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35화 (335/425)

제335화. 내치 (2)

가지런히 놓인 레일과 목침이 마지막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망치를 쥐고 못을 힘껏 내려쳤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마지막 구간이 완성되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몰려온 기자들이 재빨리 수첩 위로 펜을 놀렸다. 메리는 이마의 땀을 닦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땀을 닦고 돌아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벌써 몇 년을 그녀의 회사에서 구른 원주민 족장 하얀 황소였다. 그는 또렷한 발음으로 물었다.

“이제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신에 계신 고용주께선 일이 끝나는 대로 새 터전과 생계 수단을 마련해 준다고 말하신 것이 있으니까요.”

“일전에 말한 그 제안은.”

“네. 그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요. 솔직히 그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유쾌했으니까.”

하얀 황소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세상 누가 연합왕국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마음대로 벗길 기회를 주겠으니 그 밑에 와서 일을 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할까. 그는 그 제안 한마디만으로도 승도를 높게 평가했다.

대담함과 배포만 본다면 그들이 그 그늘 아래 들어가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이 일은 단지 그런 기분 하나로 결정할 사안은 아니었다.

“걸리시는 거라도 있단 말씀인가요?”

“이 땅, 당신이 철도를 놓은 대지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요. 여길 우리가 떠난다면 백인들에게 토지를 넘기고 간다는 건데, 그건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지.”

“하지만 이곳에선 부족의 안위는커녕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어요. 철도 공사를 하고 있는 동안은 괜찮았지만, 이게 끝난 이상 왕국에서도 다시 손을 쓰려 할지도 모르고요.”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요.”

하얀 황소는 그녀의 말에 씁쓸한 투로 대꾸했다.

“자, 이쪽을 봐 주시겠습니까?”

화가 몇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대륙 횡단 철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대륙 서쪽 끝에 도달한 이 시점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고자 하는 열망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메리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기다려 달라는 시늉을 하고는 하얀 황소를 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시면 답은 간단해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길은 신으로 가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네. 하지만 많이는 드릴 수 없어요. 저기 보이는 분들이 계속 눈치를 주고 있으니까요.”

메리는 눈동자를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하얀 황소는 그 눈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붉은 군복을 입은 왕국 기병 장교 몇이 서 있었다.

하얀 황소는 그들을 보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자신을 부른 기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황소는 그녀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 철도 공사 노동자들의 숙소로 돌아온 하얀 황소는 부족의 원로들을 모아놓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몇 년 우리는 ‘철도 공사’를 하는 동안 결정을 내린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피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왕국의 붉은 코트들은 우리 목을 칠 ‘합법적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우리를 보호해줄 시한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결정을 내릴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 땅에서 다시 무기를 들고 왕국과 싸울지 아니면 부족의 장래를 위해 신으로 향할지.”

“정말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지. 우리의 어머니 대지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남는다면 ‘철도’까지 부설되어 제 마음대로 힘을 투사할 수 있게 된 붉은 코트들과 싸워야 할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떠나는 것도 문제이고. 그 신에 있다는 자가 한 약속 한마디만 믿고 가기에 신뢰가 충분치가 않다는 게 걸리오. 족장도 그런 점을 염려하고 있을 터.”

하얀 황소는 늙은 원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그의 불안을 정확히 뚫어보고 있었다.

“족장이 보기에 그 신에 있다는 권력자의 ‘대리인’은 어떤 사람이요? 우리는 그 여자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족장은 다르니 잘 알 거라 생각하고 묻는 거요.”

“믿음이 가는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우리에게 한 약속을 빠짐없이 다 지켰습니다. 얼굴이 하얀 백인이지만 충분히 존중해줄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믿을 수 있다.”

하얀 황소는 원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로는 이가 빠진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더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나. 믿음이 가는 이가 신뢰하고 그 밑에 있기를 자처하는 권력자인데, 신의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족장도 조금은 변했어.”

“제가 말입니까?”

족장이 반문하자 원로가 주름진 눈으로 반달을 그렸다.

“우리의 옛 전통과 덕목에선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선으로 여겼다네. 비록 적대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어머니의 대지 위에서 나눈 신성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했지. 그 믿음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몰리긴 했지만, 그것이 저 무도한 백인과 우리의 차이가 아닐까 싶어.”

“옳은 말씀입니다.”

“백인들처럼 사사건건 의심하고 저울질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 그렇지만 믿음이 요구될 때는 믿고 움직이게. 족장도 백인이 아니라 위대한 어머니의 아들이니까.”

원로의 말에 하얀 황소는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었다면 움직이게. 우리는 족장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원로들이 차분하게 말했다.

족장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이 내려지자 이주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메리는 부족의 이주를 위해 대형 범선 열두 척과 기범선 세 척을 급히 임대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부는 그 정도는 쉽게 감당할 수 있었다.

신대륙의 철도 여제, 운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진 그녀다.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크다 보니 여유 자금만 가지고도 이 비용을 댈 수 있었다.

원주민들이 배를 타기 위해 디에고 항으로 몰려오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붉은 코트들이 아주 시원하단 표정을 지었다.

“지긋지긋한 야만인들이 어디 도망갈 곳이라도 찾았나 보군. 떼거지로 이주를 하는 모양인데.”

“이제야 냄새나고 골치 아픈 족속들을 보지 않아서 좋군. 우리 연대장도 저 야만인들이 이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근무 계획을 훨씬 편하게 짜주더군. 진즉에 이렇게 되었어야 할 일이었는데.”

“편하게 지내게 된 판에 뭘 그리 불평하나? 당분간은 공으로 월급을 받을 판인데.”

“그것도 그런가. 하하하.”

붉은 코트들이 ‘달아나는 패자’를 바라보며 조소를 보이고 있을 때,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두고 떠나게 된 어머니의 대지를 거듭 돌아보며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이 땅에 대부분의 가족을 묻은 검은 독수리는 몇 번이나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입을 맞추고 눈물을 쏟기를 거듭했다.

자신들의 땅, 모든 삶을 함께한 어머니의 터전을 떠난다는 슬픔이 부족민 전체를 감쌌다.

“이 대지는 우리 부족의 것이다. 우리는 기필코 돌아오고 말 것이다.”

검은 독수리가 땅바닥에서 입술을 떼며 말했다.

다른 부족민들도 그를 따라 땅에 손을 대고 흙 한 줌을 움켜쥐었다. 그들 역시 ‘어머니 대지’에 경의를 표시했다.

“피 흘린 대지를 떠나 이역만리로 가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살펴 주십시오. 이 땅의 후손들이 다시 돌아오는 그날까지 그 삶에 보살핌의 눈길을 보여 주십시오.”

부족민들은 겨우 인사를 마치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었다.

하얀 황소는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가 정말로 잘 내린 선택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부족민들의 슬픔을, 어머니의 대지를 떠나는 아픔을 보자니 실수를 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하얀 황소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다음 마중을 나온 메리의 손을 잡았다. 다른 백인들은 증오스러웠지만 은혜를 베푼 그녀는 달랐다.

하얀 황소는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전하고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어머니의 땅을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신성한 대지로 돌아올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싶다.’

하얀 황소는 무거운 눈을 질끈 감고는 배 위에 올랐다.

***

승도는 상승군을 팽창시키는 동시에 아편의 해악을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 작업’을 진행했다. 왕국 공사로부터 ‘수입’을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자는 타협안을 이끌어낸 만큼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다.

선전은 각 지방의 상급 관청에 전담 관료를 내려 보내 진행 상황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용주의 어느 마을에도 ‘대륙 최고 권력자’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방 한 부가 붙었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방을 보며 수군거렸다.

“나라에서 아편이 해독하니 가급적 몸에 대지 말 것을 권한다는구먼.”

“아편이 그리 해악한 것이었나? 그건 난생처음 듣는 소리일세.”

이 시대 민중들에게 아편이 ‘해독’하다는 생각은 그리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세수를 거두는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일하는 인구가 감소하는 주범이니 ‘만 악의 근원’으로 여겨졌지만 이를 사서 피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편은 고단한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하루를 보내게 하는 ‘낙’이고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이 쾌락이라도 없다면 세상 살기가 너무 팍팍하고 힘들었다.

그리고 양귀비는 ‘약재’로 쓰여 온 역사도 있었다. 대중적인 인식이 아편의 해독을 인식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나라님이 잘못 아신 게지.”

“하지만 건넛마을 정씨를 보면 방에 붙은 말도 맞는 것도 같네.”

“정씨 말인가?”

그들은 실제로 있는 아편 중독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편 중독자들은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축 늘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른하게 쾌락을 즐기는 그들을 보자면 사실 ‘폐인’도 이런 폐인이 없었다.

하루 종일 집에 누워 뿌연 연기를 토해내는 그들을 보면 고개가 절로 저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렇지. 정씨 얼굴을 보니 아주 다 죽어가는 골방 인간이 따로 없었어. 아편이 몸에 좋다면 그걸 부지런히 사서 피운 정씨가 그 지경일 턱이 없지.”

“그럴듯하이.”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방에서 써둔 말을 지나가듯 머리에 새겼다.

그 효과는 매우 미미한 것 같아 아편 판매상들은 그 효과에 냉소를 보냈다.

‘멍청한 신의 관료들이 현실을 모르고 꺼낸 정책이다. 아편을 한 번 피운 자들이 그걸 끊을 턱이 없는데, 그 해독을 경고한다고 통하기나 할까?’

그들의 자신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과거 임경문이 아편을 몰수해서 불태웠을 적에 제국의 아편 가격이 크게 폭등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아편 중독자들은 아편을 사서 피울 돈이 없어 전전긍긍했다. 일부는 그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가기도 했다.

그 중독성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여준 산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전례가 있는 만큼 아편 중독자들을 줄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편 판매상들의 생각이었다. 승도 역시 그 점은 계산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선전은 신규 중독자의 수를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 어차피 이미 중독된 자들은 구제하기에 너무 먼 곳까지 가버린 상태였다. 중독자들을 정상인으로 회복시킬 돈이면 못 먹고 굶주린 백성 여럿을 살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최선은 결국 예방이었다. 신규 중독자가 생기지 않도록 손을 쓰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첫 달에는 그 영향이 거의 없었다.

아편 판매상들은 그에 쾌재를 부르며 ‘신의 멍청함’을 다시 한 번 비웃었다. 하지만 두 번째 달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죽어 나가는 중독자를 보충할 새로운 ‘중독자’가 급감한 것이다.

어둠이 내린 비가 촌으로 작은 배 한 척이 천천히 노를 저어 왔다. 배가 물가에 닿자 호롱불 몇이 그쪽으로 다가왔다. 호롱불을 든 자들은 건장한 장정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만한 거리에 멈춘 채 적당한 자리를 골라 엉덩이를 붙였다.

불빛에 비친 자들은 모두 까만 장포를 두르고 있었다. 아편을 유통한다는 지역의 이권집단 흑사회의 문장이 그들의 손등에 또렷하게 비쳤다.

눈에 검상이 있는 사내는 입 안에 당과 비슷한 것을 물고 있다 퉤 하고 뱉었다. 그가 이물질을 뱉어내자 앉아 있던 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검상 사내는 흑사회의 수장이었다.

회주가 말했다.

“염병할 조정의 조처 때문에 수입이 이전의 삼분의 이로 줄어든 것 같아. 다음 달 양적 놈들에게 물량을 받을 때 수량을 줄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회주가 묻자 뚱뚱한 사내가 코를 후비다 손가락을 얼른 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량을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장마철이 되면 물건만 상할 겁니다. 아니면 물량은 그대로 받고 가격을 좀 낮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빼빼 마른 사내가 말했다. 아편은 유통 단계에서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편 구매자들은 ‘사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매를 늘리는 측면에서 보자면 값을 조금 낮추는 것만으로도 물량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이윤 부분이었다. 값을 낮추면 유통 마진이 줄어드니 그만큼 흑사회의 몫이 줄었다.

“염병. 값을 일 할을 낮추면 우리 몫이 이 할 줄어든다는 걸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구매자가 줄어든다면 우리 장사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른 사내의 반박(?)에 회주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질겅였다.

뚱뚱한 사내는 짭조름한 맛이 나는 손가락을 맛보다 한마디 했다.

“그냥 양적으로부터의 구입량을 줄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구매비와 운송비를 모두 절감하고 판매 가격을 좀 올리면 손해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을 취하면 수입이 계속 줄어든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회주님, 좀 더 장기적으로 사업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운송비’를 절감하려면 회의 형제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잘린 회의 형제들은 호구지책을 찾아 ‘비슷한’ 업종으로 투신할 것이다. 그러면 회는 위협적인 경쟁 상대를 하나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유통망을 고스란히 아는 형제들을 자른다는 것은 그런 위험이 있었다.

“에이, 빌어먹을.”

회주는 머리를 벅벅 긁다 한마디 덧붙였다.

“그 염병할 방. 어떻게 지워버릴 수는 없나?”

“방을 말입니까?”

그 말에 간부들이 놀랐다. 조정의 방은 ‘조정의 신성한 권위’와 결부된 것이었다. 이를 손대는 것은 조정의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었다.

“그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 염병할 방이 붙어 있으니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정 그 방을 치울 수 없다면 아편의 유익함(?)을 홍보하는 벽서를 붙이면 어떨까?”

그 정도라면 생각해 봄직했다.

“그런 일이라면 해볼 만합니다.”

“자네가 책임지고 한 번 해봐. 그럴듯하게 글을 쓸 줄 아는 유자 놈들 몇 고용해서 ‘소설’을 한 번 잘 써보게 하는 거야. 알겠나?”

“해보지요.”

뚱뚱한 사내가 힘주어 대답했다.

세상이 급변하다 보니 자신들의 학문을 펼 길이 없는 유자들이 몰락하는 일은 흔했다. 그런 자들에게 접근해 돈푼을 쥐어주며 부리는 것은 어린아이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웠다.

“좋아. 그럼 일은 벽서를 붙이고 효과가 있는지 살핀 다음에 다시 고려하도록 하지.”

회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간부들도 횃불을 들고 일어났다.

곧 그들은 회합을 마치고 호수로 하나둘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흔적은 횃불이 타며 떨어진 약간의 재와 회주가 뱉어낸 무화과 한쪽이 전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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