이 이 낚시의 핵심이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공사는 평정을 가장하며 잔을 집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와 달리 그 손끝이 잠시 떨린 것이 이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참, 이렇게 각하와 다과를 나눌 기회도 많지 않으니 견문을 좀 빌렸으면 합니다. 의견을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미력한 생각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은 우리 아이에게 에우로페의 역사를 가르치려 하는데, 한 부분이 도통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호오, 에우로페의 역사를 말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18세기 프리지아의 역사 중에 오스티아와 로망스 사이에서 줄을 타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거기서 프리지아가 둘의 손을 다 놓아버리고 연합왕국의 손을 잡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법도 하군요.”
공사는 승도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 안에 실린 진의를 읽었다.
18세기 프리지아 외교 이야기는 당대에 벌어진 일대 ‘외교 혁명’을 다룬 것으로, 서로 간에 접점이 없던 연합왕국과 프리지아의 동맹이 성사되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
공사는 그가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짐작했다.
‘돌려서 이쪽에 넌지시 압력을 넣는 거로군. 프리지아가 왜 연합왕국의 손을 잡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공사는 그 ‘은근한 찌르기’가 못내 불쾌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외교가에서는 이런 식으로 상대를 간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하는 편이 좋겠습니까?”
승도가 묻자 공사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 입을 열었다.
“외교 혁명의 연유는 전하께서도 짐작하시듯 이익입니다. 기존의 판에서 프리지아가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국에 손을 내밀면서 새로운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걸 쉽게 설명한다면 인형으로 비유하면 좋겠습니다. 기존에 친숙하던 인형은 분명 ‘정’도 많이 들었고 추억도 공유하고 있는 사이일 겁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은 더 얻을 수 있는 재미가 줄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롭고 신선한 인형이 나왔을 때 그쪽에 끌릴 수밖에 없겠지요. 신선한 재미와 맛을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공사가 인형을 비유해 설명하자 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조언이십니다. 오랜 고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습니다.”
“한데 전하의 따님이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공부를 하실 연치가 되셨는지요?”
“아닙니다. 그저 제 욕심일 뿐입니다.”
“동방이든 서방이든 부모의 마음은 같은 듯합니다.”
공사는 태연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프리지아 외교사를 머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아까 로망스의 봉인도 보았고, 프리지아 외교사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꽤나 갑갑하겠군.’
승도는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공사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슬쩍 지나가는 투로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가져오신 서신 말입니다.”
“서신에 문제라도?”
“얼핏 보니 로망스의 봉인이 찍힌 것 같던데 그쪽과 이야기라도 오고 가신 것이 있습니까?”
승도는 드디어 상대가 미끼를 완전히 삼켰다고 확신했다. 이쪽이 보인 뉘앙스와 ‘서신’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직접 말을 꺼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승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비공식적으로 오간 대화는 있습니다.”
“전하, 로망스와 우리 연합왕국은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이지요.”
“이 사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를 모르고서야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물론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전하께서 로망스와 선을 대신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실 겁니다. 그쪽에서 주는 이익 이상의 불이익이 따를 수도 있겠지요.”
“그 말이 썩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는군요.”
“무례했다면 용서하시길. 전하와 왕국 양쪽을 위한 충고를 드린다는 것이 과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도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연합왕국이 우리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견제하려는 생각은 진정 없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우리 왕국이 그런 행동을 취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전형적인 발뺌이었다.
승도는 그 말에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해서 득볼 것은 전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딱 두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로망스와 접촉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재검토하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첫째, 앞으로 우리 제국에 대한 왕국의 외교적 공작이 없었으면 합니다.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자면 서로가 믿을 수 있는 행동을 해야겠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대신 전하께서도 동방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나치게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둘째는 아편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귀측의 성의가 필요합니다.”
승도의 말에 공사가 수염을 매만졌다.
“성의라고 하시면.”
“금수 조처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수입을 조절할 수 있게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요컨대 중독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게 해달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귀국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지 않는 적절한 타협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십니까?”
승도가 반문하자 공사는 잠시 셈을 해보았다.
당장 에우로페에 신경을 쏟기도 어려운 처지에 로망스와 신이 손을 잡으면 연합왕국으로서는 상당히 짜증스런 그림이 만들어지게 마련이었다. 물론 신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왕국이 손해를 본다는 점은 확실했다.
그러니 공사가 내놓을 대답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대답을 내놓으며 견제에 대한 모든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지요.”
승도는 공사의 대답에 만족하며 미리 준비한 요리들을 들이게 했다.
이날, 둘은 밤이 늦도록 만찬을 맛보며 동방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쉬어.”
연단에 선 교장 앞에 선 생도대장이 목에 힘을 주었다. 교장 뒤에 놓인 좌석에 앉은 교관들과 외빈들은 차분한 얼굴로 무관 학교의 졸업식을 지켜보았다.
단 한마디에 수백의 생도들이 일사불란하게 다리를 살짝 벌렸다. 모두가 훈시를 들을 준비가 되자 생도대장이 앞으로 돌아서 경례를 하고 손을 내렸다.
교장은 생도들을 천천히 굽어보았다. 로망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가르친 생도들에 비하면 그 앞에 있는 이들은 ‘형편없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참담한 자들이었다.
과연 일국에서 가려서 뽑은 엘리트 후보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 몇 년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선입견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가르친 생도들은 처음에 태부족인 자들이었지만 배울 자세가 된 자들이었다. 엄격하고 숨이 막히는 답답한 규칙도 인내했고, 부족한 식사와 숙소에도 만족하며 자신을 갈고닦을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교장은 자신의 지론을 바꿀 정도였다.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로망스의 중산층 자제들은 준비된 인재들이었다. 그 점에서 저들과 출발점이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어려운 삶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유혹에 쉽게 시달렸고,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데 부족함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부족한 상태’에서 졸업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의 교육을 생각하면 로망스 사관생도들보다 탁월한 성취를 거두고 교육을 마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같은 차이를 보자면 물질의 풍요가 좋은 인재를 기르는데 절대적인 조건이라 믿었던 내 생각도 수정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교장이 따뜻한 눈으로 생도들을 보며 ‘덕담’을 꺼냈다. 생도들은 그 연설을 묵묵히 들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새겼다.
그 중에는 왕소도 있었다. 그는 강주에서 있었던 ‘사관생도’ 모집에 간신히 합격하여 인생을 바꿀 기회를 잡은 행운아였다.
왕소는 그 자리에서 대륙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 승도를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좀 더 운이 좋았다면 그로부터 시계를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을 텐데, 그런 운까지는 바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장교가 되는 길에 섰으니, 그 옆에 서서 포상을 받을 기회는 언제든 올 것이라고 소년은 믿었다.
“이제 여러분은 제국의 이름으로 배출된 상승군 무관으로서 무한한 기회를 잡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은 때로는 험난하고, 때로는 시련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제국이 길러낸 첫 세대의 지휘관들입니다. 여러분이 보이는 행보를 무수한 후배와 역사가들이 지켜보고 기록할 것입니다. 그것만 기억한다면 여러분은 제국의 군인으로서 당당한 내일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지도에 잘 따라준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지루한 연설을 마치겠습니다.”
교장은 연설을 마친 후 생도대장을 연단 앞으로 불러 손수 어깨에 견장을 붙여주었다.
이로써 그들은 제국의 정규 무관 교육 과정을 마친 첫 세대로서 제국군의 중추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전에 속성 과정으로 길러져 투입된 자들이 있었지만, 정규 과정(약 4년)을 모두 수료한 자들은 이들이 최초였다.
생도대장의 어깨에 견장이 붙은 순간 외빈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강주 무관학교의 졸업 행사인 관계로 조정의 요인들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강주 주변의 주요 지방관들은 모두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금발과 적발의 외국 외교관들과 상인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이 본격적으로 용트림을 하려는 시기에 배출되는 ‘첫 세대’의 지휘관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이들의 역량이 향후 제국의 군사적 능력과 직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외빈들에게 주어진 좌석에 앉아 있던 연합왕국 영사와 로망스 영사는 다소 상반된 시선으로 장래 제국의 무관들을 지켜보았다.
‘로망스 교수들을 대거 들여다 키웠다고 하더니 모양새는 그럴듯하다. 저들이 ‘일정한 수준’에만 이르렀다고 가정한다면 신은 머지않아 외국 장교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국 군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 왕국에 대한 태도도 지금보다 훨씬 호전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저들을 길러낸 교관은 로망스 사람들이 아닌가. 장래의 신군부는 친 로망스 파벌로 채워진다고 봐도 무방한 일이야. 이건 썩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왕국 영사의 우려 섞인 시선과 반대로 로망스 영사는 유쾌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연합왕국 친구들은 똥줄이 타는 모양이군. 신이 루시를 꺾고 장교를 대거 배출하며 군비를 증강하는 모양새를 취하니 제 이익에 타격이 올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거기다 장래에 신에서 우리 영향력이 커질 것이 눈에 보이니 걱정이 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군. 하하하.’
영사들의 상반된 시선 속에 ‘졸업식’이 끝나자 정식으로 임관된 사관들이 모자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도한 교수들을 하나씩 찾아내 헹가래를 쳤다. 늙은 교수들은 그때마다 기겁을 했지만 사관들은 자신들을 매번 엄격하게 지도한 ‘스승’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자 행상은 ‘무사히’ 교육을 수료한 사관들에게 소정의 ‘상금’과 잘 맞춘 군복을 한 벌씩 선물했다. 이 선물은 제국의 최고 권력자 오승도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당연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사관들이 감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선물을 보낸 것은 충성심을 얻으려는 목적 외에도 ‘군’에 대해 최고 권력자인 승도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려는 뜻이 있었다. 사관들은 승도가 내려준 군복을 입어보며 몸을 돌려보기도 했다.
왕소는 자신의 몸에 딱 맞는 군복을 입고 뭔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군복을 입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자리로 나오자 수많은 외가와 친가의 친척들이 떼거지로 밀려나왔다.
어렵던 시절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혈족들을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왕소는 얼떨떨하면서도 조금은 불쾌했다.
“왕소, 네가 나라의 무관이 되다니. 난 어린 시절부터 네가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믿었다.”
아버지를 ‘매정하게’ 밀어냈던 백부가 덕담을 건넸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더 웃긴 것은 백부가 아니라 외삼촌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어울리지 않는’ 몰락 유자 나부랭이와 얽혔다고 날마다 집에 찾아와 욕설을 퍼붓던 인간이었다.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푸근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왕소야, 네가 이리 잘 되어서 번듯하게 가문을 빛내주니 이 얼마나 좋으냐. 자, 외가로 가자꾸나. 네 외조부와 외조모님이 네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들은 서로가 왕소 일가를 팽개친 사실을 비난하며 그를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가당치도 않는 싸움을 지켜보던 왕소는 병사들을 불렀다. 그도 이제 제국의 당당한 무관이었기에 ‘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선망하는 ‘권력’의 힘을 가진 왕소는 더 이상 지난날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오승도가 만들어낸 새로운 성공의 모델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왕소는 병사들에게 명령해 가족들을 자신의 앞에서 치우게 했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이러지 마라.’,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둥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왕소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진정으로 그가 가족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제외하면 군복과 기회를 내려준 한 분밖에 없었다. 그만이 대가 없는 호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왕소와 같은 자들의 존재는 승도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이로운 것이었다.
광대한 대륙의 특성상 그 전역에 퍼지는 군대는 언제든 ‘군벌화’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 내부에 똬리를 튼 이 강력한 충성 집단이 그 위험을 거세해주기 때문이었다.
왕소는 북쪽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제 나름의 졸업식을 마친 후, 모자를 눌러썼다. 이제 상승군 장교로서의 내일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