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명분 (4)
하늘이 잔뜩 찌푸린 어느 오후, 유구의 항구에 두 척의 범선이 도착했다. 그 마스트에는 신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곳에 신의 상선이 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방문자들은 금세 유구 주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방문자들은 이곳 항구의 관리가 내어준 교자를 타고 도시 동쪽에 위치한 재번봉행의 관청으로 향했다. 뜻밖의 손님들이 관청을 방문하자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다카하시는 급히 상을 물리게 하고 의관을 차렸다.
곧 재번봉행은 방문자들과 자리를 마주했다.
“신에서 온 반진유요.”
“아, 반 대인이셨습니까. 저는 유구의 관할을 맡은 재번봉행입니다.”
다카하시는 방문자의 신분을 듣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반진유는 대륙 최고 권력자 오승도의 장인으로 평범한 상인 이상의 힘을 가진 거물이었다. 현재 조정의 관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오승도의 인척이자 최측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웬만한 대신 격으로 대접하는 것이 합당했다.
“만나 뵈어 반갑소이다.”
“저 역시 대인을 만나 뵙게 된 것을 광영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다카하시는 조심스레 차를 내주고는 눈치껏 그 방문 목적을 물었다.
“한데 신에서 명망이 높은 대인께서 이 누추한 변방에는 어인 일로 걸음을 하셨는지요.”
“하하. 상인이 일이 있어 천하를 주유하지 다른 볼 일이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반진유 역시 천하에 이름이 높은 행상의 일원이다. 신의 핵심 인사가 아니라 상인으로 방문한 것이라면 이상하게 볼 것도 없었다.
다카하시는 긴장을 조금 늦추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습니까. 하면 이 유구에 뭔가 매입하실 상품이라도 있으신지.”
“이곳이 사탕수수가 유명하지 않소?”
“그렇습니다, 대인.”
“우리 황실에서 설탕을 쓰고 싶은데 ‘관리’가 되지 않은 품목은 영 꺼림칙해서 말이요. 그래서 직접 투자를 해서 사탕수수 농장 몇을 경영하고 싶소이다.”
그 말에 다카하시는 수염을 매만졌다. 뭐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황실은 고래로 ‘까다롭기’ 그지없어 제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라면 그 재료의 손질 과정 하나까지 까다롭게 굴곤 했다. 생산 단계에서부터 신경을 쓰고 싶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면 투자 관계로 방문하신 것이로군요.”
“그렇소이다.”
“그 문제라면 환영합니다, 대인.”
다카하시는 투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로서는 조만간 중앙 정부에 그 관할권을 넘기고 본국으로 돌아갈 처지였다. 그런 만큼 ‘유구 개발’에 뚜렷한 실적을 남겨야 향후 인사 고과에 유리했다.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동영 관료가 흔쾌히 투자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반진유는 만족스런 미소를 보였다. 그는 다카하시가 휘하 관리를 시켜 ‘설탕 농장’에 관한 자료를 가져오라 지시하는 것을 보고 수염을 매만졌다.
‘역시 어리석은 자들은 한 줌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백 리 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다. 장사를 할 때 이문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본의를 읽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거늘.’
거상은 동영 관료에게 속으로 냉소를 보였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실 때 동영 관리 하나가 문서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다카하시는 그 더미를 건네받아 제 앞에 펼쳐 놓았다.
다카하시는 그 중 몇 개를 유심히 살피다 반진유에게 물었다.
“대인,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 곳이 좋겠습니까?”
“최소한 인부 오백 이상은 쓸 만한 규모여야 하오. 품질은 물론 최상으로 나올 곳으로. 그런 곳으로 셋은 골라주길 부탁하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다카하시는 적당한 문서를 이리저리 뒤졌다.
잠시 후, 그가 문서 몇 개를 골라내며 반진유에게 말했다.
“이곳들이 대인의 조건에 제일 부합할 겁니다.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좋소이다.”
반진유는 흔쾌히 응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살핀다는 것은 구색이었다. 어차피 신의 자금을 투자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유구 왕실도 신의 고위직이 유구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재번봉행의 감시를 피해 한 번 이쪽과도 접촉해 보기로 했다. 연합왕국의 후원을 받는 것으로 계산하긴 했지만 아직 그 보장이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다.
왕의 명을 받아 수리가 사탕수수 농장을 살피러 나온 반진유와 은밀히 접촉하기로 했다.
마침 반진유는 농장 한 곳을 둘러보고 그곳 유지의 집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해서 접촉의 기회도 좋았다.
그 유지는 왕실에 선을 대고 있는 자라 재번봉행의 눈을 피하기에 좋았다.
수리는 밤을 틈타 유지의 집으로 찾아갔다. 반진유는 대접을 막 받고 잠을 청하기 위해 침실로 향하다 누가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말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며 접객실로 향했다.
수리는 심호흡을 하며 신의 고위 인사를 기다렸다. 곧, 풍채가 좋은 장년인이 접객실에 들어섰다. 그는 체격이 당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지위와 연륜에서 나오는 위엄이 배여 있었다.
수리는 얼른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반진유는 그 인사를 받으며 방문의 이유를 물었다. 수리는 그 물음에 조심스레 아뢰었다.
“대인, 저는 유구 왕실의 명을 받고 찾아 뵌 것입니다.”
“그렇구려. 동영 쪽 사람이 아니라.”
“예. 일전에 신에 도움을 청한 것도 제가 왕실의 밀명을 받아 행한 것입니다.”
“그렇군. 일단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둘이 자리에 마주 앉았다. 수리는 자신의 앞에 앉은 거인으로부터 풍기는 위엄에 자못 긴장했다.
반진유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물었다.
“그래. 유구 왕실의 명이란 것이 무엇이요?”
“일전에 제의를 드린 도움 건에 대한 신의 생각을 확인하라는 명이셨습니다.”
“흠, 그 건이라면 이전과 대답이 같소. 우리는 번국의 위험을 가벼이 여길 생각이 없소이다.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도록 하겠소.”
“진정이십니까?”
“우리가 번국에 거짓을 말해 무얼 하겠소. 하니 귀 조정에서도 우리 신을 믿고 신의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혹 연합왕국과 같은 오랑캐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있다면 접어두시오.”
수리는 그 말에 뜨끔했다. 그가 연합왕국과 손을 잡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반진유는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었다.
“그 양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요. 그대들에게 무슨 보장을 했더라도 말이요. 일간 우리 귀에 들어온 소문도 하나 있소이다. 동영과 연합왕국이 협상을 한다는 이야기 말이요.”
반진유의 말에 수리가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은 대로요. 동영과 왕국이 이 유구를 놓고 물밑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거요. 그들의 의도대로 된다면 이 나라는 두 맹수의 아가리에 갈가리 찢겨나갈 거요.”
꿀꺽.
반진유의 경고에 수리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정이야 확인해보면 되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정말 큰일이다.
“그들이 협상을 해서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것은 추측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야기해 주겠소. 유구의 주변에서 이 나라의 독립을 보장해줄 용의가 있는 나라는 우리 신밖에 없소이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 점만큼은 명심해 두시오. 우리는 전통 질서 하에 편입될 번국의 독립을 침탈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하지만 동영은 그대들을 삼키려 시도했고, 연합왕국은 세계의 상당 부분을 먹어치운 배고픈 맹수요. 누구를 믿는 편이 옳을지 잘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거요.”
반진유는 뜻밖에 자신을 찾은 유구 사절을 구슬렸다. 힘이 없는 유구를 우군으로 만든다고 해봐야 유구 확보에 큰 힘이 되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 또한 의외의 순간에 내세울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 말씀이 진정이십니까.”
“믿어주시는 것이 귀국을 위한 길일 거요.”
반진유는 손에 들어온 좋은 패를 스스로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손에 들어온 고기, 수리는 반진유의 경고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자, 무기는 이렇게 다루는 것이라네. 잘 보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동방인들을 보며 로망스 사내 하나가 우스꽝스런 자세를 지어 보이곤 막대를 미는 시늉을 했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는 거듭해서 그 동작을 반복했다.
“하하하하.”
동방 사내들은 그 광경을 보고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고 잘들 보라니까.”
로망스 사내는 제 자세가 우습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 번 동작을 반복했다.
“이렇게 하는 걸세. 다시 잘 보라고.”
그는 동작을 몇 번 반복한 다음 아까 웃음을 터트린 자 하나를 지목했다.
“어이, 거기. 자네가 나와서 한 번 해보게.”
“내, 내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 말이야.”
로망스 사내가 딱 짚어 지목을 했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는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로망스 사내가 넘겨준 막대를 들고 엉덩이를 뒤로 빼는 우스운 자세를 취했다.
“큭큭큭. 저게 무슨 자세인가. 꼭 엉덩이를 살랑거리는 여인네 같지 않나.”
“무슨 소리. 여인네도 그러지는 않네. 꼭 뒤에 문제가 생긴 노인들 같군그래.”
동료들의 웃음소리에 사내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런 망신스런 자세를 반복하려니 절로 짜증이 났다.
“에이, 못 하겠소이다.”
“어허, 그럼 자네는 이번에 받기로 한 봉록은 받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겠네.”
“하지만.”
“잊지 말게. 자네들 월급은 내가 결정하는 것일세.”
그 말에 사내들은 웃는 표정을 지우고 침을 삼켰다. 그제야 이 일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보여줄 테니 동작을 똑바로 따라하도록 하게. 실수가 있으면 바로 삯을 깎을 테니 알아서들 하고.”
“아, 알겠소.”
이제야 동방인들의 태도가 교육에 적합해졌다는 것을 안 로망스 사내가 다시 시범을 보였다. 사내는 강주 무관학교에서 불려온 퇴역 교수로 잠수함에서 ‘기뢰’를 발출하는 장치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공식 직급은 없었지만, 부사관 계급 이상으로 대우받을 미래의 ‘잠수함 승무원’들의 상급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막대를 쥐었다.
그가 교육하는 기뢰 발출 장치는 이론상으로 굉장히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단한 중노동을 요구했다.
잠수함 자체가 매우 원시적인 동력(자전거와 마찬가지로 페달을 밟아서 움직임)에 의존하다 보니, 승무원 전원이 페달을 밟는 동시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페달을 밟는 상태로 기뢰를 장전하고 밀어 넣는 동작을 숙달해야 했는데, 그 자세가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그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기뢰 사용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교관은 시범을 보인 후, 교육생들을 불러내 하나씩 그 동작을 다시 시켜보았다. 아까의 경고가 있은 덕인지 훈련생들은 전보다 진지한 태도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훈련생들이 부지런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잠수함을 다루자면 승무원들은 이 페달에 익숙해져야 했다. 최소 2시간 이상은 페달을 밟을 수 있어야 잠수함의 동력원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
물론 전원이 페달을 밟는 경우는 급히 해당 지역을 이탈할 때고 보통은 절반씩 돌아가며 밟았다. 이곳 페달 훈련 역시 그렇게 진행하고 있었다.
“휴식!”
교관의 말에 훈련생들이 땀을 닦으며 페달을 멈추었다. 벌써 몇 시진을 밟고 쉬고를 반복하다 보니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어휴, 염병할. 고향에서 소를 끌어도 이거보단 편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렇군. 상승군에 들어오면 군복 멋지게 입고 폼만 잡을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거야 들어온 곳이 육군이 아니라 해군인 탓이지.”
훈련생들은 투덜거리면서 인부들이 가져온 음료와 약간의 간식을 먹었다. 간식은 모두 열량 소모가 많은 훈련을 고려하여 주로 마른 육포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짧은 휴식이 끝나자 교관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훈련생들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들이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것을 보며 교관들은 속도가 늦다, 혹은 게으름을 부린다는 둥 호통을 쳤다.
이들이 부지런히 구슬땀을 흘리는 동안, 잠수함 훈련생들을 시찰하러 온 승도가 뒷짐을 지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은 잘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 같군요.”
“예, 전하. 훈련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본 훈련만 이수하고 잠수함이 배치되면 저들은 기본적인 전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겁니다.”
“반가운 말입니다.”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뢰를 장비한 잠수함 부대는 미래를 위한 가장 강력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연합왕국의 해군이 그의 적이 된다 해도 한 번 정도는 싸워볼 생각을 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
승도는 잠수함 승무원들을 믿음직스런 눈으로 보았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클레망소의 말에 승도가 고개를 돌렸다.
“걸리는 부분이라면.”
“잠수함 전력의 최대 단점이라면 작전 반경이 매우 좁다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동력원을 사람의 발에 의지하는 만큼 연근해에서조차 작전거리가 제한적입니다.”
“그건 조금 문제가 되겠군요.”
“전술적으로는 가치가 무궁무진하지만 전략적으로 본다면 이용 폭이 상당히 좁을 겁니다. 이 부분은 염두에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점 참고하지요. 한데 잠수함에 실을 폭발물 말입니다.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장갑함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난 ‘포격전’을 참고하여 시험용 장비를 만들어 폭발물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래서요?”
“잠수함에 실을 기뢰를 대형화한다면 충분히 승산은 있었습니다.”
“그럼 연합왕국의 최신예 장갑함이라도 잡을 만하다는 얘기군요.”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시험 결과만 놓고 본다면 가능한 영역입니다.”
“좋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만족했습니다.”
“전하께서 만족하신다니 해군의 장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기왕 이렇게 한계가 있다면 잠수함은 수도와 강주의 방어 병기로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한된 거점의 방어 병기로 말입니까?”
“활용도가 제한된다면 그게 최선일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우리가 연합왕국을 상대로 원양에 나가 싸울 입장도 아니고.”
“옳으신 생각입니다.”
“뭐, 그 부분은 차후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아직 연합왕국과 정면 대결을 우려할 정도의 위기 상황은 아니니 말입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둘은 해군 훈련부대를 둘러보며 향후 연합왕국의 움직임에 대한 전반적인 대응 방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열강을 상대로 하는 일에 만전을 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